<소설, 안전기획부>박 희 권 안녕하세요. 오늘 올리는 글들은 <소설, 안전기획부> 제 4권의 전반부입니 다. 1 권은 `두 여자의 남자` 2 권은 `흑해의 잠수함` 3 권은 `전사의 고백` 4 권은 `안전기획부` 5 권은 `영원한 사랑` 입니다. 도합 다섯권을 묶어서 <소설, 안전기획부>로 출판하게 될 것 같습니다. 1, 2 권은 `서울대 찌꺼기`를 약간 손질한 것이고, 3 권은 `전 사의 고백`을 3인칭으로 수정한 것입니다. <소설, 안전기획부(1)> (1) 안기부 프락치 파리에서 돌아오자마자, 영옥은 기석의 세검정 집으로 짐을 옮 겨왔다. 그녀를 위해 2층을 비워준 기석은 아이보리색 침대와 화 장대 그리고 의료기구들을 옮기는데 한몫을 해주었다. 가끔 LA에서 어머니가 돌아오실 때를 제외하면 혼자였던 기석 이었다. 혼자 살고 있던 사내에게 젊은 여인이 들어와 사는 것이 란, 사실 말이 필요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석의 경우에는 일반 적인 경우와 구별이 있었다. 기석이 영옥이란 존재를 여자로서 받아들이기에는 걸리적거리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이사짐을 정리해주던 기석이 침대 맡은 편 벽에 사진을 걸고있 던 영옥에게 말했다. "그 사진틀은 치우지?" 현주와 영숙 그리고 기석이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영옥 이 찍어 준 사진이기도 했다. 영옥은 아무 말 없이 사진을 가방 속에 도로 집어 넣었다. 정리가 대충 끝나자, 영옥은 물을 끓였다. "아직도 커피를 좋아하시나요?" "응" "여전히 프림 세 스푼에 설탕 두 스푼인가요?" "응." 김이 모락거리는 커피잔을 입술에 갖다대면서 기석은 조용히 웅얼거렸다. "인생은 한잔 커피와도 비슷한 점이 있어. 따뜻한 김이 빠져나 가면 향긋한 따사로움을 잃은 커피는 시커먼 싸늘함만 남거든." 마주앉은 영옥이 조용히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냉커피를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요." 기석이 조금 웃었다. "허허! 그동안 말솜씨가 늘었구나." 기석은 입에 가져 갔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김이 빠져가는 커피 잔을 지켜보았다. "왜 안드시나요?" "그냥. 이 커피는 너무 따듯해 보여서..." 영옥이 자신의 커피잔을 양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아직도 저를 죽이고 싶으신가요?" "......" 기석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나오지 않자 영옥이 다시 물었다. "영숙이 언니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서인가요? 저때문에 현주 언니를 오해해서 인가요? 아니면 두 가지 모두 때문인가요?" 기석은 대답대신 영옥에게 반문했다. "네가 여기까지 온 것은, 영숙이 때문이니? 현주 때문이니? 아 니면 둘 모두 때문이니?" 영옥이 고개를 들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는 언니들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예요." 기석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영옥을 응시했다. 그리고 나직하게 물었다. "그러면?" 영옥은 대답대신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렸다. 한동안 울기만 하던 영옥이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오빠 손에 죽기 위해서 여기까지 따라왔어요. 언제라도 좋으 니까, 내키시면 죽이세요. 대신 전 제가 죽기전까지는 꺼리낌 없 이 오빠를 괴롭히겠어요." 석은 허탈하게 웃으며 맥없이 말했다. "허허허! 무섭구나." 기석은 차갑게 식은 커피를 들이켰다. 커피잔을 내려놓고 자리 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늦었으니까 자라. 난 내려가겠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는 기석에게 영옥이 거침없이 말했다. "저랑 같이 자요." 영옥의 기습적인 말 한마디에 기석은 잠시 당황해야 했다. 말 과 함께 뚜렷하게 응시하는 영옥의 눈길을 기석은 맞받기 어려웠 다. 시선을 외면하며 기석이 반문했다. "너랑 자자고?" 영옥이 흐트러짐없이 대답했다. "네." 얼떨떨한 혼란을 추스린 기석이 영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리고 입을 열었다. "난 이제껏 적지않은 여자들을 만났었다. 하지만, 여자가 먼저 같이 자자고 한 적은 네가 처음이다." 영옥이 말허리를 자르며 끼어들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같이 자자고 먼저 말할 수는 없나요?" 기석이 다시 말을 받았다. "그런게 아니고. 그런 말은 남자가 듣기에 너무 분에 넘치는 소리야. 세상에 그런 불로소득을 마다할 남자가 어디있겠니? 하 지만, 그 말이 네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무척 아쉽다." "어째서요?" "네가 아니고 다른 여자였다면, 상대가 어떤 여자라도, 난 이 런 공격에 버티지는 않았을꺼야. 하지만, 억울하게도 네 입에서 그런 기막힌 소리를 듣고 말았다. 놀리지 말고 그만 자거라." 부드럽고 연했던 영숙이었지만, 결정적일 때 독특한 순발력으 로 허를 찌르던 여인이었다. 영옥은 영숙을 생각나게 하기에 충 분했다. 영옥의 돌발적인 기습을 가까스로 모면하고 내려오던 기 석은 영옥이 영숙의 동생임을 실감했다. 기석은 이제 늦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영옥이 차려놓은 아 침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침을 먹고 영옥이 타다 준 커피 를 마시며 신문을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 기석이 커피 잔을 비우면 영옥은 연희동에 있는 메디칼 센터로 출근했 다. 영옥은 메디컬 센터의 주치의로 일하는 것을 아르바이트라고 표현하곤 했다. 영옥이 나가면 기석도 작업실로 갔다. 작업실에 쌓여 있는 자료를 검토하고 시니어들과의 미팅이 끝나면 빈둥거 리는 것이 일과였다. 집에 돌아와 늦잠 대신 낮잠을 자고있던 기석은 전화밸 소리에 깼다. 이건이었다. "기석이니?" "그래. 나다." "오늘 이 쪽으로 나올 수 있니?" "그 쪽이 어딘데?" "여기 저번에 그 장소야." "안가?" "응. 주원이도 같이 있어. 좀 의논할 게 있다." 낮잠을 방해받은 것 때문에 약간 짜증스러워진 기석이 툴툴거 렸다. "나 지금 자고 있는데..." "그러면 계속 자고 있어. 우리가 너네집으로 가지 머." "안돼. 오지마. 내가 나갈께." 안가의 테이블 위에는 두툼한 프린트 뭉치들이 널부러져 있었 다.북핵문제로 세상이 시끄러운 탓인지, 종이 뭉치의 맨 윗 부분 은 북한의 핵보유에 대한 미국정부의 기본적인 평가였다. 북한은 플루토늄 추출능력이 있고 천연 우라늄을 사용하는 원 자로로 흑연 감속로를 보유하고 있어 플루토늄 생산이 가능하며 방사화학 실험실에서 이미 플루토늄을 추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었다. 또 상당한 거리까지 도달할 수 있는 미사일을 개발했고, 미사일에 핵탄두를 실어 나를 수 있다는 평가였다. 종이뭉치를 뒤적거리던 기석이 물었다. "왜 불렀니?" 이건이 대답했다. "그냥 보고 싶어서 불렀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좀 하고 싶었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데?" 주원이가 테이블위를 가리키며 대답을 대신했다. "거기 널부러져 있잖아." 허연 종이위에 문자들이 빽빽하게 씌여진 북핵 문제들이 기석 을 약간 식상하게 했다. "한 미 북핵 강경대응할 것, 클린턴 북한 핵개발 망상 포기 촉 구, 미국인 59퍼센트 북핵 개발시 무력 응징 지지, 미 순항미사 일 북한 핵시설 공격 계획...... 이거! 맨날 떠드는 것들 아니 야?" 이건이가 자료 몇 가지를 추려주며 말했다. "너를 부른 것은 북 미 관계보다 일본 애들 하는 짓 좀 살펴 보라고 불렀어. 이걸 한 번 봐라." 국제 원자력 기구(IAEA)에 의한 대북 특별사찰 결의안 채택과 북핵문제 유엔 안보리 상정 및 대북 제재 조치 마련등을 일본이 선도했다고 하는 자료들이었다. 아울러 북한의 NTP(핵무기 확산 금지 조약) 탈퇴를 빌미로 일본이 군사재무장 핵무장화의 합법적 구실을 모색하려 한다는 우려를 담고 있었다. 천천히 읽어 내려가던 기석이 자료를 주원에게 넘기며 이건에 게 물었다. "일본애들 속마음이야 뻔한거지. 하지만 일본 애들이 이런 걸 겉으로 드러낼만큼 미련하진 않잖아? 이거 북한 외교부에서 나온 자료지? 드러내놓고 일본애들 속을 벅벅 긁어댈 곳은 거기밖에 없잖아?" 이건이가 다른 자료들을 펼치며 대답했다. "그래 맞아. 그런데 이것도 좀 봐라. 이것은 일본에서 흘러나 온 자료다." 이건이가 새로 늘어놓은 자료 역시 일본에 관계된 것들이었다. 일본은 북한과 수교 협상에 있어 북한의 핵의혹 해소등 과거 자민당 정권이 전제로 해온 조건들을 사실상 철회함으로써 북한 과의 국교 정상화 회담을 재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자 료였다. 자료는 일본 외무성 고위 당국자인 구레자와 겐죠의 말 을 인용하고 있었는데, 북한 핵의혹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으면 협상재개에 응하지 않는다고 일본 정부는 결정한 바 없으며, 협 상중단은 일본측이 아닌 북한측이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북한과 미국의 협상은 물론 남북대화가 설사 진전되지 않더라도 일본은 북한과의 수교협상을 주체적으로 재개할 수 있다고 강조해놓고 있었다. 그 명분으로, 호소가와 모리히로 내각이 대북한 협상재개를 모 색하고 있는 것은 일본의 대동아 전쟁책임을 매듭짓는다는 방침 아래 북한과의 국교 정상화를 이의 일환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고 북한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결과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 이라고 언급해 놓고 있었다. "놀구 자빠졌네. 북한 애들이 조금 얌전해지려고 하니까 또 부 추기는 수작아냐?" 이건이가 다시 새로운 프린트물을 주었다. "이것은 한일 정상 회담에서 논의 되었던 북핵 공동 대처 방안 하고 애스핀 미국방장관이 니카니시 게이스케 일본 방위청 장관 과 한반도 정세를 포함한 동북아 안보문제 전반에 관해 협의한 내용인데 읽어봐라." 한일 정상 회담의 내용은 북한 핵문제에 관련해 이를 절대로 용납 묵인하지 않겠다는 호소가와 일본 총리의 경고성 발언을 담 고 있었다. 에스핀-게이스케 국방 문제 협의 내용은 북한의 핵개발 의혹 및 노동 1호 중거리 미사일에 대응하기위한 전역 미사일 방위 (TMD)구상이었다. "부추길건 부추기고 빠질건 빠지고 안전장치까지 다해 논거네. 하여간 약은 놈들이야." 기석이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시자 주원이 군시렁거렸다. "일본 애들 뒷 다마야 당해본 놈들이나 눈치채지. 다른 놈들은 잘 이해못하는 것 같더라구. 하여간 똑똑한 놈들이야." 이건이 본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서 기석이 너를 불렀다. 지난 번 한미 안보 협의회에서 미국 측이 우리측 함정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한 적이 있었다. 우리 해상 방위체체가 일본을 견제 하고 있는 현 구도를 지적하면서 불필요한 전력 낭비라고 주장하 며 시정을 요구했었다. 우리 안기부가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미국측이 따지고 들어 온 해상 방위 체제에 대한 그들의 주장보다는 우리측 해군 전산 망이 어떻게 미국에게 노출이 되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일본을 겨냥한 해군력 배치에 관계된 것들은 사실 우리 해군 독자적으로 계발한 방위 시스템이었고 군사비밀이었다. 우리는 처음에는 미국측이 빼낸 것으로 촛점을 맞추었지만 면밀히 재검 토한 결과 미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해군 전산망을 빼간 것으로 결론질 수 있었다. 우리 해군 전산망은 일본 해상 자위대를 낱낱히 분석해서 짜 맞춘 것이었고 일본 당사자가 아니라면 사실 조목조목 따지기 어 려운 부분들이 많았다. 하지만 미국쪽은 우리측 의도를 너무나 뚜렷하게 집어내었다. 그것은 우리가 일본에 대해 아는 것을 미 국이 모두 알고 있어야만 가능한 것인데 그럴 수는 없다. 우리가 겨냥한 의도를 그대로 집어 낼 수 있는 것은 일본 뿐이다. 일본 측이 작성한 자료를 미국측에 슬그머니 흘려넣고 압력을 넣은 것 이 틀림없다. 우리 안기부가 그동안 수사과정에서 촛점을 기울였던 것은, 우 리측 전산망이 일본으로 빠져나갔을 경우 반드시 거치게 될 인물 이 누굴까? 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나까야마 쓰도무 일본 방위청소속 대외정보국장였다. 나까야마는 표면적으로 일본 민속 가부키 협회 이사로 통하고 있다. 내가 기석이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 자를 통해 우리 해 군 정보가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통로를 알아봐 달라는 것이다." 기석은 담배 한대를 꺼내 입에 물고 말했다. "그런 성가신 일에 왜 날 끌어들이냐?" 이건이 대신 주원이가 대답했다. "기석이 너도 이제 안기부원이잖아.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안 기부 프락치라고나 할까. 나도 가니까, 같이 가자." "어딜?" 기석의 질문에 계속 답변해주는 주원이였다. "물론 일본이지. 나까야마인지 쓰도무인지 그 자식 족치러." 기석이 다시 질문했다. "안기부에선 프락치한테 월급 얼마나 챙겨주니?" 이건이 대답했다. "쓸 만큼 준다." 기석이 선선히 승락했다. "에이, 어치피 막 나가는 인생! 갔다오자. 그러지 않아도 여우 한마리가 헷갈리게 해서 어수선하던 참이었는데, 일본가서 몸이 나 풀고 오는 것도 괜찮겠다. 주원아, 그 때 그 정미라는 계집애 는 무사히 꼬셨니? 엉덩이가 빵빵한 게, 졸나게 흔들고 다닐 것 같던데..." T본 스테이크 집에서 주원의 모두걸이에 관심을 보였던 정미로 화제가 돌려지고 있었다. "글쎄, 그 계집애 알고보니까 E대씩이나 다니더라고 도서관 학 과 라나......" "어쭈! 대가리는 좀 여물었나 보네. 말은 잘 듣니?" "웬걸! 몽둥이질을 안해서 그런지 드럽게 팔딱거리더라구. 저 번에 삐삐 한번 치고 만나러 나갔더니 놈씨를 하나끼고 나오잖 아. 괘씸한 년..." "크크크... 버티기 괴로웠겠다. 그래도 접때 고기집에선 너한 테 땡기는 것 같았는데." "입맛이 변했나 보지. 아니면 쌀밥만 처먹다가 그날은 보리밥 한 술 뜨고 싶었거나..." 기석과 주원이 옆길로 새려하자, 이건이 약간 신경질적으로 제 동을 걸었다. "그런 소리는 나중에 다른데 가서 지껄이고, 나까야마 건에 대 한 행동경로나 모색해 보자." 이건의 제동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기석이 말했다. "얼씨구, 계집애들 씹는 걸 마다할 때도 있네. 어째 이건이가 좀 변한 것 같다. 안 그러니? 주원아?" 주원이가 기석의 말을 수긍했다. "그러게. 나도 요즈음 이건이 저 녀석이 좀 이상해졌다고 느끼 고 있긴 해." 기석이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이상해진 것 같은데?" "글쎄, 약간 센티멘탈해졌다고나 할까. 좀 우울해보이면서 우 아하게 보일려고 애쓸 때 나타나는... 뭐, 그 비슷한 것이 자주 노출되더라구. 아까 처럼 EDPS(음담패설) 좀 시작해 보려구 하면 툭툭 틀어막으면서 신경질 쪼가리까지 부리더라구. 아무래도 저 놈 심경에 괴이한 변화가 일고 있는 것 같아. 제일 밝히던 놈이 었는데..." 이건이가 주원과 기석의 중얼거림을 무시하며 메모지와 볼펜을 꺼내들었다. "쓸데없는 소리들 그만하고, 일본 쪽에 특별히 준비해 놓아야 할 것 있으면 불러 봐." 기석이 이건의 요구에 부응해가기 시작했다. "준비도 준비지만 우선 나까야마에 대해 아는 것 있으면 죄다 이야기해 봐." 이건이 나까야마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이 45세, 1년 전에 상처했고, 슬하에 아들 하나 딸 하나 두 고 있어. 성품은 대단히 강직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사생활에도 별로 헛점이 없어. 자식들은 물론이고 죽은 전처도 죽을 때까지 나까야마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몰랐다고 해. 단순히 민속 가부키 협회 이사로만 알고 있었다나... 한마디로 다루기 까다로 운 인간이야. 그래서 너에게 부탁하는 거야." 기석이 툴툴거렸다. "정말 드러운 인간이로구만. 자료 빼 올려면 애 좀 먹겠다. 그 런 인간이라면 집 안에다 도청장치나 카메라 설치를 해 놓아도 나올 게 없을텐데." 한동안 나까야마에 골몰하던 기석이 이건에게 물었다. "납치를 해올까?" 이건이 거부했다. "그건 안돼. 우린 나까야마가 목적이 아니야. 우리쪽에서 일본 으로 정보가 흘러나가는 경로를 집어내는 것이 목적이야. 일본에 서 나까야마가 실종되면 당장 선이 끊어지고 스파이는 잠적해 버 릴 수도 있어. 또 나까야마를 족쳐서 정보 유출 통로를 제거한다 하더라도, 그리되면 일본측은 우리가 나까야마를 납치한 것을 알 게 될 것이고, 납치에 대한 일본 쪽의 껄끄러운 시비를 피하기 어려워. 스파이 행위가 어느 선까지는 인정해주어야 하는 도둑질이란 것은 국가들 간의 드러내지 않는 묵계지. 하지만 납치가 개입되 면 사정은 달라져. 우리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지나친 짓 을 했다는 평가를 받게 되지." 옆에서 주원이가 이건에게 궁금증을 표시했다. "누가 그런 평가를 내리는데?" 이건이 대답해 주었다. "일본이 나까야마의 납치를 표면화 시키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나까야마를 납치했다는 것을 각국 정보기관에 흘릴꺼야. 미국, 중국, 러시아, 북한 등이겠지. 그러면 그런 곳에서 우리 요원들 이 일하기가 힘들어져. 이런 일에도 기본적인 룰 같은 것이 있는 거야. 도둑질을 해오더라도 도둑을 잡더라도 상대방을 지나치게 건드리지 않는 것이 룰이야. 납치가 목적이 아닌 상황에서의 납 치는 위험해. 증거는 물론이겠지만 의심도 남기지 말야아 하는 것이 이런 상황에서의 납치야. 하지만 우리는 의심을 도저히 피 할 수 없는 상황이야. 그래서 나까야마의 납치는 절대 안돼." 기석이 다시 골몰하다가 이건에게 질문했다. "만일 일이 틀어지게 되면 나까야마를 납치 하는 것보다는 일 본에다 흔적없이 묻어버리고 오는 것이 낫겠네?" 이건이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런 상황이 발발해선 안되겠지만 우리가 건드렸단 증거를 남 긴다거나 의심을 받을 만한 전개가 우려되는 시점에서 나까야마 를 묻어버림으로써 원점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해야 지. 그러나, 민간인을 다치게 해선 절대 안돼. 나까야마는 군인 출신이야. 일하다 죽을 수 있다는 것이 나까야마나 우리같은 사 람들의 직업 정신이고 긍지야. 따라서 나까야마를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증거없이 묻어버려야 한다면 그래도 돼. 하지만 민간인 은 죽음이 직업이 아니야. 나까야마나 우리들처럼 국가를 위해서 라면 죽어도 괜찮다는 선서를 한 사람이 아니지. 따라서 우리가 노출되는 상황이 전개되더라도 민간인을 살상해서는 안된다. 그 런 경우에는 차라리 임무를 포기하고, 잡혀야 한다면 그 쪽에 잡 혀라. 그러면 우리가 꺼내 줄 수 있다." 기석이 나까야마에 대한 자료를 뒤적거리며 몰두하다가 이건에 게 몇 가지를 요구했다. "주원이가 함께 간다니, 일본쪽에선 한 사람만 더 있으면 되겠 다. 일어에 능통해야 하고 그곳 지리에 빠삭해야 해. 물론 운전 도 잘 해야 겠지. 그리고 타이머가 부착된 다이너 마이트 두 묶 음이 필요해. 묶음당 1키로 정도면 되겠고 둘 다 타이머가 장착 된 것이어야 해. 또 나와 주원이 사용할 권총 2자루와 이쪽에서 출발할 때의 여권과 다른 별개의 여권 둘, 그리고 은닉할 경우에 대비한 일주일 정도의 소요경비와 일본인 신분 증명서(身分 證明 書) 미분 쇼오메이쇼 두 장, 마지막으로 가옥 침투시 필요한 기 구들을 그쪽에다 준비해 줘." 열심히 받아적던 이건이 검토를 해보았다. "움직일 차가 있어야 하잖아?" "자가용은 따로 준비할 필요없어. 가서 렌트하는 것이 좋아. 렌트에 필요한 경비나 추가시켜." 이건이가 추가 질문을 했다. "다이나 마이트는 꼭 필요해?" "아마 필요할 꺼다." "어디다 쓸려구?" "알아서 욕먹지 않게 쓸테니까 자꾸 따지지 마라. 그리고 나까 야마 껀은 성공률이 반이다. 실패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지." 이건이가 수긍했다. "어려운 건이란 것은 알고있다." 대충 이야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언제 출발하면 되니?" "빠를수록 좋다." "내일 모레 항공편으로 예약해 둬라." 안가를 떠나 집으로 돌아온 기석은 차고에 차를 주차시키고 현 관으로 걸어갔다. 2층에서는 연초록 할로겐 불빛이 창밖을 포근 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 자체 하나 만으로도 불꺼진 집을 들어설 때마다 스멀거리던 외로움을 떨쳐 버릴 수 있는 것 같았다. 현관의 키를 돌리는 대신 계단을 올라 가는 발걸음 소리하나로 문이 열려진다는 사실도 그리 나쁘지 않 았다. 2층에서 기석이 도착한 것을 이미 살폈던 영옥이 현관 앞에 도 착하기도 전에 문을 열어주며 반겼다. "오셨어요?" 식탁에는 반찬 그릇들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식사 하셔야지요?" 기석이 숟가락질을 시작하자 영옥이 옆에 앉았다. 밥을 먹을 때 옆에서 누군가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것이 사람에게 정서 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 앉아 있는 여자 가 영옥이 아니었다면 기석은 식욕 대신 다른 욕구를 채우고 있 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예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영옥은 그림 속 의 여자일 뿐이었다. 옆에서 풍겨오는 여자의 냄새를 잊기 위해 서라도 기석은 부지런히 수저를 움직여야 했다. 젖가슴의 윤곽이 드러나는 얇은 티, 의자에 앉으면 허벅지의 반이 드러나는 샤넬라인의 주홍치마, 그리고 샤넬 넘버 나인틴의 향기, 기석의 약점에 너무나 정통해 있는 영옥이어서인지 영옥의 유혹은 기석으로서도 만만치 않았다. 배를 채운 기석이 물 한 컵을 단숨에 비우고 아래층으로 서둘 러 내려가려 할 때였다. "물 받아 놓았으니까 목욕 하시구 내려가세요." 저녁 식사후 샤워 대신 물 받아서 목욕하는 것을 좋아하는 기 석의 취향 역시 영옥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세심한 배려가 싫지는 않았지만 기석은 버텨보았다. "아래층에서 하지 뭐." "물 받아 놓았으니까 그냥 여기서 하세요." 영옥의 당돌함에 기석은 말을 좀 더듬었다. "그, 그러지. 뭐." 기석은 물 한 번 끼얹지 않고 탕안에 몸을 집어 넣고 욕조에 등을 기대었다. 뜨거운 수증기 속에 파묻혀 상념에 잠기다 보면 온몸의 신경세포는 노곤함에 젖어 취하곤 했다. 기석이 탕안에서 떠올리는 상념의 대부분은 영숙과 현주였다. 기석의 목욕 습관도 따지고 보면 그녀들이 만들어 준 것이었다. 영숙의 방배동 아파트에서 그녀들과 함께 목욕하던 기억은 기석 이 갖고 있는 추억 중 가장 음흉한 것이기도 하지만 소중한 추억 이기도 했다. 욕조가 비좁은 탓에 지금처럼 길게 눕지도 못하는 방배동의 탕 이었지만, 그 좁은 욕조안에도 세 남녀가 편안하고 행복하게 들 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욕조안에서 사랑하는 두 여인사이 에 끼어 물 밖으로 뻗어 있는 그녀들의 미끈한 네 다리를 보고 있노라면 혹자는 진시황이 부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겠 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엉뚱한 다른 여 자를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 사내라는 짐승이었다. 여인들이야 믿기 어렵고 싫겠지만 사내라는 동물의 속마음은 그런 것이다. 하지만 여인들은 그런 것에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두 여인 사이에 끼인 채 다른 여자를 생각하기도 했던 기석이었지만 사랑 하는 두 여인에게 기석은 충성할 줄 알았다. 다른 사내들도 마찬 가지 일 것이다. 기석이 욕조안에서 은밀한 추억에 젖어있을 때였다. 문에서 노 크 소리에 이어 영옥이 들어오고 있었다. 브래지어와 팬티만으로 간신히 가리고 들어온 영옥은 손바닥만한 천조각들도 스스럼없이 떼어내고 까내리고 있었다. 터키탕 여급처럼 자연스런 몸짓으로 때밀이 수건을 손바닥에 말아쥔 영옥이 욕조안의 기석에게 말했 다. "등 밀어 드리려고 들어왔어요." 영옥의 알몸에 자극받은 기석의 가운데가 주책없이 솟구쳤다. 기석은 그나마 물속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눈으로 영옥의 알몸을 흠으며 물었다. "등 미는데, 옷은 왜 다벗고 들어왔니?" 기석의 눈길이 자신의 알몸을 더듬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탕안 의 후끈한 열기 탓인지 영옥의 얼굴에 붉으레한 홍조가 감돌고 있었다. 영옥은 애써 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옷 입고 등밀어 드리면 옷이 젖잖아요." 기석은 물밖으로 나와 욕터에 걸터 앉아 영옥쪽으로 등을 돌렸 다. 그리고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서 밀어." 영옥의 고운 얼굴에서 잠시 당황해하는 움찔거림이 느껴졌지만 기석은 개의치 않았다. "어서 밀라니깐..." 영옥이 두 손을 모아 기석의 등판을 오르락 거리며 때를 벗겨 냈다. "아직도 등에 여드름이 많군요." "내 등에 여드름이 많은 것은 어떻게 알았니?" "언니한테 들었어요." "영숙이가 그런 이야기도 해주던?" "제가 오빠에 대해서 물어봤어요. 아주 많이..." "등에 여드름이 많은 것까지 물어보진 않았을텐데?" "언니한테 오빠에 관한 것을 언니만큼 알게 해달라고 졸랐어 요. 언니가 아는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알려달라고 했거든요." "넌 참 미련한 여자다." "오빤 약은 여자보다 미련한 여자를 좋아하잖아요." "허허! 하지만 사이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제가 사이코 같은 가요?" "다분히..." "그럼 좋아하지 마세요." 이것은 전쟁이었다. 영옥의 육탄공세는 확실히 기석을 위협할 만한 것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공격은 기석을 수세로 몰아가기 에 충분했다. 그녀는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그의 약 점 또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기석과 살아본 여자가 아니 고서는 기석에게 이런 수법으로 다가올 여자는 없다. 하지만, 영 옥은 기석을 알고 있었다. 영옥의 몸짓 하나하나에는 확실히 영 숙의 그것이 배어 있었다. 괜찮다 싶으면 따라가서 숱하게 채이는 기석이었지만 사실 기 석만큼 여인에게 짜게 구는 남자도 드물었다. 기석에게는 묘한 똥고집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아무리 예쁜 여자라도 먼저 꼬리 치는 여자에게는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는 그의 헌터로서의 자존 심이었다. 여인에게 선택 당할 수 없다는 삼대과부집 장손의 똥 꼬집 철학은 이제껏 한 번도 무너진 적이 없었다. 물론 여인들이 건드려 주지 않은 탓도 있지만, 가끔 술기운에 돌아버린 아가씨 들이 기석에게 풀썩 기대와도 슬쩍 밀쳐버리고 도망가던 기석이 었다. 기석은 영옥의 허를 찌르는 속공에 다소 고전은 하고 있었지만 최후의 마지노 선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다. 또한 이제 밀릴 때 까지 다 밀린 상황인지라 마음을 진정시키고 전열을 가다듬기 시 작했다. "다 밀었니?" "네." 영옥이 끼얹어 주는 물벼락을 맞으며 몸을 씻은 기석은 서둘지 않고 런닝과 팬티를 입었다. "때까지 밀어줘서 고맙다. 이제 아래층으로 내려가도 되겠니?" 영옥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저하고 같이 주무실 수 있나요?" "같이 자고 싶니?" "네." "그럼 그러자." 영옥의 침대는 싱글이었지만 두 남녀가 붙어 자기에는 그리 좁 지 않았다. 영옥의 풋풋한 살내음과 매끄러운 감촉들이 간간히 기석을 괴 롭히고 있었지만 기석은 별로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영숙에게 알몸으로 자는 것까지 배워온 영옥이었지만 기석의 똥고집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기석은 똥고 집만이 아니었다. 영옥이 기석에게 그림속의 여자가 되어야 했던 것는 사랑했던 두 여인과 이별해야 했던 분풀이 때문이었다. 다 섯장의 편지질로 시작되었던 지난날의 옹고집도 똥고집에 못지 않은 것이었다. 영옥은 온몸으로 승부를 걸어오고 있었지만, 여인으로서 취하 기에는 처절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몸짓으로도, 기석의 고 집을 꺽을 수 없었다. 여인의 안타까운 몸부림 속에서 사내는 조용히 읊조리며 무심 한 잠속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너무 애쓰지 마라. 너는 영숙이가 아니고 영옥이야." 기석은 어떤 여인에게도 냉랭하게 대하지 않으며 신경질을 부 리는 일도 없다. 말을 얄밉게 할 때가 간혹 있긴 하지만 그것도 얼굴엔 헤벌쭉 거리는 웃음이 함께 하곤 한다. 기석이 어떤 상황 에서도 여인에게 냉랭하게 대하지 못하는 것은 현주 때문에 붙은 습성같다. 현주를 잃은 것을 영옥의 편지질에 갖다 붙이고 있지 만 사실 기석은 자신의 냉정함으로 그리 되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영옥도 여인이었고 그래서인지 어쩐지 기석은 영옥에게 쌀쌀맞게 굴 수는 없었다. 더구나 영옥은 영숙의 동생 이고 아버지의 이종사촌이며 기석에게는 고모뻘이었고 회사의 시 니어였다. 하지만, 세상에 없는 현주일지라도 기석에게는 살아있는 영옥 보다 훨씬 더 소중했다. 기석은 이런 점에서 삼대과부집 장손으 로 자라난 면모를 확실히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다. 기석이 그의 어머니 할머니 증조할머니에게 뼈저리게 보고 배운 것이 있다면 바로 지조다. 기석의 십대에 인생의 추구하던 바는 오로지 사랑 이었는데 그의 사랑의 골격이 되어버린 것이 삼대과부들의 지조 였다. 사랑은 죽어도 변치 말아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들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삼대과부 속에서 자라다 보니 저절로 익혀 진 철학이었다. 그래서 기석의 인생의 목표는 여인이 되었고 충 분히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아직까지도 평가하고 있 다. 기석이 자라난 배경이 유별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보편 적인 것은 분명 아니다. 따라서 죽어도 변치 말아야 사랑이 된다 는 그의 고집을 일반화 시켜서 생각할 수는 없다. 그저 기석이란 한 인간에 국한시켜 놓고 개성있는 사랑의 한 유형정도로 여기면 그만일 것이다. 영옥은 그의 고집에 자신이 없어졌다. 여인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모욕스런 지난 밤의 몸짓으로도 그를 꺽을 수가 없었 다. 프라이 팬에서 하얀 두부가 시커멓게 타고 있었지만 영옥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두부가 다 탔잖아." 세수를 끝내고 나온 기석이 영옥을 툭 치며 프라이 팬을 들자, 영옥은 그제서야 정신이 드는 듯 했다. "어머! 이런... 미안해요." "미안할 것 까지야. 오늘은 내가 할 테니까, 그냥 앉아있어." "아니예요. 잠깐 딴 생각을 했어요. 제가 할래요." 두부대신 계란 후라이를 먹으며 기석이 말했다. "내일 일본에 좀 다녀와야 해." 영옥이 감자국을 떠 놓아주며 물었다. "위험한 일인가요?" "아니. 친구 심부름 가는거야. 별 일 아니야." "얼마나 계실 건가요?" "한 사 나흘 걸릴꺼야. 좀 길어지면 일주일 정도 걸릴지 모르 고. 가 봐야 알 것 같아." 영옥은 파잘과 베셀 두 시니어를 아저씨라고 부르고 있었다. "아저씨들도 가시나요?" "아니 나 혼자야. 회사 일하고 상관없는 일이야." "무슨 일인지 제가 알면 안되나요?" "알아도 돼. 그런데 내가 말하기 싫어." "아저씨들 한테는 어떻게 이야기 해야 하나요?" "일본 간다고 미리 말해 두었으니까, 급한 일 생기면 그 쪽으 로 연락하라고 전해 줘. 연락처는 숙소를 잡는대로 전화해줄께." "네." 밥 공기가 거의 다 비워질 때까지 아무말이 없던 영옥이 다시 물었다. "혹시, 윤희가 일본에 가나요?" "잘 몰라. 왜?" "그럼 윤희 때문에 가는 것은 아닌가요?" 기석이 실소를 흘리면서 대답했다. "윤희한테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파리에서의 만남으로 영옥과 윤희는 안면을 텄고 서로 전화번 호까지 주고 받은 적이 있었다. 영옥이 고개를 들고 약간 망서리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윤희하고 가까워져도 되나요?" "그런거야 윤희한테 물어봐야지. 나한테 물어보면 대답할 말이 없잖아." "윤희는 현주언니를 많이 닮은 것 같아요." 영옥이 느닷없이 꺼낸 현주이야기에 기석은 약간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닮은 여자는 많아. 닮았다는 자체도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 고. 나는 윤희가 좋아서 추근댄 것이었고 그렇다가 채인거야. 그 게 다야. 일본은 친구가 한 가지 일을 부탁해서 가는거야. 누굴 좀 찾아 봐 달라는 부탁인데 위험한 일은 아니야. 그러니 혹시 걱정이 되 더라도 걱정은 하지마." 영옥의 얼굴에 미소가 조금 감돌았다. "조금만 걱정할께요." 동경에 도착하자마자 기석과 주원은 동경프린스 호텔 507호로 직행했다. 찌부드드한 오후의 기운을 간단한 샤워로 씻어내고 맥 주 한모금으로 갈증을 달래고 있을 즈음이었다. 이건이에게 연락받은 30대 중반 정도의 건장한 사내가 쑥색 잠 바차림으로 룸안으로 들어왔다. "이 현수라고 합니다. 오시는데 마중도 못 나가서 죄송합니다. 따로 부탁하신 장비를 점검하다가 좀 늦었읍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기석은 이 현수가 가져온 여권과 권총 노끈 유리를 부식시키는 산 유리칼 강력 테이프 다이너마이트등을 살피다가 다이너마이트 두 뭉치 중 한 뭉치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 뇌관을 뽑았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기석이 옷을 갈아 입으며 말했다. "이런 일은 빠를수록 좋으니까 저녁 식사 전에 현장을 좀 둘러 봅시다. 우선 나까야마의 집 근처를 한 번 돌아보죠. 시나가와구 의 고단다라고 들었읍니다만?" 도이데에 있는 렌트카 업소에서 기석은 도요다 한대를 렌트했 다. 메구로로를 따라 고다마의 나까야마의 집주변을 돌며 운전대 를 잡고 있는 이 현수에게 기석이 물었다. "고다마 주변에 다이너 마이트를 터뜨릴 만한 인적 없는 장소 가 있읍니까?" 이 현수가 대답했다. "이 근처에는 없고 도고시 공원을 지나 외곽도로로 이 삼십분 정도 가다보면 인적 없는 장소가 있읍니다." "한 번 가보죠." 이 현수가 안내한 장소는 멀리 유리섬유 공장들과 비닐 하우스 들이 드문드문 보이는 한산한 곳이었다. "어두워지면 인적이 끊기는 곳이지요. 인가도 보기보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소음에 귀기울일 사람은 없을껍니다." 기석이 사적인 이야기를 일체 입에 담지 않고 있는 탓이어서인 지 이 현수의 목소리가 약간 경직되어 있었다. 기석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있는 듯 했다. "그래도 여긴 시야가 너무 트여 있는데, 좀 구석진 곳을 찾아 봅시다." 주변에 흩어져 장소를 물색하던 주원이 그럴듯한 장소를 찾았 다. 섬유공장의 쓰레기를 갖다 버리는 곳인 것 같았다. 유리질의 흙덩어리들이 잔뜩 쌓여 있는 우묵한 곳이었다. "이제 저녁 먹으러 갑시다." 도고시 공원 근처에서 김밥과 우동과 통닭으로 저녁을 때웠다. 어두워지자 근처 농가에서 삽을 훔친 기석 일행은 보아 두었던 장소에 되돌아왔다. 삽을 주원에게 건네주며 기석이 말했다. "어서 파." "이걸 내가 파야 해?" "그럼 내가 하리? 빨랑 파. 후딱해치우고 일찍 뜨는 것이 피차 좋잖아." 사람 한 둘 정도 들어갈 넓이로 깊이 2 미터 정도의 구덩이가 파여졌다. 땀을 뻘뻘 흘리며 구덩이를 빠져나오는 주원에게 기석이 물었 다. "지금 몇시 쯤 되었니?" "이 자식아 넌 시계없어. 자정이잖아." 기석이 이 현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나까야마가 어디 있을까요?" "밤 열두시가 넘었으니 집에 있을껍니다." "그럼 나까야마 집으로 갑시다." 주원이가 인상을 찡그리며 툴툴거렸다. "나까야마 집엔 뭐하러? 아까 둘러볼 만큼 둘러봤잖아." "둘러 봤으니까 데리러 가야지." 주원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따지듯이 물었다. "지금?" 이 현수도 약간 난색을 표시했다. "오늘 도착해서 피곤하실텐데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닐까요? 돌아가셔서 좀 더 시간을 갖고......" 기석이 이 현수의 말을 잘랐다. "이런 일은 빠를수록 좋아요. 더구나 여기는 일본입니다. 오늘 은 토요일이고 월요일 아침까지는 나까야마가 증발해도 관심을 기울일 사람이 없어요." 주원이 다시 칭얼거렸다. "그래도 그렇지. 작전도 구상하지 않았는데 집 앞에 가서 어쩌 자는 거야? 도주로도 생각해두지 않았고." "사람하나 집에서 데려오는데 무슨 작전이 필요해. 도주로도 그래. 이 넓은 일본에 도망갈 곳 없겠니? 여권이 두장씩이나 있 잖아. 게다가 지금 시간이 딱 좋아. 새벽까지 나까야마를 좀 못 살게 굴다가 아침 첫 비행기로 뜨면 그게 제일 확실한 도주야. 얼른 가자." 허름한 일본식 가옥인 나까야마의 집 담위에서 안쪽을 살폈다. 시간은 새벽 두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열 두어 평의 안뜰과 뜰 을 가로질러 짧은 마루가 있었고 마루 옆에 현대식 현관문을 만 들어 놓았다. 이 현수에게 망을 보라하고 주원과 같이 담을 넘었다. 손잡이 부위의 유리에 산을 뿌리고 유리칼로 둥글게 흠을 만들 었다. 강력 테이프를 붙이고 소음없이 손잡이 부위의 유리를 떼 어냈다. 현관으로 들어서니 미닫이 문이 세 개있었다. 현관 맞은 편의 미닫이 문을 살그머니 열어보니 예상대로 나까야마의 방이었다. 약간의 인기척에 나까야마가 뒤척이며 눈을 떴다. 기석은 베레타를 나까야마의 이마 중앙에 갖다대고 손가락 하 나를 입술에 갖다대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공손한 일본어였 다. "조용히 하시면 애들은 다치지 않습니다." 눈을 껌뻑이던 나까야마가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챘는지 기석을 쳐다보며 크지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요?" 기석이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대답했다. "당신을 도둑질하러 온 사람입니다. 질문은 더 이상 하지 마시 고 조용히 따라나오셔야 합니다. 아이들의 깨면 다칠수도 있으니 까 서두르시죠." 렌트해온 도요다에 나까야마를 태우고 주원이 땀을 흘린 구덩 이로 데려왔다. 음산한 주위의 분위기가 나까야마를 몹시 기분 나쁘게 하고 있 는 것 같았다. "담배 한 대 피우시죠?" 기석이 말보로 라이트 한 개피를 꺼내주었지만 나까야마는 거 절했다. "난 담배를 피우지 않네. 용건이 뭔가?" 주원이 기록용 녹음기를 틀었고 기석이 나까야마에게 용건을 말했다. "일본 방위청 대외정보국장님이 알고 계신 것을 알고 싶어서 모셔왔읍니다." 나까야마가 다시 물었다. "무엇에 관계된 사항인가?" 기석이 다시 요구했다. "방위청 대외 정보국장님으로서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을 모 두 말씀하시면 됩니다." "거절한다면?" 기석은 천가방 안에서 다이너 마이트 한 묶음을 꺼내어 타이머 를 일분 후로 맞추었다. "일분 후면 터지게 됩니다." 50초 정도가 흘렀을 때 기석은 다이너마이트를 구덩이 안으로 던졌다. "쾅!" 폭발음과 뿌우연 먼지들이 잦아들자, 주원은 나까야마의 양손 을 묶고 화약 냄새가 매케한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기석이 구덩이 밖에서 한덩이 남은 다이너 마이트의 타이머를 5분후로 맞추었다. 그리고 구덩이속의 나까야마에게 말했다. "거절하시면 그곳에서 흔적없이 묻히시게 됩니다. 시간은 5분 남았읍니다." 구덩이 속의 나까야마의 얼굴에 굵은 힘줄이 돋았다. 이마에는 식은 땀이 흐르고 있는 듯 했지만 나까야마의 입에서는 강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냥 이곳에서 죽겠네." 기석이 담배 한모금을 내뱉으며 말했다. "4분 남았읍니다. 고아가 될 자식들을 생각하셔야죠." 나까야마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기석이 몇 모금 의 담배연기를 내뿜었을 때 타이머는 2분을 남기고 있었다. "책임감이 없는 아버지로군요. 2분 남았읍니다." 나까야마가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 "아이들을 건드리지 않아줘서 고맙네." 기석이 꽁초를 발바닥으로 비벼끄며 마지막 경종을 울렸다. "1분 남았읍니다." 마약과 폭력에 찌든 놈들과 양놈들만 보면 가랭이 벌리고 달려 드는 년들을 흔하게 볼 수 있는 일본이지만, 그런 일본을 세계 정상의 국가로 이끄는 겁나는 인간들도 있는 일본이었다. 나까야 마도 겁나는 일본인 중에 한 명일 것이란 생각을 하며 기석은 다 이너마이트를 나까야마의 셔츠속으로 밀어넣었다. 시간은 약 이십초가 남아있었다. 나까야마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삽십초가 더 지났고 일분 이상이 더 흘렀지만 다이너마이트는 터지지 않았다. 나까야마가 눈을 뜨고 기석을 바라보았다. "왜 터지지 않고 있는가?" 기석이 나까야마를 올려주며 대답했다. "불량품인가 봅니다. 그만 나오시죠.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읍 니다." 도요다는 다시 도고시 공원을 거쳐 고단다의 나까야마 집앞에 서 정차했다. 기석이 나까야마 쪽의 차문을 열어주고 말했다. "내리시죠." 나까야마가 기석을 의아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날 살려주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내가 신고할 수도 있다는 것쯤은 모르지 않을텐데? 나는 차 번호도 기억하고 있네." 기석이 조그만 미소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국장님에게 정보를 빼낼 자신은 없지만 신고 하셔도 도망 갈 자신은 있읍니다." "한국(강고쿠)에서 온 것 같군?" 일본에서 북한을 지칭할 때는 강고쿠(한국)란 말을 쓰지 않는 다. 나까야마의 강고쿠는 남한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기석이 인정했다. "그렇습니다." 나까야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렇겠구만, 왜 왔는지도 알것 같네. 조선(북한)에서 왔다면 내가 아직까지 살아있긴 어려웠겠지." 차 밖으로 나온 나까야마와 악수를 하고 기석이 도요다에 올라 탈 때였다. 나까야마가 기석을 불러세웠다. "잠깐 차라도 한잔 하고 가는 것이 어떻겠나? 자네의 질문에 한가지 정도는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네만." 기석은 다시 차에서 내려 나까야마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나까야마가 손수 차를 끓였고 기석은 찻잔을 씻었다. 찻주전자에 서 찻잔으로 떨어지는 투명한 자주빛 액체에서는 결명차 비슷한 향기가 그윽하게 퍼져 나오고 있었다. 나까야마가 먼저 한모금 마셨고 기석이 뒤따라 입술을 축였다. "감미로운 차로군요. 여인의 입술 같습니다." 나까야마가 조금 웃었다. "자넨 차 맛을 아는 사람이로군." 나까야마의 방안에서 기석은 궁금한 것을 묻기 시작했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저희 해군 전산망이 일본쪽으로 흘러 들 어간 경로를 알아보기 위해서 입니다. 대답해 주실 수 있으시겠 읍니까?" 나까야마가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했네. 우리는 그 정보를 시노하라 를 통해서 얻어왔네. 일본 후지 텔레비젼에서 일하고 있지. 현재 는 한국에 파견나가 있네." 나까야먀의 선선한 대답이 기석으로서는 의외가 아닐 수 없었 다. 기석은 우회적으로 나까야마의 의중을 짚어갔다. "이렇게 쉽게 대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시노하라의 신변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 드리면 되겠읍니까?" 나까야마가 기석의 찜찜한 의도를 눈치챘는지 슬쩍 웃으며 대 답했다. "자네는 예의를 지켰고 날 살려주었으며 아이들도 건드리지 않 았네. 그 보답을 해야지. 시노하라는 한국측에서 알아서 하겠지. 하지만 추방정도로 매듭지어질 것으로 짐작하고 있네. 이후의 시 노하라에 대해서는 나는 일절 개입하지 않겠네. 그를 통해 자네 들이 알고자 하는 것을 알아내면 될 것일세." 기석이 억양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시노하라는 일본을 위해서 일한 것인데 아랫사람을 너무 쉽게 떠 넘기시는 것은 아닙니까?" 나까야마가 다시 웃었다. "헛헛! 시노하라는 내 사촌일세. 난 그 애를 아낀다네. 더 이 상 이런 일에 써 먹긴 싫으이. 그래서 이 기회를 이용하고 있는 것일세. 그리고 사실 내가 자네에게 순순히 털어놓는 진짜 이유 는 따로있네." 기석이 궁금증을 표시했다. "제가 알아도 되는 것입니까?" "물론이네. 알아야 될 것일세." "기록으로 남겨도 되겠읍니까?" "녹음은 안되고 메모는 가능하네." "그렇게 하겠읍니다." 차 한모금을 마시고 나까야마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리 일본이 한국 해군 자료에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 북조선 때문이야. 북조선의 함정들이 요근래 일본 근해에서 자취를 감추 었지. 대신 북한의 시추선들이 일본 근해 외곽에서 상당기간 동 안 머물고 있다네." 나카야마가 언급하기 시작한 북조선에 석은 약간 긴장했다. "일본 근해라면?" "난세이 제도와 이오지마 섬 쿠릴열도까지 이어지는 일본 대역 외곽지역을 말하는 것일세. 사실 일본을 섬이라고들 부르지만 실 상 섬이라고 하기 어렵네." 기석이 나카야마의 말을 받았다. "지질학적으로 본다면 일본은 섬이라기 보다는 대륙에 가깝죠. 천해들 사이사이에 무수한 섬들이 이어지면서 유럽대륙만큼이나 넓은 곳이 일본입니다. 이곳 동경에서 남단 이오지마 섬까지의 거리는 이곳에서 대만까지의 거리와 맞먹죠. 일본은 매우 넓은 곳입니다. 지질학자들 중엔 일본대륙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 이 있읍니다." 나카야마의 얼굴에 잠시 놀라는 빛이 어렸다. "자네는 지질학을 공부한 적이 있었나?" "대학에서 지질학 과목을 수강했던 적이 있었읍니다." "그렇다면 잘 되었네. 이야기 하기가 좀 쉬워질 것 같네. 그 넓은 해역에서 항상 우리를 긴장시켰던 북조선 함정들이 모조리 사라져 버린 것이네. 대신 리비아에서 북조선으로 들여온 것으로 여겨지는 시추 장비들만이 일본 근해 곳곳에서 떠다니는 것이 관 측되었지." 기석이 나카야마의 말을 부연했다. "북한이 리비아에서 시추 장비들을 슬그머니 들여간 것은 알고 있읍니다. 돈이 없으니 석유라도 찾을려나 보지요." "한국 정보 기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군." 고개를 습관처럼 끄덕이는 나카야마를 보며 기석은 실소를 했 다. 북한이 리비아에서 시추 장비들을 들여갔다는 정보는 기실 한국 정보부와 무관한 정보였다. 중동의 시니어들이 기석에게 개 인적으로 가져다 준 정보였다. 당시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나 시 추선들의 움직임이 태평양 판(PLATE)과 필리핀 판이 맞물리고 있 는 환 태평양 경계역이라서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었다. 중동의 슬럼브에 재직하던 시절 지질학적 오일분석을 했던 기석으로서는 판 경계지역에서 석유를 찾는 다는 것은 잘 납득이 가지 않는 부 분이었다. 기석이 나카야마에게 이오지마를 일부로 언급했던 것 도 북한 시추선이 이오지마 근처에서 꽤 오랫동안 머물었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오지마 근처에서 북한 애들이 몇 군데 구멍을 뚫어 놓은 것 은 알고 있읍니다. 그곳에서 석유라도 나왔읍니까?" "그렇진 않은 것 같네. 다만 우리가 의심스러운 것은 늘 우리 를 위협하던 북한 함정들이 어째서 사라졌느냐? 에 대한 궁금증 이었지. 그에 대한 분석을 위해 우린 한국의 해군 자료가 필요했 던 것이었지. 그 와중에 우린 한국 함정들이 우리를 지나치게 경 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네. 그래서 미국에 그런 정보를 흘리 고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어줄 것을 부탁했다네. 하지만, 얼마 뒤 한국 해군 자료를 재분석 하는 과정에서 우리 역시 쓸데 없는 우려를 했던 것이란 판단을 내렸지. 한국 함정들 의 배치는 철저한 방어용일 뿐 공격용이 아니란 걸 알았거든. 평 상시의 한국 해군과 그다지 달라진 점이 없었는데도 북조선 함정 들이 갑자기 자취를 감춘 것 때문에, 우리 일본은 한국 함정들에 게 유별나게 신경을 곤두세웠던 것 같아." "그랬었군요. 요즘도 북한 함정들이 일본 근해에 전혀 출몰하 지 않습니까?" "아닐쎄. 요즈음은 가끔씩 돌고 있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 부 분에 대한 긴장이 어느정도 해소되었지." "하하. 안보이면 무섭고 보이면 안 무서운 것이로군요?" 기석의 너털 웃음에 나카야마도 따라 웃으며 맞장구쳤다. "헛헛! 그런가 보네. 하지만 아직도 북조선의 시추선들이 가끔 신경을 거슬리게 하곤 한다네." "어째서 입니까?" "북한이 시추선을 몰고 다니는 지역이 문제야. 전혀 석유가 나 올 것 같지 않은 지역들이거든." 기석도 나카야마가 지적한 부분에 대해 꺼림직한 부분이 없지 않았으나 대충 얼버무리기로 했다. "시추선에 일본이 겁먹을 필요야 없겠죠. 잘 아시겠지만 북한 은 지질학에 관한한 세계 제일입니다. 그러니, 그런 곳에서도 석 유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최초로 입증해 보일 수도 있겠지요. 또 시추선이 꼭 석유만 찾기위해 구멍을 뚫는 것은 아니니까요. 천해(낮은 바다)에는 여러가지 자원들이 많잖습니까?" 나카야마도 기석의 얼버무리는 의도를 알았는지 더 이상 북한 의 시추선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소설, 안전기획부(2)> 나카야마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핵 문제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자네는 핵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기석은 말을 흐렸다. "글쎄요. 저는 그쪽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어서..." 나카야마는 핵 문제를 놓치지 않고 늘어졌다. "동 아시아에서 핵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기석은 언급하기 싫은 핵 문제였지만 나카야마의 성의에 보답 하기 위해서라도 장단을 맞추기로 햇다.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여겨집니다만." 나카야마가 따지듯이 물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핵을 갖고 싶어 하지 않나?" 기석이 대답했다. "한국은 이미 비핵화 선언을 했읍니다. 그런만큼 핵에 대한 애 착이 있을 리 없습니다." 나카야마가 웃으며 꼬집었다. "헛헛헛. 한국의 노 태우 대통령이 그런 선언을 했던 것으로 아네만, 노 태우 대통령의 속마음이야 어디 하고 싶어서 했겠나?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어쩔 수 없이 그랬겠지." 기석이 인정하지 않는 투로 나카야마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카야마가 기석을 지긋이 쳐다보며 지난 일을 끄집어냈다.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되네만 90년 쯤으로 알고 있네. 여하튼 노태우 대통령 시절이었음은 분명할 걸세. 최 영희란 미국의 재 미교포 여류 사업가가 미국내 최대 핵 기폭장치 공급 업체였던 EG&G 사에 크라이트론 4개와 하이드로전 타이레톤 1개를 구입했 던 것으로 알고있네. 당시에 최 여인은 물건을 사서 싱가포르로 가져간다며 구입을 의뢰했었지. 미심쩍어 하던 EG&G사의 수출담 당 이사였던 스테판 베리는 미국 상무성의 관리에게 최 여인의 구입에 대한 보고를 올렸고 CIA가 개입하게 되었지. CIA는 최씨 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 두달 후 기폭장치를 넘겨 주었어. 물론 핵심부품은 모두 빠진 상태로 건네주었던 것이지. 만일 최종 사 용자가 싱가포르에 있는 적법한 수입자라면 크라이트론이 작동되 지 않는 점에 대해 EG&G사에 따지게 될 것이고 EG&G사에서는 사 과와 함께 최종 사용자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이란 의도였지. 그러나, EG&G사에 따져오는 트라이트론의 사용자는 없었네. CIA가 처음에 의심했던 것은 사실 북한이었네. 90년 당시 미국 정찰위성은 영변의 북한 원자로와 핵 폭탄용 기폭장치 실험장을 이미 발견했었거든. 하지만, 트라이트론의 뒤를 추적해보니, 놀 랍게도, 핵심부품이 빠진 트라이트론은 한국의 제주도에 있는 한 대학에 처박혀 있었지. 우리 정보가 틀리지 않았다면 비핵화 선 언을 했던 노 태우 대통령 시절에 그런 일이 벌어졌던 것이지. 그런 사실을 자네는 몰랐었나?" "그 건과 비슷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읍니다. 다만 제가 듣 기론 재미교포 여인의 배후는 북한이라고 들었읍니다. 물론 확인 된 바는 아닙니다." "그럼 지금 확인하게. 배후는 북조선이 아니고 한국이었네." "그냥, 첩보 정도의 수준으로 받아들이겠읍니다." "그럼 그러게나. 내가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겠 나?" "잘 모르겠읍니다."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 하고 싶어서일세. 어쨋거나, 지금 자 네와 난 한국과 일본의 비공식 창구가 되고 있는 것이지. 이런 계통에 종사하다 보면 흔히 있는 일이니까. 우리 서로 좀 더 솔 직해지지 않겠나?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드네." "저도 나까야마상이 마음에 듭니다." "그럼 동의한 건가?" "그렇습니다." "우리 일본 자위대는 새로운 방위 전략에 따라 재편되고 있네. 러시아 군을 의식했던 북방중시 전략에서 북한의 로동 1호 미사 일의 사정권 지역인 서일본 및 수도권등의 방위를 중시하는 신전 략을 수립했다네." "알고 있읍니다." 나까야마가 잔기침을 한번 했다. "쿨럭. 한국 정보 기관이라면 그 정도는 알고 있었겠지. 그러 면 우리가 플루토늄을 대량으로 들여오는 이유도 알고있나?" 기석이 잠시 골똘하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확신은 없읍니다. 다만 2000년대에는 일본이 마음만 먹으면 수일내에 수천 개의 핵폭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알고 있읍 니다." 나가야마가 빙그시 웃었다. "맞네. 아마 그럴 수 있을 것이네. 하지만 우리가 핵 폭탄을 만들 이유가 없네. 우리가 대량의 농축 우라늄을 들여오는 것은 원자력 에너지가 필요해서 일세. 우리는 2000년대의 핵보다는 2000년대 부터 시작될 해양개발에 더욱 관심이 있네. 그러자면 많은 핵연료가 필요하고 더욱 많은 원자로가 필요하다네. 우리가 수천개의 핵을 만들어서 어디다 쓰겠나? 중국, 러시아, 북조선, 그리고 한국등에 쓸 수 있을 것 같나?" 기석이 대답했다. "쓰지는 못 하더라도 위협이야 되지 않겠읍니까?" 나까야마가 다시 웃었다. "우리가 무엇때문에 위협을 해야하나? 아마도 국가 간의 사소 한 이익다툼에 아웅다웅하게 될 때를 생각하나 본데, 지나친 걱 정아닌가?" 기석이 자세를 꼿꼿이 하며 대답했다. "일본은 땅욕심이 많잖습니까?" 나까야마가 인정했다. "우리가 욕심이 좀 있는 것은 사실이네. 하지만 섬 한 두개 더 차지하자고 세계의 빗발치는 질시를 감수하며 엄청난 돈을 들여 수천 개의 핵을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나?" "일본에게는 과거가 있읍니다. 섬 한 두개가 될지 통째로가 될 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합니다." 나카야마가 약간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본의 과거라... 태평양 전쟁을 말하는 것인가 본데, 자네는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인 한국인이니만큼 자네와 과거를 논하기는 어려울걸세. 분명한 것은 일본은 코쟁이들에게 달려들었고 패해서 패전국가가 되었네. 그래서 할 말이 없는 것 이네." 기석이 나카야마의 말 도중에 끼어들었다. "아마도 한국이 일본을 우려하는 것은 태평양 전쟁도 전쟁이지 만 그보다는 불평등 조약에서 시작한 갖가지 어거지 조약들, 그 리고 한일합방으로 이어진 악몽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21세기에 일본이 군사적으로 한국을 강점할 수는 없을 것 입니다. 한국은 일본을 위협할 수 있는 중국 러시아 북한 등으로 부터 일본을 지켜주고 있읍니다만, 반대로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중국 러시아 북한 등을 지켜주는 구실도 하고 있읍니다. 만일 남 북이 통일이 된다면 통일 한국이 그런 역할을 떠맡게 되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일본이 한국을 군사적으로 공격해 온다는 것은 한 국 뿐 아니라 중국 러시아까지도 침공하겠다는 의사표시지요. 그 리되면 한국은 일본의 군사력 이상을 주변국으로 부터 제공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이 핵을 쓰겠다고 위협하면 주변국으로부 터 한국도 핵을 얻어 쓸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핵을 얻지 못해 자주국방을 못한 한국이 망한다면 전 세계의 핵 없는 국가는 저 마다 핵을 갖겠다고 아우성치게 될 것입니다. 21세기의 문명은 아프리카의 신생국까지도 핵을 소유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일 껍니다. 그리되면 세계 도처에서 발발하게 될 국지전에서도 핵은 사용될 것이고, 환경 더럽히지 말라고 끼어드는 강대국들도 핵을 쓰게 될 것입니다. 지구상에는 강대국보다는 강대국이 아닌 나라 가 훨씬 더 많습니다. 한국의 멸망으로 약소국들은 강대국의 미 소를 음흉한 미소 정도로나 여기게 될 것이고 결국 강대국과 적 대시 하게 될 것입니다. 가벼운 마찰에도 세계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험악한 상황해서 모두가 핵을 갖고 있읍니다. 이런 세상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겠읍니까? 따라서 일본의 군사적인 침공은 있어서는 안되겠지요. 물론 지금 떠들은 소리는 21세기의 한국이 비리비리한 국가로 전락한 상황을 가정해서 이야기 해 본 것입니 다. 제 이야기의 핵심은 21세기의 일본은 군사적으로 그리 강해 질 필요가 없고 따라서 핵이 필요없을 것이란 이야기 였읍니다." 나까야마가 소리내어 웃었다. "핫핫핫! 자네 이제보니 말을 참 잘하는구만. 한참 떠오르는 한국을 약소국으로 추락시키고 일본보고 핵을 만들지 말라고 은 근슬쩍 협박하는 것이 정말 보통이 아니야. 그러면 이 나카야마 의 이야기도 들어보게나. 21세기에 일본이 핵을 만들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닐세. 하지 만, 그것은 공격용일 수는 없는 것이지. 자네 말대로 일본은 침 략을 위한 전쟁을 절대로 일으킬 수 없네.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한국이 통일이 되고 일본을 능가하는 강대국이 될 경우네. 자네 도 인정 하겠지만, 한국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싫어하는 나라가 어딘가? 바로 우리 일본이네. 현재의 토막난 한국도 여러면에서 만만치 않네. 특히 군사적인 면에서 더욱 그렇지. 게다가 더욱 두려운 것은 한국의 잠재력일세. 통일한국이 되어 21세기를 주도 하는 강대국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네. 그런 한국이 일본을 침공 하게 된다면 일본이 얼마나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물론 핵이 없을 때를 가정해서네. 아마 사흘도 버티지 못하고 일본은 맥없 이 무너져야 할 걸세. 물론 과거가 깨끗한 한국인들은 터무니 없 는 가정이라고 생각할 것이겠네만 일본의 안보를 책임지는 사람 이라면 그런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에 대한 대비 책을 마련해 두지 않을 수 없네. 따라서 일본이 핵을 제조하는 시점은 한국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세. 또 한국민이 일 본에게 품고있는 좋지 않은 감정도 일본을 겁먹게 하는데 충분한 기여를 하게 되겠지. 싸움이란 것은 이권다툼이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감정이 격화되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라네. 일본이 전쟁에서 미국에 패한 뒤, 일본은 정치, 군사적인 면에 서 미국의 의도에 거스르지 못하고 그대로 따라왔네. 우리에게 허용되었던 것은 경제 뿐이었지. 우리는 그 점을 최대로 이용해 서 경제에만 매진해 달려온 덕에 지금은 부자나라라는 소리를 듣 게 되었다네. 부자가 된 일본의 21세기의 목표는 무엇일 것이라 고 생각하나? 군사대국일 것이라고 생각하나? 천만의 말씀이네. 더 부자가 되는 것이네. 솔직히 말한다면 정치 군사적으로도 독립해서 세계를 이끄는 주도적인 국가로의 면모를 만방에 과시하며 아시아 뿐 아니라 세 계위에 군림하고 싶어 하는 일본인들이 많이 있네. 나도 그런 사 람들중의 한 명이란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방법론은 결코 무력은 아닐세. 우리 는 젊은이들의 피로써가 아닌 돈으로써 세계를 사려 한다네. 군 사력은 우리를 방어할 수 있는 정도면 그것으로 족하다네. 자네 가 언급했듯이 한국인들이 우리를 경계하는 이유는 태평양 전쟁 보다도 한일합방일 것이네. 구한말 당시의 조선은 일본에 비해 힘이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불평등 조약에 서명했어야 했 네. 당시에 일본의 힘의 배경이 되었던 것은 군사력이었다는 것 을 부인할 수는 없네. 하지만, 또 다시 군사력을 배경으로 그런 짓을 벌일 수 있는 국가는 지구상에 없네. 세계 전체를 상대할 수 있는 군사력을 확보하기 전엔 어림없는 일일세. 그러나 돈은 다른 것일세. 주었다가 얼마든지 욕 먹지 않고 되찾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돈이거든. 우리는 돈을 주고 이권을 사고 다시 돈을 찾아오는 방법으로 세계를 살 수 있을 것이네. 일본 뿐 아니라 어느 민족 어느 국가든 내색은 못해도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네. 지구상의 유별난 깡패국가인 북조선까지도 이런 점을 의식하기 시작했네. 북조선에 핵이 있으 면 얼마나 있겠나? 기껏 조잡한 것 한 두개 가지고 전쟁위협을 무릅쓰고 세계를 상대로 줄다리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 고 생각하나? 바로 돈 때문일세. 북조선은 차세대까지 지금처럼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 할 수는 없는 입장이네. 그리되면 그들의 현대화 된 무기들도 차세대에는 재래식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지. 군사비에 그동안 실컷 돈을 처박아 넣었는데 차세대에 돈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쓸모 없는 재래식 무기로 무장한 군대가 되는 것일세. 그런 결과가 두 려웠겠지. 그것이 핵을 만들려고 애쓰는 이유의 한가지 일 것일 세. 핵을 마련해 차세대의 군사비를 줄이자는 것이지. 또 다른 하나는 핵을 빌미로 주변국들의 돈을 타다 쓰고자 하 는 것이겠지. 그들의 낙후된 경제를 고려해볼 때 돈이 절실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 궁지에 몰린 북조선이 이판사판식으로 남쪽으 로 쳐 내려올 경우보다는 돈을 요구하는 것이 우리로서는 백번 낫다네. 자네에게는 미안하지만 무력통일이든 평화통일이든 일이 잘못 되어 남북한이 일찌감치 통일이라도 하게 된다면, 일본은 현해탄 바로 맞은 편에 세계에서 일본을 가장 싫어하는 강국을 경계해야 만 될 것일세. 그리되면 일본은 군사재무장을 해야 할 것이고 어 쩔 수 없이 핵폭탄도 준비해 두어야 할 것일세. 공격이 아닌 방 어용으로써......" 나까야마의 은근한 협박을 잠자코 듣고 있던 기석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던 것에 대해 저 개인적인 생각 으로는 별로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전쟁이 곧 세계의 종말로 이어질 가능성은 없었으니까요. 또, 지금 환갑이 넘은 일 본인들도 당시에는 열 살짜리 코흘리개였을 것입니다. 전쟁을 주 도했던 당사자들은 모두 죽었읍니다. 따라서 지금의 일본인들은 사실 당시의 태평양 전쟁과는 무관한 사람들이겠지요. 그런 까닭 에 지금의 일본인들에게 조상들이 저질렀던 전쟁책임을 묻는 것 이 어쩌면 가당치 않게 여겨질 수도 있읍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진 빚을 아들이 갚아주는 것은 시시비비를 떠나 의리와 도덕입니다. 당연한 것이지요. 물론 일본이 가난하 고 못 산다면 우리 한국민은 결코 일본을 닥달하지 않았을 것입 니다.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의 빚을 충분히 갚아줄 수 있는 여 건이라면 갚아주는 것이 백번 지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민 이 일본에게 바라는 것은 지난일에 대한 자질구레한 보상 따위가 아닙니다. 일본인들이 지난 일을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 고 싶은 것입니다. 일본사람들 대부분의 속마음을 모르는 바 아 닙니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세계를 향해 덤벼들었던 자신의 아 버지 할아버지들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을 갖고 있는 일본인들이 얼마나 되겠읍니까?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전쟁에서 패했다는 사 실만을 속으로 안타깝게 삭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바 아닙니 다. 우리가 일본에게 바라는 것은 일본인들의 아버지들 때문에 상처를 당한 사람의 아픔도 생각해 달란 것입니다. 자신들의 아 버지들을 욕하면서 미안해 달란 소리가 아니고, 단지 진심으로 아버지 때문에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자식으로서 사죄하고 싶은 그런 일본사람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일본은 부자고 첨단기술에 있어 세계최고로 꼽히고 있읍니다. 향후 세계의 판도에 일본이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이 많 습니다. 나카야마상의 의도대로 아니 대부분의 일본사람들의 의 도대로 일본이 21세기의 경제대국으로 세계위에 군림할 수도 있 겠지요. 하지만, 일본 뿐 아니라 어느나라든지 자국의 이익에만 급급해 가지고서는 세계의 정상에 우뚝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세계인으 로부터 존경받는 정상의 자리는 다른 민족의 아픔을 자신과 동등 하게 돌볼 줄 알고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며 세계인의 복지를 위 해 앞장서야 하는 고지일 것입니다. 그런 고지야 말로 세계인들 이 인정해 주는 정상의 자리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돈이 많고 군사력이 강하다고 해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시 대는 지나가고 있읍니다. 21세기는 크건 작건 세계 모든 지역의 국가들이 문명화되고 무지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민족간에 힘의 우위에 따라 지배와 종속이 결정지어질 수 있는 과거의 미 개사회는 영영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21세기의 세계 정 상이야말로 진짜 정상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일본이 이런 자리를 노려 보겠다면 일본은 자신들의 아버 지들이 할퀴어 놓은 이민족의 상처정도는 확실하게 보상할 줄 아 는 책임감을 세계에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가식적인 것 이어서는 안되죠. 아버지의 빚을 자식으로서 송구스럽게 갚는 미 덕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의 일본이면 충분히 그 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기석의 말이 끝나자 나카야마가 호감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상대방을 기분좋게 설득하는 재주를 가졌군. 자네를 알게 되서 기쁘네. 언제 일본에 다시 올 기회가 생긴다면 차대신 술한잔 나누고 싶군." 나카야마의 인상좋은 미소에 기석도 답례를 했다. "나카야마상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아이들이 깨기 전에 그만 일어나야 하겠읍니다. 오늘 저에게 베풀어주신 호의는 잊지 않겠읍니다." 해군 전산망을 관리하는 xx부대 구 진태 중령은 지난 밤 도박 판 에서도 돈을 날리고 말았다. 한 번 맛들인 카드의 유혹이 자 신의 모든 것을 앗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하루하루의 일상을 짓눌 렀지만, 카드를 쥘 때만이 그런 압박감을 떨쳐내 버릴 수 있었 다. 일본에 유학갔다온 아내의 친구가 시노하라를 소개해 주었다. 일본 후지 텔레비젼 특파원이라고 소개한 시노하라는 유창한 한 국말로 구 진태 중령을 반겼었다. 그 후 몇 번의 만남에서 시노 하라는 구 진태 중령에게 몇 가지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아내의 화장품을 선물하고 대학 입시를 목전에 둔 자식을 위해 귀에다 꼽고 자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이상야릇한 기기를 선물해 주곤 했 었다. 또한 시노하라를 따라 우연히 찾아든 한남동의 한 밀실의 포커판에서 뒷 돈을 대주며 도박 맛을 들여 주었다. 첫 판에서 왕창 긁었던 짜릿한 유혹을 잊지 못해 자주 들리게 된 도박판은 얼마 못가서 구진태 중령을 빚더미에 올라서게 만들 고 말았다. 인심좋은 시노하라에게 사정을 호소했을 때, 구 진태 중령은 시노하라가 단순한 일본 TV의 특파원이 아니란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20여년 동안 간신히 마련한 24평 아파트를 도박판에서 날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도박에 젖어 시노하라의 요구를 들어 주다 보니, 군인의 길 대신 국가에 대한 배신의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가지 더 배운 것이 술이었다. 오늘도 한남동의 한 술집에서 시노하라를 기다리며 구 중령은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이십대의 나는 얼마나 당당했었던가? 눈은 맑았고 정신은 또 렸했었지. 해군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기뻤 었던가!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조국의 바다를 지키고 있다는 긍지가 떠오를 때면 충무공이 부럽지 않았던 이십대였어. 그런 데, 인생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아내와의 결혼에서부터 였던 것 같아. 새초롬한 미모에 홀려 허둥지둥 서둘러 결혼하고 보니, 헤픈 씀씀이에 국가니 조국이니 하는 것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는 여자였지. 게다가, 돈만 아는 장모는 가난한 해군 장교 주 제에 외동 딸을 채간 것이 못내 억울해서인지 노골적으로 업수히 여기곤 했지. 그래도 아내를 사랑했고 견딜만 했었는데, 이렇게 인생 쫑나고 있는 것은 시노하라 그 새끼 때문이지.` 구 중령은 시노하라의 돈을 기다리며 시노하라를 욕하고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 실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후후후! 뭐 어때! 이렇게 살다 가면 되는 것이지. 제길.... .." 그때였다. 누가 어깨를 툭치며 아는체를 했다. 시노하라였다. "왜 이리 찡그리고 있어. 부인은 잘 있나?" 구중령은 어서 자리를 뜨고 싶었다. "돈은?" 시노하라가 웃으며 말했다. "서두르기는, 내가 언제 약속 어기는 것 봤나! 물건은 잘 챙겨 왔겠지?" 구 중령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노란 봉투를 시노하라에게 건네 주었다. "여기 있네. 돈은?" 시노하라 역시 돈 봉투를 건네 주었다. 그 때였다. "우당탕!" 뒷 쪽에서 서 너명의 사내들이 덮쳐왔다. 구 중령은 올 것이 왔다는 느낌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다만 아직도 잔에 남 아있는 위스키를 마저 마시고 싶었지만 붙잡힌 팔목을 빼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노하라는 버티었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내가 누군 줄 알고!" 뒷 쪽의 사내애게서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후지 텔레비젼의 시노하라 선생이시죠. 같이 좀 가 주셔야겠 읍니다." "용건이 뭐요?" 아직도 카랑카랑한 시노하라의 궁금증을 뒤 쪽에서 또 다른 사 내가 설명해 주었다. "국내의 해군 전산망을 빼낸 간첩 혐의로 시노하라 선생을 체 포하겠읍니다. 친구로부터 정중히 모셔달라는 부탁을 받았읍니 다. 순순히 따라 주시지요." 한국으로 돌아온 기석으로부터 후지 텔레비젼 소속 특파원 시 노하라에 대한 정보를 들은 이건이었다. 안가의 갈색 가죽소파에 마주앉아 바둑을 두고 있던 기석과 주 원은 이건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무사히 체포했다." 이건의 전화를 받고 있던 주원이 물었다. "그 새끼가 뭐라든?" "버티고 있긴 한데, 증거가 명백한데 어쩌겠어. 어제 밤 시노 하라의 오피스텔에서 구중령과 오갔던 전화 대화를 도청해 두었 으니까 꼼짝못해." "잘 되었네. 우린 그만 나가보겠다. 여기 들릴 일 없지?" "응. 다음 주 화요일쯤 의논할 것이 있으니까, 오후 세 시쯤 모이자. 기석이에게도 전해 줘." "알았다." (2) 옛 여인 손톱을 오랫동안 깍지 않은 탓인지 키보드를 때리는 감촉이 껄 끄러웠다. `ATDT 01420`을 찍으니 잠시 뒤에 연결 신호음이 들려 왔다. 한낮이라 그런지 연결이 한 번에 쉽게 되었다. 자정무렵이 라면 열댓번 찍어대도 접속이 어려울 때가 많이 있었다. 기석은 오늘도 천리안에 들어가자 마자 `GO DEBUT`이라는 명령 어를 넣고 컴퓨터 문단으로 들어갔다. 한가할 때면 글을 읽는 나 쁘지 않은 습관이 몸에 배여 있었다. 컴퓨터 문단이 개설된 이래 수 천 편의 글들이 전화선을 타고 올라왔다. 글들 중에는 어린 소년의 공상을 소년답게 펼친 글들 도 있었고 이십대 초반의 순수와 열정을 담은 소설들도 많았다. 또한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작가들도 적지않게 참여하고 있는 곳 이었다. 몇몇 아마추어 작품들이 출판이 되는 경우도 간혹 있었 고 대단히 훌륭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이 쏟아져 올라오 는 글들사이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글들도 꽤 있는 듯 했 다. 기석 역시 수 천 편에 달하는 글들을 모두 읽을 수는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석이 대단히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그 많은 글들 중에서 소름끼치도록 만족스러운 글을 읽을 수 있는 행운을 찾아냈다는 점이었다. 기석이 `ARMENIANHJ`라는 아이디로 올려지는 글을 읽을 수 있 었던 것은 `언제 가셨는데 안오시나`로 시작되는 구닥다리 가요 `못 다핀 꽃 한송이`의 노랫 말들이 제목으로 등장하면서 눈을 끌어당긴 탓도 있었다. `못다핀 꽃 한송이`는 현주에게 기석이 지어준 별명이기도 했었다. 약간은 불규칙적이지만 대체로 일주일에 한 두번씩 올라오는 그녀의 글은 기석에게는 비밀스러운 행복이었다. 그녀의 짤막짤 막한 글들은 정교함보다는 정열이 흐른다는 점에서 세련미보다는 풍요로운 감정을 맛보여 준다는 점에서 기석을 빨아들이곤 했다. 주체할 길 없는 내면의 외로움을 구절구절마다 적셔놓고 악마 를 상징하는 최악의 우연성을 공격하는 그녀의 글귀들은 기석으 로서는 경탄해 마지 않는 것이었다. 기석 역시 같은 문단에 두서없는 글을 올리곤 했다. 하지만 안 타깝게도 대중들은 그녀의 섬세하고 미묘한 감정이 발산되는 글 보다는 기석의 글들에 더 많이 몰려들었다. 아마도 감각적으로 이어졌던 기석의 유별난 과거를 재미있어 하는 평범한 독자들이 기석의 글에 조회수를 보태주어서 인 것 같았다. 그녀의 글에 빠져버린 기석으로서는 그녀의 글들 속에서 번뜩 이는 시적 영감을 흉내내보기 위해, 시도 한 두 편 적어 올려 보 았지만, 서글프도록 가능성 없는 질투심으로 정신적 타격만 입고 말았다. 언제부터인가 기석은 그녀의 글에 짝사랑 비슷한 감정이 솟아 나는 것을 느끼곤 했다. 기석은 천리안에 찾아들때면 예외없이 그녀의 글로 달려가 꼼꼼히 읽었고 그녀의 글 대부분을 암기할 수 있을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기석은 아편속으로 빠져드는 환자처럼 혼자서 빠져드는 황홀한 만족감을 그녀의 글 속에서 느낄 때마다 정신적 자유를 배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온갖 비평을 무시하고 자신의 내면 세계를 고 수하며 순수하게 떠오른 정신의 산물을 키보드로 찍어 올리는 그 녀의 세계를 관통하고 있다는 자유는, 기석으로 하여금 그녀 자 신보다 그녀를 더욱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갖게 하여 주 었다. `ARMENIANHJ`로 시작되는 그녀의 아이디를 뒤져보니 `한민정` 이라는 이름이 나왔고 주소는 목동 신시가지 아파트였다. 전화번 호까지 추적해 보니 652-XXXX였다. 하지만 기석은 그녀를 찾지 못했다. 그녀의 강렬하게 꿈틀거리며 살아나오는 글에서 감정의 영양소를 공급받고 있는 기석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접근 경로 를 통해 그동안 쌓아왔던 열정의 탑을 두드리고 싶지 않아서였 다. 그녀의 슬픔에 찬 싯귀들이 기석의 눈에서 한방울의 눈물을 뽑 아내려 할 때였다. "띠이이이~" 문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컴퓨터를 끄고 혼자만의 가상 공간에서 빠져나와 머리털을 한 번 쓰다듬었다. 옆에 걸린 거울 을 한 번 쳐다보니 약간 흐트러진 머리결이 매끄럽지 못한 모습 이었다. 영옥이 앞서서 문을 열어주고 있었다. "윤희 왔구나! 어서 들어와." 영옥이 반색을 하며 반기는 여자는 단발머리 최 윤희였다. "언니! 나 왔어! 버스타고 오느라고 좀 늦었어. 어휴! 무슨 언 덕이 이렇게 길어. 찾긴 별로 어렵지 않았는데, 올라오기 너무 힘들다." 과자 봉다리 하나를 영옥에게 건네주고 수다를 떨며 들어서는 윤희가 기석과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오빠." 기석으로서는 예기치 못한 윤희의 방문이었다. 영옥과 윤희가 서로 연락하는 사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집까지 오가는 관계로 발 전한 것은 금시초문 이었다. 그동안 시노하라 사건으로 며칠 집 을 비운 사이에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응 윤희왔구나. 나 때문에 온 것 같진 않은데......" 옆에서 영옥이 말했다. "제가 불렀어요. 허락도 받지 않고 불러서 미안해요." 이번에는 윤희가 끼어들었다. "영옥 언니가 고모뻘이라면서 조카에게 허락받고 사람 불러야 하나? 안 그래요? 오빠." 기석이 헤픈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크크... 물론이지. 하지만 너가 온다고 이야기 정도는 해 줘 야, 옷이라도 이쁘게 입고 있지." 영옥도 웃으며 말했다. "어이구, 지금도 예뻐요. 윤희 불렀다고 하면 도망가실 것 같 아서 이야기 안 했어요." 기석이 뻗대며 말했다. "내가 왜 도망가? 요렇게 예쁜 여자가 오는데, 더구나 과자도 사왔구만. 내가 좋아하는 뱅뱅이네." 영옥이 과자를 뽑아 기석의 입에 넣어주며 요구했다. "안 도망가실 거면 이따가 요앞 하림각에 나가서 윤희랑 같이 저녁 사 주세요." 기석이 조금 멈칫거렸다. "그게 말이지. 요 동네는 물가가 비싸서 말이지." 윤희가 기석을 흘기며 따졌다. "제가 왔는데 저녁 한끼 사주기 싫다 이건가요?" 기석이 과자봉투로 손을 집어넣으며 얼버무렸다. "그게 아니고..." 윤희가 날렵하게 쏘아부쳤다. "과자봉투에 손 집어넣지 말아요." 기석이 얼른 손을 빼며 윤희의 눈치를 살폈다. "알았어. 사주면 될꺼아냐! 사줄께. 그대신 뱅뱅 좀 먹어도 돼?"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쩨쩨하긴..." 영옥이 타다 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집 주변에 대한 하찮은 이야기를 나누던 윤희는 영옥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두 여자 사이에서 희희덕 거렸던 기석은 썰렁한 1층에 혼자 남자, 다시 방에 들어가 컴퓨터의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민정의 글줄 기에 마음의 문을 열고 읊조리며 무아의 경지에 빠져드는 기석이 었다. 윤희는 몇번 만난지 얼마되지 않은 영옥이었지만 호기심 비슷 한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베르사이유의 아름다운 노천 까페에서 영옥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일었던 기이한 느낌은 영옥에 대한 짙은 관심의 시작이었다. "언니 정말 의사예요?" "후후. 그래." "근데 전혀 의사처럼 보이지 않아요. 의사 선생님들은 뭐랄까, 소독약 냄새같은 콜콜한 분위기를 피우는데... 언니는 너무 우아 해 보이거든요." "그렇게 보아주니 고마와." 영옥의 화장대에 놓인 사진에 눈을 돌린 윤희가 물었다. "이 언니들이 기석 오빠의 연인들이었나요?" "그래." "정말 도둑놈이군요." "도둑놈이라니?" "저 사진속에 가운데 낀 남자 말이예요. 그래도 설마설마했는 데 저런 염치없는 악당이 어디있나요? 배실배실 웃고 있는 꼴이 에이 나쁜 놈!" 영옥에게서 웃음이 삐져나왔다. "호호호. 맞아. 나쁜 사람이야." "이 사진속의 언니들은 어째서 이런 늑대 옆에서 웃고 있는 걸 까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영옥이 현주에게 반문했다. "윤희는 남자를 사랑해 본 적이 있니?" "글쎄요.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등하교 때 미술선생님을 좋 아했던 적이 있어요." "만일 그 미술선생님에게 다른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데도 윤희 를 사랑했다면 윤희는 어쩌겠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만일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전 그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을꺼예요. 또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다 른 여자를 넘보는 남자는 여자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 해요." "어째서 그러니?" "그야 당연하잖아요. 사랑은 남 녀가 일대일로 만나서 서로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주는 것이잖아요." 영옥이 말없이 웃고만 있자, 윤희가 물었다. "제 생각이 틀렸나요?" "아니야 맞아." 윤희가 사진을 흘깃거리며 재차 물었다. "그런데 사진속이 두 언니들은 이상하게도 행복해 보이네요. 제 착각인가요?" "언니들은 무척 행복해 했어. 얄미울 정도로...... "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요?" "언니들은 오빠를 사랑했거든. 오빠도 언니들을 사랑했고." "기석이 오빠가 얼마나 대단한 남자였길래 두 언니들이 동시에 오빠를 사랑했나요?" "그다지 대단한 남자는 아니었어.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어. 단 지 오빠는 여자를 사랑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아." "여자를 사랑하는 법이라니요?" 영숙은 윤희에게 대답대신 질문을 던졌다. "여자가 남자에게 자신을 맡길 때 무엇을 보고 맡겨야 옳은 거 니?" "그야 사랑이겠지요." "그럼 다시 물어볼께. 여자는 남자의 무엇을 보고 사랑을 느껴 야 옳은 거니?" "그거야. 한 두가지가 아니잖아요. 보통 통틀어서 느낌이라고 많이들 하던데요." "후후. 그럼 그 느낌은 어디서 오는거니?" "에이 그거야, 복잡한 거잖아요. 사람마다 다 틀린 것이고 그 때그때 상황 따라 복합된 것이 많잖아요." "그래 사랑은 그렇게 복잡한 것이고 여자가 남자에게 주는 마 음도 가지각색이야. 오빠가 언니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렇게 복잡했던 거야. 나도 사진속의 언니들에게 네가 했던 비 슷한 질문들을 했던 적이 있었어. 언니가 대답하길 일일히 나열 하라면 백가지 이유도 더 댈 수 있고 또렷하게 한 가지만 대보라 고 하면 한 가지 이유도 못 대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어. 하지만 여러해 동안 기석 오빠의 행적을 뒤쫓아 다니며 나는 왜 언니들 이 오빠를 사랑했는지 어느 정도는 알 것같아." "왜 사랑했는데요?" "처음에 오빠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던 것은 어린시절 오빠에게 품었던 호기심과 언니들과의 사랑을 깨뜨린 죄책감 그리고 일종 의 오기 비슷한 것이었어. 그런데 오빠의 주변 사람들을 찾아다 니며 오빠에 대해 점점 더 깊이 알게 되었어. 오빠의 어머니 그 리고 여동생, 그리고 친구들 친척들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 오빠 를 욕했어. 그런데,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 사람들 에게 오빠는 남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어." 영옥은 말을 잠시 끊고 윤희에게 물었다. "너는 네 주위에 친구든 가족이든 어떤 경우에도 남이 될 수 없는 사람이 있니?" "물론이죠. 우리 아빠 엄마 언니들... 그리고 가까운 친구 한 둘 정도..." 영옥이 미소를 띄우며 물었다. "그 사람들을 얼만큼 사랑하니?" "아주 많이요." "후후. 오빠의 주변 사람들도 입으로는 오빠를 욕하면서도 네 가 아빠 엄마를 사랑하는 것처럼 오빠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 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으로 오빠를 마음껏 욕하는 것은, 오 빠와 매우 친밀한 사이여서 아무리 욕해도 오빠와 남이 되지 않 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어. 오빠는 주위 사람들에게 그런 믿음을 뿌려놓고 다닌거지.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현주 언니의 죽음이었어. 너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 받았다고 죽을 수 있니?" "아뇨." "현주 언니는 성당에 다니고 있었어. 카돌릭 신자에게 가장 큰 죄는 자살이야. 현주 언니가 남긴 일기장 여기저기 에는 카돌릭 신자로서의 자살에 대한 두려움이 잔뜩 기록되어 있었어. 죽어서 도 천주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빌고 있었지. 하지만 오빠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고통보다 지옥의 불구덩이가 언니에겐 덜 고통스럽게 여겨졌나 봐." "어쩜 그럴수가? 어떻게 그럴수가 있나요? 저도 성당에 나가고 있어요. 현주언니가 정말 신앙이 있었다면 남자 때문에 자살은 하지 않았을 꺼예요. 전 믿기 어려워요." "그럴꺼야. 하지만 오빠 고향 선산에는 현주 언니의 무덤이 있 어. 찾기도 쉬워.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의 계명목장 뒷 산인데 비문이 아주 독특해." "뭐라고 씌여져 있는데요." "`현주야. 어디에도 지옥은 없단다. 무서워 하지말고 천주님 곁에서 자고 있어. 조만간 너를 깨우러 가겠다.` 그런 내용이 적 혀있어. 오빠가 적은거야." "정말 뻔뻔스러운 인간이군요. 따라죽지는 못하고......" 영옥은 윤희의 분개한 모습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호호. 오빠가 따라 죽어야 하는거니?" "당연하죠. 저렇게 순진한 여자를 망쳐놓고 자기는 여자들 사 이에서 놀아나는 것이 사람인가요?" 영옥이 조용한 음성으로 현주를 달래 주었다. "너무 오빠를 욕하지 마. 오빠는 무서워서 죽지 못하는 것은 아닐거야.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침대 정도로나 알 고 있는 사람이니까. 누구에겐가 갚을 것이 있다면 살아서 갚을 수 있는 것이지 죽어서는 못갚아. 그래서 오빤 죽지도 못해." "그래서, 기석이 오빠는 현주언니한테 진 빚을 갚기라도 했나 요? 제가 본 오빠의 모습은 반성은 커녕 잘 놀아나는 오렌지족 처럼 보이던데요." 영옥이 다시 웃었다. "호호 그래 맞아 오렌지야. 빚 투성이 오렌지지." "근데 왜 살아요?" 영옥이 이번엔 웃지 않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살아야 현주 언니를 기억할 수 있으니까. 무덤에 잡초도 뽑고 꽃가지도 꺽어다 줄 수 있으니까. 현주언니에게는 너처럼 언니 둘도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도 계셔. 하지만 누구도 오빠만큼 현 주언니를 생각하진 않을꺼야. 오빠는 하루도 빠짐없이 언니를 생 각하거든. 누군가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애틋하게 그리워 한다면 그것이 사랑 아니겠니? 오빠는 자신의 그런 마음을 말 보다는 감정과 행동 하나하나에 담아 언니들에게 표현할 줄 알았어. 그것이 언니들이 오빠의 사 랑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아." 윤희가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물었다. "기석이 오빠가 그렇게 정이 많은 사람인가요? 제 눈에는 그렇 게 보이지 않아요." "윤희 눈에 그렇게 보일 정도면 다른 사람 눈에도 그렇게 보일 꺼야. 그건 오빠가 무척 싫어하는 것이지. 오빠는 다른 사람 앞 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굉장히 수줍어 해." 윤희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미심쩍어 했다. "설마?" "사실이야. 오빠에게는 고지식하다 싶을 정도로 순진한 면이 있어." "믿기 어려워요. 그렇게 순진한 사람이 어떻게 두 언니들 사이 에서 저렇게 능글맞게 웃고 있을 수 있나요?" "후후. 그게 오빠의 이중성이야.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도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는 저돌적으로 감 정표현을 하지. 진실, 거짓말, 사탕발림, 공갈, 가리지않고 동원 해서 자신의 마음을 모두 표현해." "결국 사기꾼 이라는 소리네요." "맞아. 사기꾼이야." "그런 사기꾼을 왜 사랑했을까요?" "언니들은 자신들이 속았다고 느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또 속아 주었어. 오빠의 거짓말은 주로 언니들을 기쁘게 해주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지. 나는 한때 오빠의 거짓말들은 언니들보다 도 오빠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언니들에게 따진 적이 있었어. 언 니들도 그런 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런데 그 당시 내가 놀랬던 것은 두 언니 모두 거의 동시에 똑같은 대답을 해주 었어. 오빠를 위한 것과 자신들을 위한 것에는 차이가 없는 것이 라고. 근데 우스웠던 것은 오빠에게도 똑같이 따졌더니 오빠는 자신을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순순히 대답해주었어. 내 가 언니들과 오빠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몇 해 더 지 나서였어. 오빠와 언니들은 몇년동안 늘 똑같이 희노애락을 느끼 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거든."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이었군요." "후후. 오빠나 언니들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을 제대로 이해한 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야. 그래서 함부로 남을 아는 척 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지. 평범한 사람을 엉뚱하게 영웅처럼 미화시킬 수도 있고 순수한 사람을 비하시켜 추잡하게 매도할 수도 있는거 야. 고의가 아니더라도 무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이 야기야." "어쨋든 전 오빠가 착한 사람처럼 여겨지지는 않아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윤희를 쳐다보며 영옥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난 여러해 동안 오빠를 캐고 다녔어. 그래서인지 어떨 때는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세상에서 오빠 한 사람밖에 없다는 착각 에 빠져들 때도 있었어. 그런 내눈에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착한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할 꺼야.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니까. 그래서 남에게는 오빠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윤희에게는 말해도 될 것 같아. 오빠는 착하 고 좋은 사람이야." 영옥의 조용한 모습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숙연함이 윤희의 마음 한구석에 섬세한 감각을 새겨주고 있는 것 같았다. "오빠가 잘 대해주나요?" 영옥은 윤희의 묻는 의도를 비껴서 대답했다. "오빠는 내 조카이기도 하니까 당연히 잘해주지." 윤희가 재차 파고들었다. "그것 뿐인가요?" 영옥은 모질게 대답했다. "그것 뿐이야." 윤희가 영옥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또렷한 어조로 물었다. "만일 오빠가 다른 여자와 사귄다면 언니는 무척 슬퍼하실 것 같아요." 영옥이 부인했다. 하지만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슬프긴 왜 슬퍼. 내가 바라는 것은 오빠가 사랑할 수 있는 여 자를 만나서 행복한 모습을 보는 거야. 그래야만 나도 오빠의 굴 레를 벗어나서 자유로워 질 수 있을 것 같아." "정말인가요?" 영옥은 허리를 펴고 윤희를 바라보았다. 영옥의 눈동자에는 맑 고 윤기 흐르는 빛이 담겨져 있었지만, 윤희는 영옥의 까만 눈빛 에서 흘러나오는 상처입은 영혼의 애잔함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 다. 영옥은 자상하고 친절한 음성으로 윤희에게 말했다. "정말이야. 내가 윤희에게 오빠와 언니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윤희에게 오빠를 소개시켜 주고 싶어서 그랬던거야. 저기 사진속의 현주언니를 한번 봐. 오빠가 못 다핀 꽃 한송이 머리라 고 부르는 머리 스타일을 윤희처럼 단발머리로 바꾸면 바로 윤희 야. 내가 현주언니와 윤희가 닮았다고 했을 때, 오빠는 닮은 것 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어. 하지만 그 것은 거짓말일 거야. 오빠는 지독한 과거형 인간이거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래를 바라보고 살고 새로운 사랑에 더 많 은 비중을 두고 살아. 그것은 건전한 것이고 삶을 행복하게 하는 옳바른 처세술이야. 그런 면에서 볼때 오빠처럼 과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미련하고 고집스럽게 살고 있는 것이지." 윤희가 영옥의 말 사이로 끼어들었다. "일종의 병이로군요?" "그래. 병이야. 오빠는 환자야. 나는 의사지만 오빠의 병을 치 료하지는 못해. 하지만 윤희 너는 오빠를 치료할 수 있을꺼야." 윤희가 어정쩡하게 물었다. "제가요?" "윤희 아니면 아무도 치료 못할꺼야." "어떻게 치료 하는 건데요?" "오빠의 연인이 되어 주어야 해." 윤희는 기가막힌 표정이 되었지만 영옥의 진지한 태도에 눌렸 는지, 조심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전 오빠같은 사람의 연인이 되기는 싫어요. 하고 다니는 행실 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무엇보다 싫은 것은 제가 과거형의 여자 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예요. 저와 비슷한 다른 여자를 생각하는 남자를 제 인생을 걸고 사랑할 수는 없어요. 또 전 오빠같은 남 자를 감당할 자신도 없구요." "무리한 부탁이란 것은 알아. 선택의 자유를 포기하고 어떤 한 남자를 억지로 사랑해 달라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청인지 알고있 어. 그럼에도 윤희에게 이런 부탁을 해야 하는 것이 수치스럽기 도 해. 하지만 과거에 파묻혀 허우적 거리는 오빠의 고집을 꺽기 위해서라면 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 나는 알몸으로 목욕하는 오빠의 등을 밀어 주겠다고 했고 같은 침대에서 자자고 졸랐어. 오빠는 선선히 응해주었지만 나는 오빠 의 벽을 무너뜨리는데 실패했어. 목욕탕에서는 오빠의 때만 벗겨 주었을 뿐이었고 내 침대에서 오빠는 잠만 잤어." 윤희가 어이없는 목소리로 약간 날카롭게 말했다. "정말 희한한 사람들 다 보겠네요. 오빠뿐만 아니라 언니도 이 상해 보여요." "네가 오빠나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아. 다만 나는 너에게 그냥 오빠를 사랑해 줄 것을 부탁하는 거야." "제가 이해도 못하는 사람을 무엇을 위해서 사랑해야 하나요?" 영옥은 윤희의 약간 쌀쌀해진 태도에 개의치 않고 뚜쟁이 노릇 을 계속했다. "사랑은 그 자체가 목적이야. 무엇무엇 때문에 사랑을 하는 것 이 아니야. 윤희가 오빠를 만났고 오늘 나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 고 있다는 것은 윤희와 오빠사이에 어느정도는 인연이 있다고 볼 수 있어. 최소한 사랑을 시작하기에 불가능 하지는 않다고 생각 해. 물론 윤희는 나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나는 오빠의 사랑을 구 하는데 이미 실패한 여자야. 더 이상 오빠의 사랑에는 미련이 없 어. 다만 어머니가 상처받은 아들을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마음 뿐이야. 그러니, 윤희가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오빠를 이성으로서 여기고 대해 줘. 억지로 연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 고, 그냥 가까운 언니한테 소개받았다는 심정으로 오빠를 대해 줘." 영옥의 간곡한 설득이 윤희를 어느정도 누그러뜨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전 오빠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어요." 윤희의 수그러진 태도에 약간 안도가 되었는지 영옥이 다시 미 소를 머금기 시작했다. "윤희만큼 오빠에 대해서 아는 사람도 몇 없어. 다만 오빠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를 꺼야. 안 그러니?" "네. 잘 몰라요. 오빠는 어떤 일을 하나요?" "오빠는 수학 과외 선생님이셔." "하여간 어울리지 않는 짓만 골라서 하고 다니네요. 수학 과외 선생이라니...그런데 돈은 잘 버나요?" "선생님의 품위를 잃지 않을 정도는 벌꺼야." "선생님의 품위라니요?" "아이들이나 학부모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가르칠 수 있다 는 이야기야. 돈 못 벌면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거든." "다른 일은 하는 것이 없나요?" "소설도 써." "으엑! 그 인간이 글도 써요? 책을 썼단 말인가요?" "응." "보나마나 삼류소설이겠죠?" "글쎄. 나는 잘 모르겠어." "제목이 뭔가요?" "안전 기획부." "안전 기획부요? 들어본 적 없는데?" "별로 많이 팔리진 않았어. 두 권짜리 소설이었어." "그런 글 쓰고도 안 붙잡혀갔나요?" "잡혀갔다왔을꺼야." "잡혀 가서 어떻게 되었는데요." "좀 젊잖게 쓰라고 혼나고 나왔대." "얻어맞진 않구요?" 영옥이 툭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대답해 주었다. "얻어맞긴 왜 맞아. 오빠가 싸움을 얼마나 잘 하는데, 안기부 원들 다 덤벼도 오빠한테 져." "에이 거짓말..." 기석은 정민의 민감한 글 속에서 몽롱하지만 투명한 세계를 만 들어 놓고 헤엄치고 있었다. 가느다란 실날같은 의식의 끈을 아 슬아슬하게 타고 미묘한 영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한걸음씩 내 딪고 있었다. 마음속에 파묻어둔 구질구질했던 수치스러움이 깨 어나 소스라치는 얹짢음으로 뒷골을 때리면 키보드위에 손가락에 는 자지러지는 파문이 일곤했다. 불현듯 밀려드는 차가운 파도에 깃털을 잔뜩 적시고 오돌오돌 떠는 젖은 새만큼이나 추워지기도 하고 꼬챙이에 꼽혀진채로 벌겋게 변색 되어가는 전기구이 바베 큐가 되어 뜨거워지기도 하는 몽상들이 좁은 정신적 통로를 오가 며 부대끼고 있었다. 하마트면 무디게 죽어가고 말았을 잠재적 정서들을 극한까지 뽑아 올리려는 묘연한 시도들이 정민의 글속에 빠진 기석의 가상 공간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아기 엄마가 된 영숙도 보였고 못 다 핀 꽃 한송이 현주도 다가왔다. 그녀들의 뒤에서 누군가의 하얀 손이 울타리를 쳐주고 있었다. 꿈만큼이나 뚜렷하게 보이는 여인 들의 모습과 감촉에서 고통인지 희열인지 분간이 안되는 머리끝 까지 솟구치는 결렬한 짜릿함들이 기석의 세포 사이사이마다 예 민하고 뜨거운 촛농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여인들과 기석 사이를 유영하는 하얀 손의 허물어진 영상만이 또렷하게 잡혀 주질 않아 안타까왔다. "지이잉, 지이잉..." 2층과 연결된 차임 벧이 민정의 울타리에 빠져 있는 기석을 건 져 놓았다. 수화기를 드니 영옥이었다. "지금 뭐 하세요?" "그냥 있어." "준비하시고 저녁 먹으러 나가요. 오늘은 옷을 좀 멋있게 입으 셔야 할 꺼예요." "왜?" "여자가 둘이잖아요." "크크... 알았어." : <소설, 안전기획부(3)> 짜장면에 탕수육을 곁들여 젖가락질을 시작했다. 통통하게 튀 겨진 살점들을 영옥과 윤희에게 하나씩 집어주며 기석이 말했다. "토실토실한 놈으로 하나씩 먹어 봐." 여인들에게 고기 집어주는 것에 잘 숙달된 기석의 젓가락질은 유연하고 정감이 어려 있었다. "고기를 씹을 때마다 볼록 거리는 윤희 볼이 너무 예쁘다. 짜 장면 기름에 반지르르 하게 빛나는 영옥이 입술하고 가히 필적하 는 수준이야. 크크..." 입안에 잔뜩 집어넣고 우물거리던 윤희가 기석의 아첨에 일침 을 가했다. "침 튀겨요. 어서 먹기나 해요." 다시 고기덩이를 뒤적이던 기석이 윤희의 쌀쌀한 일침에 보답 이라도 하는 듯, 영옥에게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영옥아. 좀전에 윤희 말할 때 이빨 사이에 때낀거 봤니?" "아뇨." "오무리고 씹을 때는 그렇게 예쁘던 모습이 입이 벌려지니까 그렇게 우악스럽게 찌그러질 줄이야." "뭐라구..." 발끈해진 윤희가 입을 열려 하자 기석이 손가락으로 윤희의 입 을 가리키며 떠들었다. "헤! 영옥아, 저 이빨 좀 봐. 저 시커먼 것이 아마 다 때지" 따지려던 윤희 입이 도로 오무라들고 조그맣게 옹알거리는 음 성만이 새어 나왔다. "짜장면이란 말여요." 식사를 끝내고 가옥의 정원을 개조해서 만든 `인 마이 메모리` 라는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커피와 레몬 주스와 토마도 주스를 시켰다. 기석은 문득 지난날의 영숙과 현주시절의 애상이 떠올랐다. ` 이쑤시개 부러뜨리기`만 하고 있어도 재미있었고 아무말 없이 얼 굴만 쳐다보고 있어도 심심하지 않았던 좋은 시절이었다. 기석은 되돌아 가고픈 추억을 애써 지우고 새로이 앉아 있는 두 여인에 게 눈길을 돌려 보았다. 귀에 익었지만 이름을 알 수 없는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 고 아름다운 여인 둘이 기석을 바라보며 턱을 고이고 있었다. 새 로운 사랑을 시작하라는 유혹이 기석을 충동이질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석은 지난 몇 년 동안 여인에게 한번도 진지한 구애를 해 본 적이 없다는 염두가 스쳤다. 나이 서른 살을 시작한지도 1년이 넘었다. 스무살 적에 거침없이 여인들을 후리고 다녔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기석은 지금도 그때 처럼 그럴 수 있을지가 궁금했 다. 기석은 두 여인을 동시에 꼬시는 상상을 해보았다.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깍지를 낀 양손을 테이블위에 얹어 놓고 시작해야 되겠지. 마 침 음악은 잔잔한 것이 흐르고 있으니 표정만 진지하게 굳히면 분위기는 그것으로 다 잡혀진 것이고. 무슨 말로 운을 뗄 것인가? 부드러운 유공(柔攻)이 좋을 것인가? 서두부터 제압해 들어가 는 강공(强攻)이 나을 것인가? 일대일이라면 당연히 유공으로 시작하는 것이 기본이겠지만, 일대이는 상황이 좀 다를꺼야. 여자 혼자일 때야 사내의 강력한 구애에 겁을 집어먹기 쉬울 테지만, 여자가 둘이니 강공으로 나 가도 겁을 먹거나 움추러들지는 않을 꺼야. 승부의 관건은 둘이 맞받아 쳐올 때겠지? 일대이를 승복시킬만한 빈틈없는 이론을 쥐어짜내서 어거지 처 럼 보이지 않게 설득시켜야 할꺼야. 일대이는 여자에게도 일대일 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못 하지 않은 것이라는 점과, 그녀들이 창피하게 생각할 것이 틀림없는 그녀들 주변사람의 눈초리와 입 방아를 무마시킬 수 있는 확실하고도 구체적인 방법을 조목조목 하게 나열해 주어야 하겠지. 그 다음에는 미묘한 감정들을 정리해주어야 되는데, 약간 어려 울 것 같지만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아. 한 놈에게 동시에 당하고 있다는 분하고 억울한 두 여인의 심 정들은 필시 나를 꼴도 보기 싫고 역겹게 생각할 테지만 대놓고 표출하지는 않을꺼야. 여긴 젊잖고 우아한 분위기가 깔리고 있는 곳이니까, 속으로 분을 삭이면서 서로에게 양보하는 형식으로 너 가지라고 떼밀며 체면을 지키겠지. 그녀들의 분한 마음을 달래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그녀들을 부 리는 상전이 아니라 충성스런 신하임을 강도높게 보여주는 것 뿐 인데...... 요게 만만치가 않군. 가느스름하게 눈을 내리깔고 혼자서 희죽거리는 기석의 꼴갑에 제동을 건 것은 윤희였다. "뭘 혼자서 키득거려요? 음흉해 보여요." 영옥이 챙겨 주는 소리도 들렸다. "가만 놔둬. 행복한 상상을 하고 계시나봐." 기석이 영옥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국가 발전 오단계를 짚어보면서 사회주의가 실패했던 필연적 인 인과관계들을 정반합적인 유물론 시각에서 벗어나 나름대로 분석해 봤지." 영옥이 입을 가리고 웃으며 기석을 흘겼다. "어이구, 그러셨어요. 입술에 침만 조금 묻혀 놓으면 그대로 늑대의 모습이었는 걸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새침하게 꼬집는 영옥에게서 기석은 스무 살 이전의 영옥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빨 교정을 하기위에 입안 가득 철사를 끼고 있던 탓에 웃을 때나 말할 때면 어김없이 하얀 손으로 입을 가리던 영옥이었다. 기석은 영옥의 단순한 동작 하 나에서도 과거로 되돌아 가려는 자신을 간신히 말렸다. 무엇인가 새로운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자꾸 입에서 옛 이야기만 튀어나오고 있었다. "웃는 모습이 예쁜데, 뭐하러 손으로 틀어막니. 아직도 이빨에 철사끼고 다녀?" 영옥이 손을 내리며 말했다. "어머나, 별걸 다 기억하고 계시네. 그런 건 빨리 잊어 버리세 요. 옛날 일을 너무 오래 기억하면 못 써요." 기석은 영옥에게 수긍을 해주고 윤희에게 말문을 돌려 보았다. "그럴께. 윤희는 언제 비행있니?" "내일 있어요." "장거리 나가니?" "이번 주는 국내만 있고 내주에 해외 나가요." "어디로 가니?" "프랑크푸르프요." "좋은 데 가네." "가 보셨어요?"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면 7인승 픽업 차를 타고 스타인베르그 호텔에 가서 묶게 될꺼야. 입구 정면에는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매력있게 마주보아주는 청동 조각상이 있고, 오른 쪽 커피 수에 서는 검고 긴 드레스를 입은 바이올린 연주자가 모짜르트의 음악 을 켜주지. 호텔 주변의 울창한 자작나무 숲을 따라 퀸즈호텔 방 향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올라가면 몇 개의 벤취들이 나올꺼야. 그 중 등받이가 약간 뜯어져 나간 초라한 벤치가 있어. 그곳에 하트를 그려 놓았는데 아직도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찾아 볼께요. 그런데 오빠는 내가 스타인베르그에 묶게 될지 어떻게 그리 잘 아세요? 저도 잘 모르는데." "일요일에 도착하면 퀸즈호텔에서 하루를 묶고, 평일이면 스타 인베르그야." "그런 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기석은 윤희의 단순한 질문에 어이없이 핑 도는 눈시울을 느꼈 다. 축축해 지려는 속눈썹의 습기를 쓴웃음으로 간신히 가렸다. 그것은 한 여자 때문이었다. 한 여자 때문에 항공기 여승무원 들이 모두 예뻐 보였고 그래서 그녀들이 가는 곳은 모두 따라다 녔다. 그녀들이 타는 비행기는 물론 비행기에서 내리면 타는 버 스, 그리고 묵는 호텔, 그녀들이 자주 몰려 다니는 관광코스, 하 다못해 알래스카의 승무원들을 위한 아파트까지 모두 샅샅이 가 본 기석이었다. 이란 테러 단체에서 대한 항공을 노렸을 때는 뉴욕의 대한 항 공 지사에 경고성 제보를 보냈고, 테러범들을 지구 반대편 까지 추적해서 손마디를 으깨주었다. 제다의 한 일본 호텔이 한국 사 람을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 아가씨들을 거절했을 때는 그 호텔의 물탱크를 터뜨려서 물바다를 만들어놓고 보름동안 영업을 못하게 했었다. 기석은 자신에게 솟아나는 어색한 감정이 두 여자의 기분을 망 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를 슬쩍 숙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여승무원들의 제복 입은 모습을 무척 좋아해. 그래서 비 행기 타는 아가씨들을 많이 따라다니다보니 그런 호텔에만 머물 게 되더라고. 그래서 알아." 기석의 음성에 깃든 우울함을 눈치챘는지, 윤희가 눈치를 힐끔 거리며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럼 여승무원들 중에 아시는 분이 많으시겠네요?" "좀 있어." "제 동기들 중에도 있나요?" "현영이 오현주 김현주 송현주 최현주 주연이 연진이 희전이 희선이 고임이 진영이 미란이 정희 은영이 은주 경희 혜원이 유 림이......" "아주 다 아시는군요." "그래도 모르는 애들이 더 많아." 고개를 수그리고 동기들의 이름을 맥없이 주절거리는 기석에게 서 윤희는 뭉클한 연민이 솟아나는 자신을 느꼈다. 기석을 쳐다 보는 윤희의 눈빛이 애틋해졌고 그녀의 가슴속에서는 따뜻한 열 기가 피어 올랐다. 하지만 그녀의 입은 여전히 꼿꼿한 말투였다. "정말 병이로군요." 영옥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집에 먼저 들어가겠다고 한 까닭에 기석은 윤희의 집이 있는 잠실까지 그녀를 태워다 주어야했다. 차안에서 윤희와 단둘이 된 기석은, 삼일 고가를 타고 성수대교 를 건너 언주로를 따라 매봉터널을 지나 남부순환도로에 접어들 때까지, 말없이 운전만 했다. 기석의 조용한 옆 모습을 자주 흘 낏거리던 현주가 길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저기 잠실 병원 지나서 우측으로 꺽어주세요." 백제 고분로라고 씌여져 있는 이정표를 따라가던 기석에게 다 시 현주가 길을 가르쳐 주었다. "저기 끝에서 좌회전이요." 왼쪽으로 꺽어 이 삼백 미터 쯤 내려가니 편의점이 눈에 들어 왔다. "저 편의점 바로 맞은 편에서 오른쪽으로 꺽으세요." 기석이 꺽고나니 집대신 3층 건물만이 덩그라니 서 있었다. 1 층은 자동차 카센터와 복덕방 간판이 붙어 있었다. 건물 입구에 는 노란 나무판에 중소업체의 상호 비슷한 것이 검은 글씨로 새 겨져 있었다. "여기가 우리집이예요. 우린 삼층에 세 들어 살아요. 우리집 앞까지 같이 온 남자는 오빠가 처음이예요. 잠깐 기다리시겠어 요?" 기석이 처음으로 입을 떼었다. "왜?" 윤희가 차문을 제끼며 말했다. "그냥, 어쨋든 꼭 기다리셔야 해요." 가로수 끝이 닿아있을 듯한 3층의 캄캄한 유리창에서 불이 켜 졌다. 윤희의 방인 것 같았다. 2-3분 뒤에 윤희가 건물 입구에서 다시 나와 차안으로 들어왔다. 윤희의 손에는 길쭉한 종이 한 장 이 들려 있었다. "제 비행 스케줄이예요. 가지세요." 그녀가 건네준 길쭉한 종이 위에는 그녀의 전화번호도 적혀 있 었다. - 422-9XXX - 하지만, RF(READY FOR FLIGHT:비행대기)는 찍혀져 있지 않았 다. 사랑했던 지난 날의 현주가 DAY OFF(휴일)보다 더 좋아했던 RF였다. RF가 찍혀 있어야 할 자리에는 HS가 대신 찍혀져 있었 다. 비행 스케줄표에 고개를 기울이고 있는 기석을 쳐다보며 윤희 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작지만 맑은 소리였다. "여승무원은 자신의 비행스케줄을 한사람에게 밖에 주지 않아 요." 기석의 입술사이로 음울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난 이런 걸 받을 자격이 없는데......" 윤희에게서 곱고 또렷한 미소가 다가왔다. 기석의 얼굴 앞까지 바짝 다가온 미소가 오물거렸다. "오빠는 환자고 저는 자격증 없는 의사예요. 제가 잘 보살펴 드릴꺼예요. 죽는 날까지..." 그녀의 미소가 그의 볼에 닿았다. 볼 위에 찍히고 있던 그녀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제 입술이 처음은 아니시죠?" 윤희의 달콤한 음성이 기석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기석은 대답대신 그녀의 스케줄표를 운전대 위에 올려놓고 천 천히 접었다. 기석은 네겹으로 접힌 종이위에 한동안 망연히 시 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잘 접힌 스케줄 표를 윤희의 윗 주머니 에 꽂아 넣어 주며 말했다. "호의는 고맙다. 하지만 난 환자가 아니야. 그래서 의사가 필 요없어. 누군가 나를 병자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병 자다." 기석은 말을 끝내자 마자, 윤희의 입술이 찍혔던 자리를 얼얼 하게 얻어 맞고 말았다. 돌아오는 차안에서는 오래된 영화음악 러브 스토리가 흘러 나 오고 있었다. (3) 전쟁 시나리오. 백화점 근무를 끝낸 영식은 백화점 맞은 편의 지하 크리스탈 다방에서 일본에서 온 스즈끼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수하던 형과 동시에 대학입시에 실패했던 관계로 일본의 대 학으로 유학을 떠났었다. 그곳에서도 학업과는 인연이 그리 닿지 않았던 관계로 세월만 쏟아붓고 입학을 하지 못했었다. 형이 릿 꾜오 대학에 들어가 준 것이 일본 유학 시절의 그런대로 좋은 기 억이었다. 하지만 형의 대학 생활이 그리 순탄치 않았다. 일본에 서 아르바이트를 위해 비디오 가게 종업원으로 일하며 알았던 박 종길을 통해 일본의 민족 민주 연합이란 단체에 들어간 형은 학 업은 뒷전이었고 여기저기 벽보나 붙이러 다니곤 했다. 영식 역 시 형의 입김에 영향을 많이 받았던 시절이어서 형의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곤 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영식의 형은 직업대신 반핵 통일 투쟁 연합 이란 곳에 들어가 반정부 활동에 개입하다가 도망 다니는 처지가 되었다. 어릴 적부터 형을 무척 따랐던 영식 역시 아직도 가끔 형의 뒷 치닥거리를 맡아주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형대신 일본에서 알았던 박종길로 부터 부탁을 받고 나왔다. 내용도 별 것은 아니었다. 일본에서 온 사람에게 통역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다방 입구에서 박종길이 가르쳐 준 인상착의의 50대 남자가 두 리번 거리고 있었다. 영식이 다가가서 일본어로 아는 체를 했다. "스즈끼 이찌로상 이십니까?" "하이. 하이. 당신이 영식씨 입니까?" 자리에 앉은 스즈끼가 영식에게 싹싹한 어조로 자질구레한 말 들을 건네고 두툼한 봉투를 건네 주었다. "일본에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수고스럽겠지만 형님이나 영식 씨에게 좀 전해 주시겠읍니까?" "그러지요." 영식은 내용물이 궁금하긴 했지만 애써 알고 싶지는 않았다. 다방을 나서서 반대편으로 사라져가는 스즈끼를 한 번 쳐다보고 영식이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두툼한 손길이 목덜미를 거머 쥐었다. 돌아보니 건장한 세 사내가 험악한 눈길로 자신을 내려 보고 있었다. "왜 이러세요?" "그거 이리 내놓고 같이 좀 가자." 들고 있던 봉투를 빼앗긴 영식은 짚차에 떠밀려 들어가 어디론 가 사라지고 있었다. 이틀뒤, 대부분의 국내 일간지에는 일제히 형제 간첩 사건이 보도 되었다. 일본에서 유학하다 돌아온 김 현식, 영식 두 형제가 김일성 일 대기를 담은 영화 비데오와 프린트물 그리고 공작금을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반정부 단체인 조선 통일 연합 소속의 일본인으로 부터 건네 받던 중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는 기사가 일제히 실렸 다. 그러나, 공작금등을 건네 준 일본인은 체포되지 않았다는 기 사였다. 또 일간지들에는 국내 운동권의 한 지류인 반통투연(반핵 통일 투쟁 연합)이 일본의 친북 조직과 연계되어 북한의 사주를 받고 있었다고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북한의 금수산 의사당의 304호실에서 조직부 제 1 부부장 장성 택은 잔뜩 인상을 찌부리고 읊조렸다. "이런 제길 되는 거이 없구만." 장성택의 양발이 올려 진 책상 위에는 참고통신이 펼쳐져 있었 다. 참고통신은 남한의 국제정세 과학 기술 무역 개인문제까지 주석 없이 그대로 보도하고 있는 북한의 부장급 이상의 고위층에 게만 보급되는 자료였다. 장성택의 맞은 편에서 약간 공손한 자세로 남한 신문을 펼쳐든 사람이 장성택의 말에 조아리고 있었다. "면목없습네다. 더 조심 해써야 했는데......" 장성택이 코 위에 걸쳐진 안경을 손가락 하나로 슬쩍 올리며 말했다. "동무래 잘못 없어. 일이 안 되다보니 그리 된게지. 그래도 다 행이야. 동무래 움직이고 있는 조통연(조선 통일 연합)은 안 다 치질 않았어." "기렇게 생각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읍네다." "아니야. 기래도 이번에 동무래 조직한 조통연이 아직 살아 있 다는 것은 보여줬잖아. 남한의 반통투연하고 연계할 수 있었으니 까니 다른 운동 조직하고도 선이 닿을 수 있을끼야. 난 동무의 능력을 이 기회에 한층 더 높이 평가하갔으니 앞으로도 열심히 해보라우." "최선을 다하겠읍네다." 장성택 맞은 편의 사내는 남한의 형제 간첩 사건의 보도내용을 읽고 있었다. 사내의 이름은 문태진이었다. 짧은 고수머리를 하 고 있는 문태진은 북한-중국간 국경 무역 거점인 훈춘에서 태어 났다. 조선족 집단거주지역인 훈춘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고 일본 으로 건너와 성장했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던 중 (조통연)조선 통일 연합이란 단체를 조직했다. 처음에는 남한의 미군이 유지하 고 있던 핵 우산에 대한 핵 반대 주장으로 시작된 순수 단체였 다. 그후 몇 년동안 뚜렷한 활동을 보이지 못하다가, 몇 년전 김 일성 사망을 남한의 반핵단체에 허위로 흘려넣었던 적이 있었다. 허위 제보에 속았던 남한 정부는 이기백 국방장관을 통해 김일성 사망 오보를 텔레비젼을 통해 전세계로 전하는 촌극을 빚었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김일성을 죽었다고 보도한 남한 정부는 그렇 게 망신을 당했던 적이 있었다. 그 사건 이후로 조선 통일 연합 은 반핵 보다는 북한의 공작 지령을 받는 요주의 단체로 여겨지 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 몇년 동안은 남한에 대한 반정부 유인물 을 배포하는 정도에 그쳐 활동상황이 두드러지지 못했다. 그러다 가 이번에 남한의 형제 간첩 사건에 다시 연루된 것으로 보도된 것이다. 유명무실하던 조통연의 새로운 부상이 북한에서의 문태 진의 위상을 도와준 결과가 되고 있었다. 장 성택이 책상위의 참고통신을 접으며 화제를 돌렸다. "기건 기렇구 말이야. 갸래, 요즘 하는 짓이 영 탐탁지 않아." 문태진이 말을 받았다. "누구말씀입네까?" "누구긴 정성진이 말이야. 그 동무래 하구 다니는 꼴이 영 불 안해 보여. 동무는 그 아이하고 다니는 사업을 어드렇케 평가하 구 있어?" 장성택이 거론하는 정성진은 북한 권력 서열 2위인 오진우의 사위로 92년 부터 동북지역을 자주 드나들며 무역업을 하고 있었 다. 김 일성의 외척이기도 한 정성진은 처가와 외가의 배경이 말 해주듯 수하에 정보기관 요원들을 거느리며 벤츠 500을 타고 다 닐만큼 위세 당당한 인물이었다. 정성진은 79년 평양 외국어 대학 불어학과를 졸업하고 중앙 사 회청 외사과와 조선 인민 경비대 평양시당 지도원 등을 거쳐 87 년 6월 부터 90년 2월까지 인민 무력부 보위 연구실장이라는 막 강한 자리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외국인들과 무분별한 접촉을 했다는 이유로 평남 북창군에 있는 수용소에 강제 수용되었으나 2년후 오진우의 보증으로 풀려나 92년 부터 금수산의사당(주석 궁) 경리부 산하 능영윤전합영회사 부사장 직을 맡게 되었고, 벤 츠 승용차를 타고 주로 육로를 이용해서 중국을 왕래하며 무역을 해왔다. 처음에는 북한의 무산, 회령, 남양과 중국의 연길, 도 문, 장춘, 혼춘등지에서 석탄과 중국산 상품등을 거래해 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골동품 거래쪽으로 눈을 돌렸으나 고미술품에 대한 전문지식의 결여로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러시 아의 강판과 벤츠 승용차를 밀수로 들여와 중국에 팔아먹고 있다 는 소리가 그의 주변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중국 의 무역업자에게 넘긴 강판대금까지 사기당해서 대금착복 의심까 지 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문태진은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장성택은 북한 권력서열 백위 바깥이었지만 김정일이 북한에서 가장 신임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김정일의 매제이기도 한 장성택은 실질적인 권력 서열이 김정일 다음이라고 할 수 있 는 조직부 제1부 부장을 맡고 있다. 그가 거론한 상대는 인민무력부장 오진우의 사위 정성진였다. 정성진 본인이야 물론 장성택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뒤에 오진우 가 있음을 생각하면 역시 거물이었다. 함부로 입을 놀리기가 어 려운 상황이었지만 문태진은 다시 얻기 어려운 기회가 왔다고 생 각되었다. 일본에서의 김일성 사망 허위제보 공작의 성과로 조총련에서 부터 이곳 조직부 대외 정보 분석 과장까지는 힘 안들이고 올라 섰다. 그러나 지난 몇 년동안 일본에서의 공작이 지지부진 하다 는 평가 때문에 입지가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러던 중 남한 신문 이 보도해 준 형제 간첩 사건을 계기로 오늘 장성택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더우기 장성택이 정성진을 꼬집어서 거론해 준 것은 문태진으로서는 고맙기 그지없었다. "정성진 부사장 동지께서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것만은 분명합네다. 훈춘의 조선족 인사에게 지사설립자금 10만달러의 지원을 요구했지만 그것까지 거절당한 것으로 알고 있읍네다. 뿐 만 아니라 정 부사장 동지의 활달한 언행때문에 조직부 요원동무 들이 신경을 꽤나 곤두세우고 있읍네다. 술자리에서 한국 대중가 요 따위를 부르기도 하구서리...... 아뭏튼 조처가 필요하다고 판단됩네다." 대한민국 국가 안전 기획부 소속 현장요원, 고유번호 7123 암 호명 잉꼬, 김재준은 혁시 같은 안기부 소속 현장요원, 고유번호 6938 암호명 원앙, 문태진으로부터 장성택과의 대화내용을 보고 받았다. 김재준은 지난 몇 년간 중국의 고미술상으로 위장한 채 중국의 동북지방에 머물고 있었다. 북한의 유력인사에 대한 귀순공작이 그의 주요 목표였다. 정성진에게 접근하는데 성공한 잉꼬는 정성 진에게 골동품상과 벤츠의 밀수입을 부추겼다. 중국의 수입업자 로 위장한 본부 요원에게 골동품과 벤츠를 구입하게끔 한 뒤에 부도처리를 해버린 것도 잉꼬의 공작이었다. 잉꼬는 원앙과 마찬가지로 조선족 출신이었다. 일본에서 조총 련 업무에 종사하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아버지 가 심장병으로 요절했던 탓에 성장기를 어렵게 보내고 대학에 들 어갔다. 대학에서 처음만난 원앙과 둘도 없는 친구사이였고 같이 자취를 했다. 조통연도 둘이 주축이 되어 같이 조직했다. 조통연 의 근본 취지는 남 북한 뿐만 아니라 중국 연변의 조선족까지 포 괄하는 통일을 위한 염원을 담고 있었지만 영향력있는 단체로 성 장하기에는 역부족인 소규모적인 모임이었다. 그러던 중 같은 자 취방에서 원앙의 실수로 화재가 발생했고 잉꼬는 실명의 위기에 놓여지게 되었다. 당시, 조통연의 실체를 내사하며 원앙과 잉꼬 를 주시하던 안기부 소속 정보관 최명진은 잉꼬에게 구원의 빛을 선사해 주었다. 남한에서 안구를 가져와 잉꼬에게 안구를 제공함 으로써 다시 시력을 되찾을 수 있게 해주었다. 최명진은 자신이 남한의 안기부 요원임을 솔직히 밝히고 잉꼬 와 원앙에게 안기부 현장요원이 되어 민족의 평화통일에 기여해 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어떠한 강제적인 압력도 행사하지 않았으 며 안구 역시 미리 제공했었다. 잉꼬와 원앙은 망설이지 않고 응 락했고 자신이 조직한 조통연을 최명진의 지시대로 조총련 산하 에 입적 시켰다. 당시 남한으로서는 대북관계에 있어 고급현장요원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북한의 공작부는 오리무중의 마력으로 세 계를 놀라게 하고 있었고 김정일의 대외 조사부는 무식한 깡패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각종 테러를 무자비하게 저지르고 다 녔다. 남한으로서는 어느 때보다도 북한의 난폭성에 대비한 예방 공작의 필요성이 절실했었다. 당시 북한의 핵심계층에 전혀 접근 하지 못하고 있었던 안기부로서는 잉꼬와 원앙의 가치를 놓고 논 쟁이 없진 않았지만 결국 둘을 고급 현장 요원으로 만드는 데 투 자를 아끼지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후 조총련에 잠입한 조통련의 부상을 위해 조통연으로 하여 금 김일성 사망 오보 시나리오를 구상하게 하였고 남한 정부는 가만히 있어도 그만인 김일성 사망 오보를 억지로 발표하면서 조 통연을 부상시켜 주어야 했다. 그런 까닭으로 원앙은 북한 내부로 잠입할 수 있었고 잉꼬 역 시 중국에서 무역상을 차리고 이중 스파이 노릇을 톡톡히 해내며 많은 정보를 물어다 주었다. 잉꼬와 원앙이 빠져나간 뒤, 원앙의 발판 구실을 했던 조통연이 약화되었다. 북한 고위층에서 조통연 을 한국 내부의 운동단체들과 연계시킬 것을 원앙에게 종용하였 고 그 가능성을 타진해 보며 원앙의 가치를 평가하고자 했다. 북 한의 핵심계층에 깊숙히 침투한 원앙의 입지를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잉꼬의 보고로 안기부는 사건 하나를 만들어야 했 다. 그것이 형제 간첩 사건에 조통연을 연루시킨 배경이었다. 고급현장요원 한 명의 비중은 그만큼 큰 것이었다. 사안에 따 라선 국가의 체면과도 바꿀 수 없고 특별한 경우에는 인권 이상 으로 비중을 두어야 하는 것이 현장침투요원의 가치라고 할 수 있겠다. 잉꼬는 자신의 고미술상 지하 응접실에서 오진우의 사위 정성 진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미 북조선 당국으로 부터 특별체포령에 따른 협조요청이 연 변 조선족 자치주 공안국에 정식 접수 되었소. 동무가 갈 곳은 남조선 뿐이오. 배 편은 준비해 두었소. 어떻게 하시겠소?" 긴 한숨을 내 뿜으면서 오진우의 사위 정성진이 힘든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북조선은 내 체질에 맞지 않는 사회인 까타네, 그 길 밖에 없다면 그리라도 가야디요." 이건이가 테이블 위에 올려 놓은 것은 제 2차 한국전 시나리오 였다. 미국 국방부의 `U.S. Forces Op Plan 5027`은 1차 한국 전 쟁때의 전략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한국군이 막대한 타격을 입 겠지만 곧 미국의 지원아래 연합군이 중국 국경까지 밀고 올라간 다는 내용으로 되어있었다. 이 시나리오에서 북한측의 역할을 맡은 미 국방부의 아시아 군 사 문제 전문가인 폴 고드윈은 한국전쟁이 발발할 경우 북한의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해 놓고 있었다. 하나는 북한이 서울을 점령해 놓고 평화적인 타결을 모색하는 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서울을 우회해서 속전속결로 미군을 몰아 내는 것이었다. 미 국방관리들은 전쟁 초기 단계에서 한국의 지상군에 지상방 위를 의존하다가 통신, 정보, 최신 무기, 공군력, 해군및 해병대 병력을 지원한 뒤 해상수송으로 증원군을 파견한다는 전략을 세 워놓고 있었다. 이러한 전략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북한은 현재 중국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적 경제적 지원 도 받지 못 할 입장이고 북한의 석유 지원국이었던 소련 역시 존 재하지도 않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었다. 반면에 연합군은 냉전 이 종식 되면서 엄청난 전투력의 증강으로 전쟁 발발과 동시에 정예부대의 즉각적인 파견이 가능하다고 분석하고 있었다. 따라서 북한이 서울 점령을 기도하든 우회로를 택하든 어느 경 우라도 일주일 이상이 소요될 것이며 미국은 북한을 서울 북쪽에 묶어둔 뒤 반격을 가해 북한을 패퇴시키고 제 2차 한국전을 승리 로 이끌 수 있다는 시나리오였다. "크크..." 기석의 비릿한 웃음이 이건의 신경을 건드렸나보다. "왜 웃어?" "그냥 우스워서." "뭐가 우스운데?" "북한 애들이 500 MD에 태극 마크 붙여서 휴전선을 넘어오면 어떻게 될까? 대책이 있겠니??" 기석이 언급한 500 MD 는 북한이 서독에서 80여대 수입해 간 헬기로 남한의 모델과 같은 것이었다. 기석이 시나리오 상에 언 급되지 않은 전력차를 계속 꼬집었다. "잠수함이 우리는 네 척이지만 저쪽은 수십 척이야. 남한은 몇 십대밖에 없는 방사포도 저쪽은 수백대고 게다가 세계 최대의 십 만 특공대가 하늘에서 우박처럼 떨어져 봐라. 아마 초전에 당하 기 십상일껄. 남쪽이 나은 거라야 전산 소프트 웨어 한가지 정도 일텐데...... 허긴 미군이 있으니까, 이런 시나리오도 보는 사람 정도는 있을꺼다." 기석의 배배꼬는 말투가 듣기 껄끄러운지 주원이 어설프게나마 기석을 책망했다. "그래도 정신력은 우리가 앞서있어서 괜찮아. 팔이 안으로 굽 어야지. 나쁜 놈 같으니라고." "안으로 굽을 걸 굽어야지. 전쟁터지면 최소한 일주일은 끌텐 데, 그동안 얼마나 죽을 건지 생각해 봤어? 남북 가릴 것 없이 군사력 칠, 팔십프로가 휴전선에 몰려 있는 판인데, 한번 붙어봐 라. 최소한 십만은 그 즉시 사망일껄. 그리고 북쪽애들 기지는 대부분 요새화 되어 있어서 미군이 얼마나 밀고 올라갈지도 장담 못해. 그리고 내가 지금 이 시나리오를 까는 이유는 우리쪽 군사 력이 열세라고 비웃는 것이 아니야. 아무래도 미군 덕을 보고 있 으니까 안 써도 될 만한 군사비 아껴서 사람들 배부르게 하는 것 이 낫겠지. 문제는 이 시나리오야. 이런 시나리오가 여기까지 흘 러들어온 걸 보면......" 말을 잠시 끊었던 기석이 이건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미국애들 지금 전쟁하겠다고 맘 먹은 거잖아? 이건아, 내 말 이 틀렸어?" 이건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미국애들이 전쟁하겠다고 맘을 굳혔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심 상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굳이 미국방성 비밀 시나리오를 우리 에게 유출시킬 필요는 없었거든. 또 너무 낙관적으로 써 보낸 것 이 마음에 걸리긴 해." 이건의 우려에 주원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미국애들이 북한 원자로에 미사일 쏘겠다는 소리를 듣긴 들었 는데...... 그냥 때리는 공갈이 아니었나?" 이건이 탐탁치 않게 말했다. "북한이 지금 핵무기를 가졌어도 조잡한 것 한 두개 정도일테 니, 더 만들기 전에 폭격하자는 말들이 백악관에서 오가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아. 게다가 미국인들이 북한에 대한 무력 응징 을 지지한다는 둥, 유럽 매스콤까지 날뛰고 있는 것이 영 심상치 않아." 이건의 얼굴이 한층 딱딱해졌다. 굳어진 이건의 입술사이에서 모종의 결의가 담긴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사건을 하나 터뜨려야 겠다." 기석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사건?" 이건이 표정을 약간 풀면서 대답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그동안 준비해 놓은 것이 있어." 기석이 다시 궁금증을 표시했다. "뭘 준비했는데?" 이건이 담배를 꺼내 물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미국이 서두는 것은, 현재 북한이 기껏해야 조잡한 핵 한 두 개 정도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추출해 놓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야. 영변의 기폭 실험장 역시 대외 과시용 정도로 보고 있 는 것 같아. 북한이 핵을 탄두화 하거나 핵 운반 장치와 유도장 치 개발까지는 아직 이르지 못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아. 그래서 북한이 핵폭탄을 사용할 수 있는 국가가 되기 전에 한 번 밟아놓자는 것인데, 우리로서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고?" "북한이 이미 핵을 만들만큼 만들었다는 것을 미국에게 인식시 켜 주는 거지. 그러면 절대 공격 못해." "어떻게 인식 시킬려고?" "귀순자들을 통해 증언을 시키는 것이지. 북한은 이미 충분한 핵폭탄을 보유했다고." "미국이 귀순자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을까?" "일반 귀순자라면 어렵겠지만 좀 특별한 케이스로 준비해 둔 귀순자들이 있어. 북한의 핵심계층이거든, 고위층이라고 할 수 있겠지." "북한 핵심 계층이 귀순을 해? 북한 애들 다른 건 몰라도 핵심 계층 하나는 엄청 대접 잘 해주는데, 왜 귀순을 해?" 이건이 혀를 끌끌차며 말했다. "쯔쯔, 그런 것이 공작이지. 안기부는 가만히 앉아서 국민들 세금 받아먹는 줄 알았니?" 기석이 이건의 이야기에 흥미를 기울였다. "마마보이들만 있는 줄 알았더니, 제법이네 안기부." "마마보이라니?" "가만히 앉아서 CIA 애들이 물어다 주는 정보만 받아 먹고 사 는 줄 알았거든. 미국애들이 말 잘 듣는다고 머리 쓰다듬어 주면 재롱떨고, 머 그런 줄만 알았지." 이건이 약간 발끈했다. "이 자식이 말이면 다 말인 줄 아나! 안기부가 돈이 좀 없어서 그렇지. 하는 일만 따지면 CIA 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한 건 없 어. 어쨋건 대북 관계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은 안기 부야." 기석이 이건을 진정시켰다. "알았어 그래. 그렇다고 해줄테니까,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 봐. 어짜자고 그런 기특한 준비를 했니?" 담배 꽁초를 부벼끄면서 이건이가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이 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우리 국에서 그런 준비를 시작하게 된 것은 김국현이 때 문이야." "김국현? 파리에서 실종되었던 전 중앙 정보부장 김국현이 말 하는 거야?" "그래. 그 김국현이가 파리에서 실종된 것 때문에 말들이 많았 었거든. 당시 김국현이 파리에서 뗑깡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은 중 정시절의 회고록 때문이었는데, 한국 정부에 회고록 발간을 협박 하며 몇 가지 요구를 했어. 주로 돈이었지. 한국정부는 모두 들 어주었는데도 김국현은 자신의 회고록을 일본에서 발간했지. 아 마 회고록 내용을 공개하지 않으면 한국정부로 부터 암살당할 수 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던 것 같아. 아무튼 한국 정부로서는 괘 씸한 김국현이었지만 쓸모가 없어진 김국현이었지. 감춰야 할 것 은 다 드러나 버렸거든." 옆에서 듣고 있던 주원이가 불쑥 끼어들었다. "김국현이 죽었잖아. 중앙 정보부 에서 파견된 파리공사가 유 인해서 마취주사를 놓은 다음 KAL 화물편으로 서울에 실어보냈다 고 들었어. 그다음 청와대 지하실로 끌려들어가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쏜 권총에 맞아죽었다고들 알고 있잖아." 이건이가 주원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 이야기가 처음 실린 곳은 일본의 시사주간지였던 `주간문 춘`이었는데, 그 기사는 어떤 소설가가 작성한 기사였어. 김국현 이가 파리의 웨스트 엔드 호텔에서 실종되었을 당시, 청와대나 중앙정보부의 내부 분위기 및 대응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를 조사해 본 적이 있는데 중정의 김재규 부장이나 박 대통령도 김 국현의 실종에 대해 매우 궁금해하고 있었음이 분명해. 따라서 김국현의 실종과 박대통령은 무관하다는 것이지. 죽었는지 살았 는지 알 길도 없고. 그 이후 중정은 김국현이가 중정의 부장을 지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백방으로 김국현의 거취를 알아보 려 애썼어. 코드 네임 K2 로 명명되었던 김국현 찾기는 인터폴, 미연방수사국, 스위스정부, 프랑스경찰 까지 초미의 관심을 기울 이며 수사에 나섰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어. 세계 유수 의 정보기관이 총동원 되어도 실마리를 건질 수가 없었던 것이 지. 지구상에서 누가 이런 짓을 할 수 있었겠니? 아마 한군데 밖 에 없었을꺼야. 중앙정보부는 북한의 공작부 짓이라고 판단했고 그 판단이 틀리지 않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어." 이건의 말을 경청하던 기석이 이건에게 계속할 것을 주문했다. "그래서 그 김국현이가 뭘 어쨋다고?" 이건이 대답했다. "실종된 김국현이가 문제가 아니고, 그 사건을 검토하던 중 북 한이 김국현을 필요로 했던 것처럼 우리 안기부도 북한의 요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던거야. 사실 중앙정보부가 안기부로 바뀌 면서 조직내부구조까지 메스를 가했던 것은 실종된 김국현이가 북쪽에 있을 것이란 점이 적지않게 작용했어. 당시의 중정내부구 조가 김 국현이 하나 때문에 저쪽에 다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상 황이라 여겼던 것이지. 그래서, 그 당시 사건을 되짚어 보던 안기부는 북한 핵심 계층 의 요인을 데려오기로 결정했던 것이지. 물론 납치가 아닌 귀순 형식으로......" 기석이 다시 물었다. "그게 쉽지는 않았을텐데, 그 이야기 좀 들어볼 수 있겠니?" 이건이 기석을 쳐다보며 말했다. "물론 일급기밀이지만 너에게는 이야기해 줘야겠지. 앞으로 이 일에 관계된 부분에 너를 부려먹어야 하니까." 기석이 약간 투덜거렸다. "어째 이건이 이빨에 은근슬쩍 코를 꿰는 것 같다. 들어나 보 자." 이건은 암호로 움직이는 진짜 첩보원 잉꼬와 원앙에 대한 이야 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국가 안전 기획부 소속 일급 현장 침투 요원, 암호 명 잉꼬와 원앙은...... ................................................. ................................................. ................................................. ...... 그렇게 해서 그들은 오진우의 사위 정성진을 중국해서 데려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것이지." 한참동안 말없이 귀를 기울이던 주원이 잉꼬와 원앙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표시했다. "이거야, 믿기 어려운 한편의 소설이구만. 잉꼬와 원앙은 장가 도 안가고 그 짓하는 거냐?" 이건이 대답했다. "둘다 장가를 갔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도 있어. 잉꼬의 가족들은 중국에 살고 있고 원앙의 가족들은 평양에서 잘 살아." 주원이 다시 물고 늘어졌다. "그러면 잉꼬는 중국사람이고 원앙은 북한 사람이나 마찬가지 일텐데, 단지 일본에서 안구 때문에 신세졌다는 이유하나 만으로 멀리 떨어진 남한의 안기부를 위해서 일하니?" 이건이 설명했다. "물론 처음부터 그들에게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던 것은 아니 야. 북한과 중국에서 현장요원으로 뿌리를 내리고 살다보니 그쪽 에서 가족들이 생긴 것이지." 주원이 다시 물었다. "최소한 사랑하는 처자식들은 중국사람으로 북한사람으로 교육 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 일텐데, 그들을 배반하고 북한의 고급 정보를 이쪽으로 빼돌린 다는 것이 별로 납득이 되질 않는다. 더 구나, 원앙같은 경우 북한의 고위직으로 출세까지 하고 있는데 이쪽 안기부에서 얼마나 월급을 챙겨주길래 그런짓을 하고 있는 거냐?" 이건이가 웃었다. "크크... 안기부 예산이 북한 고위층을 돈으로 매수할 만큼 많 지는 않다. 이쪽에서 잉꼬와 원앙에게 지불하는 경제적인 보수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끔 중국의 잉꼬에게 공작금 형식으로 돈을 조달해 주기는 하지만 그건 공작에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다. 또 북한의 원앙에게는 송금조차 어렵다. 잉꼬나 원앙 모두 사회주의 체제속에서 오랫동안 생활해온 까 닭에 돈에 대한 욕구가 이쪽 사람들 같지는 않아. 그들은 중국과 북한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만족하며 잘 살고 있어. 원앙의 경 우, 신분 문제 때문에 가끔 위태위태한 적이 없진 않았는데 그럴 적마다 우리 안기부가 도와주었지. 우리는 돈대신 사건을 만들어 서 원앙의 출세를 도와줄 수 있거든. 그리고 원앙은 그동안 많은 정보를 우리측에 제공했어. 그것이 드러나면 그 쪽에서 편안히 살기가 어려워지겠지. 물론 원앙이 안기부원임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그의 출세를 안기부가 도와준다거나 그의 행각이 북한측 에 드러날 것이 우려되기 때문만은 아니야. 잉꼬나 원앙이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안기부원으로서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야. 그들은 안기부가 심혈을 기울여 북한에 심어 놓은 일급 요원들이 긴 하지만 안기부가 그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식으로 명령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야. 북한이나 중국도 마찬가지야. 잉꼬나 원 앙이 남한에서 심어 놓은 첩보원이란 것을 알 도리가 없거든. 그 래서 잉꼬나 원앙은 매우 자유로운 상태에서 그들의 신념대로 움 직이는 거야. 우리측이 그들에게 어떤 공작에 대한 사안을 보내 면, 일을 하고 안하고는 순전히 그들 마음이야. 그들이 판단해서 해도 될 일만 하는 것이지. 분명한 것은 잉꼬와 원앙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다는 것이지. 민족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라고 판단이 서면 그들은 안기부원이 되어주고, 민족적으로 도움 이 안되는 일이라고 판단하면 이쪽의 사안을 무시해버리지. 우리 는 잉꼬나 원앙에게 무시당할 경우에도 가급적이면 그들을 자극 하지 않아. 그들의 긍지를 지켜 주어야 하거든. 그대신 이러저러 한 배경설명을 보내주면서 설득 정도는 시도할 수 있어. 그래도 그들이 싫다고 하면 대통령이 부탁해도 그들을 못 움직여. 그런 잉꼬와 원앙인 까닭에 사랑하는 처자식들에게 떳떳할 수 있는 것 이겠지. 자신들이 하는 일은 배반이 아니고 민족에 대한 사랑이 라는 뚜렷한 신념을 갖고 있으니까. 어쨋거나, 그들은 안기부의 최상급 정보 요원임에 틀림없어. 머! 북한이나 중국에서 알면 안 기부 프락치라고 하겠지만 말야." 기석이 이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사드의 엘리코헨은 시리아에 침투한 이스라엘의 스파이였 지. 시리아의 대통령은 그에게 의형제를 맺고 자신의 차기 후계 자 자리를 암시하면서 국방장관을 제의했던 적이 있었어. 그래도 엘리코헨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일했지. 후에, 시리아의 감시망에 걸려 체포되어 형틀에 묶이게 되었을 때, 시리아의 대통령이 `너 는 도대체 무엇때문에 이스라엘을 위해서 일했냐?` 고 엘리코헨 에게 물었었지. 그때 코헨은 `나는 이스라엘의 군인이기 때문입 니다.` 라는 유명한 한마디를 남기고 죽었지. 그만큼 군인이라는 직업에 자부심이 컸던 거야. 인간을 움직이는 원동력에서 자부심 이 차지하는 비중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지. 잉꼬와 원앙의 자부 심이 어떤 걸 물어왔는지 결과를 두고 봐야 겠다." 예측불허의 복잡한 국면이 전개되고 있었다. 북한의 한 회담대표가 운운했던 `불바다 독트린`이 한동안 남 북한의 긴장상황을 날카롭게 몰고 가는 듯 했으나 카터의 김일성 방문이 남북 정상 회담이란 역사적 만남을 약속 받으면서 어느정 도 긴장을 완화시켜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런데, 갑작스런 김일성 사망 보도가 세상을 다시 어지럽게 만들어 놓았다. 김일성 암살에 대한 추측보도가 난무하고 남북 정상회담은 무산되고 말았다. 북한의 내부권력구조와 김일성 사 후의 김정일의 위상등이 신문의 지면을 메우며 한반도를 둘러 싼 주변 열강등의 대응여부와 전쟁발발 가능성에 대한 논란이 끊이 지 않고 보도되었다. 뜨거운 7월이었다. 북한의 병력이동이 휴전선 쪽으로 집중배치되며 준 전시상황 체제로 전환되었고 미군과 국군 장병들의 휴가가 취소되었다. 주 한 미군 사령부에는 24시간 동안 불이 꺼지질 않았고 미국방부는 매시간 단위로 한반도 상황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오키나와의 미순양함들이 한반도로 이동해오고 있었고 항모 인 디펜던스가 환태평양국가 해군합동훈련(RIMPAC)에 참여해왔다. 미전술 항공기의 부품과 탄약을 포함한 군수품 그리고 페트리어 트 미사일 배치까지 완료 되었다. 안기부 역시 비상근무 체제에 돌입했고 백악관의 의중을 타진 해 보고자 CIA의 극동지역 책임자와 물밑접촉을 갖고자 했으나 극동 지역국장 존 하우스만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안기부에서 유럽 쪽 대사관에 파견된 요원들로 부터 한반도의 전쟁 발발 가 능성이 심화되고 있다는 보고가 속속 날라들었다. 외국에 나가있는 친지들로부터 전쟁에 대한 우려 전화들이 국 내로 쇄도했다. 대부분의 슈퍼마켜에서는 라면이나 통조림을 사 기위해 몰려든 사람으로 북적거렸고 시중의 방독면등 전시 상황 을 대비한 물자들이 동이 나고 있었다. 이럴 즈음, 서울 대학교 31동 4층 418호 통신이론 연구실에는 자정이 넘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아직도 멀었어?" 기석이 후배들을 닥달하고 있었다. "거의 다 되어가니까, 자꾸 닥달하지 마세요." 송현중이었다. 어머니가 제주도에서 호텔 청소부를 했다는 배 경 때문에 어려운 환경해서 공부하는 고교생들에게 귀감이 되었 던, 85 학력고사 수석이었다. 대학에 들어와서 클래식 기타에 심 취해서 졸업 후 1년여 동안은 밤무대에서 빽반주를 하고 다니며 전전한 적도 있었다. 다시, 몰골을 수습하고 대학원에 들어와 음 향 신호 처리 분야에 달라붙어 있는 현중은, 세계에서 몇 안되는 컴퓨터 해킹 전문가이기도 했다. "근데 이거 로직 에러에 빠져서 잘못하면 무한루프로 돌겠는 데......" 이준현이었다. 대전고등학교 출신으로 역대 전자공학과 학생 중 가장 멋있게 생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180이 넘는 호리 호리한 몸맵시에 상큼한 마스크가 제비처럼 보이는 준현이었으 나, 오만하고 지고지순한 순진성과 충청도 양반 체질을 내내 고 수하고 20대를 보낸터라, 내년이면 서른 살 고개로 접어들게 되 는 지금까지 숫총각 딱지도 떼지 못한 준현이었다. "옆에다 서브문 하나 만들어서 빼돌려 주면 될꺼야." 지독한 크리스찬 김정수였다. 여의도 고등학교 출신이란 점을 강조하며 오연수 아니면 장가 안가겠다고 고집하던 녀석이었다. 하지만, 후배의 누나가 정수의 신앙과 정수가 만날 때마다 꺼내 는 공부 이야기에 빠져들었다고 고백해주자, 냉큼 장가가서 어느 새 의젓한 아들까지 둔 녀석이었다. "암호화 시킬 점자부호들 라이브러리는 다 만들었다." 조정호였다. 서른도 안 된 녀석이지만 새치 때문에 머리가 약 간 희끗했다. 새치 때문에 약간 고민했던 녀석이었지만 기석이 대구 원화여고 출신의 아가씨를 소개시켜 준 덕에 역시 아버지가 되어있는 정호였다. 반도체를 전공하고 있지만 해킹 능력이 있는 진짜 해커중 한명이었다. "오빠들 다 짰으면 빨리 주세요. 실행시키게요." 실험실 안의 막내 박미영이었다. 88학번의 홍일점인 미영은 입 학할 때 선배들로부터 4년 동안 내내 입고도 남을 속옷을 제공 받기도 했었다. 85, 86, 87 학번을 거치는 동안 단 한명의 여학 생도 들어와 주지 않았던 전자과였다. 그런 까닭에 기석은 88학 년도 입시생 게시판에 `여학생만 들어와 주신다면 4년동안 내내 속옷을 제공해주겠다`는 벽보를 붙여놓은 적이 있었다. 그 결과 가 주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쨋든 미영은 전자과에 들어와 귀 염둥이로 졸업했고 통신이론 연구실에 남아 있었다. 피아노를 잘 치는 미영은 키보드도 잘쳐서, 일분에 육백타 정도는 거뜬하게 쳤다. 미영은 통신이론 연구실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해킹 전문 프로그램 `터미널 투시안 1`을 인터넷의 공개 자료실에 올려놓았 다. 자료제목은 `시바의 야한침대`였다. GWS(GRAPHIC WORK SHOP: 그림을 볼 수 있는 프로그램) 프로그램 위에서 실행시키면 동 서 양의 야한 여인들의 포즈들이 배경으로 깔린다. 그리고 그럴듯한 줄거리들이 단편소설처럼 한줄한줄 찍혀지게 되는 `시바의 야한 침대`였다. 2분도 안되서 몇몇 얼뜨기들이 다운을 받아갔다. `시바의 야한 침대`에 달라붙어 있던 해킹 프로그램 `터미널 투시안 1`이 얼뜨 기들의 퍼스널 컴퓨터에 들어갔다. 약 한 시간 가량 지났다. 통신망을 빠져나갔던 얼뜨기 중 한명 이 재접속을 시도했다. 얼뜨기가 `시바의 야한 침대`를 다른 자 료실에 올리고 있을 때 해킹 프로그램 `터미널 투시안 1`은 제 몫을 하기 시작했다. 미영은 `FOOLISHBOY`라는 아이디의 사용자가 다른 자료실에 새 로 올린 `시바의 야한 침대`를 찾아냈다. `터미널 투시안 1`은 자신을 다운 받아간 얼뜨기의 퍼스널 컴 퓨터에 잠복해 있다가 얼뜨기가 재접속을 시도해서 `시바의 야한 침대`를 다른 곳에 올릴경우 얼뜨기의 아이디 다음에 찍히는 비 밀번호를 암호화시켜 `시바의 야한 침대`의 이야기 속에 집어 넣 어 준다. 미영은 얼뜨기가 새로 올린 `시바의 야한 침대`를 다운받아, 시바의 야한 침대 속에서 얼뜨기의 비밀번호를 찾아냈다. 송현중이가 `시바의 야한 침대` 대신 `영국 왕실과 MI6의 인적 자료`에 `터미날 투시안 2`를 붙여 놓았다. `터미널 투시안 2`는 `터미널 투시안 1`과 달리, `영국 왕실과 MI6의 인적자료`를 다운받은 얼뜨기가 새로 재접속을 시도할 때 `터미널 투시안 2`는 `FOOLISHBOY`에게 얼뜨기의 비밀번호를 곧 바로 전송해 주게 된다. `터미널 투시안 2`는 `터미널 투시안 1` 에 비해 비밀번호를 알아내기 쉬운 프로그램임은 분명하지만 비 밀번호 주인의 추적을 따돌릴 수 없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미영이 들어가고 있는 아이디는 `FOOLISHBOY`인 까닭에 추적해와도 별로 걱정될 것은 없었다. 미영은 얼뜨기의 아이디를 도용해서 미국 CIA에서 운영하는 공 간을 찾아 들어갔다. 그곳의 일반인 게시판에 `영국 왕실과 MI6 의 인적자료`라는 제목으로 프로그램을 올려 놓았다. 목표 아이디는 ZPCIA** 계열 아이디였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CIA의 지도급 요원들이 사용하는 ZPCIA** 계열 아이디는 그들만 이 사용하는 비밀 게시판을 들어갈 수 있는 아이디였다. 미영이 CIA의 일반인 게시판에 `영국 왕실과 MI6의 인적자료` 라는 제목으로 프로그램을 올린지 두 시간 정도가 흘렀을 즈음, `터미널 투시안 2`가 도둑질을 시작했다. `ZPCIA11`이란 아이디의 얼뜨기로부터 미영의 `FOOLISHBOY`에 게로 암호와된 부호들이 전송되고 있었다. 키보드를 매만지고 있던 미영이 두손을 번쩍 치켜들고 환호성 을 질러댔다. "오빠! 떳어요! 대한민국 만세! 어머, 어머, 내가 했어, 하고 만거야, 난!" 아직도 소리를 벅벅지르고 있는 미영을 진정시켰다. "그만 떠들고 비밀번호가 뭐야?" 미영이 키보드를 눌러 주었다. "`SDF%#$&?ciA`예요." "더럽게 복잡하구만, CIA의 얼뜨기가 나가면 바로 들어가." "네." CIA 지도부 요원실 게시판에 들어간 미영은 조그만 가슴을 팔 딱거리며 최근의 한반도 관계자료들을 다운받기 시작했다. 31동 4층의 허름한 연구실안에서 키보드를 누르고 있는 여학생 의 손가락이 갸날퍼 보였지만, CIA의 일급자료들은 모조리 빠져 나오고 있었다. 마침내 안기부는 미해군의 화력이 북한의 원자로에 집중되고 있다는 정보와 북한 주민의 김일성 애도가 끝나는 시점인 8월초 쯤에 미군의 미사일 폭격이 시작될 것이란 첩보를 빼낼 수 있었 다. 유난히 뜨거운 7월이었다. 안기부는 전쟁을 막아야 했다. 북한이 이미 핵폭탄을 충분히 제조했음을 미국에 알려줌으로써 미국의 북한원자로폭격이 그다지 의미가 없음을 인식시켜 주어야 했다. 미국은 의미를 상실한 원자로를 폭격하지는 않을 것이다. 엄청난 대가를 치뤄야 하는 전쟁을 미국이 쓸데없는 폭격으로 시 작할 리는 없었다. 그리고 북한이 이미 핵폭탄을 사용할 수 있는 단계에 접어들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므로써, 북한 원자로 폭격을 고집하는 이들에게 겁을 주기로 했다. 안기부의 사명은 한반도의 비핵화 보다는 국가안보다. 국가안 보의 가장 큰 업무는 한반도에서 전쟁발발 가능성을 여지없이 틀 어막는 것이기도 하다. 안기부는 고심끝에 지난 5월 중국에서 빼돌린 북한 고위층 귀 순자 정성진을 공개하기로 했다. K 프레스 센터 2층에서는 기자회견이 진행되었다. 오진우의 사 위 정성진의 귀순 기자회견이었다. "김달현이는 강반석(김일성의 어머니)의 오라비의 손녀사위로 서 92년 12월 최고 인민 회의를 할 때 강성산 총리가 심장 쇼크 로 쓰러졌을 때 강성산을 대신해서 경제문제를 대행했던 적이 있 읍네다. 에또, 리을설이는 김일성과 같이 한 빨치산 1세대로 빨 치산 시절부터 김일성의 경호와 전령을 대행했으며 호위총국장직 을......" 내, 외신 기자들이 언급하는 인물들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으로 신분을 입증한 정성진에게 기자들은 핵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북한의 핵 실상에 대해서 아시는 대로 답변해 주십시오." 탁자위의 물한컵을 들이킨 정성진이 내, 외신 기자들은 물론 전 세계에 폭탄선언을 하면서 북한 핵 시설을 공격하자는 겁 없 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기 시작 했다. "북한은 다섯 개의 핵폭탄을 발써 만들었으며 95년 말까지 10 개의 핵폭탄을 보유하게 될 것이라고 알고 있읍......" 북한 인민 무력부 오진우의 사위 정성진이 북핵 보유설을 터뜨 리자, 그동안 꼬리를 감추었던 CIA 극동 지역 국장 존 하우스 만 이 제일 먼저 안기부 관계자와의 면담을 요구해왔다. "우리는 북한이 핵 5개를 보유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소." 하우스 만의 의구심을 안기부 관계자가 더욱 부채질해 주었다. "믿지 마시오. 우리도 믿기 싫어서 정씨의 증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아요. 단지 첩보 정도의 수준으로 받아들이고 있 읍니다. 하지만, 북한이 지난 86년 세워진 영변 원자로를 전면 가동해왔을 경우 원폭 4개 정도를 제조할 플루토늄을 추출했을 공산이 크다고 봅니다. 또, 잘 아시겠지만, 독일에서 고농축 우 라늄을 소지하고 있다가 체포된 아돌프 예클레의 배후에 북한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북한이 핵 제조를 위한 플루토늄을 얼마나 확보하고 있는 지에 대해선 누구도 자신할 수 없다고 생 각합니다. 우리는 북한에 대해 좀 더 신중히 대처해 나가야 할 것입니 다." 하우스만은 정성진의 존재에 대해 미리 귀뜸해 주지않은 것에 대해 매우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하고 물러갔다. 며칠 뒤, 워싱턴 타임즈는 지난 5월에 있었던 북한측의 핵연료 봉 인출강행으로 `북한측이 과거 어느정도의 플루토늄을 추출했 느냐?`를 판단할 수 있는 단서들은 이미 사라졌으며 핵 폐기물에 대한 특별사찰등 여러 방법을 동원해도 플루토늄 추출양을 포함 한 결정적 의문들은 풀 수 없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또 워싱턴의 강경대응조치의 분위기에 대해서도 어떤 결과를 예 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의 강경조치는 무모하다고 보도했다. 로스엔젤레스 타임즈는 미국 국방부의 제 2차 한국 전쟁 비밀 시나리오 U.S. Forces Op Plan 5027을 보도하면서, 1차 한국 전 쟁때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한국군이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겠 지만 곧 미국의 지원아래 연합군이 중국국경까지 밀고 올라간다 는 이 시나리오의 내용은, 먹혀들지 않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미 군사전문가들이 이 시나리오의 내용의 현실성에 회의를 표시하고 있으며 엄청난 희생만을 초래할 것이라는 경고성 내용을 담고 있 었다. 또 타임즈는 미국의 현직 및 전직 국방관리, 군사 지도자, 외교관들을 면담한 결과를 종합해서 보완된 새로운 시나리오를 보도했다. 북한이 서울을 점령한 뒤 평화적인 타결을 모색하려 하거나, 서울을 우회해 속전속결로 전지역을 점령하려 할 것이다. 북한이 어느쪽을 택하든지 미국은 24시간에서 72시간의 여유밖에는 없을 것이고 따라서 걸프전 때와 같이 주어진 시간내에 군사력을 증강 할 수 없을 것이다. 제 2차 한국전쟁은 전쟁 초기단계에서 한국의 지상군이 막대한 인명 피해를 보는 극도의 혈전이 될 것이다. 북한 지상군은 포격 의 엄호아래 군사 분계선을 돌파한 뒤 전략지점과 방어진지를 포 위하게 될 것이고 10만 특공대는 남한의 통신 보급망 뿐만 아니 라 미증원군이 상륙할 항구와 공항을 파괴할 것이다. 북한은 남 한의 보급로를 파괴하고 서울을 점령한 뒤 방어가 허술한 지역으 로 진격해 들어갈 것이다. 미증원군이 도착하기 위해서는 일주일 에서 열흘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데, 북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 력이 취약한 한국군의 전력을 감안할 때 일주일 이상을 버티는 것은 무리라고 전망한다. 타임즈는 이러한 새로운 가상 시나리오를 소개하며 클린턴 미 행정부가 한반도의 상황을 위기로 해결짓기 보다는 타협으로 해 결해야 할 것이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군사제제와 경제제제를 포함해서 북한에 대한 유엔의 어떤 제 제도 강력히 지지한다고 하던 일본도, 기존입장이 약화되고 있음 이 감지되었다. 조총련의 대북한 송금문제가 법적으로 복잡하며 설사 일본이 대북한송금중단조치를 취해도 다른나라의 은행을 통 해 북한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다고 성명을 내고 대북한송금중단 조치를 일본은 철회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북핵 문제에 대 한 어떠한 해결방식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라고 전제하고 북한을 지나치게 고립시켜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클리턴 행정부는 북한의 과거 핵에 대한 규명보다는 앞으로 북 한이 더이상의 핵을 확보하지 못하게 막는 것으로 촛점을 전환시 키기 시작했다. 채찍 보다는 당근으로 북한을 구슬르기 시작했 다. 북한의 구형 흑연 감속로(플루토늄 추출이 쉽다.)를 신형 경 수로(플루토늄 추출을 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새로운 시설이 필요 하기 때문에 플루토늄 추출이 어렵다.)로 대체하기 위한 회담이 진전되었다. 북한은 플루토늄 추출이 쉬운 흑연 경수로를 포기하 는 반대급부로 많은 돈을 요구했고, 한미일은 비용분담과 맞물린 경수로의 기종선택 여부를 논의했다. 남한의 슈퍼에도 사소하지만은 않은 변화가 있었다. 없어서 못 팔던 라면과 통조림등이 잘 팔리지 않았고, 방독면등 전시상황에 서 필요한 물품들도 잘 팔리지 않았다. 외국에서 쇄도해 오던 전 쟁 발발 우려 전화들도 더 이상 오지 않았다. 한반도 주변에 잔 뜩 몰려있던 전쟁 먹구름이 걷혀지고 있었다. 성북구 석관동이지만 이문동으로 더 잘 알려진 안기부 본청사 입구를 따라들어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화강암에 새겨진 `음지에 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국가 안전 기획부원이라면 누구나 아는 안기부의 표어이기도 하다. `음지`라는 단어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겠지만, 보통 어둡고 음 침한 이미지와 어우러져서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할 질서를 무시 하고 힘을 행사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겠다. 법이란 떳떳한 햇 살이 쪼이지 않는 곳에서, 드러나지 않는 이빨로, 인권을 유린하 며 권력에 아부하는 음지로 여기는 사람들이 적진 않을 것이다. 일반인들이 그렇게 `음지`를 평가하는데 대해, 안기부는 변명을 할 수 없다. 실제로 안기부는 그런 대접을 받을만한 잘못을 저질 렀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괘씸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기부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음지`란 단어에 대단한 애정을 느 낀다. 물론 그들이 느끼는 `음지`는 약간 다른 뜻이 있다. 따뜻 한 `양지`를 일반인에게 비켜주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밝은 곳을 지켜주겠다는 `음지`다. 사내로 태어나서 그보다 더 매력있는 인 생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어서, 그런 음지에 유혹되어 안기부에 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 없진 않을 것이다. 축구선수가 경기에서 한 골만 넣어도 전국민이 환호하지만, 일 주일 후면 터졌을 전쟁을 막아내도 한마디의 감사도 기대할 수 없다. 안기부에는 그런 음지가 사무치게 좋아서 일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소설, 안전기획부(4)> (4) 인권과 국가안보. 이태원의 안가대신 새롭게 마련된 거처인 한남동의 한강 오피 스텔 C동 303호였다. 의자에 앉아있던 이건이가 비데오를 껐다. "왜 꺼?" 포청천 테이프를 보고있던 주원이 물었다. "벌써 세번째 보는 거잖아. 지겹지도 않냐?" "그러게 재미있는 테이프 좀 갖다 놓으라니까, 테이프라고는 이것 하나밖에 없으니까 자꾸 집어넣게 되는 것 아냐?" "여기 놀러왔냐? 할일 없으면 자료들이나 좀 정리해." "놀면서 일하면서 겸사겸사 하는 거지." 이건과 주원이 두런거리고 있을 때 밸이 울렸다. "기석이가 온 모양이네." 이건이 열어주는 문 안으로 들어선 기석은 오피스 텔 안을 휘 휘 둘러보았다. "지난 번 안가보다는 좀 좁은 것 같긴해도 건물이 새거라 깨끗 해 보인다." 자리에 앉은 기석이 찌뿌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번 돌렸다. 약간 지루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목소리는 낭랑했다. "왜 부른거야?" 이건이가 오렌지 주스 한잔을 따라주며 마주앉았다. 이건이의 낯색이 굳어 있었다. "너한테 힘든 부탁을 하나 해야겠다." 이건이의 태도에서 기석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어떤 요구에도 뻔뻔했던 이건이었는데, 지금의 이건은 몹시 어려워 하 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부탁인데?" "이번에는 프린세스 낙랑이 되어주었으면 한다. 사람을 구해오 는 일이야." "어디에서, 누구를?" "북한에서 원앙과 그의 가족들을 빼내 와야 해." "북한 어디에서?" "지금 온성에 있어. 잉꼬가 손을 써서 당분간 숨어있을 거처는 마련했나 봐." "그럼 슬쩍 들어가서 빼오면 되잖아?" 이건이가 난처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체포령이 떨어져서 손을 쓰기가 쉽지않아. 그래서 너한 테 부탁하는 거야." 기석이 물었다. "어쩌다 일이 그 지경이 되었니?" 이건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독일에 출장갔던 현장요원 한명이 등을 돌리는 바람에 일이 그렇게 꼬였다." "현장요원이 등을돌려?" "박종길이라는 친구인데, `노가다 영상`이란 영화제작업체의 대표였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반정부 활동을 하면서 영화를 찍다가 우리에게 붙잡혀 왔어. 그때 회유했지. 그후, 우리를 위 해서 여러모로 협조를 했는데, 독일에서 임무수행 중 심경에 변 화를 일으켰나 봐." "심경의 변화라니?" "주로 반정부 단체에 위장침투해서 정보를 빼다 주었는데 주위 사람 몇명에게 신분이 노출되면서 고민을 했나봐." "뭐로 회유했는데?" "꽃띠암호니까, 잡혀왔을 때 고생 안시켜주는 대신 일해달라고 했을꺼야." "꽃띠암호라니?" "꽃이름을 딴 암호를 붙여주었다는 이야기지. 암호명이 아카시 아야. 스파이 분류등급 중 사급 정도 되는거지. 가치관 보다 이 권 때문에 일하는 요원들에게는 꽃이름을 따서 암호를 붙여 주거 든." "박종길이가 원앙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나?" "꽃띠요원들이 새띠요원들에 대해서 알 수는 없다. 새띠요원들 은 우리가 가장 아끼는 사람들이거든. 다만 박종길이 문제가 된 것은 형제 간첩사건 때문이야. 원앙의 북한내에서의 입지를 굳히 기 위해 터뜨렸던 형제 간첩사건에 약간 연류되어 있었어. 동생 간첩 김영식을 체포할 때 박종길이 유인했었지. 박종길은 독일의 범민노련이란 인권단체 관계자들하고 접촉을 하고 있었어. 그러다가 우리측에 등을 돌릴 결심을 하게 되었나 봐. 그래서 그쪽 관계자에게 자신이 남한의 형제간첩사건에 개입 했었다고 주장하면서 사건의 조작성을 폭로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더라. 가뜩이나 오진우의 사위 정성진을 공개하는 바람에 의심받 고 있던 원앙이었는데, 형제간첩사건에서 고의로 조통연쪽에서 파견된 일본인을 우리측이 잡지 않은 것이 드러나 봐. 북한에 있 는 원앙은 그 즉시 끝장이야. 원앙의 입지를 키워준 조통연의 배 후가 우리라는 사실이 당장 노출될텐데, 조통연 덕을 보고 있는 원앙이 무사할리 없겠지. 다행히 잉꼬가 그런 사실을 미리 알게 되어서 원앙을 피신시켰어." "박종길이는 왜 그리 변덕이 심해?" "마음이 여린 녀석인 것 같아. 회유할 때도 쉽게 되더니, 등도 쉽게 돌리는 것 같아. 자신이 관계했던 반통투연 사람들에게 안 기부 프락치라고 의심을 받고 있었는데 그게 괴로웠다나봐. 그래 서 독일에 파견나가 있던 중 독일의 범민노련 사람들과 접촉하면 서 양심선언을 하겠다고 나선거지. 아마 사나흘, 길어야 일주일 후면, 독일에서 양심선언 어쩌구 하면서 터질꺼야." "그럼 일 터지기전에 원앙을 데려와야겠네?" "일은 이미 터졌어. 박종길의 변심사유에 남한의 형제간첩 사 건이 한몫을 하고 있다는 정보가 독일에서 북한 쪽으로 벌써 새 들어간 것 같아. 중국 국경에 원앙에 대한 비상수배령이 쫙 깔렸 어. 잉꼬쪽에서 원앙을 빼내려했다가 삼엄한 경계때문에 실패했 거든." "그러면 잉꼬도 위험해졌을텐데?" "잉꼬는 아직까지는 버틸만한가 봐. 하지만 원앙이 노출된 잉 꼬는 현장침투요원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봐야지. 잉꼬도 얼마 안 있으면 위태로워질 수도 있으니까, 이번기회에 둘 다 철 수시킬 생각이야." "잉꼬와 원앙의 가족들은 어떻게 할껀대?" "모두 같이 데려와야 해. 잉꼬와 원앙이 강력하게 원하고 있 어." "위험 부담이 몹시 클텐데. 비상 수배령까지 떨어졌다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껄?" "그래서 너한테 부탁하는거잖아. 프린세스 낙랑이라면 쉽진 않 아도 할 수는 있을테니까." "중국도 아니고 북한까지가서 가족하고 함께 모셔와야 할 정도 면 원앙이 대단한 존재는 대단한 존재인가 보네?" "그것도 그렇고, 잉꼬가 보고하기를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원앙의 가족을 빼내와야 한다고 했어. 잉꼬가 중국으로 원앙을 빼돌리는데 실패한 것도 원앙의 가족 때문이었어. 원앙이 가족과 함께가 아니라면 절대 국경밖으로 나오지 않겠다고 버텨서 실패 했대. 또 원앙이 평양에서 도망나오면서 대단히 중요한 정보를 물고나왔다는데, 이전의 정보를 다 합친 것보다 중요한 정보임이 확실하대." "이전의 정보를 다 합친 것보다 중요한 정보라? 그거 잉꼬가 원앙의 가족을 구해달라고 허풍치는 것은 아닐까?" "그럴수도 있겠지. 어쨋든, 우린 원앙과 그의 가족을 무사히 데려와야 해. 우리에겐 정보보다 신뢰가 더 중요하니까." "크크크...... 정보보다 신뢰라? 허긴 우리끼리니까...... 그 래. 정보보다 신뢰라는 말이 마음에 들어서 다녀오긴 하겠다. 하 지만, 비상 수배령이 깔려진 상황에서 나혼자 원앙의 가족 모두 를 데리고 나올 수는 없다. 총잡이들을 데려가야 겠는데, 707애 들을 데려갈 수 있니?" "4인 1조의 침투조로 2개조를 편성해서 미리 준비시켜 놓았다. 너 아니면 주원이 혼자서라도 갔다와야 했으니까." 기석과 주원은 707대대에서 차출된 여덟명과 이틀간의 합숙으 로 손발을 맞추었다. 중위 둘의 성은 조씨와 이씨였다. 상사 둘은 나씨와 배씨였다. 그리고 네명의 중사들은 김, 윤, 김, 허, 였다. 8명으로 구성된 707대대원들은 움직임이 경쾌했고 탄력이 있었으며 눈빛도 좋았 다. 사격은 정확했고 자신들이 수행해야할 일에 대한 동요가 없 었다. 잘 훈련된 병사들이었다. 여러명의 집단을 움직이는 원리로서 민주주의 원리를 빼놓을 수는 없다. 여러개의 입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고 각각의 귀는 상대의 목소리를 들어주어야 한다. 뒤집어 말하면 내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내목소리처럼 들어주어야 하고 내 생각 이 아니더라도 내 생각과 똑같은 가치를 부여할 줄 알아야 민주 시민이다. 그러나 이런 완벽한 민주주의가 모든 분야에서 적용될 수는 없다. 개개의 입에서 나오는 보편적으로 옳은 말들을 하나 로 모아보면 아무것도 안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럴경우 개 개인의 주장들에서 하나의 뚜렷한 줄거리를 뽑아내 방향을 잡아 이끌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하다. 리더는 두목하고는 다른 것이다. 의견들을 수집해서 최종 결정을 내리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 서는 두목과 비슷하지만, 독단이 아니라는 점에서 두목과 다르 다. 우왕좌왕하는 배는 침몰하기 쉽고, 한 개인의 독단에 의해 처리되는 일도 위험하다. 그래서, 올바르고 현명한 리더는 칼날 위에 서 있는 존재와도 같다. 조금만 형평이 기울어도 미움을 받 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여러사람의 의견을 모아 수렴된 결정을 올바르게 내릴 수 있다면 존경받는 지도자일 것이다. 그래서 민 주사회에서도 훌륭한 지도자를 갈망한다. 훌륭한 지도자를 뽑아 낼 수만 있다면 역시 민주시민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 다. 하지만, 이런 민주적인 체계가 별로 먹히지 않는 집단이 있다. 바로 군대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서 주어진 시간내에 작전을 성 공적으로 완수하자면, 민주주의 어쩌고 하면서 우왕좌왕할 틈이 없다. 그래서 군인은 민주적인 의견수렴과정 대신 지휘자의 명령 에 의해서 움직여진다. 그런 까닭에 리더를 인정하기를 꺼리는 사람은 훌륭한 병사는 될 수 없다. 남에게 자신을 맡긴다는 것은 내 심정을 백프로 이해해줘도 될까말까한 것인데, 무작정 떨어지 는 명령에 움직여야 하는 신세이고 보면 임무수행에 최선을 다하 기 싫어질 것이다. 707 대대원들의 병사로서 우수한 점중에 한가지는 자신들의 생 각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여가시간에 같이 고스톱을 칠 때에는 잔머리도 제법 돌리던 대대원들이었지만, 일단 모의 작전에 들어 가자 그들은 자신들에게 떨어진 임무를 묵묵히 수행했을 뿐 의견 따위는 일체 없었다. 그들의 일사분란한 움직임은 미련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자신들의 위치에 정확했고 동작들은 민첩했 으며 순간순간의 포착은 정교했다. 707대원들은 명령에 따라 하 나의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믿음직스러운 전사들이었다. 기석 일행은 두 명씩 짝을지어 연변족 자치주의 주도인 연길시 에 관광객으로 입성할 수 있었다. 연길에 마중나온 잉꼬와 함께 기석일행은 도문으로 갔다. 도문에 마련된 잉꼬의 은신처는 슬레이트로 만든 지붕의 낡은 건물이었지만 지하실이 넓고 깨끗했다. 해가 떨어질 무렵 잉꼬가 손수 고아준 닭찜으로 푸짐하게 배를 채운 기석일행은 수면에 들 어갔다. 앞으로의 고된 작업을 대비해서 병사들은 긴 수면이 필 요했다. 열두 시간 이상의 긴 잠에서 깨어난 기석은 잉꼬와 마주앉았 다. 삼십대 후반에서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잉꼬는 작달만한 체구였지만 떡 벌어진 어깨가 제법 당당했다. 기석이 먼저 말을 꺼냈다. "온성에 있는 원앙과 연락은 되었읍니까?" "어제 연락이 되었는데 아직까지는 무사하다네." "가족도 함께겠죠?" "아내와 여섯 살짜리 딸하나와 네 살짜리 아들일세." "연락은 어떻게 하고 있읍니까?" "우리 일을 도와주는 조선족 아주머니가 오늘 다시 온성으로 들어가네. 중국과 북조선의 국경을 오가며 골동품 밀매업을 하는 아주머니인데 원앙과의 연락을 도와주고 있네. 원앙은 지금 가족 과 함께 온성 변두리의 밀거래자들이 이용하는 무허가 여인숙에 머물고 있어. 오늘밤 자정쯤 우리가 데리러 가겠다고 원앙에게 메모를 전해주라고 부탁했지." "아주머니는 믿을만한 분인가요?" "그 아주머니의 두 아들이 살인을 했는데, 내가 신분을 위조해 주었고 보살펴 주고 있네. 한 명은 이곳에서 내가 데리고 있고, 다른 한 명은 온성에서 원앙 근처에 머물며 우리 일을 도와주고 있어. 그러니 안심해도 될걸세." "믿을만 하군요." "그럴걸세. 자네들이 이곳에서 북조선으로 건너가는 데는 무리 가 없겠지만 그곳에서 이곳으로 건너오는데는 쉽지 않을꺼야. 원 앙 때문에 북조선 국경쪽에 경비가 삼엄하거든. 그래서 온성에서 원앙을 두만강변까지 데려온다음 이쪽으로 건너올때는 야음을 틈 타서 쪽배를 이용해야 하네. 배 편은 마련해 두겠네." "알겠읍니다." "그리고 한가지 부탁이 있네."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하시지요." 이마의 잔주름을 깊게 파며 잉꼬가 어렵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원앙과는 둘도 없는 친구사이일세. 일본에서 동문수학하면 서 서로 고생을 나누었어. 그리고 내 눈이 다친이후로 원앙이 나 에게 보여준 우정은 지극한 것이었네. 지금까지 나대신 북조선으 로 들어가 아슬아슬한 곡예를 자청해온 것도 나에게는 커다란 미 안함이 되고있네. 이번에 원앙이 어려워진 것도 따지고 보면 나 때문일세. 원앙과 그의 가족들이 털끗만한 해라도 입게 된다면 나는 평생 죄의식 속에서 살아야할걸세. 어려운 길을 떠나는 사 람에게 이런 넋두리를 늘어 놓는 것이 도리가 아닌 줄은 알고 있 네. 하지만 그래도 원앙과 그의 가족에 대한 안위에 무엇보다 신 경써 줄 것을 부탁하네." 기석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 알겠읍니다. 최선을 다하겠읍니다." 기석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잉꼬는 한 번 더 부탁했다. "무사히 구해와 주기만 한다면 은혜는 잊지 않겠네. 예의가 아 닌 줄은 아네만 자네의 부모님 모셔오듯, 최선을 다해주길 부탁 하네. "알겠읍니다. 잉꼬와 원앙의 우정에 대해서는 서울에서부터 익 히 들어 잘 알고 있읍니다. 저도 두 분의 우정에서 많은 감동을 받고 있읍니다. 최선을 다하겠읍니다." "고맙네." 잉꼬가 도문의 해관원(세관원)들과 가까운 사이여서 조선족 보 따리장사로 위장한 기석일행이 해관을 통과하는 데는 무리가 없 었다. 잉꼬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 북한으로 들어온 기석 일행은 어두 워지자, 두만강변의 갈대숲을 헤치고 자리를 잡았다. 강변의 수 풀 속에서 무기를 실어다 줄 쪽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만강 하늘에서의 별은 아름다웠다. 강의 수면위에 떠 있는 별빛을 남한의 동포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문득 기석은 윤동주의 서시를 떠올리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에서 빠진 단어를 생각해냈다. 그것은 강이었다. 물빛이 빠져있 었다. 이자리에 시인이 서 있었다면 이런 강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는 없을 것이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긴 강에는 역사의 슬픔 따위는 담겨져 있지 않을 것이고 그저 흐르고 있을 뿐일게다. 인간들이 잘났다고 설 치며 영욕에 몸부림쳐봐도 강은 강이었다. 인간의 영예와 절망도 결국은 강바람에 솟았다가 스러지는 물 거품처럼 흩어지고 말 것이다. 한잔 탁주술의 이야기거리 정도로나 떠돌면 다행인 인간사 하 고많은 시비성패들, 그리고 우여곡절들...... 불을 보고 달려드 는 하루살이를 비웃을 수 있는 자격이 과연 인간에게 있을까? 민족을 구하고 세계의 평화에 기여하는 따위들을 업적이라고 불러주지만, 강변의 물거품과 비교해서 우월하다고 자신할 수 있 을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만, 더러운 엉덩이에 깔려지는 호랑이의 가죽이 죽은 호랑이 에게 무슨 대단한 의미를 줄 수 있을까? 기석은 흐르는 강을 바라보며 누구에겐가 방아쇠를 당겨야 하 는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있었다. 자신이 저지를 살인에 대한 변 명을 인간무상에 가져다 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좋지 않았 다. 기석은 킬러로서의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기석은 이전에도 살인에 이유를 끌어다 붙이곤 하는 습성이 있 었다. 하지만, 그것은 살인을 저지르고 난 후의 습성이었고, 이 유를 끌어다 붙이는 것들도 진정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의도 는 아니었다. 억지로 갖다 붙인 이유들로 합리화를 시도해보고자 애썼던 것은 허무란 알맹이에 껍질을 씌우는 가짜 합리화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총을 쥐기도 전이었고 명백한 자신에 대한 합리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총잡이에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곧 총을 쏘기싫다는 무의식이다. 어째서일까? 영 옥과 윤희라는 새로운 두 여인이 사랑빛을 뿌리며 맴돌아 주어서 일까? 아니면 동족의 이마에 탄을 박아 넣어야하는 꺼리낌때문일 까? 아버지가 총을 쥐어주며 동족의 일에는 개입하지 말라던 이 유가 이것이었을까? 절대의 사수는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지 않는 다는 디트로이트의 저격수 아론의 말이 떠올랐다. 기석은 자신이 전사로서 실패의 길목에 접어들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 다. 기석의 이마위에 맺힌 구슬땀을 강바람이 말려주고 있을즈음 쪽배가 도착하고 있었다. 잉꼬가 강변으로 내려가 배위의 조선족 청년으로부터 무기가 든 꾸러미를 받아내렸다. 그때였다. 반대편 갈대가 흔들리며 황망하게 나타난 조선족 보따리장수 아주머니가 잉꼬에게 서둘러 다가갔다. 보따리 장수 아주머니와 잉꼬가 사색 이 된 얼굴로 무어라 말을 주고 받는 것 같았다. 잉꼬가 기석일 행이 은신하고 있는 갈대쪽으로 뛰어왔다. "큰일났네. 원앙이 그의 가족들과 함께 끌려갔다고 하네." "어디로 끌려갔읍니까?" "종성 쪽으로 끌려갔다니까, 103 훈련소의 941여단으로 붙잡혀 간 모양일세." "여단씩이나?" "941여단의 3대대애들이 이 부근의 국경경비를 맡고 있는 것으 로 아네만. 어쩌면 좋겠나?" "언제 끌려갔읍니까?" "저녁 8시 경에 군인들이 잡아갔다고 하네." "원앙의 경우 그대로 부대에 남겨두지는 않을 것이고, 다른 곳 으로 호송해가지 않겠읍니까?" "그럴걸세." "어디에서 데리러 올까요?" "원앙은 아마 국가 보위부에서 데려갈 것이고, 원앙의 가족은 사회안전부 쪽에서 데려갈 것이 틀림없네." "그쪽 계통의 위조신분증을 구할 수 있을까요?" "당장으로서는 어렵네." "언제쯤 데리러 올 것 같습니까?" "아마 내일 오전 11시에서 12시 사이쯤 일걸세. 회령에 국가 보위부 지부가 있고 아오지에 사회안전부 지부가 있네. 보통 도 망하다 잡힌 탈출자들을 호송할 때는 그쪽에서 나오네. 원앙처럼 신분이 국가기밀에 관계된 경우는 국가보위부에서 데려가고, 일 반인의 경우는 사회안전부로 데려가네. 그런데, 국가보위부나 사 회안전부 어느쪽에서 나오든, 대개 오전 11시 정도 이곳에 도착 해서 인수인계 절차를 끝내고 점심을 먹고 오후 2시쯤 출발 한다 네." "호송차량은 식별이 가능합니까?" "가능하네. 보통 검은색 찝차에 인공기가 백미러 옆에 꽂혀있 어서 멀리서도 식별이 가능하지." "그럼 내일 오후 2시경에 원앙과 그의 가족들을 실은 차량이 941여단을 떠나겠군요?" "확실하네." "온성, 회령, 아오지 일대를 낱낱히 살필 수 있는 지도가 필요 합니다만?" "지금은 없어도 구할 수는 있네." "우선 종성 근처로 위치를 이동해야 겠읍니다. 종성 근처에 저 희들이 머물만한 장소가 있겠읍니까?" "북창평 근처가 좋겠네. 종성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또 그 근 처에는 인적이 끊긴 폐광도 하나 있네." "일단 그곳에 가서 작전을 구상해야 겠읍니다. 오늘밤 안으로 지도를 구해다 주실수 있겠읍니까?" "그럴 수 있네." 보따리 아줌마의 길 안내로 동관에서 북창평으로 이어지는 소 로를 따라 폐광으로 이동했다. 폐광에서 원앙과 그의 가족들을 구출하기 위한 실마리를 땅바 닥에 끄적거려 보았지만, 신통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국가보 위부와 사회안전부 두 군데로 분산되어 호송되는 까닭에 상황이 더욱 어려워 질 것 같았다. 기석이 작전구상에 골몰하고 있을즈 음, 두사람이 도착했다. 한명은 잉꼬였고 또 한 명은 이십대 초 반 정도의 젊은 남자였다. 잉꼬의 손에는 지도가 들려져 있었다. "지도를 구하느라고 구했지만, 그다지 자세한 것 같진 않네. 하지만, 이곳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을 한 명 데려왔네. 보따리 장 수 아주머니의 아들일세. 원앙 옆에서 도와주던 조선족 청년이 지." 기석은 지도를 받아들고 707 대대원들과 조선족 청년을 주위에 둘러 앉혔다. 기석과 대원들은 작대기로 땅위에 지형을 끄적이고 조선족 청년에게 무언가를 묻고 지우고 하는 동작을 오랫동안 반 복했다. 날이 샐때까지 고심하던 무리들속에서, 정리를 끝냈는 지, 기석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지만 표정이 어두웠다. 착찹한 표정으로 담배를 빨고 있는 기석에게로 잉꼬가 다가왔 다.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말해주게나." "차량 정지용 삼각표시판 네 개와 공사장 안전모 네 개, 그리 고 삽 두개가 필요합니다. 가능한한 빨리 구해다 주셨으면 합니 다." "이곳에서 구하기 어렵지 않은 것들일세. 아마 두 시간이내에 구할 수 있을걸세." 잉꼬가 같이 온 조선족 청년에게 삼각표시판과 안전모 그리고 삽 두개를 구해달라고 부탁하자 청년은 지체없이 자리를 떳다. 기석이 잉꼬에게 다시 말했다. "고령진 근처의 학포라는 곳이 있읍니다. 오늘 밤 그곳에서 원 앙을 모시고 두만강을 건너겠읍니다. 배는 준비하실 필요가 없고 강을 건너면서 신호를 보낼테니까, 학포 맞은편 강변에 의복과 차량 편만 준비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해두셨 겠지만, 강을 건너는 즉시 중국을 떠나 서울로 향하는데 애로가 없도록 모든 차량편과 서류들을 재검토 해주십시오. 서울 쪽에다 가 부탁한 전세기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세요. 지금 곧바로 중국 으로 들어가셔서 점검을 시작하세요." "알았네. 그런데 배 없이 두만강을 어떻게 건너려고? 아주머니 와 애들도 있는데?" "그건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이쪽이 소란해지면 배가 오히려 위험합니다." 잉꼬가 걱정이 되는지, 머뭇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중국에 들어가서 점검을 끝내고 다시 돌아와 자네들하고 행동 을 같이 하면 안되겠는가?" "너무 자주 왕래 하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저희들이 최선을 다할테니 너무 염려 마시고 강 건너에서 기다리세요. 물을 건너 면서 후레쉬로 3,2,1 부호를 띄울테니 1,2,3부호로 응답해 주세 요. 아이들이 춥지않도록 따뜻한 옷이나 잘 준비해 두시고." "알겠네. 해떨어지면 해뜰때가지 기다리겠네." "네. 건너가셔서 잠도 좀 주무시고 나오세요." "별 걱정을......" 담배를 비벼 끈 기석은 주원과 대원들 개개인에게 임무를 지정 해주기 시작했다. "누가 소음 권총을 가장 많이 쏘아봤나?" 이 중위가 대답했다. "나 상사가 가장 정확합니다." "운전은 누가 가장 잘하나?" "윤중사입니다." "주원이는 조중위와 나상사 그리고 김, 윤 중사와 함께 풍계로 가도록 해. 사회안전부에서 나온 차량이 아오지로 가자면 풍계 고갯길을 반드시 거친다니까, 그 근처의 적당한 지형에 잠복해 있어. 차량이 오기전에, 잠복지점 근처의 후미진 곳에 서, 너 사 람정도 묻을 수 있을 만한 크기로 구덩이를 파놔. 조 중위는 잠복지점 오백미터 후방에서 사회 안전부 차량이 통 과하자 마자, 15분동안 차량의 출입을 막도록 해. 바위더미들이 무너져 내려서 노면 상태가 위험하다고하고 15분 후면 복구 된다 고 설명해. 차들도 별로 지나다니지 않는 곳이라니까, 삼각 표시 판과 안전모 정도면 15분 동안은 충분히 막을 수 있을꺼야. 김중사는 잠복지점이 보이는 전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잠복지 점에서 차량이 나타났다는 싸인을 보내면 그 즉시 잠복지점이 보 이지 않는 곳까지 전방으로 더 전진해서, 올라오는 차량이 있으 면 15분 동안만 막아. 잠복지점에는 주원이와, 나상사, 그리고 윤중사가 잠복해 있도 록 해. 주원이와 윤중사는 호송차량을 중심으로 나상사와 삼각점의 위 치가 되도록 자리를 잡도록 해. 나상사는 도로변의 음영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사회안전부 차 량이 지나가면 뒷 바퀴를 쏴. 차바퀴를 갈자면 사람들이 모두 내릴테니, 마지막 사람이 내리 면서 차문을 닫을 때 일제히 사격해. 상대로 하여금 총소리를 내 지 못하도록 신속하고 정확하게 끝내야 해. 한 발의 총성도 나지 않도록 확실히 해야 해.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노려. 유탄에 원 앙의 가족들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고. 호송원들을 모두 사살하는 즉시 주원이와 나상사는 시체들을 구덩이에 묻어. 묻기전에 시체들의 신분증하고 공민증을 꺼내는 것을 잊어 먹으면 안돼. 몸에 피가 묻지 않도록 뒤질 때 조심하 고, 운반할 때도 마찬가지야. 바닥의 핏자국도 반드시 흙으로 덮 어야 해. 윤중사는 주원이와 나상사가 시체를 처리하는 동안 뒷바퀴를 갈고 원앙의 가족들을 차에 태워. 가족들이 떨거나 긴장하지 않 도록 안심시키고 아버지의 심부름이란 것을 부드럽게 설명해. 정리가 끝나면 김 중위를 먼저 태우고 다음에 김중사를 태워서 그 길로 곧장 학포의 약속지점으로 와." 기석은 주머니에서 일회용 치약만한 튜브 2개를 건네주며 계속 해서 작전지시를 내렸다. "주원이는 차안에서 사회안전원 신분증에서 사진을 떼내고 네 사진을 붙여. 칼로 신분증의 옆날을 조심스럽게 가르고 사진도 칼로 조심스렵게 떼어내. 잘 안떨어지면 푸른색 튜브의 액을 칼 에 적셔서 떼내면 잘 떨어질 꺼야. 그 다음에 하얀색 튜브의 고 무액으로 갈라진 신분증의 옆날을 붙이고 꾹 누르면 돼. 손때 묻 지 않도록 조심하고. 사진은 갖고왔지?" 주원이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준비하라고 했잖아." "군바리가 무슨 대답을 그따위로 해. 가져왔어? 안 가져왔어?" 주원이 또렷한 어조로 다시 대답했다. "가져왔어." 기석은 자신과 동행할 나머지 대원들에게도 비슷한 임무를 할 당했다. "이 중위 배 상사 김, 허 중사는 나와 같이 상삼봉 고갯길에 가서 원앙을 호송하는 국가보위부 차량을 기다려야 돼. .............................. .............................. .............................. 그리고 작전의 범위 밖에서 별도의 상황이 벌어질 경우, 지휘 자의 판단에 따라 움직인다. 상급자의 지시를 받을 수 없는 상황 에서는 스스로 잘 대처해 나갈 것으로 믿겠다. 우리들 중 누구 하나라도 자신이 맡은 역할을 실수할 경우 모 조리 위험해지고말 것이다. 부디 임무를 무사히 끝내고 남한 땅 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상. 알겠읍니까?" "네엣!" 조선족 청년이 안전모등을 구해오자, 10명의 군대는 학포로 이 동했다. 학포 부근의 두만강 변의 우거진 곳을 찾아, 약속 장소를 정하 고 근처의 지형을 숙지하는데 한 시간여를 더 보냈다. 다시 한번 각자의 임무를 돌아가면서 암송해보고 주원의 팀은 풍계로, 기석 의 팀은 상산봉으로 이동했다. 거칠거칠한 바위들이 비탈진 채로 솟구쳐 있는 고갯길목에 자 리를 잡은 기석일행은 내리막진 습지대에 시체들을 처리할 구덩 이를 만들었다. 그런 연후, 오목하게 둔덕진 곳에 각자의 위치를 만들고 몸을 숨겼다. 기석 역시 종성에서 출발했을 국가보위부 차량을 기다리며 따가운 햇살아래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잠을 못자서 그런지 목이 좀 껄끄러웠다. 어느덧 오후 두시를 넘고 있었다. 오늘따라 마가로프를 쥔 손에서 진땀이 느껴지는 기석이었다. 총을 놓고 손마다를 꺽으며 손목을 훌훌 털어 보았 다. 하지만 오후의 탁탁한 공기는 손안의 진땀을 시원하게 씻어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기석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싶었지만 흔적을 남기기 싫어서 참았다. 여기는 현장이니까. 꺼림찍한 작전이었다. 사람 넷을 구하기 위해 칠, 팔명을 죽여 야 하는 작전은 작전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또 이번 작 전은 칠, 팔명이나 죽여야 하는 작전임에도 불구하고 작전의 일 부를 운에 맡겨야 하는 헛점까지 있는 것이었다. 원앙의 구출계획은 처음부터 배배 꼬여서 여기까지 왔다. 하루 만 더 일찍 왔어도 별부담없이 두만강 너머로 모실 수 있던 원앙 이 갑자기 잡혀버렸다. 또 호송에도 문제가 있었다. 국가보위부 나 사회안전부 둘 중 한군데에서만 데려가 준다면 작전도 훨씬 쉬워지고 완벽성도 높아질 것이며 양방향에서 살인을 저지를 필 요도 없어질 것이다. 기석은 죽이지 않고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를 생각해 보았지만, 도저히 그럴만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 았다. 완전히 막힌 방정식이었다. 기석은 자신에게 몰려오는 후덥지근한 잡념들을 털어내기 위해 도리질을 해보았으나 여전히 기분을 전환시킬 수가 없었다. 기석 은 기어코 담배를 한개비 꺼내물고 말았다. 현장에서 피는 경우 는 처음이었다. 다 피운 꽁초를 주머니에 넣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죽이고 살 기라도 해야지, 죽이고 죽는 것은 더욱 미련하다는 생각에 기석 은 마음을 가다듬고 집중을 했다. 마가로프의 은색이 태양광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약 삼십분 정도 더 흘렀다. 손바닥 두어 배만한 인공기를 차 앞부분에 꼽고있는 검정색 짚 차가 나타났다. 마가로프의 조준경으로 뒷좌석 중간에 앉아있는 원앙을 확인했다. 짚차 앞에 트럭이 한대 지나가고 있었지만 개 의치 않았다. 찧이 기석의 앞을 스치자 기석은 왼쪽 뒷 타이어에 조준을 시 작했다. 오른쪽은 비탈이 진 상태라 차가 굴러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왼쪽을 조준했다. "퓨숭!" "빵!" 꽤 요란한 소음을 남기고 뒷 타이어가 주저앉고 있었다. 차는 이 삼십미터도 못가서 정지했다. 운전석의 사내가 나와 투덜거리 며 무어라고 씨부렁거렸다. 앞서 가던 트럭은 흙먼지만을 남기고 사라지고 있었다. 차안에서 사내들이 더 내리고 있었다. 운전석 옆자리에서 한 명이 내렸고, 뒷 좌석에서 손목에 수갑 이 채워진 원앙이 내렸다. 그리고 마지막 사내가 오른쪽 차문 밖 으로 내리면서 차문을 닫았다. 그게 신호였다. 쨍쨍한 햇빛이 원앙과 국가 보위부에서 나온 세 사내를 비추고 있었다. "퓨숭, 퓨숭, 퓨숭" "퓨슝, 퓨슝, 퓨슝" 원앙을 제외한 도로상의 세 사내들에게는 마지막 햇살인 듯 싶 었다. 기석이 세 발을 끝냈을 때, 이미 허물어지고 있던 사내들의 고 개가 좌 우로 한번씩 더 꺽였다. 배상사와 허중사의 뒤따른 확인 사살이었다. 비교적 정확한 솜씨들이었으나, 권총사격에 그다지 익숙치 않 은 친구들이어서인지 약간의 흠이 있었다. 둘 다 속도가 조금 느 렸다. 게다가 허중사는 확인사살이 완벽하게 끝을 맺기전에 이마 를 노출시켰다. 총잡이로서 대단히 나쁜 버릇이다. 반드시 고쳐 야 할 습관이다. 조상사는 뒷 마무리에서 상대의 가슴을 쏜 것이 나빴다. 이런 상황에서 가슴을 쏘면 많은 양의 피가 대로를 적시 게 된다. 흙으로 덮어도 피비린내가 오래가서 개라도 끌고오면 현장이 쉽게 노출된다. 허중사가 빵꾸난 뒷 타이어를 가는 동안 기석은 쓰러진 사내의 주머니를 뒤져 원앙의 수갑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원앙의 암호 를 대며 안심시켜 주었다. "남쪽에서 원앙을 구하러 왔읍니다." 자신의 암호로 기석일행을 확인한 원앙이 간단한 인사를 했다. "와줘서 고맙네." 이런 상황에선 대화가 짧아야 한다는 것을 원앙도 잘 알고 있 는 터라, 사내들은 대화대신 재빠르게 움직였다. 기석은 사내들의 신분증이 들어있는 지갑을 모두 꺼내고 시체 를 이미 파 놓은 구덩이에 밀어넣고 흙을 덮었다. 배상사는 바닥에 묻은 핏자국들을 처리했다. 허중사가 타이어를 갈아 끼운 즉시 출발했다. 후방의 이 중위 와 김 중사를 찧에 태우고 학포로 방향을 잡았다. 달리는 차안에서도 기석은 한가하지 않았다. 신분증 위조작업 에 들어가고 있었다. 시체들의 품속에서 꺼낸 지갑들을 뒤적였 다. 지갑에는 신분증이 있었다. 기석이 신분증을 뽑아내자, 신분 증이 빠진 자리에 사진이 드러났다. 고추를 뽐내고 있는 갓난 아 이를 무릎에 앉힌 젊은 아낙네의 사진이었다. 방실거리는 아기와 행복하게 웃고 있는 엄마가 재빠르게 움직 이고 있던 기석의 손을 멈추어 놓았다. 이 순간부터 사진속의 모 자는 한 명의 과부와 한 명의 애비없는 자식이어야 했다. 과부와 아기의 사진에 잠시 손길을 멈추었던 기석은 더욱 재빠 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분증의 옆날을 썰고 사진을 떼어내고 자신의 사진을 붙이고 접착액을 칠하고 눌렀다. 잘 숙달된 기민 한 손놀림이었다. `위조신분증이 있어야 또 다른 과부가 생길 가능성이 줄어들테 니...` 기석은 자위를 하고 웃었지만 자조적인 쓴웃음이었다. 기 석은 갓난아기에서 느껴지는 동병상련을 떨치기 어려웠다. 사진 속의 엄마와 아기가 기석을 오랫동안 괴롭힐 것 같았다. 학포까지 가는동안 두 곳의 검문소를 위조신분증으로 간단히 통과했다. 학포에서 삼, 사키로 떨어진 곳의 도로변에서 차의 넘 버를 떼어내고 찧을 버렸다. 두만강변의 약속장소에 도보로 도착 한 기석일행은 여전히 바빴다. 손목 굵기의 어른 키만한 나무 두 그루를 뿌리채 뽑아내었다. 그리고 나무토막 몇개와 줄기들을 이어 사다리 모양의 뗏목을 만 들었다. 만들기도 쉽고 야밤에 도강하기에는 안성맞춤인 뗏목이 었다. 아이 둘과 아주머니를 풀잎으로 위장시켜 사다리에 앉혀놓 고 나머지 대원들은 나뭇잎 속에 달라붙어 헤엄치며 강을 건널 수 있는 사다리 뗏목이었다. 뗏목이 완성될 때까지도 주원 일행은 나타나지 않았다. 원앙이 초초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내와 아이들을 구출하러 간 사람들이 곤란한 지경에 빠진 것은 아닐까?" 기석도 걱정이 되고 있었다. 이미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벌써 도착했어야 했다. 하지만 기석은 원앙을 안심시켰다. "상삼봉보다는 풍계가 조금 더 머니까 시간이 더 걸리겠지요. 또 차를 우리보다 더 먼곳에 버리고 오면 지체될 수 있고, 아무 래도 아이들과 아주머니들 하고 함께니까 좀 더딜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해가 거의 떨어질 무렵이 되자, 기석의 얼굴에도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그럴 즈음이었다. 반대편에서 망을 보고 있던 배상사 의 반색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와. 왜 이렇게 늦었어?" 주원과 김중사가 아이 둘을 데리고 나타났다. 지친 기색이 완 연했지만, 지친기색보다도 침통한 빛이 더욱 역력했다. 기석이 주원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거야? 나머지는?" 주원과 김중사는 대답대신 고개를 떨구었다. 기석이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상황을 이야기해줘야 대처할 것 아냐?" 머뭇거리던 주원이 입을 열었다. "풍계에서 아주머니하고 아이들을 빼돌릴 때까지는 모두 무사 했는데 오다가 검문에 걸려서 총격전이 벌어졌어. 그 와중에 나 상사가 총에 맞았고......" 뒷말을 잊지 못하는 주원에게 기석이 채근했다. "그리고?" 주원대신 김중사가 떠듬거리며 경상도 사투리로 대답했다. "아주머니도......" "아주머니도?" "돌아가셨읍니더." 옆에서 아이들을 안고있던 원앙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안 경 안에서 잔뜩 고이며 떨어지고 있는 눈물이 기석과 대원들을 비참하리만큼 면목없게 만들고 있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기석이 다시 물었다. "조 중위와 윤 중사는?" 주원이 어렵게 어렵게 대답하고 있었다. "추적해 오는 차량들을 따돌리기 위해서 우리를 고령진에서 내 려주고 민사봉쪽으로 달아났어. 민사봉이나 가라지봉에서 사, 나 흘 정도 은신하고 있겠대. 그러다 잠잠해지면 무산철산의 계곡을 따라 이동해서 두만강을 건너겠대." 기석은 북한에 들어온 이래 내내 지저분하게만 풀려가는 상황 에 구역질이 나왔다. 헛구역질을 몇 번하고 기혈을 좀 진정시킨 기석은 주원을 쳐다보며 물었다. "위조 신분증은 조 중위에게 건네 주었지?" 주원의 얼굴이 몹시 비참해지고 있었다. "위조 신분증이 없었으니까 검문에 걸렸지." 기석이 약간 거칠어진 음성으로 물었다. "위조 신분증이 없다니? 신분증도 없이 어떻게 민사봉까지 달 아나?" 김중사와 주원에게서 참담한 음성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게 말입니더. 그만 깜빡했습니더" "그러니까. 풍계에서 차량을 탈취하고 서둘러서 시체를 묻고보 니, 사회안전부애들한테서 신분증을 꺼내는 것을 잊어 버렸어. 차를 몰고 나오다 생각이 나서 돌아가려고 했는데, 차들이 막 올 라오기 시작하잖아. 그런 상황에서 도로변에 묻은 시체를 파내기 는 어려울 것 같았어. 그래서 위조신분증을 만드는 것을 포기하 고, 그냥 오다가 검문에 걸려 버렸어. 신분증 뒤지는 것쯤은 별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깜박했었나 봐. 긴장되고 서두르다 보니 당황스럽기도 해서, 그러다가 잊었 나 봐. 역시 실전은......" 주원의 말이 거의 잦아들고 있을 때였다. 가만히 듣기만 하던 기석이 오른쪽 무릎이 가슴에 닿도록 다리 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땅바닥에 붙어있는 왼쪽 발바닥의 탄력 을 이용해서 접혀있던 오른발을 그대로 내뻗었다. 태권도의 밀어 찍기였다. 가슴에 정통으로 찍혀진 압력에 주원은 사, 오미터 뒤 로 나동그라졌다. 주원의 가슴에 찍힌 오른발을 땅에 내리기도 전에 기석은 오른손으로 김 중사의 뺨을 후려쳤다. 김 중사도 한 바퀴 회전하면서 널부러졌다. 기석이 거칠어진 호흡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전시였으면 너희들은 총살이야." 분을 삭인 기석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원앙에게 고개를 조 아리며 빌었다. "차라리 저희들이 오지 않은 것만도 못하게 되었읍니다. 이번 일을 어떻게 감당해야할 지 난감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분이었는 데,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하게 되어서, 뵐 면목이 없습 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원앙이 안경을 다시쓰며 물기배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닐세. 자네들은 어쨋든 최선을 다한거야. 나때문에 사지에 뛰어들어준 것만 해도 고맙기 그지 없어. 안기부의 친구들에게도 감사하고. 안기부를 위해 일한 것에 후회 없네." 기석은 수치스러울 정도로 원앙에게 미안해졌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더욱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아니야. 자네들은 더 이상 미안해할 필요없어. 아이들이나 강 건너까지 잘 부탁하네. 강을 건너면 잉꼬에게 아이들을 맡겨주게 나. 그리고, 자네가 책임자인 모양인데, 단 둘이 할 이야기가 있 네." 기석이 여전히 고개를 세우지 못한채 말했다. "일단 강을 건너신 후 말씀하시는 것이 어떻겠읍니까?" "난 그대로 이곳에 남겠네." 기석이 고개를 들었다. 어이없는 얼굴이었다. "여기 계시겠다니요? 위험하실텐데요." 원앙의 눈가에 다시 이슬이 고이기 시작했다. "난 이제껏 조국을 위합네, 민족을 위합네, 하면서 바쁘게 살 아왔어. 바쁘다는 핑계로 아내에게 외식 한 번 제대로 시켜준 적 이 없네. 투정하는 아내를 다정하게 달래주기는 고사하고, 국가 의 기밀들을 다룬다는 은근한 자부심으로 별로 아는 것 없는 아 내를 속으로 무시하곤 했지. 그래도 아내는 나를 몹시 따랐네. 거실에 앉아 있으면 옆자리에 따라와서 재잘거렸고, 방안으로 들 어가면 또 따라 들어와서 칭얼거리곤 했지. 머리가 복잡할 때에 그런 아내가 몹시 귀찮게 여겨지기도 했었네. 그런 그녀와 십년 가까이 살다가, 이제 싸늘한 시체로 만들어 놓고 말았네.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이 땅에 그녀의 주검을 팽개치고 내가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기석은 물기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원앙을 정면 으로 바라보기 어려웠다. 고개를 약간 숙이자, 기석은 콧날이 시 큰해짐을 느꼈다. "그래도 아이들을 생각하셔야죠." "아이들은 잉꼬가 맡아줄 것으로 믿네. 아내를 잃은 심정으로 난 아이들을 키울 자신이 없네. 잉꼬는 오랜 친구였으니까 내 마 음을 잘 이해할 것일세. 돌아가서 잉꼬에게 전해주게. 아이들을 국가니 민족보다는 가까운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워 달라고. 꼭 부탁하네." 원앙의 진지한 음성이 기석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기석은 원 앙을 좀더 설득하고 싶었지만 부질없는 짓 같아서 그만 두었다. "반드시 그대로 전해드리겠읍니다. 국가니 민족보다는 가까운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등을 돌리는 기석을 원앙이 다시 불러 세웠다. "그리고, 마지막 정보를 가져가게나. 자료들은 붙잡히기 전에 모두 소각해서 없네만. 이야기라도 듣고가게." 이런 상황에서까지 정보를 이야기 하고 챙겨 들어야 하는 신세 들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민족이란 거창한 단어 앞에 굴 복하고 있는 원앙과 기석은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말씀하시지요." "북한은 다른 것은 몰라도 땅파는 재주 하나는 세계 제일일세. 대부분의 요주의 시설물들을 땅속에 건설해 놓고 있네. 북한의 지하에는 남한의 남대문 거리까지도 그대로 복사되어 있을 정도 야." "알고 있읍니다." "시간이 없으니 간단히 말하겠네. 최근에 북한은 성능이 대단 히 우수한 굴착기를 만들었다는 정보야. 이 굴착기는 사람이 사 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땅을 파고 들어가는 로보트에 가까운 것일세. 원료는 핵원료를 사용하고 15키로미터 정도 스스로 파고 들어간다고 하네. 이 굴착기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것은 4년 전일세. 당 시에는 굴착기 정도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잊 고 말았는데, 이 굴착기가 인민무력부의 기밀로 다루어지면서 주 의깊게 조사해 보았지. 북한은 핵운반수단으로서 미사일과 더불어 이 굴착기를 사용하 려는 의도인 것 같네. 굴착기에 핵을 매달아 휴전선 이남으로 뚫 고 들어가 터뜨린다면 대책이 있겠나? 또 이 굴착기를 이용해 10여키로미터 정도의 땅속에서 기폭실 험을 한다면 알 도리가 없지 않겠나? 아무리 방사능이라고 하더 라도 10여키로미터의 지각속에서는 표시가 나지 않을 것일세. 하지만, 아직은 굴착기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만한 유도장치의 개발이 안된 상태라고 알고있어. 따라서 기폭실험을 끝냈을 것이 라고는 여겨지지 않네. 굴착기에 대한 연구를 주도한 것은 김책 공대의 권민호 교수이 고 굴착기를 핵관련 사업에 연결짓는 인물은 인민 무력부의 사진 태 소장이야. 그리고 북위 24도 동경 143도 부근의 카잔열도가 언급되어 있었어. 더 이상은 아는 것이 없네" 기석은 원앙의 마지막 정보를 무시하기로 했다. 15키로미터를 스스로 뚫고 들어가는 굴착기는 있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 다. 기석은 땅을 파본 사람이었다. 1키로 미터 뚫기도 힘들텐데 15키로미터를 스스로 파나가는 기계란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었 다. 막대하게 소요될 에너지 문제는 접어두더라도 불가능한 점은 땅을 스스로 파나가자면 최소한 방향이 입력이되어야 할텐데, 여 러매질의 암석층은 밀도가 제각각이라서 일정한 방향을 입력해 줄 수 없었다. 또 밖에서 유도신호를 보내주고 싶어도 뒤로 쌓여 지는 십여키로미터의 암석더미들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사용가 능한 전자파란 존재하지 않았다. 15키로미터 두께의 지각이란 것 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스스로 통과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두 께였다. 원앙이 언급한 카잔열도가 일본에서 나카야마가 북한 시추선들 이 오갔다고 했던 이오지마 근처라는 점이 약간 걸리긴 했다. 하 지만 15키로 두께는 너무한 것이었다. 북한이 고의적으로 흘리는 허위정보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북한은 엉뚱한 정보를 흘리고 곧잘 혼자 좋아하는 습관이 있는지라, 어떤 정보라도 좀처럼 간 과하지 않는 기석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무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원앙에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잘 알아들었읍니다. 보고서를 올리겠읍니다." "그럼 어서 떠나게." "살아서 다시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원앙은 대답대신 미소로써 기석의 마지막 인사에 답례했다. 어머니를 졸지에 잃고 아버지와 생이별 하고 있는 아이들을 달 래기가 무척 어려웠다. 다행히 아이들도 분위기를 깨닫고 있는 지, 크게 소리내어 울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입에 재갈을 물려 놓아야 했다. 네살, 여섯 살 짜리 아이들에게 재갈을 물리 기가 몹시 난처했다. 원앙이 그 점을 이해했는지 아이들을 달래 며 원앙 자신이 아이들의 재갈을 물려 주었다. "울지 말라우. 너희들이 무사히 강을 건너야 아바이도 따라갈 수 있는기야. 울지말라니까네. 강 건너에는 어마이도 있을끼야. 너희들이 소리를 크게 내면 아바이는 못 따라가니까니, 울지 말 라우." 아이들을 간신히 달랜 원앙이 기석에게 간곡하게 말했다. "아이들을 잘 부탁하네. 그리고 잉꼬에게 살아있는 한 우정을 간직하겠다고 전해주고, 나와 가족을 위해 애써준 것에 진심으로 고마와 하더라고 더불어 이야기 해주게." 목이 메이고 가슴이 저미는지 말을 끝내고 얼른 고개를 돌려버 리는 원앙이었다. 두만강의 어두운 수면위에 사다리뗏목을 띄웠다. 아이들을 풀 잎에 가린채 사다리에 앉히고, 대원들과 기석 주원이 강물에 들 어가 사다리 좌우에 달라붙어 헤엄을 치기시작했다. 사다리 뗏목 은 고요히 물살을 헤치고 강을 가로지르며 나아갔다. 실크처럼 부드러운 물결이 피로를 씻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물위에 밤새들이 노니는지, 아니면 잉어들이 튀어오르기 시합을 하는지,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가끔씩 들려왔다. 두만강...... 백두산 천지(용왕담)를 수원으로 한반도의 머리 를 감싸고 동으로 굽어 흐르는 긴 강이었다. 세 시간 가량의 유영끝에 반대편 강변 가까이에 다다랐다. 기 석이 후레쉬로 3,2,1 싸인을 띄우자, 강변의 침엽수림에서 1,2,3 싸인으로 응답해왔다. 잉꼬였다. 잉꼬가 강가로 다가와 사다리 목(木)에서 아이들을 건져 올렸 다. 기석은 물에서 빠져나와 수건으로 몸을 닦고, 잉꼬가 건네주 는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기석은 두리번 거리는 잉꼬에게 북한에서 있었던 그대로를 들 려주었다. 기석은 책을 읽는 것처럼 억양없이 설명했고, 잉꼬는 몹시 흐느끼며 들었다. 자정이 막 지나고 있었다. 기석은 오늘내로 강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텐진에서 대기중인 전세기 편으로 남한으로 떠날 것이다. 남한에 도착하면, 출장에서 돌아올때면 늘 그래왔듯이, 긴 잠부터 잘 것이다. 자고나면 버릇대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자신 의 출장뒤의 고백을 두드릴 것이다. 기석은 잉꼬에게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원앙과 잉꼬의 우정에 성의를 보여주고 싶었던 기석이었지만 결과가 너무 나빴 다. 이제껏 허다한 현장출장을 겪었지만 이번 일처럼 쓴맛이 느 껴지는 경우는 없었다. 한명의 동료가 죽었고 두명의 동료 또한 살아 돌아오기는 어려 울 것이다. 그들의 희생보다도 기석을 더욱 우울하고 갑갑한 상 태로 몰아넣는 것이 또 있었다. 애비없는 자식과 과부와 홀아비 들을 잔뜩 만들어 놓고, 기껏 구해온 것은 부모잃은 아이 둘이었 다. 온몸에서 스멀거리는 구질구질함들이 기석의 머리속을 구깃 구깃 구겨놓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을 살려야 하기 때문에 너를 죽인다.` 어설픈 킬 러들이 자신을 합리화하기위해 자주 찾는 말이다. 이런 말을 수 학자에게 들려주고, 이 문장이 명제냐고 묻는다면 무어라고 대답 할까? 수학적으로 명제는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는 문장이어 야 한다. 따라서 수학자는, 이 문장은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없 는 것이라서 명제가 될 수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기석 은 수학을 떠나 인간적인 견지에서 이 문장의 옳고 그름을 따져 보고 싶었다. 강변에서 연변까지 달리는 차안에서, 연변에서 선양까지 이르 는 열차안에서, 선양에서 북경까지의 비행기안에서, 북경에서 텐 진까지 대절한 버스안에서, 텐진에서 대한항공 전세기에 올라탈 때까지, 기석은 두리번 거리며 이 복잡한 문장에 필사적으로 매 달렸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졸지 않기 위해서......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너를......` 전세기에 올라 타서도 기석은 눈동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입으로는 버릇처럼 읊조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너를, 너를......" 기석은 잠들고 있는 원앙의 아이들과 잉꼬를 한번 더 둘러보았 다. 둥그런 창밖으로 전세기 밖을 살폈지만 비행기 쪽으로 접근 해 오는 중국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전세기가 드디어 텐진의 하늘을 나르기 시작했다. 두시간 오십 분 후면 서울일 것이다. 비로서 출장이 끝났다. 이제 그만 생각 해도 되었다. 더 이상 복잡한 문장에 매달릴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부터는 안심하고 자도 되었다. 기석은 무겁게 짓누르는 눈꺼플 사이로 가물가물하게 다가오는 여승무원 한명을 느꼈다. 현주인 것 같아서 아는체를 하고 싶었 지만, 버둥거려 보아도 더이상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단발머리 여승무원이 깊은 잠속으로 빠져드는 사내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있었다. 돌아서는 뒷모습이 여리여리했다. 어깨가 흔들리고 머리가 돌려지고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기석 은 눈을 떴다. 긴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멍한 뒤통수를 조금 흔 들어 보고 눈을 서너 번 껌벅였다. 다섯 개 짜리 초록색 할로겐 등에서 연초록 불빛들이 눈을 시리게 했다. "무슨 잠을 그리 오래 주무세요?" 영옥의 목소리였다. "세상에! 20시간도 넘게 잠을 자는 사람은 첨이예요." 이번엔 윤희의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비단 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옥과 윤희의 모습까지 보였다. 천정의 할로겐 등도 세 검정의 영옥의 방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누워있지?" 팔뚝에는 주사기가 꽂혀 있었고, 옷걸이에 링겔 병도 보였다. "이건 또 뭐야?" 주사위를 잡아빼고 일어나 앉는 기석에게 영옥이 상황을 설명 해 주었다. "어제 오후에, 이건이란 친구분이 업고 오셨어요. 며칠동안 한 잠도 못 주무셨다고 하시면서, 푹 주무시게 놔두랬어요. 너무 오 래 주무셔서 걱정이 되서 포도당 주사를 놔 드린거구요." 기석이 누운채로 거칠게 돋아난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거 몰골이 몹시 흉악해 보이겠다." 영옥이 웃으며 말했다. "산도둑 같아요." 기석도 웃으며 말했다. "영옥이가 고생했겠네." "고생은요. 오빠 없는 동안 윤희가 와있어서 아주 편했어요." 영옥 옆에서 윤희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 주사바늘 내가 꽂은 거예요. 언니한테 배웠어요." 기석이 물었다. "언제 배웠는데?" "어제요." "어제 어디서?" "여기서요." "그럼 내가 실험용이었니?" "킥! 그런 셈이죠. 오빠 팔뚝에 찔러 본 것이 처음이니까요. 하지만 너무 억울해 하지 마세요. 영옥이 언니가 하도 잘 가르쳐 주어서 몇번 실수하지 않고 성공했거든요. 언니가 저보고 소질있 다고 그랬어요." "몇 번이나 실패했는데?" "다섯 번이요." "어이구! 이런......" 괘씸하지만 귀여운 여인들이 기석으로 하여금 북한에서의 우울 한 실패를 잠시 잊게 해주었다. 몸을 일으킨 기석이 윤희를 쳐다보고 말했다. "그런데, 넌 비행 안 나갔니?" "사흘전에 LA 다녀온 후로 계속 널널하게 놀았어요. 그저께는 홈 스탠바이(HS)였구, 어제는 데이 오프였고, 오늘은 오전에 부 산 두번 왕복하고 왔죠." "그렇구나." "부산에 갔다오면 깰 줄 알았는데 여전히 자고 있잖아요. 그래 서 잠자는 병에 걸린 줄 알구 언니랑 잡아 흔든거예요." 기석은 이불을 제치고 침대밖으로 발을 뻗었다. 털이 부숭거리 는 종아리를 내려보다가 갑자기 장난이 하고 싶어졌다. 기석은 눈을 내리 깔고 잠긴 목소리로 따졌다. "바지가 벗겨져 있네. 어! 이거! 내가 입고갔던 팬티가 아니잖 아. 누가 허락도 안 받고 갈아 입혔어?" 두 여인이 당황한 음성으로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영옥이 언니가요." "윤희가요." 기석이 여전히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눈도 내리깔고 있었다. "이거 왜 벗겼어? 누구야? 빨리 솔직하게 말해." 두 여인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영옥이 먼저 말했다. "옷이 너무 더러워져 있었어요." 영옥에 이어 윤희도 변명을 늘어놓았다. "어디에서 뒹굴면서 놀았기에 겉옷 속옷 할 것 없이 옷이 그렇 게 더럽나요? 누런 흙먼지가 세탁기안에 꽉 차던데요." 기석은 아직도 목소리를 풀지 않았다. "윤희 너가 벗겼구나?" 윤희가 손을 어지럽게 휘저으며 황망스럽게 대답했다. "아니예요. 저혼자서 한게 아니구, 언니랑 같이 벗겼어요." 기석은 고개를 숙이고 두 손가락으로 이마를 집으며 끽끽대며 흐느꼈다. "끄윽 끄윽 끅끅! 어짜자고 내 순결을 ......" 기석의 장난을 눈치챈 윤희가 베개로 기석의 뒤통수를 후려쳤 다. "에라잇!" "에고고!" <소설, 안전기획부(5)> (5) 성수대교 붕괴와 육군소위 조진수. 중국 퉁화에서 서남쪽으로 50키로미터 떨어진 압록강 연변의 하가촌(霞家村)은 중국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약 2천명 정 도의 조선족이 살고 있는 마을이기도 했다. 하가촌의 몇몇 조선족이 지난 90년 한약판매바람이 불었던 한 국을 찾아 평생 먹고 살만한 돈을 벌어들여 갔었다. 그 이후로 하가촌에는 한국행열풍으로 많은 가구들이 몸살을 앓았다. 서울사람으로 부터 초청장을 구하기위해 한국인 브로커에게 몇 만원(한국돈 몇 백만원)씩 지불해야했고, 한국행 비자와 나이제 한을 속이기 위해 가짜서류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돈과 여행경비 등을 부담하기 위해 또 빚을 져야했다. 그나마 그렇게 해서라도 한국에 들어가면 식당 종업원을 하더라도 한몫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중에는 재미를 본사람도 있었지만, 김포공항에 도 착하자마자 추방되거나 불법취업으로 강제추방되어 재산상의 커 다란 손실만 입은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하가촌의 직공병원의 수간호사였던 유인애(劉仁愛)씨도 태국 패스포트로 한국을 방문했다가 강제 추방된 적이 있었다. 그바람 에 빚장이에게 몰려 집을 잃었고 남편은 직장까지 잃었다. 그녀 는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다시 한국행을 시도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에 자리잡는데 성공한 하가촌의 한 친인을 통해 가까스로 새 로운 초청장을 구했지만, 한국에 들어가 자리잡는데는 자신이 없 었다. 그러던 와중에 그녀의 처지에 밝은 조선족 한명이 단둥에 서 왔다는 한 사내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는 그녀에게 편지 한통 을 건네주며 이번 한국행은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해 주 었다. 편지겉봉에는 `대한민국 서울 성산여자대학 조경숙`이라고 적 혀 있었다. 성산여자대학 서무과 계장 김유현은 오늘도 열일을 제쳐두고 성산여대 재단기록을 열심히 뒤적이고 있었다. 이틀전에 중국에서 왔다는 조선족 아주머니가 건네준 편지때문 이었다. 처음 낯선 조선족 여인이 편지를 내밀때만해도 귀찮은 일꺼리를 맡아야하는 짜증이 일었지만, 들여다 본 편지 내용이 섬뜩했다. 겉봉에 `대한민국 서울 성산여자대학 조경숙`이라고 씌여진 편 지는 기구한 인생을 살아온 한 노인이 걸고 있는 마지막 `희망의 비둘기`였다. 6.25때 국군 소위로 전쟁에 휩쓸린 조진수라는 노 인이 북한군에게 포로가 된후 40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못하고 있 는 사연이었다. 나룻배에 노구를 의지하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 로 탈출한 이 현역 국군소위 조진수 노인이 서울에 살고 있는 누 나에게 도움을 구하는 편지였다. 관계기관에 즉시 신고를 했으나, 기관에서 나온 사람은 오히려 자신에게 찾아봐 줄 것을 부탁하고 명함한장 안주고 사라졌다. 김유현은 구청과 경찰청을 바쁘게 오가며 혼자서 조경숙을 찾아 야 했다. 성산여자대학 서무과 계장 김유현이 60년대 중반까지 성산여고 교사로 재직했던 인명록을 뒤지고 있을 때였다. 찾고있던 이름이 인명록에서 발견되었다. 성명:조경숙 출생:1922.08.27 주소:서울 서대문구...... 조선족 여인이 주고갔던 편지에 적힌 조경숙의 생년월일과 성 산여고 교사 인명록의 생년월일이 일치했다. 드디어 찾았다. 지 루했지만 꼼꼼해야 했던 작업들이 김유현에게 너울거리는 감격같 은 보람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조진수 노인의 가족들은 성산여자대학 서무과 계장 김유현으로 부터 조노인의 편지를 건네 받을 수 있었다. 기막힌 사연의 조진 수 노인의 편지는 조 노인의 가족들을 바쁘게 움직이게 만들었 다. "아이고 진수야! 이 자식아! 흑흑!" "누님! 엉엉!" 중국으로 탈출한 지 사흘만에 조진수 노인은 가족들과 첫 통화 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조씨가족들로 부터 조노인의 귀환을 도와달라는 요청이 안기부 에 접수되었다. 하지만, 안기부는 도와주지 않았다. 중국의 눈치 를 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은, 그동안 북한과의 군사정전 회담을 재개하는 등, 오진우에게는 사위가 없다는 등, 그간 중국 의 조선족 마을이 남한측 공작거점이 되어왔다는 불만을 간접적 으로 터뜨리고 있었다. 조씨가족들이 중국주재 한국공관에 찾아 가 귀한요청을 하려했으나 그것도 말렸다. `중국과 북한간에 `범 죄인 인도 협정`이 체결되어 있어서 성사가 희박하기 때문이었 다. 조씨의 가족들에게 중국으로 건너가 조씨를 만나서 배를 이 용한 밀항방식을 모색해 보라고 했다. 조씨의 가족들은 몇차례 중국을 왕래하며 공식적, 비공식적 귀 환경로를 수소문했다. 마침내 조씨의 가족들은 선박을 이용한 중 국탈출을 결정했다. 조선족 유여인에게 조노인의 편지를 전달해 준 한 사내를 통해 뱃길에 밝은 중국인 선장 한 명을 고용할 수 있었고 선박도 빌릴 수 있었다. 첫번째 시도는 실패했다. 칠흙같이 어두운 바다에 파도가 심해서 80톤급 조그만 어선으 로 바다위에서 조노인을 해상인도받을 수 없었다. 바람과 파도 때문에 배를 붙일 수 없어서 실패했다. 조노인이 남한으로의 귀향에 실패한 다음날, 기석은 영옥과 윤 희가 정성껏 차려준 저녁을 먹었고 윤희를 집까지 태워다 주어야 했다. 성수대교 쪽으로 방향을 잡던 기석에게 윤희가 말했다. "오늘은 성수대교로 가시면 안되요. 어제 무너졌어요." 기석이 약간 놀라며 물했다. "다리가 무너졌다고?" "네. 사람들이 많이 죽었대요. 무학여고 학생들도 여덟명이나 죽었대요." 영동대교 쪽으로 차를 몰아가며 기석이 다시 물었다. "모두 몇 명이나 죽었니?" "잘 모르겠어요. 몇 십명은 죽은 것 같아요." "왜 무너졌다는데?" "저도 잘 몰라요. 지은 지 15년 밖에 안되었다는데 다리 관리 가 허술했다나봐요." "김영삼 또 욕먹게 생겼구만." "그게 뭐 대통령 잘못인가?" "직접적인 잘못은 아니더라도 어쨋거나 욕은 먹어야지." "허긴,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뒤에 참 사고가 많이나요. 하늘 에서 아시아나 항공기가 추락하고 바다에선 배가 침몰하고 육지 에선 열차가 충돌하고 이번엔 어중간한 다리까지 무너져 내리구. 정말 대통령을 잘못 뽑아서 그런 사고가 계속 터지는 걸까요?" "넌 어떻게 생각하니?" "전 잘 모르겠어요. 오빠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잘잘못을 따지기전에 대통령으로 뽑힌 죄가 있으니까, 대통령 이 욕을 먹어야지." 윤희가 화제를 돌렸다. "오늘밤엔 영옥이 언니 침대에서 자면 안돼요." "왜?" "그냥." "하하. 나 오늘밤엔 잠 안자니까 염려마." "누가 오빠때문에 그러는 줄 알아요. 오빠가 언니 침대에서 자 면 언니가 잘 곳이 없잖아요." "많이 신경 써 준다. 오늘은 집에 안들어 갈꺼니까, 영옥이 걱 정은 안해도 돼." "툭하면 외박이군요. 사람이 아주 불량해 보여요." "미안하다. 불량해서." "또 어디를 쏘다니실려구요? "친구가 숙직인데, 밤이 쓸쓸하대나." "아까 저녁 먹을 때 전화왔던 그 친구인가요?" "응." "그 사람이 어제 오빠를 업고왔던 친구인가요?" "응 이건이라고 하지." "둘이 친하신가 봐요." "약간. 왜?" "그냥. 인상이 께름찍해서..." "좀 음흉해 보이지만, 그다지 못된 녀석은 아니야." "그래도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아요." "물론 좋은 놈은 아니야." "근데 왜 가까이 지내세요?" "나도 좋은 놈이 아니거든." "그 말은 맞아요." 가로수가 3층의 유리창을 가리고 있는 건물 앞에 주차시키며 기석이 말했다. "저 가로수 끝이 닿아 있는 방이 윤희방이지?" "어떻게 아셨어요?" "지난 번에 네가 올라간 다음 저기에서 불이 켜지더라구." 윤희가 내리지 않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냥 내릴까요? 여기까지 태워다 주신 벌로 뽀뽀해 드리고 내 릴까요?" 기석이 약간 웃으며 대답했다. "내 뺨은 열려 있으니까, 하고 싶으면 해. 때리지는 말구." "쪽!" 윤희가 차에서 내리며 덧붙였다. "내일 아침까지 입술자국 지우지 마세요." "알았어." 한강 오피스텔 C동 303호에는 이건이 혼자서 맥주 잔을 들이키 고 있었다. 기석이 룸안에 자리를 잡자, 이건이 한잔 권했다. "한잔 마셔라." 기석이 잔을 비우자 이건이 땅콩 봉지를 밀어주며 말했다. "잠은 잘잤니?" "잘잤다." 이건이 여러 잔을 기울인 듯 술기운이 약간 도는 음성으로 비 아냥거렸다. "허긴, 꽃침대 위에서 뻗었으니, 얼마나 잠이 잘 오겠어." "꽃침대라니?" "시치미 떼기는...... 두 아가씨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반기는 걸 보니까, 울화가 치밀더라. 제길." 기석이 조금 웃었다. "크크... 부럽겠지. 배도 아프겠고." "누군 허구헌날 맨침대에서 자빠져 자고, 어떤 자식은 꽃 같은 아가씨가 둘씩이나 꽃침대로 모시고. 에이고, 내 팔자야! 하여 간, 기석이 너는 복이 많은 놈이야." "부러우면 너도 아가씨 둘 꼬시면 되잖아." "그게 마음대로 되나. 너 같은 기생오라비나 가능한 것이지." "여자 둘 꼬시는 것하고 기생오래비하고는 별 관계 없는 거다. 뭘 모르는 소리지." "그럼, 나도될까?" "물론이지." "어떻게 하는건데?" "처음에는 속이고 나중에 충성해. 그게 비결이야." "처음에 충성하고 나중에 속이는 것이 아니고?" "그래가지고서는 따로따로 데리고 살 수는 있어도 두 명을 동 시에 데리고 살지는 못할걸." 이건이 맥주를 훌쩍 들이키고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쩝. 그런데 정말 옛날처럼 또 두 여자하고 같이 살고 있는 거 니?" "아직은 아니야. 하지만, 안살면 모르되, 같이 산다면 다 데리 고 살아야지." "못된 놈같으니라고!" "못된 놈이라니?" "그럼 못된 놈 아니야? 두 여자 다 데리고 살겠다는 것이 말이 나 돼?" "말이 왜 안되는데?" 이건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여자 쪽에서 기분 나쁠 것 아냐?" "기분이 왜 나쁜데?" "그거야 당연한 거지, 여자쪽에서 나눠 같는 것에 대해 기분 좋을 턱이 있겠어?" "뭘 나눠 같는데? 돈?" "돈도 돈이지만, 그보다 기타 사랑에 부가적으로 따라 붙는 것 들이 여러가지 있을 것 아냐?" "그게 뭔데?" "우선 화장대도 같이 써야 하잖아." "그건 두개 사주면 돼." "그리고 옷이며 악세사리며 여자들이 좋아하는 따위들이 있잖 아. 그런 걸 두배씩 사 줄려면 힘들잖아." "결국 돈이야기 하는거네. 뭐하러 그런 걸 다 두배씩 사주니? 1.5배만 사 줘도 같이 쓰면 다른 여자들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진 않을껄. 그리고 여자가 둘이면 돈이 많이 깨질 것 같지만 꼭 그 렇지도 않아. 여자 한명이 애보는 동안 다른 한명은 편한 마음으 로 야쿠르트 아줌마 노릇이라도 할 수 있거든. 게다가 남자가 나 가서 벌면, 최소한 경제적인 면을 놓고 볼 때, 일대이 상황이 일 대일 상황보다 불리하지는 않아." "돈 이야기말고라도 딴 것도 있잖아." "뭔데?" "남녀의 사랑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잖아. 네가 슈 퍼맨이냐? 두 여자를 어떻게 감당할려구?" "에라 이 밥통같은 자식아! 여자야 무식해서 그런 소리를 한다 치고, 넌 달고 나왔으면서도 그런 소리를 하니?" "그런 소리라니?" "여자들에게는 대단히 무식한 점이 하나 있는데, 그건 남자의 섹스야. 섹스는 스포츠와 비슷한 점이 있어. 꾸준히 규칙적으로 쓰면 팔십, 구십까지도 할 수 있고, 안 쓰면 한달에 한번 채우기 에도 헉헉거려야 한다는 점이지. 남용하면 나이들어 시든다 어쩐 다하는 근거없는 헛소리가 있지만, 14살 때부터 거의 하루도 빼 지않고 두번씩 가지고 논 사람을 아는데, 팔십이 가까운데도 풍 하나 안 걸리고 요즘도 자주 쓴다더라." "그게 정말이야?" "장담한다." "그러면 중년 남성은 쉽게 시든다는 등, 그런 소리는 죄다 헛 소리냐?" "그건 아마 사실일수도 있을 것이고 아닐 수도 있을꺼야. 좀전 에도 이야기 했지만, 남자가 쓰다가 말다가 불규칙적인 성생활을 하면 성욕감퇴에 빠지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아. 그렇게 이 삼십 대를 보냈으면 사십대에는 당연히 녹슬겠지. 하지만, 꾸준히 규 칙적으로 쓰면 팔십이 되어도 성생활이나 건강에 도움이 되면 되 었지, 해는 안된다. 결혼한 남자의 성욕 감퇴는 남자보다도 여자에게 책임이 많아. 착하고 예쁜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상당히 미련한 점이 있다면 바 로 그 점이야. 남편들이 아내에게 대놓고 말을 못해서 그렇지, 총각때에는 하루에 한번 세우는 것은 보통이었을텐데 결혼하고 신혼초만 지나면 뚝 떨어지거든. 여자가 애 한둘 낳고 나면 보름 에 한번 채우지도 못하는 것이 아마 보통일꺼야. 여자가 배가 불 러서 한동안 못하고 애낳고 두달은 못하고, 넉달 쉬고나면 남자 는 성기능을 대폭 상실해. 그런 것이 두 어번 거치고 나면 아무 리 사랑하는 아내일지라도, 아내와의 잠자리에서 남자들은 무의 식적으로 수동적이 되면서 능동적인 섹스를 기피하게 돼. 그러다 보면 부부간의 섹스는 한달에 한두번 정도로 전락해 버릴꺼야. 그것도 형식적으로 일을 치루는 선에서, 대충 넣고 싸고 마무리 하는 것이 대부분이겠지. 여자들은 그런 것을 남자의 체력이 떨어진 것으로 판단하기 쉬 워.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야. 남자의 의욕상실에서 오는 아내 거부증이야. 대부분의 빌빌거려 보이는 중년남성이라도 아내 아 닌 다른 여자가 치마만 슬쩍 올려주면 발딱발딱 서 버리거든. 설 사 그 여자가 아내보다 다소 못 생겼어도 마찬가지일꺼야. 아내들은 자신들의 남편에 대해서 과소평가하고 살고 있는거 야. 남편들도 잔뜩 물려 있는 아내가 자꾸 해달라면 귀찮아서라 도 그런 척을 하고 사는 경우가 많을 것이고." 잠자코 듣던 이건이가 불쑥 내뱉었다. "그래서 공백기를 메우기 위해서라도 아내가 한명 더 필요하다 는 이야기냐?" "아니야.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었어. 사람들은 획일 적이지 않아. 여러종류의 사람들이 있거든. 부부애를 쌓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야. 어떤 부부는 섹스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또 어떤 부부는 중요하게 생각할 꺼야. 내 이야기 는 섹스가 부부애를 쌓아가는 데 중요한 요소라고 여기는 사람들 에게 통하는 이야기지. 섹스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아내들은 남편의 성(性)을 생각해 줄 필요가 있어. 특히 공백기에는 자궁이 안되면 입이나 손으로 라도 남편을 달래줄 필요가 있어. 께름찍하고 지저분하다고 생각 되기 쉽겠지만, 깨끗히 닦아주기만 하면 입술보다 깨끗한 곳이 거기잖아. 섹스는 이성에 의지할 때보다는 본능에 가까울 때 더 욱 화려한 감각으로 피어날 수 있는거야. 반대로, 남자들도 자신의 아내의 예민한 감성들을 제대로 어루 만져줄 줄 알아야 해. 제 욕심만 채우는 버릇은 대단히 미련한 버릇이야. 비단 아내에게도 불성실한 짓일 뿐만아니라, 자신의 아내에게 잠재되어 있는 아름다운 표현들을 영영 맛보지 못하게 되는거야. 그것은 마치 보물찾기와도 같아. 아내의 몸뚱아리 구 석구석에 숨겨져 있는 화려한 보물들을 찾는 것이지. 여인의 몸은 다이아몬드와 흡사한 점이 많아. 유리알과 다이아 먼드를 구별하기 싫어하는 남자는 다이아몬드란 제일의 보석 자 체가 뿌리는 신비한 매력을 제대로 감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야.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내가 잠재하고 있는 매력을 끝내 찾지못한 다면 아내를 과소평가한 채 불쌍하게 세상을 뜨게 되는거야. 다 이아몬드의 매력을 구하는 데는 돈이 많이 들지만, 옆에 있는 아 내에게 감춰져 있는 보석을 찾는 데는 관심만 있으면 되는 것이 지. 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성(性)이 자신들의 삶에서 상당한 역 할을 하는 것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무시하면 되겠지. 이건이 기석의 피해나가려는 말을 두 여인쪽으로 다시 돌렸다. "그래서 요점이 뭐야? 잠자리에서도 일대이가 일대일보다 결국 낫다는 소리야?" 기석이 이건을 한동안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리고 대답대신 반 문했다. "남자끼리니까 까놓고 이야기 해보자. 매일밤, 두명의 여자하 고 두번씩 하는 것이 쉽겠니? 아니면 한여자 하고 한번씩 하는 것이 쉽겠니?" 이건이 잠시동안 입을 열지 않다가 대답했다. "색다른 두 여자가 몸만 열어준다면 하루에 두 번 정도야, 얼 마든지 롱런할 수 있겠지. 물리지도 않겠구. 하지만, 그런 동물 적인 본능만으로 여자 둘을 데리고 살겠다면 여자들이 억울해하 지 않을까?" "억울해 하겠지만, 그건 여자들이 속고 있는거야." "여자들이 속다니?" "일대다 제도는 여자에게 불리할 수 없는 제도야. 정확하게 말 해서 지구상에 일대다 제도는 없어. 다만 일대다를 방임해주는 사회가 있을 뿐이야. 일대다를 인정해주는 사회에서도 대부분이 일대일로 살고 있거든. 우리같은 일대일 사회가 법적으로 `일대 다는 안된다.`라는 규제를 만들어 놓았을 뿐이야. 분명히 말하지 만, 이런 규제는 근본적으로 좋은 법이 아니야. 법은 최소한의 원칙이 지켜질 때 좋은 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데, 이런 규 제는 불필요하고 전혀 득이 되지 못하는 규제야. 우선 여자 입장에서 살펴보면, 여자는 더욱 많은 선택을 할 수 있어. 유부남도 자신의 반려자가 되어줄 수 있는 것이거든. 그렇 다고 총각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현실적으로도 한 남 자에게 한 여자가 부담해야 할 여성으로서의 책임이 현저하게 감 소할 수 있어. 아이라든가, 사회적인 진출이라든가, 가사문제라 든가, 이런 것에서 여인들은 많은 자유를 얻어낼 수 있어. 또 두 여자를 부양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여자를 또 얻지는 않아. 최소 한 두 여자를 얻는 사람은 두 여자를 먹여살릴 만한 사람일꺼야. 여자들이 언뜻 생각할 때, 결혼해서 살고 있는 남편이 자신이 외에 다른 여자를 얻을 것이라는 불안감을 들면서 항변할 지도 몰라. 그것도 일대다로 살아보지 못한 무식함의 소치야. 다른 여 자를 데려와도 되는 남자입장에서는 절대 조강지처에게 섭섭하게 대하지 않아. 오히려 미안한 마음에 더욱 잘해주겠지. 이건 총각 시절 바람둥이던 남자가 아내에게 잘 해주는 것과 같은 맥락이 야. 일대다가 허용되면 미쳤다고 조강지처를 내치겠니? 일대다가 안되니까, 바람 피우다가 눈이맞은 여자를 위해 늙고 시든 조강 지처를 버리는 거야. 하지만, 일대다가 인정되는 사회에서는 그 런 늙고 시든 아내 마저도 남자에게 무척 소중한 아내가 되는거 지. 오랜 친구요, 아이들의 어머니요, 말 그대로 인생의 반려자 요, 젊은 시절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소중한 아내를 안내쳐도 되는데, 내칠 놈이 어디 있겠어? 그리고, 만일 다른 여자를 남편 이 데려와서 불만이라면 오히려 아내가 떠날 수는 있겠지. 일대 다에서는 장가 못가는 남자는 많아도 시집 못가는 여자는 없어. 여자의 재가가 그만큼 쉬워진다는 이야기지. 나이 들고 능력 없 는 여자라도 얼마든지 남자를 선택할 수 있게 될꺼야. 우는 여자 는 일대일에서나 생기는 것이지, 일대다에서는 생기지 않아. 불쌍해지는 것은 남자야. 우선 여자에 비해 선택이 폭이 줄어 들 수 밖에 없는 남자들은 여자들을 얻기위해 보다 헌신적일 수 밖에 없어.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데려갈 수 있는 입장만 보면 이해가 안되겠지만, 뒤집어 이야기 하면 여러남자가 한 여자도 구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이야기거든. 일대다 사회에서 여자를 데려올 때 남자가 신부측에 지참금을 갖다주는 풍습도 아마 이런 이유들 때문에 생겼을꺼야. 여러 여자들을 데려가는 남자들은 대부분 미인들을 선호하게 돼. 그래서 일부 다처제 사회에서 다처에 해당하는 여자들은 미 인들이 많아. 미녀들은 남자로부터 관심을 얻어 내는데 못 생긴 여자들보다 자신있어 하거든. 그래서 아내있는 남자에게도 자신 있게 시집가지. 그리고 그런 미녀들의 선택은 미인이 아닌 여자 들에게도 혜택을 주게 돼. 미인에게 실패한 장가못간 총각들이 다 누구에게 구애를 하겠니? 아, 물론 미녀들이 몽땅 유부남에게 장가간다는 소리는 아니었어. 그럴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지. 일대일이란 악법이 여러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미국 때문인데, 미국 남성들이 여자에게 잘 해주겠다고 일 대일 제도를 만든 것은 아니야. 서부 개척 시대에 여자들의 존재 는 남성에 비해 70프로 정도 밖에 되질 않았어. 상대적으로 여자 의 가치가 남성에 비해 훨씬 높았지. 그러다보니까, 여자들이 이 남자, 저 남자 사이에서 왔다리갔다리 하면서 너무 자유롭고 제 멋대로 놀았거든. 그래서 남자들이 쐐기를 박은 것이 일대일이 야. 제도적으로 서양 여자들은 서양 남자들에게 어느 사회의 여 자들보다 이용당하고 살고 있는거야. 남녀평등 어쩌고 하지만, 남녀평등을 잘 파고 들어가서 한 번 제대로 따져 봐. 여자들 더 부려먹겠다는 것이고, 일대일의 불만족스러운 상황을 밖으로 끌 어낸 여자들로 해소하겠다는 의도가 없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 다." 이건이가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큭큭큭...... 너 다운 소린데, 에라잇! 도둑놈아!" "도둑놈이라니?" "그러면 장가 못 간 남자들은 어떻게 해?" "그래서, 아까 처음에 이야기 했잖아. 여자하고 안살면 모르되 같이 산다면 둘 다 데리고 산다고. 어차피 인생은 하나의 도박과 도 같은 것, 사내로 태어나서 그 정도 도박도 못해? 안 살면 마 는거지. 까짓거." "그래도 남자하나에 여럿 붙어서 살아야 하는 여자들이 주위로 부터 받을 곱지않은 시선에 움추러 들지 않을까?" "그런 것을 욕하는 사람들은 사고의 폭이 좁은 거야. 남녀가 사랑하는 감정에 꼭 일대일이란 틀을 씌워야 한다는 철학이 정말 옳은 철학이겠니? 일대일에 대한 규제가 없어진다면 그런 몰지각 한 시선도 차차 없어질꺼야. 스스럼없이 사랑하며 남에게 해 안 끼치고 사는 것인데, 거기다가 지나치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은 대부분 마음이 좁은 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야. 그런 것은 콱 무시해버리면 돼." "큭큭큭...... 그래도 남녀간의 사랑은 일대일이어야 하는 거 잖아." 기석은 고개를 뒤로 제끼고 이건을 게슴츠레 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건에게 물었다. "남녀의 사랑이 일대일이어야 한다고? 그거 네 생각이냐?" 이건이가 몸을 기울이며 대답했다. "물론 아니지만, 남들이 그러잖아." "남들 누가?" "그냥 보통사람들이." "만일 그 보통사람이 여자라면 그냥 무시하고, 남자라면 골목 에 데리고 들어가서 조용히 다시 한번 물어봐라. 남녀간의 사랑 이 꼭 일대일이어야 하느냐고." "큭큭큭...... 하여간 넌 좋은 놈처럼 보이긴 어렵겠다. 특히 여자들한테는." "좋게 봐 주는 여자들은 별로 없겠지." "그래도 집에 있던 두 여자는 널 몹시 생각해 주는 것 같더라. 아뭏튼 부럽다. 한 지붕아래서 한남자 두여자라. 난 언제 그렇게 해보나." 기석이 다시 나직한 웃음을 띄웠다. "크크...실속이 중요한 것인데, 아직까지는 둘 다 처녀다. 그 러니, 너무 배아파하지 말아라." 이건이 축 늘어진 몸을 바로 세우며 물었다. "어! 그거 정말이야? 책임질 수 있는 말이냐고?" 기석이 잠시 뜸을 들이며 말했다. "그게 그러니까, 최소한 나는 그녀들한테서 순결을 지켰다는 이야기지. 오리지널 처녀인지 아닌지는 나도 들어가 보지 못했으 니 알도리가 없고. 네가 정말 궁금하다면 언제 기회있을 때 한 번 들어갔다올께. 다녀와서 대답해주지. 머~" "안돼. 이 자식아." "안되긴, 내 맘이지." "이런 못된새끼. 그러지 말고, 친구 좋다는 게 뭐냐, 한명은 나한테 넘겨라." "글쎄, 나야 두명 다 넘겨도 상관없겠지만, 개네들이 널 좋아 하겠냐?" "내가 어때서?" "내가 보기엔 사실 이건이 너는 참 괜찮거든. 마음씨도 곱고, 매력도 있고, 그런데, 개네들이......" "개네들이 뭐라든?" "넌 음흉해 보여서 싫대. 난 착해 보여서 좋고." 이건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언성을 높였다. "에잇! 음흉하기로 따지면 너보다 더한 놈이 어디있다고. 계집 애들도 눈이 삐었지." "크크크. 너무 속 썩지 말아라." 한남자 두여자 이야기에서 기석과 이건은 한민족 두국가에 대 한 이야기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건 이었다. "그래. 따지고 보면, 영숙이와 현주 두여인의 틈바구니에서 보 여준 네 짓꺼리가 내가 생각하는 통일론에까지 영향을 끼친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한민족이 반드시 한 체제하에서 무리한 통일을 시도하려는 고집적인 사고방식을 수정하는데 도움을 주었거든. 서로 다른 체제에서 수천만이 반 백년 가까이 갈라져 살아왔는 데, 어느 한쪽의 사는 법이 약간 낫다고 해서, 다른 수천만에게 그들의 사는 법을 포기할 것을 강요하기는 어려울 꺼야. 그래서 생각해 본 것이 한 민족 두 체제하에서의 통일이었지. 두 가지 체제를 모두 고수하는 통일이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거 든. 오히려 우리 여건에서는 그런 쪽으로의 통일이 더욱 바람직 하다고 생각해. 문제는 남북간의 화해와 사랑이 교류되어야 우리민족이 통일을 이용해 먹을 수 있는 것인데, 남북이 서로 시샘하고 다투고 자꾸 그릇을 깨니, 백성들만 그 등쌀에 손해보는 거라구. 영숙이나 현 주처럼 마음이 넓은 여자들이 남북에서 개네들 닮은 애들을 펑펑 나줘야 서로 씹지를 않을텐데." "영숙이하고 현주는 그만 가져다 붙여라. 듣기에 껄끄럽다." "어쨋거나, 북쪽애들의 고집불통적인 사고방식에 대응하다보면 진땀이 자주 흘러." "그래도 잘 구슬러야지." 기석이 말을 조금 끊었다가 맥주 한잔을 들이키고 진지하게 말 했다. "이제 할 말을 하자." 말을 빙빙 돌리던 기석과 이건은 이제부터 꺼내기 싫은 말들을 시작할 시점이라고 느꼈다. 이건도 그렇고 기석도 그렇고 북한에 서의 임무에 대한 논의는 떠올리기 싫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냥 넘길 수는 없는 것이었다. 기석이 원앙이 언급했던 마지막 정보를 이건에게 이야기했다. "원앙이 북쪽에서 굴착기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 스스로 15키 로 미터 정도 파내려가는 굴착기에 핵을 장착해서 핵 운반수단로 삼을 것이란 정보였어." "굴착기에 핵을 장착한다고?" "응." 이건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그런 소리는 금시초문인데, 그게 가능할까?" "아직 유도장치는 개발하지 못 했다고 그랬어. 김책 공대의 권 민호교수와 인민무력부의 사진태 소장이 관여되어 있다고 했어. 굴착기에 핵을 달아서 땅속에서 기폭실험을 한다고 하더라구." 이건이 다시 한번 물었다. "가능하다고 생각하니?" 기석이 대답했다. "내 생각으론 불가능한 시도야. 그냥 흘리는 허위정보일 것 같 아. 개네들 가끔씩 내부의 스파이 색출을 위해 허위정보를 흘리 잖아. 정성진 사건이후 주석궁 내부 정화를 위해서 고의적으로 흘린 정보인 것 같아. 그걸 원앙이 물었을게고. 난 그렇게 생각 해." 이건도 맞장구 쳤다. "내 생각도 비슷해. 기술적으로 약간 더 알아본 후, 말소처리 해야 할 것 같다." 기석이 이건에게 물었다. "같이 돌아오지 못했던 707대원들은 어떻게 되었니?" "모두 그쪽에서 사살되었다. 어제 평양방송에서 중국국적의 위 조 여권을 소지한 세 명의 무장괴한을 민사봉 근처에서 사살했다 고 방송되었다." 기석이 침울하게 잠긴 목소리로 읊조렸다. "국립묘지 영현봉안과에 시신없는 위패 세 개가 더 생기겠구 나." 이건도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되겠지." 떨떠름한 자세로 몸을 기울이고 있던 기석이 다시 물었다. "이쪽에서 건너간 것이란 것은 저쪽에서 알고 있겠지?" "물증은 없겠지만 심증이야 확실하겠지." "원앙을 족치면 다 드러날텐데?" 기석이 원앙에게로 말을 돌리자, 이건이 씁스레한 목소리로 말 했다. "족쳐도 소용없어. 원앙이 알고있는 것은 잉꼬 뿐인데, 잉꼬와 그의 가족들 모두 우리쪽으로 건너왔잖아. 그리고, 원앙은 남한 출신이 아니고 조선족 출신이야. 게다가 북한의 고위간부였고, 원앙이 대외적인 물증이 될 수는 없겠지. 문제는 중국이야." "중국?" "응. 원앙을 데려오려던 무장괴한들이 중국측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고, 오진우의 사위 정성진을 빼돌리는데 잉꼬와 원앙이 결정 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 중국에게 곱게 비칠 수 없었겠지. 더욱이 잉꼬와 원앙 역시 중국의 조선족 출신이라 우리한테 대놓고 항의 할 수도 없거든. 그러니, 괘씸하고 분한 마음이 오죽하겠어. 우 리가 중국을 우리측 스파이들의 거점으로 삼고 있는 것에 대해 중국은 무척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어." "당분간 중국 눈치 좀 봐야겠구만." "그래야 될꺼다. 너무 밉살스럽게 보이면 그 쪽에 진출해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별로 안좋아. 별 것도 아닌 것으로 생트집 을 잡을 수도 있는 것이니까." 기석이 독일의 범민노련에서 양심선언을 한 박종길로 화제를 돌렸다. "박종길이는 어떻게 되었니?" "독일에서 양심선언을 하는 바람에 우리가 궁지에 몰리고 있 어." "왜?" "형제간첩사건을 조작했다는 거야." "조작하지 않았어?" "박종길을 개입시킨 것은 형제간첩을 체포하기 위한 것이 아니 었어. 북한의 원앙을 도와주기 위해서였어." "그게 조작이지, 뭐." "김 현식, 영식 두 형제가 우리측 군사정보를 일본의 대남공작 원에게 돈을 받고 빼돌린 증거를 우린 이미 확보하고 있었어. 그 냥 체포할 수도 있었지만, 일본의 조통연을 연루시키기 위해 박 종길을 약간 개입시켜 그들의 체포를 이용했을 뿐이야. 다시 말 해서 우리가 생사람을 잡지는 않았단 말이지." "아뭏튼 조작아냐? 안기부 욕좀 먹어야겠네." "빌어먹을 자식. 그러면 네 놈 같았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겠니?" "글쎄. 그 상황에 안 처해봐서 모르겠다. 그런데, 심문하면서 두들겨 패지는 않았니?" "사상범들을 다루다보면 윽박 정도 지를때가 없진 않겠지만, 두들겨 패다가 상처라도 생기면 뒷 감당이 어려워. 몸에 상처가 생길 정도의 손찌검은 못해." "고분고분한 사상범들은 별로 없을텐데, 자백은 주로 어떻게 받아내니?" "제일 만만한 방법이 잠 안재우는 것이지. 최소한 다치게 하지 않으니까." "잠 안재우는 것이라? 고문은 고문이네. 그래도 되는거야?" "이런 제길, 그럼 우리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야? 국가기밀을 외국에다 팔아먹는 놈 잡아다가 그냥 놓아 주란 말이냐? 사상범 들이 자신들이 한 짓을 순순히 부는 경우가 몇이나 될 것 같아? 증거가 명백하고 현장에서 체포해도 아니라고 박박 우기는 놈들 을 다루고 있는 거야. 그런애들에게 자백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보통 두가지야. 회유 아니면 잠 안재우는 것이지. 그런데, 회유 하면 회유한다고 욕하고, 잠 안재우면 잠 안재운다고 욕하고." 이건의 볼멘 소리를 잠자코 듣던 기석이 말했다. "심정은 이해가 간다만, 사상범들을 다루는 수사관들의 인격에 는 문제가 없니?" "인격이라니?" "이를테면, 고문을 즐기는 그런 부류의 악질은 없냐는 것이지. 또 그런 악질까지야 아니더라도,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심문을 하는 수사관들도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안 그러니?" 이건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우리도 고문 잘못하면 2년이하의 징역을 살게된다. 또 그런 제도적인 구속이 아니더라도 함부로 사람을 고문하지 않아. 요즘 은 세상이 옛날과 다르다. 간첩질을 했다고 해서 짐승다루듯 하 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고 간첩에게도 사람대접을 해주고 싶은 것 이 우리 입장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어. 그럴 때 우리는 고문을 해야 한다. 회유가 먹히지 않거나 긴급하게 자 백을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 닥치면, 보통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 으로 시작한다. 때로, 독한 상대를 만나면 인격적인 모욕이 추가 된 고문을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이 부분 에 대한 장담을 할 수는 없다. 내가 고문하지는 않으니까, 고문 을 맡은 수사관의 심적상황을 모두 파악할 수는 없어. 그들이 고 문을 즐기는지,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는지, 아니면 국가안보를 위해 하기 싫은 인격적 모욕을 가해야 하는 것인지...... 분명한 것은, 안기부의 누구라도, 고문을 하고 싶다고 고문을 할 수는 없다. 고문을 해야만 하니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문 와중에 고문하던 수사관이 제대로 안 풀린다고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또 수사관도 사람이니까 그럴 때 신경질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수사관이 그 신경질을 고문과는 별도로 분리해 자 제할 것이라고 장담할 자신이 없다. 신경질을 고문에 섞어서 인 격적인 모욕으로 표출하는 수사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수사 관은 신경질을 자제할 줄 하는 수사관보다 확실히 사고치기 쉬운 수사관이고 무능한 수사관이다. 그래서 안기부는 감정에 흔들리 지 않고 유능한 사람을 채용하고 싶어한다. 채용되는 모든 직원 들이 그런 인재들이라면 안기부는 마음놓고 고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직원들 모두가 자신의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국가안보 를 위해 꼭 해야할 만큼만 정정당당하게 고문할 수 있다면, 고문 때문에 욕을 먹어도 뒷맛이 개운 할 것이다. 하지만 누차 강조했 지만, 안기부도 사람이 움직이는 집단이다. 감정의 조절이 완벽 하고 실수가 없는 성인(聖人)들만의 집단은 아니라는 이야기지." "어쨋든 형제간첩 사건은 박종길이 때문에 대충 넘어가기는 어 려울 것 같다. 안 그러니?" "대충 넘어갈 수 없지. 인권이 걸려있는 문제인데. 제대로 다 루지 못하면 김영삼 정권의 오점으로 남을 수도 있고 안기부 입 장에서도 치욕이 될 수 있는 문제니까, 우리도 확실하게 다룰 생 각이다." 이건이 일어나서 책상을 뒤적거리다가 프린트된 서류를 가져다 기석에게 건네 주었다. "오늘 오전에 입수한 것인데. 한번 읽어봐라." 박종길의 양심선언 이후 형제간첩 사건에 대한 민주당 국회 정 보위원 이보형의 정보위 질의요지였다. 정보위원회 월례회의를 앞두고 민주당 소속 정보위원들은 사전 논의를 통해 지난해 소위 안기부 프락치로 활동했다고 주장하는 박종길씨의 양심선언 이후 점차 국민적 의혹이 증폭되고 있는 안 기부의 프락치 공작과 `김현식 김영식 형제 간첩' 사건의 조작설 에 대해 정보위에서 제기하여 국민적 의혹을 씻기로 의견을 집약 하였다. 이와 관련 이보형 의원은 이 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요지 의 질의를 통해 안기부의 명확한 답변을 요구하였다. 이(李)의원 의 질문 내용은 대부분이 이미 박씨의 양심선언과 민주사회를 위 한 변호사 모임과 KNCC의 조사 활동, 그리고 일부 언론의 보도를 통해 공개된 내용임을 밝혀둔다. 정보위원회(情報委員會)는 <김현식,김영식 형제 간첩사건>의 조작여부(造作與否)에 대한 명확한 진상(眞相)을 밝혀 국민에게 알려줘야할 책무(責務)가 있다. 이 사건의 본질(本質)은 안기부(安企部)가 프락치를 활용하여 국민을 상대로 간첩 만들기를 했다는 주장의 사실성(事實性) 여 부에 있다. 따라서, <형제 간첩사건>의 조작의혹(造作疑惑)에 대 한 진실규명(眞實糾明) 여부는 안기부(安企部)의 도덕성(道德性) 과 개혁의지(改革意志)를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안기부가 취한 "무작정 부인"의 자세는 책임있는 국 가정보기관(國家情報機關)의 자세가 아닐 뿐더러, 오히려 현정부 (現政府)의 도덕성(道德性) 자체를 위협하는 중대한 과오(過誤) 이다. 안기부는 이 사건을 전면재수사(全面再調査)하고, 사건 조 작이 사실로 판명될 경우 사건관련자(事件關聯者)를 법률(法律) 에 따라 엄격히 의법처리(依法處理)하라. 지금 김영삼 대통령(金泳三 大統領)이 내세우고 있는 '세계화' 를 위해서는 정부(政府)의 인권수호(人權守護) 역시 세계화(世界 化)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인권(人權)이 존중(尊重)되 지 않는 상황에서 '세계일류국가'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할 뿐이 다. 인권(人權)은 세계화(世界化)의 기본토대인 것이다. 그래서 새해 우리 정부가 에 정식으로 가입한 것은 비 록 때늦은 감은 있으나 바람직한 방향의 정책추진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정작 우리의 인권상황(人權狀況)은 이른 바 <김현식,김영식 형제 간첩사건>이 이미 국제적으로 심각한 ' 인권(人權)침해사건'으로 지목되고, 사건의 성격(性格) 역시 함 정수사의 차원을 넘어서 "범죄(犯罪) 그 자체의 조작"으로까지 비화되고 있는 상태이다. 특히 이 사건은 문민정부(文民政府)하 에서 안기부가 발표한 첫번째 간첩사건이자, 사건 발생 이후부 터 그 조작의혹(造作疑惑)이 증폭되어온 사건이라는 점에서 이 정부(政府)와 안기부(安企部)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그 진위(眞 實)을 분명하게 검증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진실규명(眞實 糾明) 노력은 결국 김영삼 정부(金泳三 政府)의 인권수호 의지 (人權守護 意志)와 안기부(安企部)의 도덕성(道德性) 수준을 가 늠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이 사건의 본질(本質)은 안기부(安企部)가 소위 '프락치'를 이 용하여 국민을 상대로 '간첩만들기'를 했다는 주장의 사실성(事 實性) 여부에 있다. 따라서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이 되는 박종길 의 양심선언의 진위(眞僞)가 우선 밝혀져야 한다. 안기부는 지금 까지 박씨의 양심선언에 대하여 공식입장은 물론, 그가 밝혀온 구체적(具體的)인 사실(事實)들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나 반론을 제시하지 못한채, 그저 포괄적 부인(包括的 否認)의 자세를 고집 해왔을 뿐이다. 설득력과 성실성을 갖추지 못한 이러한 '무작정 부인(否認)'의 태도는 책임있는 국가정보기관(國家情報機關)의 자세가 아님은 물론, 오히려 현정부의 도덕성(道德性) 자체를 위 협하는 중대한 과오(過誤)를 범하는 것이다. <형제간첩사건>이 발생한 시기(時期)는 문민정부(文民政府) 출 범 이후, 국회(國會)에서 안기부법 개정(安企部法 改正) 및 안기 부 예산(安企部 豫算)의 공개(公開)에 대한 여야(與野)간 협상이 진행중이던 시점이었다. 즉, 이 사건의 발생배경(發生背景)은 당 시에 그 입지(立地)를 위협당하고 있던 안기부내 일부 조직이나 수사팀에서, 기구(機構) 및 예산축소(豫算縮小)등의 위기에 직면 하여 자신들의 기득권(旣得權)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리수를 써가 며 급조(急造)한 사건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현 안기부장(安企部長)은 이 사건에 대한 확대되는 의혹(疑惑) 을 해소하고 진실(眞實)을 규명(糾明)하므로써, 안기부 개혁(改 革)을 더욱 견고하게 추진해 나가야 하는 위치에 있다. 이에 안 기부장(安企部長)은 이 사건 자체의 전면 재수사(全面 再調査)를 실시하여, 의혹이 사실로 입증될 경우 사건관련자를 해당 법률 (法律)(국가보안법 제12조)에 의거, 처리할 용의가 있는지 밝혀 주기 바란다. 이와 관련, 현재 독일에 머물고 있는 박종길이 사 건의 진상(眞相)을 밝히기 위하여 귀국(歸國)하겠다는 입장을 밝 히고 있는 만큼, 부장(部長)은 이번 사건의 공정한 사실규명을 위하여 박종길의 귀국을 허용하고 그의 신변안전을 보장할 의사 가 있는지 밝혀주기 바란다. 그리고, 이번 박종길의 양심선언 내용 및 <형제간첩사건>과 관 련된 다음의 주요 의혹(主要 疑惑)들에 대하여 명확한 해명을 정 보위원회(情報委員會)에 제시하기 바란다. 1) 박종길의 프락치 활동에 대한 사실 확인에 대하여. 박종길이 안기부 프락치로 활동했다는 주장과 관련하여 안기부 는 몇몇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 사실 일부를 시인하고 있다. 안기부는 박종길이 프락치로 활동하게 된 경위와 활동 기간, 그 리고 프락치 활동에 대한 댓가로 얼마를 지급했는지에 대해 밝혀 주기 바란다. 또한 박종길과 같이 안기부에 협력하는 국내 민간인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도 밝혀주기 바란다. 2) 박종길이 프락치로 활동한 기간에 안기부에서 지시한 사업 의 내용과 활동에 대하여. 박종길은 양심선언을 통해 프락치로 활동한 기간 동안 안기부 책임자의 지시를 받고 총 5차례(92년 5월 미국행과 최근의 독일 행 제외) 일본을 방문하여 재야 인사의 방일행적 파악, 일본의 친북조직과 국내와의 연계활동 임무를 수행했다고 밝히고 있다. 박종길의 이러한 방일활동 주장은 법무부의 출입국 관련 기록과 거의 일치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외에도 박종길은 또 다른 프락치 포섭 공작을 비롯하여 수차례에 걸쳐 안기부에 운동권 관련 동향을 보고하고, 교육까지 받아 왔다고 밝히고 있 다. 안기부는 박종길이 안기부에 협력하여 활동한 기간에 지시한 활동 내용과 그 결과에 대해 밝혀주기 바란다. 3) 소위 [김현식,김영식 형제 간첩단 사건] 조작 관련에 대하 여. 박종길과 김현식,김영식 형제의 증언에 따르면, 박종길은 안기 부로부터 김현식,김영식 형제를 대상으로 사건 하나를 하루 속히 만들어야 한다는 지시를 받고 소위 [김현식,김영식 형제 간첩단 사건]의 조작 활동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 박종길이 제시한 비디오테이프에 담긴 안기부 직원의 신상에 대하여. 박씨는 자신의 프락치 활동기간 동안 공작 지시를 해왔다는 안 기부 과장 (박종길은 '김영훈'이라고 기억)과 수사관 1명 ('윤동 철'이라고 함)과의 대화는 물론, 그들의 얼굴과 차량번호까지 촬 영한 비디오테이프 2개를 물증(物證)으로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는 안기부가 박씨를 프락치로 이용했다는 사실들이 그대로 담겨 져 있다. 이 비디오테이프에 담긴 안기부 직원 2인에 대한 신상 (身上)과 현재의 직위에 대해 밝혀 주기 바란다. * 비디오테이프에 담긴 [간첩 사건 조작]에 관한 내용에 대하 여. 박씨가 제시한 비디오 테이프에 담겨진 내용에 따르면, 당시 간첩사건 조작 의혹이 제기되고 있던 박종길에게 안기부 직원이 재판이 끝날때까지 송탄 양어장에 피신해 있으라는 지시를 내리 는 내용과, 사건에 박종길이 관여한 내용이 박씨의 친구인 백상 만씨 때문에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또한 프락치 의혹을 막기 위해 경찰로 하여금 박씨를 사실상 수배하도 록 해놓고 안기부가 보호하고 있다는 내용도 담겨져 있다. 안기부는 이러한 사실에 대한 경위와 함께, 테이프에 구체적으 로 등장하고 있는 수정 다방(안기부 직원과의 주요 접촉장소), 송탄 양어장과 안기부와의 관계에 대해 밝혀주기 바란다. 또한 박씨가 안기부 직원들과 합숙하며 활동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드나들었다고 하는 마포 한성 오피스텔 408호와 안기부와의 관계 에 대해 밝혀주기 바란다. * <형제간첩사건>에서의 박종길의 사건 조작 활동에 대하여. 박종길의 <형제간첩사건>에서의 역할문제는 곧 그가 안기부 프 락치로서 안기부의 지시에 의해 이 사건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 사실확인(事實確認)의 주요부분이다. 박씨의 주장 에 따르면, 그는 <형제간첩사건>에 있어 <중간연락책>에 해당한 다. 그런데 김영식씨는 체포 직후부터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줄곧 " 박종길의 부탁으로 일본손님을 만났을 뿐"이라는 등 박씨의 부탁 에 따라 활동했다는 진술을 일관되게 했으며 박씨가 김(金)씨형 제 체포 이후에도 사무실에 출근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모두 무시하고 단지 <하부선>인 김(金)씨형제만을 체포하고 박씨 에 대한 조사는 커녕, 연행조차 하지 않고 사후에 프락치 의혹에 대비하여 형식적인 경찰 수색을 하도록 한 이유는 무엇인가? 또 한 이러한 내용은 김씨 형제 간첩사건 발표에도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안기부가 박종길을 통하여 남매 간첩단 사건을 조작했 기 때문이 아닌가? 만일 박씨가. 김현식,김영식 남매의 간첩 혐 의에 대한 제보자의 위치라면 박씨가 제시한 비디오테이프의 대 화내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안기부(安企部)가 김씨 형제의 상부라고 발표한 간첩(間諜) '일본(日本)손님'을 체포하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 안기부가 이번 간첩사건의 '현행범'으로 김영식씨를 체포하면 서, 정작 김(金)씨에게 책을 건네준 소위 '일본(日本)손님'을 체 포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더구나 그 남자 '일본(日本)손님 '은 "안기부가 2년간 추적 수사한" 김(金)씨의 바로 <상부선>에 해당한다. 그런데, 당시 사건현장의 정황에 대한 김영식씨의 진 술에 의하면, 7-8명이나 되는 안기부 수사관들이 2년간이나 추적 해온 50대 간첩을, 고속터미널에서, 그것도 대낮에, 100m도 채 안되는 거리에 두고서 체포하지 못한(?) 것이 된다. 도대체 이러 한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안기부의 분명한 답변을 바란다. * 김씨 형제 간첩사건을 재조사하고, 사건 조작 의혹이 사실일 경우 책임자를 관계법에 따라 처벌하라. 국가보안법 제12조(무고, 날조)에 따르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타인으로 하여금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죄에 대하여 무고 또는 위증하거나 증거를 날조, 인멸, 은닉한 자는 처벌하도록 하고 있 다. 안기부는 조작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김씨 형제 간첩단 사건에 대해 전면 재조사를 실시하고, 사건 조작 의혹이 사실로 판명될 경우 책임자와 관련자를 관계법에 따라 조치할 계획은 없는지 밝 혀주기 바란다. <참고> 국가보안법 제12조 (무고, 날조): 타인으로 하여금 형 사처분을 받게할 목적으로 이 법의 죄에 대하여 무고 또는 위증 을 하거나 증거를 날조, 인멸, 은닉한 자는 그 각조에 정한 형에 처한다. 범죄수사 또는 정보의 직무에 종사하는 공무원이나 이를 보조하는 자 또는 이를 지휘하는 자가 직권을 남용하여 제1항의 행위를 한 때에도 제1항의 형과 같다. 다만 그 법정형의 최저가 2년 미만일 때에는 이를 2년으로 한다. 4) 박종길의 독일 출국 경위 박종길은 안기부 관계자로부터 베를린 범민노련 사무국 정황 파악 지시를 받고 새여권과 돈을 받아서 출국했다고 밝히고 있 다. 반면 안기부는 몇몇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박씨와의 관계를 정리 했다고 밝히고 이 사실을 부인한 바 있다. 그러나 안기부의 협조 활동을 수행했던 자가 안기부와 연관없 이 자의로 출국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또한 구여권을 분실처리하고 새여권을 발급받는 과정에서 여권 분실시에 새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서는 특별한 사유 없이는 1달 기간의 유예 기간을 거쳐 발급받도록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 고 단 하루만에 발급받았으며, 하루만에 안기부의 신원조사(신원 조사 신청번호 A574208) 과정까지 마쳤다는 점을 종합적으로 살 펴볼 때 안기부가 박종길의 출국 사실과 관계가 없다는 주장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 이 점에 관한 안기부의 답변을 바란 다. 민주당 이보형의원의 정보위 질의 요지를 꼼꼼히 읽고 난 기석 이 이건에게 물었다. "대답하기 곤란한 것도 있긴한데, 그렇다고 입 다물고 있다가 는 직싸게 욕 먹겠다. 안기부에서는 어떻게 대응해 나갈 생각이 냐?" 이건이 찝찝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할 수 있는 것만 해 줘야지. 어쨋건, 김현식 형제가 우리 측 군사자료를 일본의 북한 공작원에게 돈을 받고 넘긴 증거가 있으니 그걸 제시해주면 될 것이고, 박종길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있는 부분만 대답해주면 되겠지." "그걸로 국회 정보 위원들이 만족할까?" "만족 못해도 어쩔 수 없다. 밖으로 새어나가도 되는 정보라면 대답해 줄 것이고, 새어나가서는 안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대답을 거부할 수 밖에 없다." "왜?" "누설되니까." "국회 정보 위원들이 기밀을 누설할까?" "그 사람들은 정치인들이야. 그 사람들 중에는 정치권에서 자 신들의 입지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이라면 무슨 짓이든 다할 수 있 는 사람이 끼어있을 수도 있어. 정치생명에 보약이 된다고 판단 하면 무조건 애국으로 포장해서 국가기밀도 나불거릴 수 있는 인 간이 있을지도 모르거든. 그런 인간이 한명만 있어도 정보는 새 는거야." "국회정보위원들이 설마 국가기밀을 유출시킬리야 있을려구?" "어쨋든 우린 장담할 수 없고, 매사에 조심하는 것이 좋아. 이 번일만 해도 그래. 사람들은 형제간첩과 박종길과의 관계 하나만 을 보고 우리를 들볶고 있지만, 박종길의 양심선언 때문에 우리 가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우린 우리가 입은 손 실을 대외적으로 공개할 수도 없는 입장이야. 첩보전이란 것은 꼬리를 물고 있기 마련이잖아. 우리는 박종길때문에 원앙을, 원 앙때문에 잉꼬까지 잃었어. 국립묘지에는 시신없는 위패 세 개도 생겼지. 그 뿐이니? 원앙을 빼내오려다가 북한측 국가보위부와 사회안전부 요원들을 일곱명이나 죽였어. 남북한이 서로의 얼굴 에 찬물을 끼얹은 꼴이 되고 말았지. 게다가, 원앙, 잉꼬, 그리 고 민사봉에서 사살된 우리측 요원들의 발자취들이 북한뿐만아니 라 중국까지도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어. 다행히 잉꼬를 무사히 데려와서 중국쪽에 증거를 남기지 않은 까닭에 중 국의 직격탄을 피하고 있는 것이지, 증거 하나라도 남겼다면 우 린 대외적으로 꽤나 욕을 먹었을꺼야. 이보형 의원의 질의 내용을 보면 우리가 대답하기 어려운 성질 의 것들이 있어. 국내에서 활동하는 안기부 프락치가 몇 명인지 를 묻고 있고 돈은 얼마나 주는지 따지고 있어. 생각하기에 따라 서는 매우 단순한 질문같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안그래. 또 우리 의 접선장소들이 노출되고 있고 우리가 사용하는 안가들도 드러 나 있어. 우리 요원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고 박종길이 관여했 던 다른 사건들을 캐묻고 있어.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해 우리도 시원하게 이야기 하고 싶다. 사실 국회정보위는 우리가 대단히 욕먹을 짓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간접적으로나마 증 명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기구야. 그렇지만, 그런 국회정보위 일지 라도 우린 아직까지는 믿을 수 없어. 국회정보위원들이 국가기밀 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해먹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안 서거든. 몇 몇 정보를 흘려보면서 신뢰할 수 있는 기구라는 확신이 설 때 우 리는 비로서 국가안보에 관한 기밀들을 그들에게 설명할 수 있게 될꺼다. 하지만 분명히 말해두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러면 국회정보위에서조차 다룰 수 없는 그런 거창한 기밀들 을 안기부내에서는 도대체 누가 다루고 기획하고 있니?" 이건이 떨떠름한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아마 나같은 사람일꺼다." "너같은 애들이?" "안기부내에서 차장급 이상은 비밀스런 업무를 다루지 않아. 그들은 완성된 공작의 보고만 받을 뿐이지, 세세한 것을 알려고 하지 않지. 그들은 자주 물갈이 대상이 되고 신분이 노출되어 있 는 까닭에 위험한 공작에는 기웃거리지도 못해. 안기부내의 불문 율이지. 국가안보의 핵심적인 대외비(對外秘)는 2국의 국장, 과장급이 다룬다. 그리고 국장보다는 과장이 더 깊숙히 개입해 있는 것이 보통이야. 그리고 과장들 중에 핵심적인 대외비를 전문적으로 다 루는 과장이 나니까." "어째 좀 위험스런 시스템 같다. 애들한테 너무 큰 칼자루를 맡기고 있는 것 같아. 믿기는 싫지만 대충 그렇다고 믿을 수 밖 에 없네." "억지로 믿어줄 필요없어. 안 믿어도 그만이니까." 기석이 북한문제를 포괄적으로 물었다. "그런데 북한 애들하고 다정하게 대화하기가 그렇게 어렵니?" 이건이 고개를 약간 떨구며 대답했다. "어려울 때가 많아. 워낙 자존심으로 똘똘뭉친 애들이거든. 고 구려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고, 미국에 빌붙어 있는 남한 을 보통 싫어해야지. 삼국시대시절 신라가 당나라에 빌붙어서 통 일을 했다는 것에 대해 몹시 언짢게 생각하고 있는 애들이거든.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땅을 정복한 고구려가 신라에 무너진 것을 비통해하는 사람들이 많아. 북한사람들 뿐만아니라 남한 사 람들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꺼야. 그것 때 문에 신라는 통일을 하고도 자주 욕을 먹지. 우리민족 차원에서 볼때,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여 통일을 한 것이 눈꼴이 시어 보이 는 것은 당연하거든. 하지만, 당시의 신라의 지도부와 신라라는 국가에 속해있는 국 민들의 위기의식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고구려가 삼국 중 가장 큰나라로서 백제와 신라에게 보스기질을 발휘하며 따뜻하게 대해주지는 않았을 꺼야. 동등한 국가로서 백제와 신라로 여기기 보다는 기회만 있으면 쳐내려가서 부속시켜 버릴 하찮은 대상으 로 보았을 꺼야. 다만, 고구려는 당나라의 견제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거야. 당나라의 입장에서 본다면 고구려란 껄끄러 운 대상을 견제하기 위해서 신라와 백제라는 조그만 두 나라가 안성마춤이었을꺼야. 고구려의 삼국통일은 곧 당나라에 대한 커 다란 위협으로 간주되었을 테고, 그런 이유들로 당나라는 삼국의 통일을 당연히 원하지 않았겠지. 고구려는 자신의 상대는 거대한 땅덩이의 당나라인데, 같은 민 족인 신라와 백제가 뒷꿈치를 물고 있는 것이 보통 괘씸하지 않 았을 꺼야. 내 생각으로는 삼국시대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중 가장 큰 실수를 한 것은 아무래도 고구려같아. 고구려의 자만심 이 대업을 그르쳤던 것이라고 생각해. 정말 당나라를 상대했어야 할 고구려 였다면 백제와 신라에게 많은 양보를 해주었어야 했 어. 신라와 백제의 협조없이는 어차피 상대못하는 당나라였거든. 또 당시에는 당나라를 상대하기 위해 삼국이 손잡자고 손을 뻗어 줄 수 있는 것도 백제, 신라가 아닌 고구려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었어. 약자에게는 손을 내밀수 없는 자존심이 있잖아. 고구려가 자만심을 묻어 버리고 백제와 신라에게 형제로서 대하며 정을 심 어주며 자존심을 챙겨주었다면 최소한 망하지는 않았을꺼야. 고 구려는 당나라를 상대하고 있다는 거창한 구실을 내세워 신라와 백제에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했을테고 자신과 분명한 차별을 두 려했을꺼야. 거칠게 굴면서 잘난체나 하니까 신라, 백제가 등을 돌렸을 것이고, 고구려의 위협에 주눅들어 있던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잖은 당나라와 만만한 일본으로 눈 을 돌린거라고 생각해. 그러다 결국 잘나고 거칠었던 고구려는 망한 것이지. 우리역사 뿐만 아니라 중국을 보더라도 뻗대던 항 우는 빌빌거리던 유방에게 졌고, 조조나 제갈공명도 대업을 이루 지 못했다." 듣고 있던 기석이 말했다. "북한 이야기 하면서 고구려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니?" 이건이 담배 한 개비를 뽑아물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 고구려만큼 잘나지도 못했으면서 고구려 흉내는 다 내려 고 하니까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지." "누가?" "누구긴 북한이지." "남한은 안 그렇고?" "남쪽이야 북쪽보다 전통적으로 못난이들 뿐이니까, 잘난 점이 없거든. 대외적으로 눈치나 살살 보면서 잘난 북한을 챙겨주고 있는 입장이야. 최소한 고구려 흉내를 낼 만한 형편은 아니지." "그러니? 어떻게 챙겨주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별로 생각해 주는 것도 없는 것 같던데? 대북 비방방송 하나 꺼버린 정도아닌 가? 김일성 죽었을 때 조문도 못하게 했잖아? 아참 김일성 조문 못하게 한 것은 어느 돌맹이가 막은거니? 내가 보기에는 남북 화 해에 결정적으로 짱돌을 던진 실책으로 보이던데, 그 이후로 북 한애들이 발악적으로 악악대고 있잖아. 지난 시절 각국의 국제외교관례를 살펴 보아도 장개석하고 모 택동이 사망했을 때 중국과 대만이 정중하게 조의를 교환했어. 그것이 과거의 응어리를 무시하고 이루어진 것은 아닐꺼야. 또, 닉슨하고 포드가 모택동이 사망했을 때 북경을 찾은 것이 5만여 한국전 희생 미군을 잊고서 한 행위는 아니잖아. 그리고 일왕 히 로히또가 죽었을 때 우리 정부의 조문사절 파견이 일제 36년의 압제의 수탈을 망각한 채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을꺼야. 사실 남 북한이 친해질려면 최소한의 조의 표명정도는 했어야 옳은 것 아 니야? 조의를 표하겠다는 미국 대통령에게 `자질없는 사람`이라 고 몰아붙이는 것도 너무 단순한 대가리에서 나왔다고 여기지더 라. 북핵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려는 외교적 포석으로 보아줄 수 도 있는 것이잖아. 민자당이 김일성 조문정도를 문제삼아 엉뚱한 사상논쟁으로까지 쟁점화하면서 정치적으로 나불거리는 듯한 인 상은 영 못마땅하더라고. 혹시 그거 김일성의 위상에 비해 김영 삼이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보일 것 같으니까 청와대 쪽에서 아부 하느라고 막은 것 아니야?" "아닌데." "그러면?" "국제외교관례를 되집어 보면 조문 보내는 것도 일리는 있을꺼 야. 조문불용이 남북대화에 방해가 된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네 가 생각하는 것처럼 돌들만 모인 집단에서 조문을 막은 것은 아 니야. 가끔은 북한 애들한테 약간 밉살스럽게 보여야 할 때가 있 어." "일부러?" "응." "왜?" "북핵문제에 따른 경수로 지원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대외적으 로 북한과 사이가 좋아보여서는 안되거든." "어째서?" "미국과 일본은, 북한의 원자로 건설을 위해 북한이 요구하게 될 사십억불, 그러니까 3조 2천억중 칠, 팔십프로를 우리더러 부 담하라고 하거든. 다시말해서 남한의 대기업을 하나 뽑아다가 북 한에다 세워주는 것과 거의 맞먹는 짓을 하라는 거야." "그런데?" "북한에 돈 좀 가져다 주는 것은 나중에 통일이 되면 서로 좋 은 것이니까, 나쁠 것이 없다고 치자. 그러나 굳이 남한 돈 가져 다가 북한에 뿌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안그래?" "계속해봐라." "그래서 우린 한국형 경수로가 KEDO(한국 미국 일본이 주축이 되는 한반도 에너지 개발 기구)에서 반드시 채택이 되도록 인상 을 쓰고 있어야 했던 것이고, 북한 역시 한국형 경수로만은 절대 로 안된다고 고집부릴 수 있어야 하는거지. 즉 남한과 북한은 서 로 어느쪽도 이 중대한 문제를 양보할 수 없다는 으르렁 거리는 분위기를 대외적으로 띄울 필요가 있었지. 한국형이 들어가자면 우리기술진과 근로자 수만명이 들어가서 북한에 몇년동안 체류하며 일을 해야 하거든. 북한 입장에서는 우리 기술진과 외국 기술진과의 차이점이 대단히 큰 거야. 일단 우리기술진과 근로자들은 북한 주민들과 말이 통하거든. 감정도 쉽게 교류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북한 주민들의 남한사회에 대 한 인식이 급속하게 변화할꺼야. 이건 외국에 문호를 왕창 개방 한 것보다 확실한 개방이 되는 것이지. 외국인들이야 북한사람들 하고 말이 안통하니까, 개방해보았자, 그 속도가 더디게 진행되 지만, 남한 사람들 수만명이 들어가면 북한은 개방에서 개혁으로 그대로 이어지게 되기 십상이야. 북한도 어느정도의 개방을 원하고 있지만, 급속히 밀려드는 변 화를 갑작스럽게 수용하려고 할리는 없어. 그들이 꿈꾸고 있는 것은 40억불 원조를 디딤돌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는 것이야. 그런 다음 남한 이상의 경제력을 갖추게 되면 통일에 대한 주도 권을 쥐고 남한을 흡수통일 하고 싶어해. 웃기게 들릴지 모르지 만 북한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런데 경제성장을 하기전에 남한 사람들이 초장에 왕창 들어 가서 좋은 시계차고 맛있는 것 사먹고 또 술 한잔도 사주고 그러 다보면, 북한 백성들이 남한보다 훨씬 잘 살때까지 기다릴려고 하겠냐? 그래서 북한은 한국형 경수로만은 죽어도 안되는 거야. 우리는 돈이 없어서 한국형이 아니면 절대로 안된다고 버티야 하 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바라는 것은 한국형이겠지만, 미 국이나 일본에서 돈만 왕창 대주겠다고 하면 머~ 그런데, 이런 것을 북한하고 짜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가는 절 대 안되는 것이거든. 남북한은 정말로 서로간의 감정이 상당히 틀어져 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보여주어야 해. 연기력이 떨어지 는 북한애들하고 입을 맞추기는 어렵고해서 김일성 조문을 걸고 넘어간 것이지. 그러니까 김일성조문불용 자꾸 따지지 마." "그게 또 그렇게 깊은 뜻이 있는 줄은 몰랐네. 난 김영삼이 김 일성보다 못생겨서인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구만." "사람 생긴 것 가지고 인물을 판단하는 것은 소인배나 하는 짓 이야. 그리고 어디가서 자꾸 김대통령 못 생겼다고 하지마. 영삼 이 아저씨 그런 소리 무진장 싫어하거든." "알았어." <소설, 안전기획부(6)> 기석과 이건이 두런거리고 있을 때 책상위의 전화밸이 울렸다. 이건이 책상으로 다가가 받았다. "방입니다. 어디십니까?" "여기 군산입니다. 무사히 성공했읍니다." "다친 사람은 없나요?" "네. 아무도 안다쳤읍니다. 다만 조노인이 많이 지쳐있는 상태 입니다." "수고했어요. 병원에 준비시켰으니까, 조진수노인을 즉시 그리 로 보내세요." 조진수 노인의 첫번째 귀환이 실패한 다음날 성수대교가 무너 졌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바로 다음날 새벽, 중국인 선장의 배는 다시 조노인을 태우고 군산 남서방 80마일 지점까지 내려왔다. 그곳에는 수산청소속 어업지도선이 새벽 한시가 넘은 시각에도 불구하고 우연하지만은 않게 빙빙 돌고 있었다. 바람도 불고 파 도도 심해서 배를 가까이 댈 수 없었던 점은 첫번째 시도와 마찬 가지였지만, 수산청 소속 어업 지도선은 충분한 구조장비를 때마 침 갖추고 있었다. 현역 육군 소위 조진수 할아버지는 40여년만에 비로소 고향에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전화를 끊은 이건이 자리에 돌아와 기석에게 40여년만에 남한 에 돌어온 현역 국군 소위 조진수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기석이 이건에게 물었다. "발표는 언제 할꺼니?" "내일." "그렇게 빨리?" "빨리해야 돼." "왜?"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바람에 민심이 어지럽잖아. 국민들 관심 을 다른 곳으로 좀 돌릴 필요가 있어. 또 중국도 성수대교 무너 지는 바람에 우리측 통치권이 궁지에 몰리고 있는 심정을 어느정 도 이해할 꺼야. 중국도 이런 시점이라면 우리측이 조진수 노인 을 데려온 것을 탓하지는 않을 것이거든. 그래서 성수대교 무너 진 시점에서 빨리 발표해 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게다가 조 진수 소위라면 우리가 북쪽으로 인도한 양심수 이인모 노인에 비 해 하등 밀리지 않는 존재일 수 있거든. 사십여년동안 회유당하 지 않고 남한으로 돌아온 전쟁포로 조진수 소위라면 우리가 북쪽 으로 인도한 양심수 이인모 노인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아. 북쪽에서도 양심수 이인모 노인의 귀환으로 한창 떠벌리고 있는 시점이니까, 빨리 발표하는 것이 낫지." "매스콤이 조노인을 성수대교 무너진데 대한 무마용이라고 욕 해대지는 않을까?" "사실이니까, 뭐 욕좀 먹지." "좀 치사하다는 생각은 안드냐?" "치사해. 하지만, 치사해도 할 것은 해야지." "그럼 성수대교가 무너지지 않았으면 조노인도 구해오지 않았 을 수도 있겠네." "아니야. 조노인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북한의 이인모 노인 을 상쇄할 수 있는 존재야. 인권문제를 떠나서도, 성수대교 문제 를 떠나서도, 우리에게 무척 절실한 존재였어. 다만, 요즈음 중 국에게 미안한 짓을 너무 많이해서 중국애들 눈초리가 곱지 않았 거든. 그래서 직접적인 개입도 하지 못했고 우회적으로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뿐이야. 그러던 중에 까마귀날자 배떨어지는 식으 로 성수대교가 무너졌고, 때마침 우리는 조노인을 구했고 그래서 민심이 나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막자는 것이지." "어쨋든, 조기발표는 높은 사람들 눈치 보는 짓 아니니? 다리 무너져서 대통령 욕먹는 것까지 안기부가 막아줄 필요는 없잖아? 아부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건이 약간 계면쩍게 웃었다. "허허, 비행기가 떨어지고, 배가 가라앉고, 열차가 충돌하고, 다리가 무너지고, 이런 것이 정말 대통령 때문에 그렇게 된거니? 이런 것들 때문에 대통령이 욕먹는 것을 안기부가 좀 막아주면 안되니? 그러면 아부가 되는거니? 물론 이런 경우라도 대통령을 감싸주기만을 위해서 안기부가 공작했다면 그것은 명백한 아부겠 지. 하지만, 조노인의 조기발표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대통령 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중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북한에서 시끄 럽게 떠드는 이인모 노인을 재우기 위해서 그러는 거야. 까짓거 중국을 무시해버리고, 북한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이인모 노인 을 무시하고, 성수대교 사태도 무시하고, 조노인이란 한 사람의 인권문제에만 촛점을 맞춰서 일을 하라고 욕할 사람이 없진 않을 꺼야. 그러나, 남한으로 오고 싶어하는 평범한 한 사람의 인권만을 위해서, 안기부원들이 중국과 북한을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국제 적인 비난에 휘말리게 될 모험을 감수하고 공작을 해야 하는거 니?" 입다물고 듣던 기석이 대답대신 또 비아냥거렸다.. "그래도 인권은 중요한거야. 사실 조노인의 귀환에 안기부가 한 일은 별로 없잖아. 기껏애야 군산 앞바다로 마중나간 정도밖 에 더있어?" "그렇게 생각하니?" "그럼 아냐?" "그렇다고 해두자." "그렇다고 해두긴 그런거지. 별로 한 짓도 없으면서 사십 여년 만에 돌아온 귀환용사를 너무 이용해먹는다는 생각에 안기부를 씹어본거다.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마라." 이건이 답배갑을 신경질적으로 구겨쥐며 말했다. "그래. 너 잘났다." 이건이가 토라지는 바람에 기석은 화제를 돌려야 했다. "주원이 자식은 감기 안낫어? 아직도 병원침대에 처박혀 있 나?" 이건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며칠 더 병원에서 쉬겠대." "기껏해야 감기정도 일텐데, 젊은 놈이 병원신세 지는 것을 왜 그리 좋아해?" 이건이 여전히 풀어지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자식 담당 간호원이 이뻐." 기석이 웃으며 맞장구쳤다. "크크.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구만. 그럼 며칠 더 쉬는 것이 당 연하네. 나도 그만 집에가서 아가씨들 틈에서 쉬어야겠다. 이건 이 넌 여기서 혼자 자야겠다. 쓸쓸해도 나라를 위해서 일하고 있 는 거니까, 꾹 참고 잘 자라." 자리를 털고 일어난 기석이 이건의 머리를 톡톡치며 약을 올리 자, 이건이 구겨진 담배값을 기석에게 집어 던지며 내뱉었다. "빨리 꺼져. 이 자식아." 기석은 고개를 살짝 제끼고 날아온 담배값을 피했다. 그리고 중얼거리며 방을 나섰다. "오늘도 목욕할 때 아가씨들이 등을 밀어 줄라나......" 기석의 주절거림들이 이건의 신경을 건드렸는지, 국방색 간이 침대에 누운 이건은 모포를 머리 끝까지 길게 뒤집어 썼다. 그리 고 눈을 감았다. 퀴퀴한 모포속의 이건의 눈썹에는 쓸쓸한 서러 움 비슷한 것이 맺혀있는 듯 했다. (6) 두 여인 허벅지에서 어린 아기의 머리가 솟구쳐 올라오고, 팔뚝에서 여 인의 맨 다리가 튀어나왔다. 젊은 아낙네가 다리를 벌리고 서서 기석의 머리위에 오줌을 누었다. 얼굴에 쏟아지는 오물들에는 피 가 섞여 있어 더럽기 이전에 섬뜩했다. 어린아이가 기석의 손가 락을 집어 자신의 눈을 후볐다. 어린아이의 동공 속으로 파고든 손가락에는 감각대신 허공을 찌르는 허허로움만 느껴졌다. 웃는지 우는지 분간 못할 많은 아이들과 여인네들이 소복을 입 은채 기석의 남성을 주물럭거리며 희롱 했지만, 기석은 죽은 듯 이 늘어져만 있었다. 온갖 인종의 잡것들이 기석을 놀리며 덮쳐 왔다. 기석은 반항을 할 수 없는 자신이 괴이했다. 몸은 부드럽고 매 우 유연했지만, 흰옷이 너울거리며 흩어지는 무리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컴컴한 허공에 누어있기도 하고 뜬채로 서 있기도 했 지만, 하얀 미소들이 온몸을 답답하게 조여오는 바람에 숨을 쉬 기에도 거북했다. 기석은 방아쇠를 당겨야 했지만 당길 수 없었다. 당기려고 할 때마다 젊은 여인네들의 얼굴은 현주와 영숙으로 변해서 웃고 있 었고, 어린아기로 총구를 돌리면 아기의 동공속에 들어갔다온 손 가락에 힘이 모아지지 않았다. 기석의 무력감에 자신을 얻었는지, 젊은 아낙네와 어린아이들 은 벌떼처럼 몰려와 기석의 남성을 매만지고 할타주며 쪼았다. 기석은 곧고 힘차게 뻗을 수 없었다. 흐물흐물한 채 바람빠진 낡 은 고무공마냥 부풀고 있을 뿐이었다. 잡것들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기석의 남성을 연한 살코기 떼어먹듯 뜯어먹기 시작했다. 베개에서 뒷머리를 들어올리자마자, 오른쪽 뒷통수에 찌르르한 통증이 기석을 몹시 기분나쁘게 만들었다. 편두통이었다. 대학시 절 밤을 새울 때나 가끔씩 찾아오던 편두통이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좋지 않은 꿈때문인 것 같았다. 벌써 한달이 넘도록 매일 밤 너 댓개의 비슷한 악몽들이 기석을 괴롭히고 있었다. "쿨럭 쿨럭 쿨럭." 이불도 저만큼 차내버려져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자마자 기침 이 연달아 나왔다. 기석은 협탁위에서 담배를 꺼내 연속으로 두 대를 빨았다. "쿨럭." 창문을 여니 찬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겨울날씨였다. 다시 또 기침이 나왔다. "쿨럭, 쿨럭." 기석은 목욕을 하기로 했다. 목욕탕에 수증기를 꽉 채우고 욕조안으로 들어갔다. 따끈한 안락함이 피부에서 느껴졌지만, 머리속은 여전히 찌뿌 드드했다. 몸에 탕안의 열기가 배여들었을 때, 기석은 물위에 몸을 띄우 고 가운데를 세우기위해 중심부를 틀어쥐었다. 물컹거리는 살덩 이를 손으로 수차례 비비대었지만, 긴장이 유도되지 않았다. 이 마에 땀이 송글송글 배었다. 땀을 문지른 손으로 다시 한 번 시도를 해보았지만, 허사였다. 머릿속에 온갖 시나리오를 쥐어짜내도 시들은 것은 싱싱하게 뻗 어올라와 주지 않았다. "킥킥킥." 기석은 실소를 했다. "쿨럭, 쿨럭." 기침도 나왔다. 한번 더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두 손으로 정성껏 매만졌다. 상상력을 돋구기 위해, 지난시절 가장 화려했던 정사장면을 떠올리기 위해 애를 써 보았 다. 그러나, 가운데는 여전히 맥아리가 없었다. 기석은 북한에서 돌아온 이후로 한달이 넘도록 실패하고 있었 다. 아마 고자가 된 것 같다. 기석은 탕 밖으로 나와 세면대 옆 벽면에 붙어있는 벽장안에서 담배를 꺼내 다시 피워 물었다. 수증기속에 담배연기가 섞여 들 었다. 젖은 담배연기를 들어 마시며 기침을 하고 다시 물속에 들 어가 몸을 데우고, 나른하고 부담스러운 잠속에 빠지고...... "콩콩! 콩콩콩!" 깜박 잠들어 있던 기석을 깨운 것은 영옥이었다. "오빠 탕안에 있나요?" 영옥의 문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뜬 기석이 대답했다. "응. 나 여기있어. 왜?" "어서 아침식사 하시고 준비하셔야죠. 윤희올 시간이 거의 다 되었어요." 물속에 빠져나온 기석은 샤워를 하고 젖은 머리를 털고 나왔 다. 기석은 식탁에 앉아 아침밥을 먹으며 영옥을 몇 번 쳐다보았 다. 화장을 이미 끝낸 영옥에게서 아침의 향기가 느껴졌다. 몸의 곡선들을 부드럽게 보여주는 그녀의 스웨터와 좋은 각선미를 강 조해주는 달라붙은 바지가 기석의 가슴에 방망이질을 했다. 기석은 여인의 육체가 고자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을 지난 한 달 내내 배우고 있었다. 고자의 충동은, 열기가 느껴지지만 배출 할수 없는 답답증이었다. "몇시에 비행기 예약했어?" 오늘은 영옥과 윤희와 함께 속초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11시요." 보름 전쯤 윤희가 영옥에게 연말을 겨울바다에서 보내고 싶다 고 했었다. 솔깃해진 영옥은 그 즉시 윤희와 날을 잡아 속초의 삼풍 콘도에 1박 예약을 해놓고 말았다. 그녀들은 보디가드가 필 요하다는 구실로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사내를 그녀들의 여행에 초대했었다. 기석이 식사를 마치기 전에 초인종이 울렸다. 윤희였다. "오빠 식사하고 계셨네요?" 무슨 짐이 그리 많이 필요한지, 그녀가 들고 온 커다란 가방이 잔뜩 불거져 있었다. "다 먹었다." 식사를 끝내고 영옥의 설겆이를 돕는 기석이 기특해 보였는지, 윤희도 끼어들었다. "오빤 저리 가 앉아 계세요." "어! 이건 내 전문인데." "오빠가 가정적인 것은 잘 아니까, 비키세요." 설겆이를 끝내고 집을 나선 세 남녀는 12시 반경 속초의 삼풍 703호실에 도착했다. 두 개의 방과 주방달린 거실 하나, 그리고 거실의 식탁주위에 놓여진 길쭉한 소파, 바닷가가 직접 내려다 보이는 베란다, 짠 내음 섞인 바닷바람이 있는 곳이었다. 베란다에서 내려다 보이는 모래사장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었 다. 비성수기라 안전요원들이 없는 바닷가에 사람이 몰리는 것을 통제하기 위해 쳐져있는 듯했다. 하지만, 아이들과 젊은이 몇 명 이 철조망을 타고 넘어 들어가 백사장과 바닷물 사이에서 놀고 있었다. 사람들이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않아, 호루루기 소리와 함께 갈색 정복 차림의 관리인인 듯한 사람이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내쫓고 있었다. 철조망이 있었고, 철조망을 넘는 사람도 있었고, 철조망 밖으 로 내쫓는 제복의 관리인도 있었지만, 어쩐지 평화로워 보이는 바닷가 모래사장이었다. 대충 짐정리를 끝낸 윤희와 영옥이 베란다에 나와있는 기석에 게로 다가왔다. "여기서 뭐해요?" "그냥 구경해." "바닷가 구경?" "바다도 구경하고 사람도 구경해." "사람은 서울에도 많잖아요. 바다에 왔으니 바다를 구경해야 죠. 안 그래요?" "똑같은 사람이라도 서울에 있을 때하고 이런 곳에 와 있을 때 하고는 약간 틀리잖아." "어떻게 틀린가요?" "서울에 있을 때 사람들은 인간에 가깝고, 바다에 초대된 손님 들은 자연에 가깝거든. 그래서 여기에 와 있는 사람들은 보아줄 만한 것 같아." "듣고보니 그러네요. 오빠도 지금은 자연에 가까워 보이는 것 같아요." 스치는 바람이 영옥과 윤희의 머리결을 뺨으로 인도해주고 있 었다. 기석이 기침을 했다. "쿨럭, 쿨럭." 영옥이 윤희에게 말했다. "오빠 감기 걸렸어. 벌써 일주일째야." "오빠같은 사람도 감기에 걸리나요?" "쿨럭, 나같은 사람은 감기에 걸리면 안되나?" "히히. 오빠처럼 염치없는 사람은 감기균도 피해가는 줄 알았 거든요." 기석을 별로 동정해주지 않는 윤희에게 영옥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기석으로서는 뜨끔한 이야기였다. "윤희야, 감기약하고 주사기 가져왔어. 이따가 감기주사 놓는 법 가르쳐줄 테니까, 오빠한테 한방 놓아주려무나." "응. 언니 그럴께." 기석은 다시 나오려는 기침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크흠, 쿨럭." 참기엔 너무 간지러운 기침이었다. 콘도 지하의 탁구장에서 기석은 영옥과 윤희와 함께 탁구를 쳤 다. 배트에 공만 닿으면 휘두르는 그녀들의 공을 한 시간여동안 피하고 받아치고 하다보니 세 남녀 모두 땀에 젖었다. 후덥지근한 세 남녀의 모습이 콘도미니엄 프런트 아가씨 의해 사진으로 찍혀졌다. 윤희가 프런트 아가씨에게 맡겼던 사진기를 되받았다. 바닷가로 나가 바닷바람에 땀을 식히며 또 사진을 찍었다.두 여인이 기석과 번갈아 팔짱을 끼고 찍는 탓에 기석은 셔터를 몇 번 눌러보지 못했다. 필름을 갈아끼우는 윤희에게 기석이 툴툴거 렸다. "또 찍어?" "친구들이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고 하던걸요." 세 통의 필름을 다 찍고서야 바닷가의 산책이 끝났다. 배가 출출해졌다. 기석은 콘도 슈퍼에서 쌀과 몇가지 양념과 재료들을 소량씩 샀다. 소금, 설탕, 참기름, 마늘,양파, 계란, 김치, 후춧가루, 밀가 루, 나무꼬챙이 몇개, 표고버섯, 석이버섯, 당근, 오이, 녹말가 루, 고추장, 초고추장, 식초, 파 그리고 김치찌개용 참치 통조림 하나와 소고기 한근이었다. 양념거리를 방에 두고 기석은 아가씨들을 어시장으로 데리고 가서 장을 보았다. 아가씨들에게 먹고 싶은 어패류를 고르게 했 다. 여인들은 도미, 대합, 생굴, 마른해삼, 생해삼, 민어, 생오징 어. 등을 골랐다. 콘도로 돌아온 기석은 마른해삼을 제일 먼저 만졌다. 마른해삼을 물에 불려놓았다. 내일 아침이나 요리가 가능한 마 른해삼이었다. 영옥은 쌀을 씻어 앉혔고, 전기코드의 스위치는 윤희가 눌렀 다. 기석은 민어를 칠,팔미리의 두께로 도독하게 썰어서 소금 후춧 가루를 뿌렸다. 물을 남비에 담아 소금 두 스푼을 넣어 묽은 소 금물로 만들어 끓였다. 표고버섯과 석이버섯, 당근과 오이를 5미 리의 정도의 나비로 썰어내어 가늘게 녹말가루를 묻혀 끓고 있는 묽은 소금물에 데치고 가늘게 썬 민어도 데쳤다. 접시에 데친 것 들을 쓸어담아 초고추장과 함께 식탁에 놓아 주었다. 생해삼의 배를 갈라 내장을 빼고 식초와 간장을 조금 발라 썰어서 얇게 썬 오이와 함께 또 한 접시 놓아주었다. 영옥과 윤희의 시장기를 달 래줄 민어어채와 해삼초회였다. 그녀들이 젓가락질을 하고 있는 동안 기석의 칼질은 더욱 빨라 졌다. 생오징어의 내장과 다리를 떼어내고 접은 종이 자르듯 비스듬 히 칼질해서 편편하게 펼쳐놓은 다음 바둑판 모양의 무늬를 넣어 양념에 재었다. 20-30분후 석쇠에 구우면 날오징어 구이가 된다. 도미의 비늘을 벗기고 밑으로 가는 쪽 배에 칼을 넣어서 내장 을 긁어낸다음 물로 씻었다. 한 스푼정도의 소금을 고루 뿌려 두 었다. 20분 후에 굽기만 하면 도미구이가 된다. 대합을 까서 꼬챙이 하나에 너 덧개씩 편편하게 꽂아 넣었다. 양파를 직쪄서 간장, 설탕, 후춧가루를 섞어 양념 장을 만들었 다. 꼬챙이의 대합을 양념에 재어 놓았다. 15분 후에 구으면 대 합 꼬치 구이가 된다. 알이 또렷또렷하고 단단해 보이는 생굴을 바가지에 담아 물을 넉넉히 부어서 살짝 흔들어 일어건졌다. 바가지 아래에 티와 껍 찔들이 가라앉았다. 물이 빠진 굴에 소금 후추로 간을 하고 스푼 으로 하나씩 떠서 밀가루를 묻혔다. 달걀에 버무려서 후라이 팬 에 부쳤다. 민어어채와 해삼초회 접시에 붙어있던 영옥과 윤희는 어채와 초회를 한 젓가락씩 기석의 입에 물려준 것을 마지막으로, 접시 를 모두 비웠다. 젓가락만 빨고 있는 모습들이 귀여웠다. 빈 접시에 부쳐진 생굴전을 담아주자 그녀들은 또 다시 젓가락 질을 시작할 수 있었다. 김치봉지를 뜯어 남비에 쏟아서 참치 통조림을 따서 함께 비벼 넣고 두 어컵 분량의 물을 부어 끓였다. 찌개가 끓는동안 마지막 으로 석쇠에 오징어와 도미와 대합꼬치들을 구웠다. 기석은 대합 찜도 해줄까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오징어와 도미 와 대합을 굽고 김치찌개에 익은 밥을 퍼줄 때까지 앉아서 먹기 만 하는 두 아가씨에게 너무 친절하게 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선에서 끝내기로 했다. "어휴! 맛있다. 영옥이 언니, 오빠한테 요리사 자격증 있나 요?" 대합꼬챙이를 입에 넣고 있던 영옥이 대답했다. "그런 거 없을꺼야." 윤희가 이번에는 기석에게 직접 물었다. "어디서 이런 솜씨를 익혔나요?" "어떤 여자한테 배웠어." "누군데요?" "아줌마야. 아주 예쁘게 생긴 아줌마지." "음. 언제 배웠나요?" "대입 시험 준비할 때, 가사시간에 배웠어." "네에! 어머나, 가사 시간이 있었어요?" "응." "에이, 거짓말." "진짜야. 대학교때 짤려서 종로학원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내가 37반이었거든. 그런데 그 반은 수업이 끝나면 가사 선택한 여학생이 수업을 듣는 반이었어. 난 수업이 끝나도 자는 척하고 책상에 업어져 있었는데, 그 때 내 머리가 길어서 가르치는 여선 생이 한동안 내가 남자인 줄 몰랐는지, 그대로 놔 두더라고. 84 년에 종로학원 다닌 여학생이라면 어쩌면 날 기억할 지도 몰라. 군복만 입고 다녔으니까." "정말이예요?" "난 거짓말 별로 안해." "그래도, 거짓말 같아요." "마음대로 생각해." "어디서 배웠든 굶어죽지는 않겠어요. 이렇게 요리를 잘 하시 니까." 영옥도 그냥 먹기 미안한지 아부성 발언을 했다. "오빠가 요리를 잘한다는 전설이 믿어지지 않았었는데, 사실이 었군요." 기석은 연속적으로 칭찬을 몰아치는 그녀들의 꿍꿍이가 별로 반가운 것은 아닐 것이라고 파악했다. 기석은 그녀들의 꿍꿍이에 쐐기를 박아주어야 했다. "내일 아침에는 김치찌개 남은 것하고 불려놓은 마른해삼만 버 무려줄께. 그리고 설겆이는 너희들이 해야 해. 알았어?" "네" "알았어요." 그녀들의 찬사는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식사를 끝낸 후, 세 남녀는 고스톱판을 벌렸다. 두 어시간 동 안 지폐들과 동전들이 번갈아 오갔다. 여인들은 자정이 넘도록 허리가 뻑쩍지근하게 쳐대었지만, 그녀들은 기석의 돈을 딸 수가 없었다. 그녀들이 더 이상 치기를 포기했을 때, 기석은 음식을 장만하는 데 들어간 비용만큼만 따고 있었다. 여인들과의 고스톱은 잃으면 손해고 왕창 따면 본전이고(돌려 주어야 하니까.) 약간 따는 것이 가장 많이 따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살펴볼 때, 기석은 가장 많이 따고 판을 끝냈다. 기석이 여인들에게 침대방을 양보해 주려 했으나, 화장대와 거 울이 온돌방에 있어서 온돌방에 이부자리만 깔아 주었다. "미닫이 문이라 방문을 못 잠그는데, 정말 온돌방에서 잘꺼 야?" "방문 못 잠그면 어때요? 보디가드도 있는데." 기석이 음흉한 웃음을 띄우고 말했다. "크크크... 문제는 너희들이 보디가드라고 여기는 사람하고 위 험한 도둑놈하고 별차이 없다는 것인데, 아뭏튼 나때문에 무슨 일 일어나도 난 책임 못 진다." 윤희가 영옥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여기 고모님이 계시다는 것을 잊으면 안돼요." "얼씨구." 불이 꺼진 침대방은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방이었다. 눈을 감 고 드러 누우니 다시 기침이 나왔다. "쿨럭." 하얀 침대보위에 누워 이불을 목 까지 덮고 잠을 청했다. 하얀 수레에 백장미들이 가득 덮여져 다가오고 있었다. 또 지 겨운 싸움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꿈이란 의식이 있었지만, 마음 의 평정을 지키는데는 별 도움이 되어주지 않았다. 조금씩 두근 거리는 가슴에는 마가로프가 꽂혀 있었다. 꿈이란 의식보다는 은 색 마가로프의 촉감이 흔들리려는 총잡이의 품위를 지켜주고 있 는 것 같았다. 주위를 돌아보니 허공이었고 어둠이었다. 어둠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하얀 손들을 겨누면 어느새 영숙의 얼굴이 되고 현주의 얼굴이 되었다. 수많은 꽃송이들이 진득한 향기로 머리를 어지럽혔다. 한송이의 백장미가 긴 줄기를 달고 뻗어왔다. 조준이 끝났다고 느낀 순간 백장미는 사진속의 갓난아이가 되어있었다. 손가락에서 힘이 빠져 나가자, 무수한 줄기들이 온몸의 사지를 감아왔다. 백장미의 꽃술들이 날름거리 는 붉은 혓바닥이 되어서 기석의 온몸을 유린했다. 기석은 강간당하는 여인의 심정이 되었다. 온몸으로 파고드는 장미줄기의 가시들이 기석을 아리고 따갑게 했지만, 그보다 괴로 운 것은 귀에 붙어있는 장미 꽃술이었다. 날름거리는 혓바닥에서 는 끊임없는 곡소리같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갓난아이와 여인의 목소리가 합쳐진 날카롭게 가슴을 진탕시키는 웃음소리였다. 장 미줄기에 사지가 감긴 채 허공에 떠있는 기석에게 하얀수레로 부 터 가시들이 날라와 박히기 시작했다. 이마에 박히고 가슴에 박 히고 목젖에도 박혀 왔다. 사납게 할퀴고 지나가는 줄기들이 온 몸에 지렁이같은 핏자국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양쪽 귀에 쿼어 있던 장미 꽃술에서 긴 호곡성이 들렸다고 느 낀 순간 수레에서 수십줄기의 장미들이 꽈배기처럼 연달아 꼬아 지면서 기석의 복부로 날카로운 창처럼 쏘아져 오고 있었다. 기 석은 눈을 질끈 감고 사지에 힘을 모아 몸을 웅크렸다. 기다리고 있던 찢어지는 통증이 느껴지질 않았다. 가만히 눈을 떠보니 캄캄한 어둠이었고 기석은 침대에 앉아 있는 자신을 느꼈 다. 기석은 일어나 불을 켰다. 팔목의 시계를 내려다보니 세시였다. 기석의 턱밑에 고여있던 땀방울 하나가 현주가 준 예물시계 위에 떨어졌다. 시계위의 물 기를 닦고 턱밑의 땀을 닦았다. 이마를 만져보니 이마에도 진땀 이 배어 있었다. "쿨럭, 쿨럭, 쿨럭" 기침을 연달아 하고나니 현기증이 약간 일었다. 또 다시 잠을 청하기는 싫었다. 기석은 바다로 나가기로 했다. 콘도 앞에 오십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길게 이어진 철조망 반대편으로 깜빡거리는 등대의 불빛이 보였다. 기석은 철조망을 타넘고 푹신한 모래의 감촉을 발바닥으로 느꼈다. 주춤주춤 바닷 가로 걸어나갔다. 파도와 평행선이 되어 해변을 따라 내려갔다. 십여분이상 걷다가 되돌아 보니 콘도의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 더 멀리 걸어갔다. 은은한 뱃소리가 들려오고 빠른 불빛들이 해변과 모래사장을 스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아마도 군 작전지역 쯤 되는 곳까지 왔나보다. 기석은 개의치 않고 모래밭 에 쪼그리고 앉아 조개껍데기를 줍기 시작했다. 별빛이 있었지만 조개의 무늬를 살피기는 어려웠다. 그냥 하얗게 빛나는 것이면 손을 뻗어 집어들고 문질렀다. 조개라고 확인되면 트레이닝 바지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자잘한 조개들은 무척 많았다. 가끔씩 커 다란 것도 있었다. 소라 껍데기도 있었다. 모래사장의 조개껍데 기의 무늬를 보고 싶었지만 날은 밝아오지 않았다. "쿨럭,쿨럭" 자주 기침이 나왔다. 기침이 멈출때까지 모래속의 조개를 더듬고, 다시 기침이 시작 될 때까지 모래를 뒤졌다. 이마에 다시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대부분 껍질뿐인 모래사장 의 조개로 두 주머니를 가득채웠다. 기석은 욕심이 생겼다. 살아 있는 조개를 따고 싶었다. 기석은 옷을 벗고 바다속으로 걸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물위에 떠 있는 자신을 느꼈다. 파도가 밀려나가는 물길에 몸을 실어 멀리서 번쩍이고 있는 등대의 불빛을 향해 나아갔다. 어두 운 물속은 투명하지 않았다. 겨울의 바닷물은 오히려 따뜻했다. 물속에서는 기침도 나오지 않았다. 깊이 잠수해서 바닥의 바위틈을 만지작 거리는 동작을 반복했다. 대여섯 번의 자맥질을 하는동안 기석은 아무것도 건지 지 못했다. 조금 더 바다가운데로 나간 기석은 다시 한번 깊은 잠수를 했다. 이번에도 못 찾으면 물밖으로 나오지 않겠다는 각 오를 했다. 깊이 들어갈수록 바닷물의 감촉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숨이 차 오르고 있었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기석은 바닥의 바위 들을 붙잡고 바닷속을 헤메기 시작했다. 이어져 있는 바위들을 양쪽 손가락 끝으로 번갈아 붙잡아 가며 바위 밑을 더듬었다. 숨 이 막히기 시작했다. 가슴이 터지는 듯한 압력이 느껴졌다. 기석 은 입을 조그맣게 오무리고 열었다. 입안으로 가득 밀려온 바닷 물을 한모금 들이 마시자, 터질듯한 가슴이 조금 진정되었다. 다 시 옆 바위로 이동해 바위 밑을 더듬었다. 무언가 손에 와 부딪 히는 것이 느껴졌다. 집고보니 커다란 고동이었다. 아직은 죽지말라는 절대자의 계시처럼 느껴지는 고동이었다. 물밖으로 몸을 솟구치자 컴컴한 바다위에 희미한 여명이 느껴지 는 것 같았다. 천천히 모래사장으로 헤엄쳐 나와 젖은 몸위에 그 대로 옷을 걸쳐 입었다. 희미한 여명이었지만, 고동의 초록색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고동안쪽으로 살아숨쉬는 건데기가 안쪽으로 밀려들어가자, 하얀 대리석같은 매끄러운 안쪽면에 주 홍색 엷은 무늬가 보였다. 무척 예쁜 고동이었다. 겨울의 새벽 바람이 기석의 젖은 몸을 몹시 시렵게 하고 있었 지만, 양쪽 주머니에 가득차서 출렁이는 조개껍데기와 묵직한 고 동이 기석을 뿌듯하게 해주고 있었다. 젖은 발이 얼지않도록 기석은 가급적 발고락을 꼬물거리며 콘 도의 불빛을 찾아 걸었다. 콘도의 불빛이 나타나고 얼만큼 더 걷 노라니 철조망도 나왔다. 철조망을 타넘고 7층의 방안으로 들어 서자 방안의 후끈한 기운이 기석을 맞아주었다. 목욕탕으로 들어가 간단히 샤워를 끝낸 기석은 바가지에 트레 이닝 주머니의 조개 껍데기를 담았다. 색색의 바닷조개 껍데기들 이 매우 아름다와 보였다. 정성껏 모래를 물로 닦아내고 하얀 타 올 위에 늘어놓으니 더욱 예뻤다. 기석은 수건에 조개를 싸들고 두 여인이 잠들고 있는 온돌방으 로 들어갔다. 곤히 자고있는 여인들을 깨우기 싫어 고양이 걸음 을 하고 가만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쩌면 영옥은 기석의 기척 을 눈치채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기석은 무시하기로 했다. 화장대 앞에 주저앉은 기석은 수건의 조개를 화장대위에 하나 씩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무늬를 생각해 보았지만, 하트 보다 아름다운 무의는 떠오르지 않았다. 흔하디 흔한 하트였지 만, 색색의 조개 껍질로 채워 놓으니 만족스러우리만큼 예뻤다. 영옥이 깨어있을 법해서 영옥의 머리맡에 고동을 두고 그녀들의 방을 나왔다. 베란다에 나와 기침을 몇번 하면서 담배 몇대를 피웠다. 베란다에서 싱크대 앞으로 돌아온 기석은 물에 불린 마른 해삼 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물을 데워 뜨거운 물에 조금 더 불린 후 에 해삼의 배에 칼을 집어넣고 내장을 꺼냈다. 깨끗이 씻어서 냉 수로 헹구었다. 다시 물에 담가 불에 올리고 삶았다. 해삼이 삶 아지는 동안 기석은 쇠고기를 다졌다. 잘게잘게 칼질을 하고 소 금으로 간을 하고 파, 마늘, 후춧가루, 설탕, 참기름을 섞어 비 볐다. 한 시간 정도 삶아진 해삼을 꺼내 두 토막씩 잘랐다. 잘라 진 해삼에 다진 쇠고기를 해삼속에 끼워 넣었다. 해삼을 오그라 뜨려서 약간 동글게 모양을 잡았다. 그럴즈음 방안에서 여인들이 노닥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머나! 이뻐라." "요건 내 머리맡에 있었어." "잉! 그래도 나 줘요." "호호호. 안돼." "그럼 화장대 위의 조개는 내가 다 가질꺼예요." "그러렴." 윤희와 영옥이 일어나 나와 인사를 했다. "오빠 일찍 일어나셨네요." "오빠가 주어다 놓은거죠?" 기석은 윤희에게 대답대신 질문을 했다. "고동하고 조개말이니?" "네. 오빠가 줏어다 놓은 거죠?" 기석은 윤희의 질문에 우회적인 대답을 해주었다. "아니, 산타크로스가 다녀간거야." "피! 크리마스 지나갔잖아요. 또 산타크로스가 다녀갔으면 오 빠는 우리방에 조개가 있는 줄 어떻게 아셨어요?" "산타크로스가 내방에도 들려갔거든." "오빠방에도 선물을 갖다주었나요?" "아니. 선물대신 이야기를 해주고 갔어." "무슨 이야기요?" "윤희는 잘 때 이불을 걷어 차버리고 자는 버릇이 있더라고 하 더라. 에또, 팬티색깔도 이야기해주었는데, 무슨 색이라고 했더 라......" 윤희가 더 이상 듣기 어려웠는지, 기석의 볼을 꼬집었다. "그래서 다 보았단 말인가요?" "어어! 좀 살살 쥐어뜯어. 아냐, 아냐, 그냥 이야기만 들었어. 주홍색이라고......" "에익! 나쁜 놈!" 길게 살점을 꼬집히고 난 기석이 얼굴을 문지르고, 쏘아보는 윤희의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너 눈꼽끼었다." 두 여인이 세면을 끝내고 화장을 하는동안 동글게 말아 놓은 해삼에 밀가루를 묻혀 달걀을 듬뿍찍어 프라이팬에 골고루 지졌 다. 해삼전유어가 노릇노릇하게 익어가고 있을 즈음 영옥과 윤희 가 다시 거실로 나왔다. "냄새가 너무 근사해요." 영옥이 다가와 말을 건네자, 윤희도 프라이 팬의 해삼전유어가 신기한지 젓가락을 집어 콕콕찔러 보았다. 기석이 잘 익은 것으 로 하나 골라 집어 주었다. "익었으니까 하나 먹어 봐." 윤희가 냉큼 받아먹다가 몹시 뜨거웠는지 입술을 동그랗게 오 무리고 연신 호호거렸다. "입안에서 그냥 꿀꺽 넘어갔어요. 하나 더 줘 봐요." 기석이 접시에 몇 개 담아 식탁위에 놓아주자, 여인들은 선 채 로 집어 먹었다. 김치찌개를 데워서 밥을 퍼주는 기석의 손끝이 약간 떨리고 있 었지만, 여인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아침식사를 끝낸 세 남녀는 방을 정돈하고 콘도를 나섰다. 기 석과 영옥과 윤희는 택시를 타고 속초의 등대 어시장으로 갔다. 고깃배들이 줄지어 빽빽하게 정박해 있는 배를 배경으로 다시 필름 한통을 비웠다. 커다란 돌무더기들이 쌓여있는 곳에 우뚝 솟아있는 붉은 등대를 배경으로 또 한통을 비웠다. 막 잡아온 오 징어와 도다리 광어등을 한마리에 천원 이천원에 팔고 있는 아줌 마들 사이에서 회 한접시를 시켜놓고 또 한통을 비웠다. 겨울 바닷바람이 매섭고 차가웠지만, 세 남녀는 개의치 않았 다. 두 여인들은 깔깔거리고 웃었고, 기석도 웃었다. 간간히 참 기 어려운 기침이 가슴속을 가렵게 만들었지만, 깨어있는 기석은 최소한 괴롭지는 않았다. 속초 공항 대합실에서 기석일행은 세시발 서울행 대한항공 프 로펠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 너살 박이 아이를 안고있던 아 주머니가 아이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아이가 갑자기 울기 시작 했다. 비행기까지 사람들을 태워다주는 버스안에서도 계속 울고 있었다. 공항이라고 하기에는 조그만 속초공항이었다. 비행기도 공항에 어울리는 작은 비행기였다. 윤희와 영옥이 기석의 앞자리에 나란 이 앉았고 기석은 뒷자리에 앉았다. 기석의 옆자리에 울부짖는 아이를 안은 아주머니가 자리했다. 아이는 지독하게 울고 있었 다. 벧트를 메고 이륙할 때도 울고 있었다. 벧트를 풀어도 좋다 는 비행기 안내방송이 끝날때까지도 아이는 울고 있었다. 안정고 도에 접어들때까지 아이를 달래지 못하고 쩔쩔매던 아주머니에게 안내방송을 끝낸 스튜디어스양이 다가와 비행기 뒷쪽으로 데리고 갔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자, 기석은 졸음이 왔다. 비행기 객실에서는 더이상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기석의 귀는 여전히 시끄러웠다. 스르르 밀려온 졸음속에서 더욱 많은 아기들의 울음소리를 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세검정 기석의 집에 도착한 기석이 윤희에게 물 한컵을 부탁했 다. 물 잔을 건네주던 윤희의 손이 기석의 손과 맞닿았다. "앗! 오빠 손이 왜 이리 뜨거워요?" 영옥도 돌아오는 동안 기석에게서 심상치않음을 느꼈는지, 다 가와 이마를 집어보았다. 슬쩍 피하는 기석의 이마를 의사답게 집요하게 따라와 집는 영옥이었다. "에그머니나!" 영옥의 손이 이마를 집자마자, 참기 어려운 기침이 연속적으로 터져나왔다. "쿨럭, 쿨럭, 쿨럭, 쿨럭" 주머니에서 잽싸게 담배를 뽑아 불을 붙이자, 거짓말처럼 기침 이 잦아들었다. 윤희가 기석의 담배를 빼앗자, 영옥이 기석을 뉘었다. 기석의 눈동자를 까뒤집어 본 영옥이 약방에 가서 약을 지어왔다. 시큼 하고 쓴 약가루가 목을 타고 넘어왔다. 십여년만에 먹어보는 약 이었다. 이제껏 소화제 한알 먹어보지 않은 기석으로서는 약간 치욕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쓴 약이었다. 수면제 성분이 많이 들어있는지, 잠이 쏟아졌다. 기석은 잠에 빠져든다고 어렴풋이 느끼자마자 곧바로 싸움에 들어가야 했고, 눈을 감고있는 동안 내내 싸워야 했다. 이번에는 고양이 같았다. 하얗고 날렵해 보이는 몸뚱아리에 아 기들과 여인들의 얼굴이 붙어있었다. 날카로운 발톱들이 온몸을 할퀴었다. 우연히 손에 잡힌 한 마리를 죄려고 보니, 영숙이었 다. 발길로 걷어차려고 보니 이번엔 현주였다. 방아쇠를 걸고 있 는 손가락을 물어뜯고 있는 것은 아기의 이빨이었다. 단단하게 파고드는 아기의 이빨에 피가 배여있었다. 기석은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기침은 꿈속에서도 계속되었다. "쿨럭, 쿨럭" 가슴에 여인의 손톱같은 것이 파고 들자, 또 기침이 나왔다. "쿨럭, 쿨럭" 이번에는 뱀이었다. 커다란 구렁이들이 아가의 얼굴과 여인의 얼굴을 달고 기석을 친친 감아왔다. 온몸의 뼈마디에 전해오는 압력에 차라리 몸이 으스러버려졌으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몸은 견고했고 부서지지 않고 있었다. 찢어진 옷 사이로 뱀의 비 늘이 만들어 놓은 끔찍한 자국들이 찍혀져 있었다. 가느다란 독사들이 손등에 숭숭뚫린 구멍 사이로 오가고 있었 지만, 기석은 여전히 은빛 마가로프를 쥐고 있었다. 기석은 며칠째 비슷한 꿈들에 시달리고 있었다. 깨어나면 윤희 가 떠 넘겨주는 죽맛을 느낄 수도 있었고 영옥이 입술사이로 흘 려 넣어 주는 가루약의 쓴맛도 느꼈고, 두런거리는 그녀들의 음 성도 들을 수 있었다. 비행을 마치고 돌아온 윤희의 음성같았다. 이마를 집어주는 그 녀의 손이 곱게 느껴졌다. "아직도 여전하군요. 입원 시켜야 하지 않나요? 벌써 일주일째 잖아요." 영옥의 음성이 이어졌다. "입원은 안돼. 오빠가 싫어해." 다시 윤희의 목소리였다. "아무리 병원을 싫어해도 이렇게 심하게 앓고 있는데." 다시 영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병원에 가도 소용없어. 오빠는 지금 감기를 앓고 있는 것이 아니야. 심적으로 커다란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 분명해. 하루빨리 마음의 안정을 찾아야 일어나는데, 병원보다는 집이 더 나을꺼야." 기석은 다시 잠속의 싸움터로 빨려들고 있었다. 기석의 악물은 이빨사이로 신음같은 헛소리들이 간간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크흐... 저리가-라. 아-가야. 영-숙아, 너- 현주-니. 물지-마 라. 그만-해. 크흐... 아프-다." 기석의 헛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윤희가 말했다. "오늘도 비슷한 신음소리를 내고 있어요. 그렇죠?" 영옥이 기석의 이마에 맺히는 식은땀을 닦아주며 대답했다. "잠만들면 괴로운 꿈을 꾸나 봐. 깨어있을 때는 열병에 시달리 고, 잠들면 힘든 꿈에 허덕이고, 일주일 내내 고생하고 있어." 영옥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윤희가 영옥의 수척해진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언니도 옆방에 가서 그만 주무세요. 얼굴이 수척해졌어요. 오 늘 부터는 저도 이곳에서 오빠를 돌볼께요." 영옥이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집엔 안가구?" "어머니하고 아버님 모두 오늘 일본에 가셨어요. 한달 후에나 돌아오실 꺼예요. 작은 할아버님이 고베에 사시거든요. 친척이라 고는 아버지밖에 없으셔서 이번에 큰 마음 먹고 초대하셨나봐요. 집에 혼자 남아있느니, 친구집에 가서 있겠다고 하고 이곳 연락 처를 부모님들에게 드렸어요. 그러니까 장거리 비행나갈 때만 빼 놓고 한달동안 내내 있을 수 있어요. 괜찮죠?" "그럼, 괜찮구말구. 오히려 고맙지." "고맙긴요. 제가 겨울바다에 가자고 졸라서 오빠가 병에 걸린 것인데. 흑흑..." 눈물을 쏟는 윤희를 영옥이 미소지으며 달랬다. "오빠는 윤희 때문에 병걸린 것이 아니야. 마음이 많이 상해있 어서 병에 걸린거야." "왜 그렇게 마음이 상해 있었나요? 영옥이 언니하고 현주 언니 때문인가요?"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닐꺼야. 아뭏튼 오빤 어려운 일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야. 그러니 윤희가 잘 돌봐줘." "어려운 일이라니요?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데요?" 영옥이 잠자코있자, 윤희가 계속해서 물었다. "무슨 일을 하고 다니길래, 마음속이 저지경으로 곪아 있나 요?" 여전히 대답없는 영옥에게 윤희가 조금 잔잔해진 목소리로 다 시 말했다. "저도 어느정도 눈치는 있어요. 오빠가 아이들에게 수학만 가 르치고 다니는 사람은 아닐꺼예요. 무슨 일을 하나요? 위험한 일 인가요?" 영옥이 윤희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오빠를 사랑하니?" 윤희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네." 영옥이 다시 물었다. "얼마나 사랑하니?" "아주 많이요." 영옥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런 것을 물은 것이 아니야." "그럼요?" "어떤 일이 있어도 오빠 곁을 떠나지 않을 자신이 있니?" 윤희는 대답대신 영옥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언니는요?" 영옥이 대답했다. "나는 오빠의 고모뻘이야. 친척이지. 그리고 오빠의 연인이었 던 여자의 동생이고, 오빠가 가장 사랑했던 언니들을 오빠와 헤 어지게 만든 장본인이야. 그런데도, 이렇게 오빠 곁에 머물러 있 어. 아직도 내 대답이 필요하니?" 영옥을 빤히 바라보던 윤희가 대답했다. "아니예요. 물어본 제가 미련했어요. 저도 오빠곁을 떠나지 않 을꺼예요. 어떤 일이 있어도." 영옥이 윤희에게 다시 물었다. "오빠의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니?" 윤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오빠는 착한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전 오빠를 사랑하게 되었나 봐요. 하지만, 제가 어떤 일이 있어도 오빠곁에 머물겠다고 한 것은 오빠보다 언니 때문이예요." "나 때문이라고?" "네. 언니 때문일 꺼예요. 언니는 이제껏 제가 보아온 어떤 여 자보다 멋있는 여자였어요. 언니처럼 아름답고, 선하고, 강한 여 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아요. 그런 언니가 오빠를 믿고 사랑하고 있어요. 제가 가장 존경하는 언니가 머무는 사람이라면 제가 머물러도 최소한 손해볼 것 같지는 않아요." 윤희는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했지만, 영옥은 웃음을 참지 못 했다. "호호호. 나를 그렇게 좋게 봐주는 사람이 있다니, 너무 기분 이 좋아진다. 또 그렇게 추켜주는 사람이 너여서 더욱 기뻐." 마주보고 있는 영옥의 눈빛이 조금 쑥스러운지 윤희가 고개를 약간 숙이며 말했다. "참 이상해요. 처음에는 오빠가 도둑놈처럼 보이고 파렴치한으 로만 여겨졌는데, 이렇게 될 줄은 정말 저자신도 이해하기 어려 워요. 그냥 호기심에 몇번 만나서 정이 조금 들고, 별로 멋있다 고 느낀 적도 없었던 것 같은데 마음은 벌써 이렇게 넘어가 버렸 어요. 제가 너무 변덕이 심한 여자인가요?" 영옥이 윤희의 손을 잡아 끌고 일어섰다. "옆방으로 건너가자. 오빠이야기를 해줄께." 두 여인의 극진한 간호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석은 자리 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팔뚝에는 링겔이 꼽혀져 있었고, 입술은 허옇게 말라붙어져 있었다. 가끔씩 떠지는 눈에서는 파릇한 빛이 흘러나와 영옥과 윤희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잔뜩 돋아난 수염이 기석을 황폐하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열도 내리고 기침도 거의 다 잦아들었지만, 눈이 감기면 떠오르는 악몽이 기석을 여전히 괴롭히고 있었다. 불규칙한 수면과 깊이 잠들지 못하는 기석은 낮과 밤의 구분이 없어졌다. 시도 때도 없이 깨었다가 시도 때도 없이 잠들었다. 잠에서 깨어날 때는 깨어나기 직전의 꿈속에서 희롱당한 자신을 되돌아 보고, 꿈속에서 아기에게 물어뜯긴 자신 의 성기를 확인해보곤했다. 이미 고자가 된 쓸모없는 물건이라도 붙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윤희가 쟁반을 받쳐들고 들어왔다. "약 드세요." 무릎을 포개앉는 그녀의 다리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떠올리고 이불속에서 사타구니 사이를 더듬어 보았지만 전혀 반응이 느껴 지지 않았다. "고생이 많다." "아니예요. 빨리 일어나셔서 기운차리세요. 그래야 예전처럼 씩씩하게 여자들을 꼬시러 다니죠." "크크크...... 너한테 그런 소리를 들으니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게 느껴진다." "어서 약 드세요." 머리를 기울여 주기 위해 다가오는 그녀의 섬세한 내음이 매우 좋았다. 고개를 비끼며 왼쪽 이마로 그녀의 물컹한 가슴을 감미 롭게 건드려 보았다. 하지만 말짱 헛일이었다. 아기들의 잇몸에 물어뜯긴 기석의 실체는 전혀 요동을 치지 않았다. "집에 안들어간지 꽤 오래되지 않았나?" "나흘째예요." "그래도 돼?" "부모님은 일본에 가셨어요. 여기에 한달동안 있어도 돼요." 이불속에서 여전히 중심부를 주물럭 거리며 꼼지락거리던 기석 이 맥없이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한기석! 복이 많은 놈이야. 천하의 미인들이 두 명씩 이나 달라붙어 간호해주고, 정말 잘난 놈이네!" 윤희가 기석의 푸념같은 자화자찬에 다소곳하게 동의해 주었 다. 상당히 얌전한 음성이었다. "오빠는 세상에서 제일 착한 사람이예요. 그래서 가장 복이 많 은 사람이 된 것 같아요." 기석이 윤희의 무릎을 베고 누운 채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사실은 제일 쓸모없는 놈이지. 크크크......" 윤희가 혼자서 웃고 있는 기석이 이상해 보였는지 기석의 이마 를 매만지며 물었다. "왜 웃으세요?" 뒤통수로 윤희의 허벅지를 느끼며 기석이 말했다. "그냥 웃었어. 머리 밑으로 손좀 집어넣어 봐도 돼." 얼굴이 조금 빨개진 윤희였지만 대담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마음대로 하세요." 윤희의 스커트자락 밑으로 손을 집어넣은 기석은 그녀의 사태 구니 근처에 말려져 있는 스타킹 언저리를 돌돌말아 내리고 그녀 의 맨살의 감촉을 느껴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허사였다. 기석 이 스커트 밑에서 손을 빼고 머리를 베개로 옮기며 말했다. "고마와." 윤희가 스커트 깃을 여미며 말했다. "고마와할 것 없어요. 다 나으면 혼내줄꺼니까." "영옥인 안보이네." "요아래 유진상가에 내려갔어요. 오빠에게 잣죽 끓여준다고 잣 사러 갔어요." "흐으~ 이 은혜들을 다 어떻게 갚나? 모쪼록 다시 살아나면 최 선을 다해서 아끼지 않고 봉사해줄께. 그런데, 이거 영영 안 설 모양이네." 끄트머리 발음이 시원치 않았는지, 윤희가 엉뚱한 말을 했다. "영영 안 살다니요? 여자가 둘씩이나 바라보고 사는데! 그런 무책임한 소리 또 하면 혼날 줄 아세요." "허허허." 윤희가 밖으로 나가자 기석은 주먹을 꽉 쥐어보았다. 하지만 팔뚝에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겹게 죽어있는 물건에서 기석은 일종의 패배감까지 느껴졌다. 기석은 다시 잠이 들고 있었다. 성숙한 여인의 몸위에 갓난아이의 머리가 붙어 있었다. 갓난아 이의 머리통이 기석의 사태구니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젖꼭지를 빨듯이 기석의 성기를 빨고 있었다. 흐물거리는 기석의 물건을 이제는 아예 씹고 있었다. 기석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손에는 여전히 은빛 마가로 프가 쥐어져 있었지만 방아쇠를 당길만한 힘이 손가락에 모아지 지 않았다. 두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영숙과 현주였다. 두 여인의 손에는 채찍이 들려져 있었다. 두 여인의 채찍은 바람 을 가르며 서로를 때리고 있었다. 피가 튀고 살점이 조각나면서 흩어지고 있었다. 붉은 핏자국이 그녀들의 살갖에서 꿈틀거리며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녀들의 오공에서 피가 흘러 내리고 있었 다. 기석은 갓난아이의 이빨사이에서 씹혀지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 았다. 아이의 이빨 사이에는 살점들이 더러운 찌꺼기가 되어 끼 어있는 듯 했다. 채찍을 내리치던 두 여인이 핏물이 되어 녹아내 리고 있었다. 그녀들의 눈에는 저주같은 원망이 서려 있는 듯 했 다. 아기의 이빨과 여인들의 요요로운 눈동자가 요사스럽게 기석의 주위를 맴돌며 떠다니고 있었다. 마가로프를 겨누었지만 눈동자 주위에 다시 만들어지는 영숙과 현주의 영상이 끝내 기석을 좌절 시키고 말았다. 몸의 모든 기운이 흩어지고 있는 듯 했다. 더 이상 살아남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석은 마가로프의 총구를 자신의 이마에 갖다대었다. 심호흡을 하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 간이었다. 빨리 돌아가는 필름처럼 이마 안에서 스쳐가던 세월이 일순간 정지했다. 하나의 영상이 머릿속 한복판에 자리를 잡았다. 못다 핀 꽃한송이였다. 그녀가 조그마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저는 한 남자를 사랑했어요. 제가 사랑했던 그 남자는 어려울 때는 힘들다고 했고, 무서울 때는 두렵다고 했어요. 아플 때는 괴롭다고 했고, 실패했을 때는 울적하다고 했어요. 그러나, 힘들 어해도 끈기를 보여주었고, 두려워해도 도망가지 않았어요. 괴로 울 때는 인내를 보여주었고 실패했을 때는 더 높은 곳으로 정면 승부를 시도해 갔어요. 제 남자 한기석은 포기란 굴욕적인 단어 를 보여준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기석은 눈을 떴다. 진땀을 많이 흘려서인지 이불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초록색 블라인드에 빛이 새들어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자정이 지난 것 같았다. 기석은 몸을 일으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쿨럭" 잔기침이 나왔지만, 머리가 한결 맑아진 것 같았다. 기석은 앉 은채로 땀에 젖은 러닝을 벗어 몸의 축축한 기운을 마저 닦아내 었다. 녹색팬티 한장만이 기석의 몸을 가리고 있었다. 사태구니 사이로 구불거리는 검은털 몇 올이 팬티 바깥으로 삐져나와 있었 다. 기석은 초록색 팬티를 슬쩍열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수그 러든 자신이 남성이 초라해 보였다. 기석은 승부를 걸어 보기로 했다. 일어나서 불을 켜보니 한 시가 조금 지나고 있었다. 기석은 방을 나와 영옥의 방문 앞으로 갔다. 문의 손잡이에 손 을 얹고 잠시 망설였다. 가슴이 조금 뛰었다. 침을 한번 삼키고 방문을 열었다. 침대 머리맡의 스탠드에서 희미한 붉은색 조명이 켜져있었다. 침대 바깥쪽에는 윤희가 엎어진채로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 고, 안쪽에는 영옥이 바로 누워 있었다. 기석은 팬티를 까내렸다. 기석은 그녀들의 이불을 젖히자마자 엎어져 있는 윤희의 뒷몸에 몸을 실었다. 기석의 무게에 놀란 윤 희가 고개를 돌렸다. "누구세요?" "기석이다. 가만히 있어라." "갑자기 왜 그러세요?" 윤희가 몸을 약간 비틀자 기석이 온몸으로 지그시 누르며 윤희 의 귓볼에 입술을 붙였다. 그리고 간절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아무말도 하지말고 제발 그냥있어. 실패하면 나는 그즉시 옥 상으로 올라가서 머리박고 뛰어내릴꺼야." 윤희는 대답대신 틀고 있던 고개를 앞으로 묻었다. 윤희 옆에 누워있는 영옥의 눈꺼플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영옥은 눈을 뜨지는 않았다. 기석은 윤희의 등을 가리고 있는 하얀색 티를 벗기기로 했다. 윤희의 양허리로 파고든 기석의 양손이 그녀의 겨드랑이를 파고 올라갔다. 윤희가 팔꿈치를 올려서 기석을 도와주었다. 기석은 윤희의 상체를 가리고 있던 껍질을 그녀의 머리위로 벗겨내었다. 면도를 했는지, 그녀의 겨드랑이가 깨끗했다. 등에 가로질러 있는 브래지어의 호크를 풀었다. 풀어진 브래지어를 뽑아내던 기 석은 그녀의 출렁이는 젖살의 부드러움을 손등으로 느낄 수 있었 다. 기석은 윤희의 엉덩이에 붙이고 있던 자신의 아랫도리를 슬쩍 들고 윤희의 하나남은 천조각을 그녀의 미끈한 허벅지 아래로 밀 어내렸다. 기석은 자신의 한쪽다리를 그녀의 곧게 뻗어 있는 다 리사이로 접어올렸다. 그녀의 무릎에 걸쳐있는 삼각천에 발가락 을 거는데 성공했다. 발을 뻗어 그녀의 팬티를 마저 까내렸다. 기석은 윤희의 다리를 약간 벌렸다. 기석은 자신의 중심을 윤 희의 풍만한 엉덩이 아래에 밀착시켰다. 기석은 허리아래에서 뽀 송뽀송한 여체의 감각을 저릿하게 느꼈지만, 여전히 힘은 살아나 지 않고 있었다. 윤희의 귓밥을 적시고 있던 기석의 혀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의 혀가 그녀의 목에서 미끄럼을 타듯이 등줄기를 적시자, 그 녀는 소스라치는 짜릿함에 전율했다. "아학!" 윤희는 어쩌지 못하고 방황하던 한손을 영옥의 가슴에 얹어 놓 았다. 영옥은 자신에게 도망나온 윤희의 한손을 가만히 쥐어주었 다. 영옥의 눈은 여전히 감겨져 있었다. "아학!" 윤희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신음들이 기석의 혈기를 자극 하고 있는 듯 했으나, 여인의 몸을 뚫어주기에는 아직도 요원한 기석의 중심이었다. 기석은 윤희의 가슴아래로 양손을 집어넣고 젖을 움켜쥐고 주 물럭거렸다. 윤희의 등판 전체에 입질을 하며 혀끝으로 그녀의 살결을 맛보았다. 온몸으로 그녀를 짓누르고 그녀의 신음을 쥐어 짜내면서, 귀로도 흥분을 느껴보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힘은 모 아지지 않았다. 기석은 초조해졌다. 도저히 성공할 것 같지 않았다. 기석은 시 각적인 효과를 보태 보기로 했다. 영옥 쪽에 몰려 있는 이불을 제껴냈다. 영옥도 티하나와 팬티 한장이었다. 다소곳이 붙어있는 그녀의 탄탄해보이는 양다리가 아름다왔다. 영옥은 잠깐동안 눈을 떴으 나 다시 감고 있었다. 기석은 윤희의 등판에 달라붙은 채로 영옥에게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팬티부터 벗겼다. 종아리 아래로 천이 흘러내리자, 영옥은 발을 모아 스스로 천을 떨구어냈다. 기석이 티를 젖혀서 영옥의 머리위로 넘겨주자, 그녀는 윤희의 손을 쥐고 있던 자신의 손을 빼서 티를 마저 벗겨내었다. 그리고 다시 양손으로 윤희의 손을 꼭 쥐었다. 대담하게 움직여 주고 있 는 영옥이었지만, 그녀의 구석구석에서 잔잔한 떨림이 일고 있었 다. 기석은 영옥의 등밑으로 손을 집어넣고 브래지어 호크를 영옥 의 가슴쪽으로 돌려놓았다. 호크가 풀려나가자, 만족스럽게 보이 는 영옥의 젖가슴이 드러났다. 영옥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미와 서 구적인 젖가슴의 조화가 보기에 매우 좋았다. 탄탄하게 뻗어내린 각선미는 사내를 도발적인 짐승으로 만들기 에 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기석에게는 시각적인 효과도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석은 영옥의 가슴을 빨아보고 싶은 목마름을 느꼈다. 몸을 기울여 영옥의 한쪽 가슴을 빨아보았지만, 해갈이 되지 않았다. 기석은 영옥의 사태구니 사이에 손을 뻗어 그녀의 계곡과 수풀 을 헤집어도 보았지만 열기없는 손장난에 불과했다. 기석은 점점 막막해져 갔다. 아름다운 두 여인이 앞 뒤로 사내를 기다려 주고 있었지만, 무 능한 사내의 기둥은 전혀 제구실을 못하고 있었다. 기석은 쉬지않고 움직였다. 온몸으로 비비적거렸고 여인의 아 름다운 곳을 찾아 눈동자를 쉴새없이 굴렸다. 혀끝은 닳도록 여 체를 향았고 손길은 여인의 부끄러운 곳을 헤치며 들락거렸다. 기석의 몸뚱아리가 스스로 흘린 땀으로 번들거렸다. 여인의 몸 이 물기에 미끄러지기 시작했고 침대도 축축한 습기에 젖기 시작 했다. 후끈한 습기에 여인들은 달구어지고 있는 듯 했지만 기석 은 힘만 빠지고 있을 뿐이었다. 여인들에게 자신의 불구가 노출 되고 있다는 수치스러움 마저 일기 시작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심적으로 흐트러지고 있는 율동이 기둥 을 세우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기석이었다. 그것은 비참한 몸부림일 뿐이었다. 새 여인의 짧은치마는 익숙한 여인의 짧은 치마보다 시각적으 로 남자를 자극한다. 그러나 새 여인의 벗은 몸은 익숙한 여인의 벗은 몸보다 못하다. 사내의 기둥은 낯선여인에 닿아 있을 때보 다 익숙한 여인에 닿아 있을 때 쉽게 일어선다. 사내의 중심이 여인에게 길들여지기 때문이다. 사내는 눈을 가려도 자신의 중심 으로 여인을 구별할 수 있다. 홀딱 벗긴 여러 여인들에게 남성을 갖다대어보면 자신에게 익숙한 여인의 살결에 닿아있을 때 기둥 이 빨리 곤두선다. 기석은 영숙과 현주가 그리웠다. 천번을 채운 그녀들이었다면 자신의 가운데가 이렇게 죽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 옥과 윤희에게 그녀들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기석은 혼자서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발가벗은 여인의 달콤함을 시각적으로라도 흡수시키위해 여인 의 은밀한 곳들을 두루두루 살폈지만, 꿈속에서 본 괴이한 동물 들만 머리속에서 떠올랐다. 자신감을 되찾기 위해서 전신으로 압력을 쏟아 넣어 보았지만 찍어누르는 정복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꺽어지고 휘어지는 사내의 중심은 힘이 고이는 대신 흐물거리는 무력감만이 맴돌 뿐 이었다. 몸뚱아리가 짓눌린 여인에게서 신음을 뽑아내는데는 성공했지 만, 여인의 음악도 귓속에서 맴도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밀어내지 는 못했다. "흐으!" 기석은 윤희의 등에 이마를 기대고 숨을 몰아쉬며 잠시 널부러 졌다. 지친 육체는 그대로 영원한 잠속으로 빠져들 것을 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석은 좌우로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다시 윤희 의 등판에 머리를 박았다. "흐으! 흐으!" 두어번 더 숨을 몰아내쉰 기석은 자신이 최선을 다했는가를 생 각해 보았다. 자신이 알고있는 모든방법을 다 동원했는지에 대해 서도 생각해 보았다. 한가지 방법이 더 있었다. "흐으! 흐으! 흐으!" 기석은 크게 숨을 고르며 새로 심신을 가다듬었다. 자세를 바꿀 필요는 없었다. 윤희의 몸은 후방형이었다. 앞에 서 넣기 편한 사타구니형보다 입구가 더 밑에 붙어있는 후방형은 앞보다 뒤에서 입성하기 좋은 몸이었다. 기석은 윤희의 입구에 자신의 쭈글쭈글하게 구겨지는 살덩이를 우겨넣었다. 좁은 대롱안에 손가락으로 밀가루 반죽을 쑤셔넣듯 흐물거리는 살덩이들을 윤희의 구멍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비벼넣 었다. 손톱에 찍혀지며 꼬집혀지며 기석의 뿌리는 좁은 구멍안으 로 밀려 들어가고 있었다. 섹스가 아닌 사투(死鬪)였다. 기석의 처절함에 애태우고 있는 윤희였지만, 모질게 우겨넣는 기석의 험악한 시도에는 몸을 움추리고 말았다. "아흑! 아파요." 윤희는 가녀린 호소를 내뱉으며 그녀의 벌어졌던 양다리를 모 으려 했다. 그녀의 양허벅지에 가해진 움추림으로 그녀의 입구가 오무라 들었다. 그것이 오히려 기석을 도왔다. 반쯤 들어간 기석 의 살덩이가 그녀의 오무라든 구멍에 제법 단단하게 붙잡혔다. 기석은 비참하리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었다. 살기위해 서도 아니고 여인들을 정복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어떤 목적을 위해 지금처럼 몸부림치는 따위의 짓은 기석으로서는 경멸하는 짓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석이 발악적으로 사력을 다 하고 있는 것은 시련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피할 수 있는 시 련은 피해가는 것이 기석의 철학이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시 련이라면 정면으로 부딪쳐서 돌파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보는 것 이 기석이 살아온 방정식이었다. 성공을 했든 실패를 했든 최선 을 다한 결과는 무조건 좋았다. 그래서 기석은 지금도 인생을 걸 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기석은 윤희의 숲속에 반쯤 붙잡힌 가운데가 자신과 여인을 이 어주고 있다고 염두를 굴리며 마음에 열기를 심어갔다. 물리적인 자극도 필요했다. 그녀의 구멍에 잡혀있는 남성이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적당히 팽팽한 기운이 느껴지도록 엉덩이를 들썩였 다. 조금씩 커져가는 듯한 신호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 었다. "아! 아음!" 윤희의 하얀 몸이 한껏 펼쳐지고 있었다. 기석은 무릎을 끓은 자세에서 윤희의 양쪽 엉덩이를 구겨쥐고 약간 더 크게 움직였 다. "아학! 학!" 꼿꼿한 힘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흐물거리기만 하던 가운데가 기둥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는 듯 했다. 기석은 윤희의 몸속을 들락거리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어느덧 거의 다 자라있는 자신의 남성이 둥그렇게 물려있는 모 습이 보기에 좋았다. 기석이 눈을 감고 성공을 자축하려 할 때였다. 머리 속에서 괴 이한 울부짖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또 다시 허공이었다. 보이 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두려웠다. 매번 흉칙하게 나타나는 형상들이 이제껏 공들여 쌓아 놓은 탑을 무너 뜨릴 것 같았다. 빽빽거리며 날카롭게 찔러대는 불협화음들이 점 점 더 심하게 기석의 머리속에 못질을 해대었다. 기석의 이마에 진땀이 송글송글 배이고 가운데가 다시 시들려하고 있었다. 기석 은 윤희의 등위로 무너져 내리며 눈을 번쩍 떴다. 괴물은 보이지 않았다. 침대 옆의 영옥의 화장대가 보였다. 그 리고 화장대위의 사진에서 두 여인을 보았다. 영숙과 현주였다. 현주와 영숙과 눈이 마주친 기석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기석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했다는 떳떳한 미소같았다. 기석은 마음이 무척 편해졌다. 가슴속이 홀가분하게 비워지는 것 이 느껴졌다. 불안, 초조, 수치, 두려움, 자책, 모든 구질구질한 것들이 먼지처럼 훌훌 털어져 나가고 있었다. 기석의 미소에 아름다운 자신감이 짙어지고 있었다. 기석은 사 진속의 두여인을 쳐다보며 알아듣기 어려운 소리를 중얼거렸다. "너희들이 알아서 해다오." 조용히 소근거린 기석이 다시 상체를 세웠다. 그리고 자신의 가운데를 윤희의 다리 사이로 힘차게 밀어부쳤다. 고요하면서 빠르고, 매끄러우면서 힘차게, 그의 토막이 윤희의 사타구니 사이로 오가기 시작했다. 기석은 눈을 감아 보았다. "아아! 아학! 하아! 하악! 학" 더 이상 지저분한 잡음은 없었다. 윤희의 원시적인 교음만이 감각적으로 들리고 있었다. 기석은 더 빨리 더 강하게 부딪쳐 갔다. 윤희의 샘안에서 사정 없이 펌프질 하고 있는 기석의 둥근 기둥에는 그녀의 액이 흥건 이 젖어 윤활유처럼 매끄럽게 빛나고 있었다. "아악! 하악! 학! 학!" 듣기좋은 윤희의 성음(性音)이 오묘하고 짜릿하게 들려오고 있 었다. 여인에게서 흘러나오는 음향 자체가 사내에겐 축복이었다. 윤희의 물결치는 음악은 기석을 절정으로 몰아갔다. 기석은 가 일층 밀어 붙이는 압력으로 윤희의 양 다리를 더욱 벌어지게 만 들었다. 그녀의 자지러짐을 즐기던 기석은 마침내 최후의 힘을 모아 그녀의 몸속에 남김없이 꽂아넣었다. "하악! 아!" 찍어누르고 있는 정복감은 사내의 극치였다. 터질듯이 부푼 욕 망은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것이었다. 한껏 압축되어 있던 정 (精)들이 그녀의 몸안에서 쭉쭉 쏘아져 나갔다. 기석은 윤희의 미끄럽고 부드러운 넙쩍다리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여인의 몸 속에서 폭발하고 있는 짜릿한 분출의 미감(美感)을 음미했다. 영 원히 잃어버릴 뻔한 것들이었다. 사내는 여인의 몸 위에 무너져 그녀의 부드러움을 가슴전체로 문질러 주었다. 여인의 귓밥을 씹어주며 그녀의 고달팠던 첫날밤 을 달콤한 감사로 위로해 주었다. 쌕쌕거리며 피어오르던 여인의 단내들이 안정을 찾아 고른 숨결로 잦아들어 갔다. 윤희의 몸속에서 싸고 난 고요를 즐기며 뭉툭하게 누워있던 가 죽 방망이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기석은 풀어졌던 기운이 새롭게 뭉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기석은 단단하게 굳어지고 있 는 가운데를 윤희의 몸밖으로 빼내었다. 힘차게 뻗대고 있는 돌 출부가 늠름하게 또 다시 끄떡거리고 있었다. 기석은 영옥에게로 눈을 돌렸다. 여전히 눈을 감은채 윤희의 손을 모아쥐고 있는 영옥이었다. 기석은 이불이 흘러내린 영옥의 나신(裸身)위로 몸을 이동했다. 이제는 급급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윤희의 몸속에서 심신의 장애를 이미 극복한 기석은 사투(死鬪)가 아닌 감미로운 섹스로 영옥을 갖기로 했다. <소설, 안전기획부(7)> 기석은 영옥의 나상(裸像)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흠어 보았 다. 감상을 끝낸 기석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오똑한 콧날에 자신 의 콧날을 가볍게 스쳐 주었다. 그녀의 콧등에 세련된 열기를 피 어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받치고 쪽진머리에서 헤어밴드를 풀어 주 었다. 돌돌말려진 머리 묶음 사이로 손을 집어 넣어 손가락 사이 사이로 머리결을 곱게 흘려내 주었다. 그녀의 반듯한 어깨어림까 지 흘러내린 실오라기들이 검은 손수건처럼 펼쳐졌다. 까만 윤기 가 빛나는 곳에 그녀의 오밀조밀한 얼굴을 가만히 놓아주었다. 그녀에게서 고혹적인 아름다움이 붉은 조명을 타고 뿜어져 나오 고 있었다. 그가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그녀가 맑은 눈동자를 깜박이며 기석을 올려보았다. 그리고 수 줍게 소곤거렸다. "두번째가 더 좋은 거랬어요." 그의 얼굴 전체에 빙그레한 웃음이 번졌다. "누가 가르쳐주든?" 그녀도 아랫입술을 조그맣게 깨물며 미소를 지었다. "영숙이 언니가요." 그가 음흉하게 웃었다. "크크크. 그래서 지금 좋으니?" 그녀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네." 그가 그녀의 도톰한 윗 입술을 가볍게 한번 깨물었다. 그리고 나서 희롱했다. "입술이 죽여준다. 오돌하게 씹히는 것이 맛이 아주 그만이 야." 그에게 깨물린 입술에 혀끝을 살짝 갖다대 본 그녀가 숨죽이고 웃으며 말했다. "킥! 오빠는 여자 몸위에만 올라타면 말투가 아주 고약해진다 면서요?" "그것도 영숙이가 가르쳐준거니?" "아뇨. 옛날에 현주 언니에게서 들었어요." "내 수법들을 다 알고 있으니, 너를 자지러지게 만들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겠다." 기석의 잡소리가 이번에는 영옥을 웃기지 못했다. 영옥은 웃음 대신 잔잔한 눈빛으로 기석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저는 자지러지지 않고있지만 행복해요. 자지러져도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오빠가 사랑으로 저에게 안겨 져 있어요. 저에게 이보다 더 소중한 순간은 없을 꺼예요. 오빠 를 기다린 세월이 10년이었거든요." 기석은 영옥의 눈을 마주보기 어려웠다. 그녀의 눈에 고이는 눈물이 전염성이 있는 것인지, 기석의 눈시울도 뜨뜻해졌다. 더 이상 잡음은 이어지지 않았다. 기석은 사내가 되어 움직이 기 시작했고 영옥은 여인이 되어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마와 눈썹을 타고 내려가던 그의 혀가 그녀의 귓 속 으로 밀려들어가자 그녀에게서 움찔거리는 진동이 있었다. 한동 안 귓가에 머물며 꿈틀거리던 그의 혀가 그녀의 목부위를 거쳐 겨드랑이를 파고들자 다시 그녀에게서 긴장이 느껴졌다. 그는 그 녀의 예민한 부위를 샅샅이 탐색하고 있었다. 그녀의 움찔거리는 부위에 도착하면 그곳에 머물며 그 부위의 온도를 높여주었다. 그는 여인의 몸을 이분해서 다룰줄 알았다. 남녀간의 섹스는 분리된 두 개의 이분법이 톱니바퀴의 이빨을 달고 부딪치는 것이다. 하나는 남자와 여자의 이분법이고, 또 다 른 이분법은 시각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이다. 남자와 여자로 이분하는 이유는, 섹스에서 남자와 여자가 똑같 은 행위에서 서로 다른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분리는 심리 적인 측면이 강조된 것이다. 시각과 감각으로 이분하는 것은 남녀의 각 부위를 시각적인 부 위와 감각적인 부위로 나누어 용도에 맞게 즐기고자 함이니 육체 적인 측면이 강조된 이분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실상, 남자와 여자, 시각과 감각, 이 네가지는 서로 톱니의 이 빨을 달고 동시에 부딪치는 것들이기 때문에 완벽한 그물처럼 짜 맞추기가 매우 어렵다. 결혼하려는 남녀들이 점쟁이들을 찾아 속궁합을 보는 것도 따 지고 보면 이 네가지 톱날의 조화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다. 점장 이들이 들으면 펄쩍 뛰겠지만 이런 음양의 조화는 태어날 때부터 운명으로 점지받는 것이 아니다. 네가지 톱날의 조화는 대중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숙련에 의해 고도화 될 수 있는 것이다. `쏠린다.`라고 표현되는 충동을 남자는 여자보다 쉽게 느낀다. 쏠리는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적인 측면만으로 섹스를 생각해볼 때, 섹스는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자신들의 손가락 만큼의 값어치 도 안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은 여인과의 섹스를 몹시 밝힌다. 그것은 심리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해서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다. 남자의 섹스심리는 천차만별이다. 사랑하는 여인의 주인이 되 고 있다는 보편적인 것에서부터 `저 여자 내가 따먹었어.`라고 우쭐해하기 위한 것까지 매우 다양하다. 비록 다양한 남성의 섹 스심리지만 어떤 경우라도 여인들은 비교적 간단하게 남성의 심 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다. 대부분의 남자는 여인의 배위에서만 은 자존심을 챙기고자 한다. 여인의 입장에서 괘씸한 축에 드는 남자는 지배욕구까지 충족시키고자 할 것이다. 반면에 여인에게 만족한 기쁨을 선사해주고 싶은 자상한 페미니스트들도 많을 것 이다. 그런 점들을 다스려줄줄 아는 여인이 섹스에 강한 여인이 다. 남자의 심리는 시각에 약하다. 당하고 있다는 호소력있는 몸짓 은 여배우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여인이 섹스에서 자지러 지는 교성을 흘리며 고혹적인 몸부림을 남성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것이 연극이든 실제적인 표출이든, 여인이 남성에게 선물해 줄 수 있는 최고의 덕(德)이다. 천한 것 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다. 오히려 그런 것을 천하게 보는 사람들이 정신적 미숙아일 뿐이 다. 여인들의 감성심리는 어느 하나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폭이 넓 다. 여인들은 섹스 자체 뿐만 아니라 몸을 섞는 동안 오가는 감 정의 교류에도 남자들보다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런 점에서 여성 의 섹스심리는 남성보다 진화되어 있다. 사내들은 여인들의 그런 감성을 따듯하게 띄워주고 달콤하게 적셔줄줄 알아야 한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여인의 귓가에 입김 을 묻히며 속삭여 주는 것이다. 남자가 눈에 약하듯이 여자는 보 편적으로 귀에 약하다. 거짓말도 나쁘지 않지만, 그보다 권하고 싶은 것은, 여인의 배위에서 놀면서 머리속에 떠오르는 그대로를 나직한 음성으로 솔직하게 들려주는 것이다. 진실보다 거짓말이 나을 경우가 한 가지 있는데, 사내의 머리속에 밑에 깔린 여인이 아닌 다른 여자가 떠올라 있는 경우다. 그럴 경우는 머릿속에 떠 오른 다른 여인을 밑에서 대주고 있는 여인에게 투영시켜서 이야 기 해주면 된다. 해본 사내는 알겠지만, 여인의 흥분을 아름답게 하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될 뿐만이 아니라, 사내 자신도 즐기는 데 한몫을 한다. 조루예방에도 큰 효과가 있다. 육체적으로도 남성은 편식을 즐기지만, 여인은 `고루고루`를 좋아한다. 편식을 즐기는 대부분의 사내들에게는 몹시 미안한 말 이지만, 그들은 육체적으로 무능한 사람들이다. 한 번의 섹스에 세 가지 체위가 보통이다. 네 가지 이상의 체위를 섞을 줄 아는 남자는 섹스에 유능한 남자라고 할 수 있겠다. 여인의 `고루고루`는 체위 외에도 부위별 `고루고루`가 있다. 대부분의 사내들이 주로 쌀때의 쾌감만을 느끼는데 반해 여자의 부위별 `고루고루`는 이 점에서도 남자보다 우월하다. 여성들마 다 부위별 `고루고루`는 제각각이다. 예전에 이보희 주연의 무릎 과 무릎사이란 영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무릎이 될 수도 있고, 목이 될 수도 있고, 발고락이 될 수도 있다. 남자들은 자신과 같 이 사는 여성의 이런 부위들을 반드시 알아서 봉사해 주어야 한 다. 그리고 이런 성감대는 선천적인 것도 무시할 수 없지만, 후 천적인 성격도 무시할 수 없다. 많이 쓰다듬어지는 곳에 성감대 가 쉽게 형성된다. 이것이 애무를 많이 받는 여자가 성감대가 많 은 이유다. 후천적인 성감대 효과는 남자들도 기대할 수 있다. 싸는 데에서만 만족을 찾는 남자는 고기 맛만 알고 야채맛을 느 낄 줄 모르는 사람이다. 사내들마다 제각각 이지만 보통 대부분 의 남자들의 경우 예민한 부위의 마찰을 통해 싸는 것과는 다른 열기를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잘 연구해보기 바란다. 섹스는 스포츠와 다른 점이 거의 없다. 굳이 유사종목을 들어 보라면 남녀가 짝이되어 펼치는 아이스댄싱을 들어볼 수 있겠다. 접촉이 많고 화려한 율동이 있고 짜릿한 분위기가 섹스와 닮았 다. 그리고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가장 중요한 닮은 점이 하나 더 있다. 두 남녀의 호흡을 맞추기 위한 숙련과정이 뒤따라야 한 다는 점이다. 고도의 섹스는 아이스댄싱보다 접촉이 많고 더욱 화려하며 분위기도 훨씬 더 짜릿한 것이다. 숙련 과정이 아이스 댄싱보다 어렵지는 않지만, 한두달에 익혀질 수 있는 쉬운 것도 아니다. 두 남녀가 호흡을 맞추는 데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 고 상호간의 이해와 협조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또한 무엇보다 중요한 감정의 교류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솔직한 대화를 나누어 야 하고 섹스 외적인 서로의 삶까지도 공유하면서 애정을 키워나 가야 한다. 그래서 섹스는 만만한 스포츠가 결코 아니다. 남자, 여자, 시각, 감각, 이런 것들의 톱날을 정교한 점묘화처럼 짜맞 추어 오묘한 유희를 건강하게 즐길 수 있어야 섹스다운 섹스다. 인생을 각박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은 반면에, 섹스다운 섹스 하나로 각박한 인생을 달콤한 인생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아 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람들은, 특히 남자들은, 섹스를 돈과 연 관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뭘 모르는 사람이다. 그들이 섹 스라고 착각하는 것은 섹스라기 보다는 배설에 가까운 것이다. 그런 배설은 여자가 없어도, 돈이 없어도, 머리속에서 시나리오 를 쥐어짜고 손가락을 움직여서 얼마든지 비슷한 맛을 볼 수 있 는 것이다. 섹스다운 섹스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배설을 경험한 건강한 사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거 의 예외없이 한가지 병을 갖고 있다. 일종의 정신병인데, 자신에 게 익숙한 여인보다는 새여자를 밝히는 병이다. 대부분의 남자들 이 결혼을 할 때, 싫은 여자와 결혼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눈에 꽉 차는 여자는 아니더라도 수수한 정(情)정도는 느낄 수 있는 여자와 결혼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남편들은 다른 여자에 비해 비교적 좋은 여자와 살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가까이 있는 쉬운 것에서 좋은 것을 구하지 않으려 하고, 멀리 있는 어려운 것에서 좋지도 않은 것을 어거지로라도 구해보고자 허우적거리는 것이 바로 사내의 병이다. 이 정신병은 자칫하면 성폭행이란 악 질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다른 사람에게 커다란 피해도 줄 수 있 다는 점에서 매우 나쁘고 위험한 병이기도 하다. 몰지각한 성범죄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다. 성에 문제가 있는 것은 십대의 소년소녀들이 아니라, 성을 아는 이십 대 이후의 남자들이다. 사내들 대부분은 성을 제대로 익히지 못 했기 때문에 그런 더러운 병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 다. 남자들이 이런 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같이 살고 있 는 여자들에게도 책임이 크다. 둘사이에 배설만 오가고 있을 뿐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인 진정한 섹스를 무관심과 무지와 게으름 으로 사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섹스를 모르기 때문에 사내들이 염치없는 성범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고도의 섹스는 서로가 서로의 구석구석을 잘 알고, 서로에게 익숙하게 길이 든 사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소질이 있는 사람이라도 최소한 삼백번 이상의 실습이 오가야 터득이 가 능한 스포츠이다. 따라서 익숙한 여인이 아니고서는 섹스다운 섹 스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익숙한 여자보다 낯선여인에게 눈이 돌 아가고 상상력이 접근하는 것은 대부분의 남성에게 어쩌지 못하 는 난치병이다. 하지만 어떤 사내가 익숙한 여인보다 낯선 여자 와 섹스를 하고 싶은 충동을 더 강하게 느낀다면, 그 사내에게 불쌍한 말이 되겠지만, 자신은 섹스를 못하는 남자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다. 그런 사내는 한번도 오르가즘을 느껴보지 못한 사 내다. 남자의 오르가즘은 쌀 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지만 아닐 때가 더 많은 것이고, 쌀 때 느끼더라도 그냥 싸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간단한 차이점으로 싸고나서 허무를 느낀다면 여자 없이 도 얼마든지 쌀 수 있는 배설에 가까운 것이고, 싸고나서 보람이 느껴진다면 입문한 것이다. 배설의 쾌감은 가운데 토막에서 시작해서 자신의 몸뚱아리만 잠깐 스치고 조루와 허무를 남길 뿐이지만, 오르가즘은 그렇지 않다. 고도의 섹스를 통해서 얻어지는 남자의 오르가즘은 배설과 달리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마음에서 시작해서 전신으로 퍼 져가 여인에게까지 전달된다. 그리고 여인을 오르가즘의 꼭대기 에 올려놓고 뒤흔들며 삼십분 이상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비 단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정을 끝내고 여인의 몸밖으로 빠져 나와도 오르가즘이 끝나지 않는다. 파트너와 만족스럽게 교 류된 감정의 여운들이 보람있는 열기로 남아 오랫동안 온몸에서 피오오르기 때문이다. 고도의 섹스를 경험한 섹스마스터들은 생긴 모습을 구경하는 차원에서 낯선 여인에게 눈을 돌리거나 가벼운 장난을 걸기도 하 지만, 그녀들과의 섹스는 별로 떠올리지 않는다. 명인(名人)이 명품을 만들고 싶어하듯, 섹스마스터는 섹스다운 섹스를 하고싶어 한다. 진정한 섹스는 익숙한 사이 아니면 불가 능한 것이기에 섹스를 할 줄 아는 사내는 낯선여인보다 익숙한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성욕을 좋아한다. 부부간의 참된 성(性)의 탐험은 생활의 활력소가 되어줄 뿐만 아니라, 둘을 하나의 운명체로 엮어주는 가장 강력한 접착제의 구실도 해준다.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수련을 쌓아나가다 보면 잠 재하고 있던 새로운 본능을 하나씩 하나씩 발견하게 된다. 이럴 때 경험하게 되는 것도 오르가즘의 일종이다. 보다 높은 경지로 둘이 함께 오르고 있는 일체감을 만끽하며 애정을 두텁게 쌓아가 는 것이 부부간의 참된 성이고, 이런 성을 추구해나갈 줄 아는 사람이라면 성폭행같은 유치한 짓은 하지 않는다. 그는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더듬던 입술을 떼내었다. 혀끝으로 그녀의 새끼발가락까지 빨아본 그는 그녀의 흐느낌으로 그녀의 몸을 거의 익힐 수 있었다. 기석은 영옥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옆에 누워 있 는 윤희에게도 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루 빨리 이전의 사랑했던 여인들과 나누었던 섹스다운 섹스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기석은 기본부터 가르쳐야 했다. 그는 침착 한 조교가 되고 있었다. 기석은 영옥의 양쪽 다리의 무릎을 세운채 벌려놓았다. 그리고 축축하게 젖어있는 영옥의 입구(玉門)에 자신의 중심을 갖다대었 다. 한손으로 기둥을 감싸쥐고 용두(龍頭)로 그녀의 빈약한 숲을 헤쳤다. 용두는 그녀의 옥문(玉門)앞에서 끄덕이며 비비적거렸 다. 기석의 입술이 이미 지나갔던 그녀의 샘에서 미끌거리던 액 체가 흘러나와 용두의 진입을 돕는 듯했다. 영옥의 벌어진 입술에서 짤막한 탄성이 새어나왔다. "아아!" 용두가 영옥의 자궁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기석은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양손을 뻗어 그녀의 뭉클한 젖가 슴을 쥐었다. 손바닥에 적당한 힘을 넣어 젓살을 구겨쥐었다. 여 인의 젖이란 감각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출렁일 때 아름 다운 것으로 시각적인 유혹이 강한 것이다. 너무 세게 쥐거나 세 게 빨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약간의 잡아당겨지는 탄력이 느껴질 때 사내에게도 여인에게도 좋은 것이다. 기석은 허리를 움직이며 엉덩이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조그맣 고 빠른 움직임이었다. 기석은 `용두걸이`로 시작하고 있었다. 기석의 엉덩이는 매우 빠르게 들썩이고 있었지만 오가는 깊이 가 매우 짤막했다. 오십번의 왕복을 채우기 전에 기둥의 반 이상 이 들어가서는 안되는 용두걸이는 속도가 매우 중요했다. 일분 안에 윗몸일으키기 육십번을 채울 수 있어야 가능한 테크닉이었 다. 남자의 경우 섹스에는 세 가지 기초체력이 필요하다. 윗몸일 으키기 백번, 팔굽혀펴기 백번, 토끼뜀 삼백번이다. 매일밤 자기 전에 이십분씩만 연습하면 한달이면 기초체력을 다질 수 있다. 여인의 입구에서 빠르게 오가는 용두는 여인과의 강력한 마찰 을 통해 화끈하고 근질거리는 열기를 양쪽에 신속히 지펴주었다. 오십번을 입구 언저리에서만 재빠르게 오가던 기석은 엉덩이를 크게 들썩이며 깊은 삽입을 시도했다. 기석의 깊은 삽입에 충격받은 영옥이 소스라치는 신음을 내었 다. "학." 기석은 칠, 팔번을 빠른 속도로 커다랗게 움직였다. 모두 깊은 삽입이었다. 불필요한 동작이었지만, 이제 막 성숙한 여인이 되 기 시작한 영옥에게 가능한 빠르게 고통을 지워주기 위한 동작이 었다. "하악! 하악! 하악! 아아!" 비명에 가까운 교음을 연속적으로 흘리는 영옥에게 안정감을 불어넣어주기 위해 기석은 깊숙한 삽입을 열번이상 더 지속했다. "하악! 하악! 하아! 아아! 아음!" 영옥의 교음이 안정되어가자, 기석은 다시 용두걸이를 시작했 다. 짤막하고 빠른 반복이 영옥의 입구를 뜨겁게 불지르기 시작 했다. "아아! 아음! 어서!" 영옥은 자신의 아래에서 소름처럼 피어나는 야릇한 간지로움을 이겨내지 못했다. 날씬하게 뻗은 양팔을 기석의 어깨에 걸쳐놓고 허우적 거리기 시작했다. 세워져 있던 그녀의 양무릎이 조금씩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바닥도 잔뜩 오그라든채 공중 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기석은 그녀의 벌어진 사태구니 사이에서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빠르고 짤막하게만 움직일 뿐이었다. 그녀 의 문은 하늘을 향해 열려져 있었고 사지는 허공에서 흔들거렸 다. 사내는 용두걸이로 여인의 첫 자세를 `앙천개구 양수 허우적 세`로 만들어놓는데 성공했다. 알아듣기 힘든 비음이 그녀의 입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아! 아! 어서!" 그녀의 버둥거리는 간지로움을 만족스러운 포만감으로 긁어주 기위해, 기석은 깊은 삽입으로 전환했다. "하아! 아아! 아음!" 여인이 시원스럽게 파고드는 느낌으로 가려움을 해소하고 있을 때, 사내는 허공에 떠있는 그녀의 양다리를 바닥에 잡아내리고 곧게 펴 놓았다. 그는 깊숙한 왕복을 유지하기위해 그녀의 달라 진 자세에 맞춰 상체를 좀 더 세우고 수평삽입을 계속했다. 그녀 의 아랫배에 모아진 그의 양손에서 엄지 손가락이 삐져내렸다. 그녀의 구멍을 오가는 그의 기둥위에서 정지한 손가락이 그녀의 은밀한 부위를 눌러주며 압박을 도왔다. 양쪽으로 곧게 뻗은 그녀의 두 다리가 미끈하고 아름답게 빛나 나며 떨고 있었다.. 흔들리는 젖가슴의 물결이 그의 가슴을 진탕 시켜 놓았지만, 아직은 여유로운 기석이었다. 그는 손바닥에 지그시 힘을 가하면서 완만하고 꾸준한 수평왕 복을 계속해 나갔다. 그녀는 시원하게 파고드는 해갈대신 벅차오르는 목마름을 느끼 기 시작했다. 그녀의 벌어진 입술사이에서 단내가 흘러나오고 있 었다. "하아! 하아!" 그녀의 눈동자가 풀어지고 있었다. 침착한 조교는 여인의 두번 째 자세도 뽑아내는데 성공했다. `와와지(臥蛙之) 양안(兩眼) 몽 롱세`였다. 그는 그녀의 곧게 뻗은 다리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양쪽 발 목을 잡고 허공에서 가위 벌리듯이 그녀의 양다리를 곧게 펴서 펼쳤다. 그리고 깊고 빠르고 강하게 그녀의 몸속을 오갔다. 체조 선수 이름에서 유래된 `드가체프`였다. 그의 등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옆에 누워서 힐긋거리던 윤희가 기석과 눈이 마주치자 재빠르 게 고개를 베개속에 감추었다. 침착한 조교는 고개를 파묻고 있는 쑥스러운 여학생에게 다정 한 음성으로 말했다. "한눈팔면 못써." 베개위에 머리를 묻고 있던 윤희가 고개를 비스듬이 돌리고 빼 꼼하게 눈을 뜨며 말했다. "영옥이 언니가 너무 힘들어 보여요." 조교가 입술끝에 미소를 띄우며 중얼거렸다. "힘들긴, 이렇게 좋아하는데." 중얼거리고 난 조교는 곧바로 그녀의 동굴속에 더욱 강력한 충 격을 반복했다. 영옥은 비명같은 흐느낌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하악! 하악!" 한동안 그녀의 흐느낌을 즐기고 있던 그는 그녀의 곧게 펼쳐 있는 양 다리를 접어 내렸다. 기석은 그녀의 허벅지가 가슴에 닿 도록 양다리를 그녀의 상체위에 포개어 올렸다. 허공에 떠 있던 그녀의 양발을 그의 양어깨에 걸치도록하고 그의 기둥을 그녀의 숲속에 깊숙히 쑤셔박았다. 가장 깊은 삽입이었다. 그녀의 젖꼭 지를 두 어번 깨물어준 그의 입술은 이어서 입안가득 그녀의 젖 을 빨아들였다. 그는 그녀의 몸속깊은 곳에 자리잡은 채, 그의 꺼칠한 검은 숲으로 그녀의 연약한 숲을 무자비하게 문질러 대었 다. `남녀합일세`였다. 가득하고 뻐끈한 것이 그녀의 몸안에 채워져 거칠게 문질러지 자, 그녀는 둘이 하나가 된 벅차오르는 희열을 느끼며 양팔을 오 무려 그의 머리를 감쌌다. 기석은 그녀의 구멍에 머문채 `옆치기`로 들어갔다. 그녀의 오 른쪽 다리를 바닥에 곧게 펴게 한 후 그녀의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로 넘겨 놓았다. 그녀의 왼쪽 다리를 말처럼 타고 오른 기석 은 모로 누운 그녀의 엉덩이를 구겨쥐고 말을타고 가듯이 왕복운 동을 해댔다. 그의 엉덩이 사이로 스치는 그녀의 안쪽허벅지가 사내에게 기분좋은 감각을 보태주고 있었다. 여인이 모로누운 탓 에 아래로 몰려 출렁이는 젖무덤의 물결이 예뻤고, 꼬아져 있는 여인의 다리사이에서 눌리며 오가는 기둥의 짜릿함도 더욱 짙었 다. `옆치기`는 사내들에게 권할만한 체위였다. 기석은 모로누운 그녀를 완전히 돌려놓고 `뒷치기`로 자세를 바꾸었다. 그녀의 머리를 베개에 묻게 하고 엉덩이를 쳐들어 올 리게 했다. 날씬한 허리와 풍만한 엉덩이가 여인의 뚜렷한 곡선 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양손을 그녀의 힙(hip)에 걸치고 그녀의 갈라진 입구에 끄덕거리는 중심을 밀어 넣었다. 그는 길고 깊고 빠른 왕복을 반복했다. 허리가 날씬한 여인들이 사내를 농도짙게 자극할 수 있는 `뒷치기`였다. "아악! 하악! 학!" 기둥의 뿌리어림에 부딪치는 그녀의 엉덩이의 감촉이 그녀의 교성과 조화되어 사내를 참기 어렵게 자극했다. 박쪽처럼 벌어져 있는 그녀의 양쪽 엉덩이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최 후의 봉사를 아끼지 않기 위해 마지막 남은 힘으로 사정없이 부 딪쳐갔다. 어느순간 그녀의 몸속에 깊이 파고든 채, 그가 정지했 다. 그녀의 몸속에 한껏 박혀있던 그에게서 고요한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안에 자신의 정(精)을 모조리 쏟아내었 다. 그리고 그자세 그대로 그녀를 무너뜨리고 그녀의 뒷몸위에 널부러 졌다. 몇가지 기본적인 동작에 대한 시범을 끝낸 고단한 조교는 잠속 으로 빠져들어갔다. 희미하게 감기는 눈꺼플 사이로 화장대의 사 진이 들어왔다. 사진속의 두 여인이 밝게 웃고 있었지만, 기석에 게는 새침하게 흘기며 웃고 있는 것 처럼 여겨졌다. "미안해." 좋그맣게 웅얼거린 기석은 고른 숨을 내쉬며 잠이들고 있었다. 잠이 든 기석은 꿈의 세계로 인도되어가고 있었지만, 그의 옆 모습에는 고뇌같은 것은 어리지 않았다. 붉은 뱀들의 혀가 화살처럼 기석의 몸으로 쏘아져 왔고, 너울 거리는 가시많은 줄기들의 기석을 친친 감아왔다. 아기얼굴에 메 기의 입처럼 붙어있는 거대한 아가리에서 찢어지는 괴성이 기석 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젊은 아낙네의 싸늘한 눈빛들이 비수가 되어 기석의 가슴으로 박혀왔다. 통증이 느껴지긴 했지만 견딜 만한 것들이었다. 기석은 고개를 들어 캄캄한 하늘을 쳐다보았다. 오른손의 은빛 마가로프를 쳐들고 한점의 동요도 없는 눈동자를 조준경에 갖다 대었다. 운명을 조준한 기석은 잔잔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마가 로프의 총구에서 반짝이는 불빛은 고요한 암흑의 바다에서 반짝 이는 등대의 불빛이었다. 바벧탑의 명사수답게 총알은 모두 한점으로 날아가서 박히고 있었다. 마가로프의 열세발의 탄창이 모두 비워졌을 때, 암흑은 구멍이 뚫리고 한줄기 빛이 새파란 동아줄처럼 뻗어내려왔다. 어 둠속에 시원한 빛이 꽂히고 있었다. 기석은 더 이상 꿈이 괴롭지 않았다. 뱀의 화살이 꽂힌 채로, 가시줄기에 친친 감긴채로, 찢어지는 괴성이 귓 속에서 울려대면 울려대는 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고요한 잠을 잘 수 있는 무던한 킬러가 되었다. 죽어야 할 사람이라면 망서리지 않고 죽일 수 있 고, 죽이고 나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완전히 무심(無心)한 인간의 탄생이었다. (7) 대지진 그리고...... "언니는 힘들지 않았어?" "별로." "기분이 어땠어?" "아주 좋았어." "아프지 않았어?" "처음에만 잠깐 아팠는데, 그 다음부터는 짜릿하고 달콤했어." "난 끝날 때까지 아프기만 하던데, 눈물만 나오고." "호호호. 그래서 두번째가 좋은거야." "정말? 그런거야?" "응. 그런거 봐. 다음에는 네가 두번째해." "또 아프면 다시 안할꺼야." 기석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껌벅이고 고개를 비스듬이 돌려보니 침대 옆의 바닥에 두 여인이 앉아 있었다. 기석은 다시 눈을 감고 그녀들의 대화를 경청했다. 윤희가 재잘거렸다. "자고있는데 들어와서 훔쳐가고.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둘을 한꺼번에, 하여간 음침하고 사악한 악당이야." "호호호. 당하고나니 억울하니?" "어쩌다 내 신세가 이렇게 되었나 몰라. 언니는 억울하지 않 아?" "아니." "둘이 졸지에 도둑질 당했는데, 분하지 않아?" "사랑하는 사람인데 분하기는. 오히려 고맙지. 이제부터 오빠 는 우리말 잘 들을꺼야. 그러니까, 너무 섭섭해 하지마." "그런데, 난 왜 자꾸 분한 생각이 들까? 막 손해본 것 같구." "킥!" 그녀들의 대화를 듣고있던 기석이 잔기침을 하며 깨었다는 표 시를 했다. "쿨럭." 기석은 눈을 비비적 거리고 기지개를 켜며 두 여인에게 잘잤다 는 표시를 했다. "어! 잘잤다." 두 여인 모두 아침인사대신 말똥거리는 눈으로 기석을 쳐다보 았다. 기석도 침대에 걸터 앉으며 여인들을 마주보았다. 입꼬리 에 말아올라간 미소가 어쩌면 그녀들에게 뻔뻔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우지 않고 말했다. "너희들 덕분에 병이 다 나은 것 같다. 고마워." 기석이 자고 있는동안 기석을 헐뜯던 윤희가 180도 달라진 목 소리로 말했다. "몸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배고프지 않아요?" "배고파." "제가 가서 죽 끓여 가지고 올께요." 윤희의 갑작스런 사근사근함이 기석을 웃겼는지, 기석이 웃으 며 말했다. "하하. 아니야. 면도하고 이빨닦고 먹을께. 그리고 죽보다 밥 이 좋겠다." 잔뜩 자라 있는 수염을 부비고 있던 기석이 갑자기 개구장이 같은 질문을 던졌다. "윤희야, 어젯밤에 나때문에 무척 괴로웠지. 정말 미안해. 다 신 안 그럴까?" 윤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 "안 그러기만 해봐요! 하나도 안 괴로웠으니까 미안해하지도 말아요. 그대신 안아주지 안으면 깨물어 줄꺼예요." "크크크. 그냥 안아주기만 하면 돼?" "치. 흡족하게 안아줘야 해요. "호호호." "크크크." 기석은 목욕탕으로 들어가서 뿌연 수증기 속에서 긴 목욕을 했 다. 잔뜩 땀을 흘리고 세면대위의 거울앞에 섰다. 허연 김이 서 려있는 거울을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면도를 했다. 꺼칠한 검은 털들이 코밑과 턱에서 파릇하게 밀려내려갔다. 매끈해진 부위를 쓰다듬고 다시 거울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보일듯 말듯한 미소 를 지어보았다. 오른쪽 눈밑에 푸른 힘줄이 도드라져 보였다. 10 년전에 만들어진 상처였다. 두 여인을 동시에 얻기위해 기왓장을 눈으로 박살날 때 생긴 승전의 훈장이었다. 멍은 빠졌지만, 푸른 힘줄이 불거진 탓에 아직도 멍이 남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 밑 의 푸른 기운이 오른쪽 눈을 맑고 깨끗하게 지켜주고 있는 것 같 았다. 오른쪽 얼굴을 가리고 왼쪽을 들여다 보았다. 사악한 눈빛 이었다. 어둠을 좋아할 것 같은 음침함이 서려있는 왼쪽 눈이었 다. 기석은 두눈이 모두 차가와 보인다고 생각했다. 목욕을 끝낸 기석이 나오자, 식탁이 부산해졌다. 두 아가씨들 이 오가는 식탁이란 수선스럽기 마련이었다. 영숙보다 윤희가 식 탁에서 더 매끄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외출복을 입고 있어서 더 욱 날렵하게 보이는지도 몰랐다. "윤희 출근하니?" "네." "언제 나가는데?" "한시간 뒤쯤 나가면 되니까, 오빠 식사하는 것 보고 나갈 수 있어요." "같이 안 먹어?" "저랑 언니는 벌써 먹었어요." 가지 수가 적지 않은 반찬들이 기석으로 하여금 오랜만에 이것 저것 씹어보게 만들었다. "두부 부치는 솜씨가 제법이네? 누가 부친거야?" 영옥이가 대답했다. "윤희가 부쳤어요." 기석이 두부 한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 영옥이가 부치면 잘 태우거든." 영옥이 웃으며 말했다. "저번에 한번 태운 것을 가지고서... 남자가 그런 것 기억하면 쩨쩨해 보여요." "그런가? 윤희야 그러니?" 윤희가 대답했다. "언니말이 맞아요. 그런 거 기억하는 남자는 쩨쩨해 보여요." 기석이 여전히 우물거리며 말했다. "어쭈! 요것들이 벌써 편짰네." 마주 앉아서 기석의 먹는 모습을 구경하던 윤희가 마른침을 한 번 꼴깍였다. 기석이 그녀의 어정쩡한 모습을 눈치채고 물었다. "먹고 싶니?" "그게 아니고. 드릴말씀이 있어요." "뭔데?" "저어..." 윤희가 약간 망설이며 영옥의 눈치를 살폈다. "저... 언니하고 의논한 것인데요."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영옥이 끼어들었다. "에그. 무슨 말을 그렇게 어렵게 하니? 그냥 말하면 될 것을 가지고." 기석이 영옥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영옥이 미소를 띄고 대답했다. "윤희가 신혼여행 가고 싶대요." 윤희가 영옥이 까발린 대답에 조금 당황했는지, 얼른 부연했 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언니도 가고 싶다고 했어요." 기석이 밥알을 씹은 채 볼상사납게 웃었다. "헷헷헷헷헷! 신혼여행을 가구 싶다구? 아니 총각이 무슨 신혼 여행을 가나? 크크크크크... 그리고, 윤희 넌 매일 다니는 것이 여행아냐?" 윤희가 약간 토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치. 싫으면 그만 두세요. 누가 꼭 가고 싶댔나? 그냥 가도 괜 찮다는 정도지. 그리고, 뭐, 총각이라구. 그렇게 말하면 누군 처 녀 아닌가? 치." 군시렁거리며 씩씩거리고 있는 윤희에게 기석이 젓가락을 놓고 정중하게 물었다. "사랑스러운 신부님. 어디에 가고 싶으신가요? 지구상에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모시겠읍니다." `사랑스러운 신부님`이란 단어에 마음을 돌렸는지, 아니면 `어 디든 모시겠읍니다.`란 문구의 유혹에 빠졌는지, 윤희가 활짝 웃 으며 즉시 대답했다. "사이판요." 기석이 다시 물어보았다. "하필이면 어째서 사이판인가요?" 윤희가 대답했다. "거기는 대한항공 노선이 없어서 한번도 가보지 못했거든요." "그러시다면 언제 그리로 모시면 되겠읍니까? 사랑스러운 신부 님?" 윤희가 비행 스케줄표를 꺼내 잠깐동안 따져보고 대답했다. "오늘 휴가원을 낼테니, 다음주에 떠나요. 한 사박오일 정도 루." 기석은 고개를 돌려서 영옥에게 눈빛으로 물어보았다. 기석이 질문하는 뜻을 알았는지, 영옥이 대답했다. "그렇게 해요. 비행기하고 호텔을 예약해 놓을께요." 기석이 윤희를 다시 쳐다보며 말했다. "되셨읍니까? 신부님?" 희죽거리던 윤희가 `신부님`이란 단어가 쑥스러웠는지, 약속 받은 `신혼여행`이 부끄러웠는지, 의자 뒤에 걸쳐 놓았던 상의를 걸치자마자 쪼르르 달려 나갔다. "저 늦었어요." 기석은 현관 앞으로 도망치듯 나가는 윤희를 잡아채고 말했다. "아직 이, 삼십분 더 있어도 되잖아? 데려다 줄테니까, 천천히 나가시지요? 신부님?" 윤희가 발바닥으로 마루를 한번 거칠게 밟으며 칭얼거렸다. "그대신 놀리면 바로 나갈꺼예요." "하하! 알았어. 안 놀릴께. 신부님." 윤희가 눈을 흘기며 톡 쏘았다. "또..." "아! 그거였구나, 놀리는 것이. 알았어, 자제할께, 신..." 윤희가 장거리비행에서 돌아온 다음날인 월요일 저녁 무렵, 세 남녀는 아시아나 252기 편에 올랐다. 마침 세 명이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좌석이라서 기석이 가운데 앉고 두 아가씨들이 양쪽에 앉았다. 싱가폴 항공 유니폼 다음으로 예쁜 유니폼인 아시아나항공 유 니폼을 화장만큼 깔끔하게 차려입은 아가씨들이 서빙을 해주었 다. 음료수와 식사를 대접 받고난 후, 영화를 한편 보고난 기석 은 졸음을 쫓기로 했다. 뒤 쪽에서 때마침 지나가던 누리끼리한 제복의 아가씨를 불러세웠다. "아가씨, 죄송하지만 커피 한잔만 갖다 주실 수 있으세요?" "네. 갖다 드릴... 어머나! 기석이 오빠 아니세요?" 불러놓고보니 안면이 있는 아가씨였다. 아시아나 27기 홍윤설 이었다. 양쪽에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던 두 아가씨의 눈이 번쩍 떠졌다. 기석은 뒷골이 조금 땡겼다. 난국을 수습할 만한 적당한 계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목구비가 또렷한 예쁘장한 얼굴의 윤 설은 입이 무척 빠르고 발이 넓은 아가씨로 오렌지 물이 흐르는 곳에서 만난 아가씨였다. "어! 윤설이구나. 이야! 가는 날이 제삿날이라고 정말 반갑다. 얼른 들어가서 커피타다 줘야지?" 기석의 양옆에 앉아있는 여인의 눈초리를 잠깐 살핀 윤설이 아 직 상황파악을 못했는지, 아니면 하고도 일부러 나불거리는지, 위험한 말을 떠들기 시작했다. "지금 커피가 문제예요. 다른 데도 아니고 수천 피트 상공에서 만났는데. 요즘 무슨 일 있어요? 전화도 안 걸고 삐삐도 안치구, 전엔 뻔질나게 연락하더니......" 옆에 앉아있는 두 아가씨들이 모른 척하고 있는 바람에 기석은 점점 더 곤란해져갔다. "어! 내가 그랬나?" "그럼요. 작년 여름까지만해도 , 미현이랑, 혜숙이랑, 저랑 같 이 제주도로 놀러갔었잖아요." 기석은 약간 억울해졌다. 삐삐도 거의 친 적이 없었고, 제주도 운운하는 것도 가당치 않은 말이었다. 방배동에 제주도란 일식집 이 하나 있긴 있었는데, 거기에 한번 함께 갔었던 것도 같고, 기 석은 솔직히 아사무사했다. "그런데, 왜 난 삐삐친 기억이 안나지? 그리고 제주도라니? 혹 시 다른 남자를 나로 착각하는 것 아니니?" 윤설의 눈동자가 기석의 좌우에 앉아있는 여인들을 애써 모른 척 하고 있는 듯 했다. 윤설은 마치 그녀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호호호. 작년 여름에 제주도에 가서 회도 먹고 그런 기억 안 나세요? 그리고 다른 남자라니요? 저를 어떻게 보시고? 자꾸 모 른척 하는 것이 수상하네요." 생글거리는 윤설의 눈꼬리에서 간교한 장난을 눈치챈 기석은 어쩔수없이 오렌지물을 포기하기로 했다. 기석은 양 옆으로 앉아 있는 두 여인을 소개했다. "여기 영옥이라고, 내 부인이야. 여긴 윤희라고 하고, 역시 내 아내야. 그러니까, 윤설아, 헛소리는 좀 자제해다오." 눈을 동그랗게 뜬 윤설이 놀라며 말했다. "두 사람다요?" "응. 둘다 내 마누라야." 윤설이 양 옆의 여인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정말인가요?" 두 여인 모두 대답을 해주지 않자, 윤설이 다시 기석에게 물어 왔다. "정말 두분하고 결혼했나요?" 기석은 대답대신 기내에서 작성한 세관신고서를 보여 주었다. 신고서 내의 동반가족을 적는 난에 적힌 두 여인의 이름과 가족 관계를 보여주었다. 가족 관계란에는 두 여인의 이름과 함께 `마 이 투 와이브즈(MY TWO WIVES)`라고 적혀져 있었다. 입까지 동그랗게 벌린 윤설이 중얼거렸다. "헤, 정말, 도둑이군요." 기석이 재차 주문했다. "커피 안 갖다 줘?" 윤설이 머뭇거리며 억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애들한테 다 일러줄 테니까, 그쪽에서 총각행세 할 생각은 아 예 마세요." 기석이 투덜거렸다. "커피 한잔 얻어먹기 무진장 힘드네." 윤설이 마지막으로 쏘아부치고 사라졌다. "아까 음료 서비스 받으실 때 드셨을 텐데, 왜 염치없이 또 달 라고 그러세요. 커피 없어욧." 휑하니 사라지는 윤설의 누리끼리한 유니폼이 무척 괘씸하게 느껴지는 기석이었다. 윤설의 빠른 입을 고려해 볼 때 이제는 강 남의 오렌지 바닥에서 오렌지 기사로 행세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 다. 기석은 자신의 불운을 탓할 수 밖에 없었다. 비행기에서 내 릴 때까지 기석은 색시들의 눈치도 내내 살펴야 했다. 사이판 코레스코 관광호텔에 도착한 것은 밤 12시가 다 되어서 였다. 물발이 약한 탓에 탕안에 물을 받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샤워로 대신 하기로 했다. 꺼리낌없이 들어오는 영옥에 비해, 윤 희는 조금 망설였지만 영옥이 잡아끌자, 같이 들어왔다. 영옥에 비해 살결이 하얀 윤희였지만, 아랫도리의 숲은 영옥보다 더 짙 었다. 문질러주고 닦아주며 샤워를 끝낸 세 남녀는 캬페트가 깔린 방 으로 나왔다. 넓찍한 룸에는 더블 사이즈 침대가 두 개 놓여져 있었지만, 세 남녀는 왼쪽 침대는 쓸 생각을 안했는지, 짐을 모 두 왼쪽 침대에 올려놓았다. 그녀들이 잠옷으로 갈아 입으며 수 선을 떠는 동안, 기석은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열었다. 바깥의 더운 기운이 쏟아져 들어왔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것이 성수기에도 호텔방이 비어있는 이유 같았다. 기석은 바다대신 호텔건물 앞의 풀장을 내려다 보았다. 노란 조명등이 켜져 있는 풀장에는 자정이 넘은 시각임에도 불구 하고 몇 사람이 물을 가르고 있었다. 베란다의 푸른색 벽에 가운데 손가락 만한 초록색 도마뱀 두 마리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열대의 야자수가 삼, 사 미터 앞에서 3층의 베란다까지 자라 있었다. 영옥과 윤희가 뒤에서 다 가왔다. 두 여인 모두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잠옷을 입고 있었다. 영옥 은 짙푸른 색이었고, 윤희는 밝은 분홍색이었다. 색깔을 고르는 눈은 윤희보다 영옥이 한수 위인 것 같았다. 윤희가 기분좋은 탄성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 바깥이 참 이쁘네요." "네가 훨씬 더 이뻐." 기석이 추켜주자, 순진한 단발머리 아가씨가 재차 확인하고 싶 어했다. "정말?" "그럼." "저 불빛보다 더 이뻐요?" "물론이지. 불빛뿐이겠어." 맞장구 쳐준 기석은 윤희 바로 옆 베란다 벽에 붙어 있는 도마 뱀을 가르키며 말했다. "저것 보다도 더 이쁜데." 기석이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가던 윤희가 눈을 크게 뜨며 기 석에게 달라붙었다. "엄마야!" 윤희의 부드러운 잠옷천 속의 젖살이 기석의 맨가슴에 눌려졌 다. 부드럽고 육감적인 감촉이 피부에 닿아오자, 기석은 자신의 가운데 토막이 불쑥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바깥구경에 관심이 없어진 기석은 두 여인을 데리고 룸안으로 들어갔다. 뜨 꺼운 바깥공기를 막기 위함인지, 기석은 베란다 문을 닫아버렸 다. 잠시후, 룸안에서 요사스런 소리들이 창 밖으로 새어나왔다. 에어컨 소리 같지는 않았다. 베란다로 흘러나오는 요망한 음향들 이 사이판의 열기보다 더욱 후끈거리는 것 같았다. 물이 많은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섬이지만, 섬이 의례 그렇듯 이 사이판도 빗물로 식수를 대신하고 있었다. 호텔 4층의 한식당 에서 아침을 먹고, 식당 아주머니의 소개로 사이판 관광 안내를 맡아줄 사람을 한명 구했다. 운좋게도 이곳에와 농사를 짓는 한 국인이었다. 장씨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가이드는 삼십대 초반 정 도로 보이는 매우 친절한 사람이었다. 사이판 거리를 달리는 대부분의 차량이 일본차였다. 세로 24키 로미터 가로 15키로미터 밖에 안되는 조그만 섬이어서인지, 도로 에는 단 한개의 신호등도 없었다. 자신의 혼다로 관광안내를 하 며 부수입을 올리는 장씨가 설명했다. "그냥 감으로 좌회전 우회전 하고 살아도 교통사고가 거의 나 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착해서요. 사이판은 이곳 원주민과 필리 핀 계와 한국인 2, 3세들 그리고 일본애들이 좀 살고 있는 섬이 죠." 달리는 차안에서 거리 옆의 학교 비슷한 건물을 가르키며 장씨 가 계속 설명했다. "저곳이 사이판에서 하나밖에 없는 고등학교입니다. 웃기는 것 은 학교에서 1, 2등 하는 것은 모두 한국계예요. 걔네들이 공부 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닌데, 이곳 사람들과 똑같이 놀면서 하는 데, 그것참, 1등이란 말이죠. 우습지 않나요? 허허허!" 혼자 떠들고 혼자 웃고 하면서 자상하게 설명해주는 장씨였다. 친절한 장씨의 도움으로 사이판 곳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2차 대전 중의 전적지인 까닭에 일본군의 잔해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살 절벽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항복을 거부하던 일본병 사와 민간인들이 이곳에서 자살을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2백미터가 넘는 이 절벽 주위에서는 지금도 가끔씩 유골이 발견 된다고 한다. 일본병사는 그렇다치고, 민간인들이 자살한 이유가 궁금해서 안내인 장씨에게 물으니, 장씨가 대답해주었다. "저도 잘은 모르겠고요. 당시에 민간인 이라야, 징용당한 한국 인하고 이곳 원주민들인데, 그들이 미쳤다고 일본 망하는 데 절 벽에서 뛰어내렸겠읍니까? 전쟁에 미친 놈들이 떠밀었다면 모를 까." 그외에도 여러 전적지를 돌아보았다. 일본군 최후의 사령부, 만세 절벽, 새섬, 그로토동굴, 등등의 전적지에는 패전한 일본군 의 잔해도 잔해지만, 징용당해 이곳까지 끌려온 한국인 조상들의 무의미한 죽음들을 곳곳에서 읽을 수 있었다. 사이판 내부의 관광을 끝내고, 오후에 배를 타고 마나가하섬으 로 갔다. 바다밑바닥을 볼 수 있도록 배의 중심부를 투명하게 만 든 까닭에 백산호를 많이 구경할 수 있었고, 바다에 가라앉은 일 본 전투기의 잔해도 볼 수 있었다. 일곱가지 바다색을 볼 수 있는 마나가하 섬 주변바다에서 기석 은 두 여인과 함께, 햇빛과 수영을 즐겼다. 모래에 엎어진 두 여인에게 썬 오일을 문질러 주며 미끈한 감 촉을 즐기던 기석이 말했다. "난 누가 발라줄꺼니?" "저요." "저요." "둘 다 발라라." 오일을 잔뜩 바르고 바닷속에 들어간 세 남녀는 물장난을 제법 했다. 수경을 끼고 물속을 들여다 보면 많은 열대어들이 떠다니 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손바닥에 쏘세지 한조각을 들고 있으면 수십마리의 각양각색의 열대어들이 손바닥 위로 몰려들었다. "앗 또 헛손질!" 윤희가 물속에서 연신 고기를 움켜쥐려했지만, 엄청 빠른 열대 어들은 쏘세지 조각은 집어먹고 잡혀주질 않았다. "못 잡는 고기니까, 욕심부리지 말아라." 기석이 타이르자, 윤희도 고기잡는 짓은 그만하고 기석에게 수 영을 가르쳐 달라고 칭얼거렸다. 기석이 개헤엄을 가르쳐주자, 영옥은 옆에서 웃고만 있었고, 윤희는 금방 따라했다. 마나가하 섬에서 사이판 코레스코로 돌아온 세 남녀는 호텔 풀 에서 다시 목욕 비슷한 수영을 했다. 물보다는 두 여인의 젊고 아름다운 살 속에서 남국의 낭만이 실감나는 기석이었다. 저녁을 일찌감치 먹고 기석은 침대위의 스 포츠를 날짜가 바뀔 때까지 즐겼다. 아니 두 번은 즐겼고 두 번 은 치루었다. 네 번을 채우고 나니, 네번은 죽을 사(死)자라는 미신에 가깝다며 두 여인은 한번 더를 재촉했고, 기석은 두 번을 더 채워야 했다. 새벽까지 이어진 마지막 두번은 고역이었다. 오후로 넘어가기 직전까지 뻗어있던 기석은 그녀들을 경비행기 에 태워 티니안 섬으로 데려갔다. 티니안은 마나가하 섬에 비해 사람이 별로 없는 조용한 섬이었 다. 고대 타가유적의 바위들이있었고, 한국인 위령탑도 있었다. 2차대전 당시 약 5천명 정도의 한국인이 이곳 티니안에 끌려와 노예같은 생활을 했다고 한다. 위령탑 옆에는 2차대전 말기에 시 체들을 태웠던 벽돌로 만든 화로가 있었는데, 당시에 생존했던 노인을 아버지로 둔 사람이 설명해주기를, 죽은 사람뿐만이 아니 라, 살아있는 병자들도 태웠다고 한다. 당시 일본군의 잔학성에 치를 떨 수 밖에 없는 한국사람의 마음을 일본인들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화로였다.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이곳 티니안에 서 미군의 B 29 에 실려져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것이 우연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티니안에서 한국인 3세가 경영하는 목장에서 바나나를 실컷 얻 어먹었다. 윤희와 영옥의 미모와 싹싹함이 공짜로 얻어 먹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던 것 같았다. 기석은 마침 이곳에서 벌어지는 투계(닭싸움)를 볼 수 있었다. 이곳의 닭싸움은 약간 특이한 점이 있었다. 닭의 발목에 칼을 묶 어놓고 싸움을 시키고 있었다. 몇 번인가의 싸움에 모두 이겨서 챔피언이 여러번 되었다는 유능한 닭이 싸우는 것을 보았다. 깃털이 날리는 가운데 활개치고 날아오르고 쪼고 하는 동작들 이 여러번 반복되고 있었다. 붙었다가 떨어지는 모습이 중국영화 의 칼잡이들이 부딪쳤다가 떨어지는 장면과 흡사했다. 결판은 아 주 우습게 났다. 도전자 닭이 공중에 떠오른 순간 챔피언이 벌렁 드러누었다. 공중에서 내려오던 도전자 닭이 챔피언의 발목에 묶 인 칼날에 그대로 꿰어져 버렸다. 기석은 그 챔피언 닭을 오백불이나 주고 샀다. 그리고 사자마 자 목을 비틀어 죽여버렸다. 윤희가 물었다. "비싼 돈을 치루고 산 닭을 왜 죽였나요?" 기석이 대답했다. "다른 닭이 이 닭처럼 칼 쓰는 법을 배울까봐서..." 다행히 오백불을 다 날리지는 않았다. 질긴 닭을 요리할 줄 아 는 기석이라서, 사이판 코레스코의 한식당 아줌마에게 주방기구 를 빌려 그녀들에게 몸보신을 시켜줄 수 있었다. 호텔에서 닭백숙으로 몸보신한 세 남녀는 사이판이 자랑한다는 석양을 보기위해 `선셋 바`라는 곳을 찾아 들어갔다. 해변을 정 면으로 둔 실내에서는 필리핀 춤인 `차차`의 음악이 흐르고 있었 고, 정면의 모래사장에는 그네가 흔들리고 있는 곳이었다. 맥주 두어 병과 이름을 알 수 없는 튀김 두어 가지를 안주로 시켜놓고, 기석은 두 여인을 데리고 해변으로 나가 그네를 태워 주었다. 그네에 타고있던 윤희가 갑자기 감상적인 여운을 깔았다. "오빠 고마워요." "뭐가 고마운데?" "절 여기에 데려와 주셔서 고맙구, 그냥 다 고마워요." 기석이 가벼운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네가 고마워 할 것이 뭐가 있겠니? 진짜 고마운 것은 나겠지. 염치없는 것도 나고. 나는 영옥이하고 너에게 평생 갚아도 갚기 어려운 신세를 지고 만거다. 죽기전까지 다 갚을 수 있을지 모르 겠다." 옆에서 윤희와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영옥이 그네에 앉아 흔들거 리면서 말했다. "빚이라고 생각하시면 평생 못 갚으실 꺼예요. 저나 윤희 모두 오빠에게 인생을 걸고 오빠의 여자가 되었어 요. 오빠가 저희들을 다정하고 자상하게 아껴주고 계시다는 것이 느껴져요. 하지만 저희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런 친절 함보다 오빠의 사랑이 느껴지기 때문이예요.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에게서 사랑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것 은 당연한 심정이예요. 하지만 오빠는 그런 소리를 들려주시지 않았어요. 저나 윤희는 그래도 행복해요. 오빠가 말은 못해도 마 음으로 저희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있기 때문이죠. 저희 는 오빠의 인색한 열등감을 잘 알아요. 그러니, 저희들에게 해주 지 못하는 말 때문에 어려운 부담감같은 것은 갖지 마세요. 저희 는 듣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사랑이면 만족하니까." 지평선으로 떨어지는 석양아래에서 기석은 미안함을 느껴야 했 다. 두 여인이 자신이 그녀들을 사랑하고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그녀들의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기석은 자신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일 수 있는 그런 인간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기석에게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기석은 개념에 전문성과 철저한 정직성을 추구하는 별종의 인 간이었다. 개념에 대한 정의를 내릴 때면 기석은 수학이상으로 세밀한 조건으로 어정쩡한 것들을 모조리 잘라내 버린다. 그리고 순수한 정화만을 개념으로서 받아들인다. 물론 그렇게 얻어지는 개념은 그 혼자만의 개념일 뿐이었다. 기석이 한 인간으로서 다 행스러운 것은 그렇게 까다롭게 얻어지는 개념의 실행을 다른 사 람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비단 강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폭넓은 우유부단을 잘 이해해주고 납득해 주 었다. 그것은 그 자신이 알맹이만을 추출해가는 과정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 보았기 때문이었다. 인정, 의리, 사랑, 등등의 추상적인 개념들에 대해 기석은 매 우 까다롭고 복잡한 조건을 달아놓고 있었다. 기석을 평생동안 괴롭게 만들었던 것은 개념들에 대한 조건의 복잡성보다 실행의 어려움이었다. 그래서 그는 가장 가치있는 하나의 개념을 선택해 주력하기로 했고 그것이 여인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런데 기석의 가장 큰 실수는 여인에 대한 사랑에 단발성의 개념을 집어 넣어 버리고 만 것이었다. 기석은 `여인에 대한 사랑`이란 개념의 정 의를 스스로 완성했다고 생각했고, 그 개념에 맞추어 지금까지 살아온 대단히 희귀한 사람이었다. 기석은 `사나이 한평생에 사 랑은 한번` 이라는 철학이 담겨있는 여인에 대한 사랑을 이미 실 패했기에, 영옥과 윤희에게 그녀들이 받고 싶어하는 것을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었다. 기석이 사랑을 잃고 몰두한 개념은 죽음이란 개념이었다. 좀 더 분명히 짚어본다면, `죽어야 할 자(者)의 죽음`이었다. 죽음 이 기석의 새로운 추구 대상으로 선택된 이유는 `여인에 대한 사 랑`의 실패에서 비롯되었다. 기석은 자신의 가치를 잃은 것은 아 니었지만,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대상이었던 영숙과 현주를 잃 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여인에 대한 사랑`은 가장 추구하고 싶은 가치였지만 추구할 수 없는 가치가 되고 말았다. 사랑을 잃고 상실감에 빠져있던 기석은, 실패는 곧 자신의 죽 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매혹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죽어야 할 자(者)의 죽음`을 그의 새로운 가치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사랑 을 잃은 불안한 상황에서 가치를 정립해버린 까닭에, 기석은 새 로운 가치 `죽어야 할 자(者)의 죽음`에 대한 불안정한 요소들을 제거시키기위해 고생을 많이해야 했다. 고뇌를 겪어야 했고, 고 비를 넘겨야 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기석은 그네위에 앉아 흔들거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두 여 인의 이마에 깊은 입맞춤을 해주었다. 기석은 그녀들의 이마에 찍히는 자신의 입술은 미안함과 감사이며 자신이 살아있는한 영 원히 아껴주겠다는 맹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랑은 아니라고 끝끝내 도리질 하는 기석이었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자 기석은 두 여인을 실내로 데리고 들어갔 다. 그녀들이 따라주는 술을 연거퍼 비웠을 때였다. `선셋 바`의 입구에서 한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중에는 기석에 게 아주 낯선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이건이었다. 기석은 빈잔에 맥주를 한가득 부어서 이건의 테이블로 가져갔 다. 기석은 가득 찰랑거리는 맥주를 들이밀면서 말했다. "마셔. 여긴 웬 일이야?" "어! 기석이 아냐. 네 놈은 웬일이야?" 이건이 기석을 대뜸 알아보고 반색을 했지만, 약간 어색하게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기석이 개의치않고 대답과 질문을 했다. "난 신혼여행왔지. 넌?" "신혼여행이라구? 신부는 어디있어?" 기석이 턱짓으로 영옥과 윤희가 앉아있는 곳을 가르키자, 이건 이 고개를 돌려 그녀들을 보았다. "집에 있던 그 아가씨들이네. 둘 다 동시에 해치운거니?" 기석이 대답했다. "해지우긴 내가 당했지." "에라! 이 몰염치한 자식아!" 기석이 계속 서있자, 이건이 따라서 일어났다. 기석과 이건은 사람들이 없는 바닷가로 나갔다. "여기엔 왜 온거니?" 이건이 대답했다. "해군에서 암석분쇄기를 개발했는데, 바닷속에서 실험하려고 해. 그것에 대한 자료수집차 왔어." 기석이 다시 물었다. "암석분쇄기를 실험하려고 여기까지 와야하니?" 이건이 조금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 암석분쇄기는 바다 밑바닥의 암석을 깨뜨리는 데 사용하는 것인데 잠수함에 장착해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나 봐. 지 금 장착할 잠수함이 여기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거든." "어디있는데?" "이오지마 부근이야." 기석은 근래에 와서 `이오지마`에 대해서 자주 듣는다고 생각 했다. 또 안기부내에서 가장 꼽아준다는 엘리트 안기부맨 이건이 가 바닷속 암석분쇄기 정도 때문에 여기까지 출장와야 한다는 점 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에게 그런 의구심을 드러내 어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그만 들어가자. 서늘한 것이 별로 기분이 안좋다." 기석이 실내로 발길을 돌리자 이건이 뒤따라 붙으며 말했다. "저 아가씨들한테 인사나 시켜줘라." 기석이 비릿하게 웃음을 흘렸다. "크크크. 이녀석아, 아가씨들이 아니고 유부녀들이야." 이건이 물었다. "남편은 너구?" 기석이 대답했다. "물론이지." "확인해볼까?" "마음대로..." 이건은 끝끝내 따라와서 기어코 윤희가 따라준 맥주 한잔을 얻 어 먹었다. "이녀석 어디가 그럴듯해서 여기까지 같이 오셨나요?" 윤희가 이건에게 대답해 주었다. "잠깐 속았다가 눈을 떠보니까 여기던 걸요." 이건이 혀를 끌끌차며 말했다. "쯔쯔. 쇼핑할 때 TV를 잘못사도 냉장고를 잘못사도 에프터 써 비스를 받지만, 남자는 한번 잘못 고르면 에프터 써비스는 커녕 그대로 신세 조지는 거 아세요?" 이번에는 영옥이 이건에게 반문했다. "저희들이 잘못 고른 것인가요?" 이건도 반문했다. "불량품이란 생각 안드나요?" 영옥이 웃으며 대답했다. "호호. 불량해 보였지만, 불량품은 아니었어요." 이건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요즘 불량품은 처음부터가 아니라 쓰다가 불량해진다는 거 아 시나요?" 이번에는 윤희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불량식품이 더 맛있잖아요." 이건이 또 물었다. "불량식품 좋아하시다가 배탈나면 어쩌시려구?" 윤희가 대답했다. "소화제 먹죠." 이건이 윤희 앞에 고개를 바짝 기울이며 물었다. "제가 소화제가 필요없는 남자 하나 소개해 드릴까요?" 윤희가 솔깃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누군데요?" 이건이 기석을 깔아보며, 나직한 음성으로 윤희에게 소개했다. "기석이 정도는 콧김에 날려버릴 사람인데. 성은 방이고 이름 은 이건올시다. 사람들이 최민수로 종종 착각하는 바로 저지요. 헐.헐.헐!" 윤희가 움추리며 내뱉었다. "어머나! 징그러워라. 언니! 나 소화제 한알만." 영옥이 물었다. "소화제는 왜?" 윤희가 이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넘어올려구 해서." "호호호." "크크크." 이건이 하는 수작을 지켜보기만 하던 기석이 맥주 한잔을 따라 주며 말했다. "것 봐. 하늘은 정의의 편이야. 너같이 친구 마누라 노리는 놈 을 누가 좋아하겠니? 한잔 먹고 어서 꺼져라." 이건이 한숨같은 한마디를 뱉으며 기석이 따라준 한잔을 입술 로 가져갔다. "아! 왜 난 안될까!" 시원하게 들이키고난 이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작별의 인사말 을 늘어놓았다. "제수씨들, 달콤한 신혼여행 보내시고, 돌아가셔서 기석이 눈 돌리지 못하게 감시 잘 하세요. 이 아주버니도 기석이 바람 못 피는 데 틀림없는 한 몫을 해드리겠사오니 장가 좀 갈 수 있도록 길 좀 터 주시구요. 귀찮은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아멘." `선셋 바`에서 호텔로 돌아온 기석은 이건이 잠수함을 타야 하 는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지만, 뚜렷하게 연결지을 만한 실 마리를 건져내지 못했다. 미심쩍은 구석은 분명히 있었다. 이건 이 헛소리를 가끔 하긴 해도, 사내들끼리 있을 경우에나 그랬다. 여자 앞에서까지 너저분한 주접을 떠는 녀석은 아니었다. 영옥과 윤희에게 어설픈 농찌거리를 둘러댄 것은 이곳에 온 목적을 감추 려 하는 의도가 분명했다. 기석은 머릿속이 약간 복잡하다고 느껴졌다. 단순하게 넘겨버 리기엔 찜찜했지만, 머리를 굴린다고 더 얻어질만한 것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기석은 신혼여행만 생각하기로 했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있는 두 여인을 힐끔거리면서, 만만치않은 신혼 밤의 행사를 위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오늘밤도 무 사히 넘어가기에는 너무 긴 밤이었다. 신혼여행의 마지막 날은 제트스키로 장식했다. 한국에서는 소형선박면허증이 있어야 탈 수 있는 제트스키지만 사이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왼쪽 손잡이의 스위치로 가동시키 고 오름쪽 손잡이의 레버로 속도를 조절하고 균형을 잡았다. 푸 른 해수면에 하얀파도가 일었다. 여인들은 처음에는 앉아서 탔 고, 그 다음에는 무릎을 어정쩡하게 구부린 자세로 탔고, 곧이어 선자세로 능숙하게 탈 수 있게 되었다. 필림 열통이 들어간 4박 5일의 신혼여행을 아쉽게 끝내고 세 남녀는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여행은 두 여인과 한남자의 관계를 농도 짙게 만들어 놓았다. 기석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날 밤부터 그녀들의 노골적인 공격 에 시달려야 했다. 달콤하고 고달프고 보람있는 나날들이 이어졌 다. 이처일부(二妻一夫)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지 나흘이 지난 17 일 아침에 기석은 어린 아내의 울부짖는 소리에 깨어나야 했다. "어흑! 흑! 엉엉!" 영옥이 윤희를 달래고 있었다. "흑흑흑... 엄마.. 흑흑... "무사하실거야. 너무 걱정 하지마." 기석이 윤희의 흐느낌에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윤희에게 다가 가 어깨를 감싸주며 물었다. "무슨일이야?" 영옥이 대신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뉴스 좀 들어보세요." 그러고보니 거실의 TV가 켜져있었다. 뉴스는 고베 지진 속보를 들려주고 있었다. "성인의 날을 포함해 14일부터 3일간 계속된 연휴끝을 강타한 일본 긴키 지방 강진은 고베 앞 바다를 진앙지로..." 기석이 윤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작은 할아버지 댁이 어디야?" 윤희가 울먹이며 대답했다. "흑흑...고베예요." "고베 어디?" "흑흑... 니시노미야에 있는 아파트라고 했어요." 기석이 윤희의 들썩이는 등을 토닥이며 물었다. "일본에 전화해봤어?" 윤희가 더 크게 흐느끼며 말했다. "으흑! 엉엉! 전화가 안되요." 기석이 조금 놀랐다. "전화까지 안된다고?" 때마침 TV화면에서 일본이 어떠한 지진에도 끄떡없다고 자랑하 던 고속도로가 나왔다. 다른 고속도로보다 건설비가 3.5배나 더 들었다는 고속도로였다. 고속도로는 엿가락처럼 휘어져 있었다. 기석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대지진......" 기석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짚히지 않는 모호함 이었지만 흩 어져 있는 것들이 일렬로 나열되며 기석의 육감을 자극하고 있었 다. 굴착기, 핵, 바닷속 암석분쇄기, 잠수함, 그리고 대지진... 지진이라는 자연의 거대한 습격에 인위적인 개입을 떠올릴 수 는 없었지만, 기석은 정체모를 전의(戰意)에 휩싸이고 있었다. 기석은 보이지않는 테러에 대한 승부욕을 느꼈다. "고베로 가봐야겠다." <소설, 안전기획부(8)> (1) 어린 아내의 청부 이건은 고베지진에 대한 기사로 대부분의 지면을 채운 신문들 을 덮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니 찌뿌드한 날씨가 가뜩 이나 무겁고 부담스러운 가슴을 더욱 압박하는 듯 했다. 이건은 방정철을 떠올렸다. 안기부에 붙잡혀와 물고문을 받다가, `탁치니 억하더라.`란 유 행어를 만들어놓고 죽은 방정철이었다. 5공말기 민주화의 불꽃에 기름을 뿌린 방정철 고문치사 사건은 당시에 거리에서 돌을 던져 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기억하고 있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방정철 고문치사 사건은 민주인사를 자처하는 수많은 정치권 무리들과 학우의 죽음에 분노해 마지않는 순수이성들을 결집시켰 고, 결과적으로, 직선제 개헌을 이땅에 관철시켰다. 방정철 사건이 터지자마자 일반시민들까지도 한 대학생의 억울 한 죽음에 돌을 들었다. 야당인사들과 대학생들은 분노와 억울함 으로 거리에 뛰쳐나와 방종철의 죽음을 군사독재를 몰아내기 위 한 거리의 행사로 만드는데 기꺼이 동참했다. 방정철의 죽음은 야당인사에게는 정치적 호재로서, 20대 학우 들에게는 젊은 날의 혈기로서, 일반국민들에게는 야비한 권력집 단의 포악의 상징으로서,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큰 목소리와 비통한 절규들은 일반시민들을 거리로 불러낼 수 있었고, 남대문과 서울역 광장을 자욱한 최루가스로 가득차게 했 다. 외국 언론사에서 파견나왔음이 분명한 금발의 여기자는, 좀 더 그럴듯한 사진을 찍기 위해서인지, 치마바람에 구두를 벗어던 지고 맨발로 남대문의 담벼락으로 기어오르기도 했다. 그래서 직 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이 나왔다. 당시 5공 정부로 서는 항복선언이나 다를 바 없었던 6.29선언이었다. 방정철 사건이후, 안기부는 고문에 대한 비판적 여론에 시달려 야 했다. 신문마다 안기부를 욕했고 고문했던 수사관들은 살인마 가 되었다. 민주인사에 대한 탄압의 대명사요, 권력의 개노릇을 하는 안기부가 되었다. 영화속에 무수히 등장하는 세계유수의 정 보기관과 어깨를 겨루며 국가의 안보를 책임지기는 커녕, 자국의 연약한 대학생이나 붙잡아다가 때려죽이는 안기부였다. 열혈의 학우들은 고문을 철폐하라고 했고, 안기부 자체를 없애 라고 했다. 그들은 자신의 학우를 죽인 안기부를 뭉게 버리자고 분노해서 소리치고 욕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범 안기부는 없어지 지 않았다. 고문에 참가했던 몇몇 수사관들이 체포된 것이 고작 이었다. 이건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상세히 살펴 볼 수 있는 입장이었다. 방정철이 같은 대학내의 학우이어서 이 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이건과 정철은 오촌당숙으로 비교적 가까 운 사이였다. 방정철의 죽음은 이건에게 분명 적지 않은 슬픔이 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건은 곡소리 한번 제대로 내볼 겨를이 없 었다. 들락거리는 사람들 모두가 너무 바쁘게 오가고 있었고 이 건보다 비통하게 절규하며 큰 목소리로 대신 부르짖어 주는 바람 에, 이건은 그냥 지켜보기만 해야했다. 이건은 방정철의 죽음 뒤에도 망하지 않는 안기부를 기특해 하 며 안기부 입사를 결심했다. 안기부 자체를 없애지 못할 바에야, 남에게 안기부 공작을 맡기는 것보다는 이건 자신이 안기부원이 되어 스스로 안기부 내의 공작을 떠맡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건은 입부했다. 안기부가 자국민(自國民) 을 다시는 때려 죽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 후, 이건은 안기부를 욕하는 친구들이나 후배들을 볼때면 안기부 입사를 권유했다. 밖에서 입만 살아서 떠들지말고 들어와 서 맘에 안드는 부분을 고치라고 설득을 했다. 그런 설득이 주요 해서인지, 이건때문에 안기부원이 되어 일하고 있는 후배들이 열 명이 넘은지 오래다. 웃기는 것은 애족이니 애국이니 열심히 떠들던 녀석들도 장가 가서 여자하나 들여놓으면 싹 달라지는 것이었다. 돈봉투 가져다 가 마누라한테 자랑하고 싶은 충정이야 그렇다치고, 원칙적으로 누구에게도 노출시켜서는 안되는 안기부원이라는 자신들의 위치 를 미화하며 떠벌리는 졸장부들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건은 여자도 포기해야 했다. 애국자에서 보통사람으로 변해가는 주위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이건의 애족애국은 점점 더 깊어져 갔다. 이건은 언제부터인가 하루에 두 번씩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 는 습성까지 배였다. `민족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 나 자신의 삶을 모조리 바치고 있는가? 입으로 충성하는 정치인들이 있고, 직업으로 충성하는 군인들이 있고, 글로 충성하는 글쟁이들도 있 다. 그들의 입과 직업과 글을 다합친 것만큼 나는 충성을 다하고 있는가?` 사실 이건의 이런 충성심은 지나치다싶을 정도로 깊어지고 있 었다. 잠에서 깨어나서 다시 잠드는 시각까지 민족과 국가의 이 익만을 따지고 헤아려보는 이건이었다. 여자, 돈, 명예, 어느것 도 이건에게는 한올의 관심꺼리조차 되지 못했다. 오로지 민족과 국가였다. 그것은 방정철의 죽음이 있기 전까지 민족과 국가에 대해 무관심했던 반성도 없진 않았겠으나, 그보다는 일종의 오기 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건은 방정철의 죽음이후 수많은 애국자들을 보았다. 그들은 민족과 국가에 대한 열정을 하나도 수줍어 하지않고 마구 떠들어 댔다. 그래서 이건도 애국자가 한번 되어볼 것을 다짐했다. 얼마 나 민족을 사랑하고 얼마나 국가를 사랑해야 저런 사람들처럼 큰 소리로 자연스럽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라고 떠들을 수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이건은 결벽증 비슷한 것에 걸렸 다. 민족과 국가의 이익만 생각하려는 결벽이었다. 애족애국이외 에 다른 욕구가 떠오르는 자신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이건이 었지만, 아직 누구에게도 자신의 민족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입으로 표현하지는 못했다. 입으로 표현해 버리면 이제껏 청춘을 썩히며 쌓아왔던 애족애국의 탑이 그대로 무너져 버릴 것만 같 은, 미신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건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신문을 펼쳤다. 오 천명이상의 사 망자와 수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고베 대지진 기사를 꼼꼼히 읽 어 내려가는 이건이었다. 읽어 내려가는 이건의 눈빛에는 자조적 인 연민의 빛도 언뜻언뜻 스치고 있었다. 이건은 그럴 때마다 고 개를 도리질 하며 눈빛을 추스렸다. 그리고 나직하게 중얼거리곤 했다. "약해지면 안돼. 상대는 일본이야......" 히로시마에서 헬기로 고베에 도착한 기석과 두 여인은 곧장 니 시노미야를 찾아갔으나, 아파트가 있었던 장소에는 아파트라고 불릴만한 것이 없었다. 수십동의 건물들이 허물어져 있었다. 무 너진 콘크리트 더미와 짓뭉개진 가재도구들, 그리고 틈새에 끼어 있는 시체들이 있었다. 지진 발생후 이틀이 지나고 있었지만, 아 직도 구조작업이 한창이었다. 구조요원들의 구조작업 현장에 접근하기 어려워 안타까운 구경 꾼이 될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시체가 발견되고 들것에 실려 나올 때마다 가족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그속에는 윤희도 있었다. 가끔씩 윤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도로 펴지곤 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대, 여섯 시간째 서성이며 울먹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애처로웠다. "너무 염려하지마. 어디 외출 나가셨을지도 모르잖아." 영옥이 위로했지만 윤희의 눈물만 더욱 자극하고 말았다. "흑흑. 새벽에 무너졌다는데 어딜 가셨겠어요. 흑." 더러 운좋은 생존자들이 구조되기도 했지만, 그들도 대부분 끔 찍한 몰골들이었다. 발이 부러진 할머니와 팔이 꺽여진 청년, 얼 굴전체가 까맣게 타서 입술만 하얗게 말라붙은 어린 소녀등이었 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 노란색 방호복을 입은 구조대원들이 너 댓 개의 들것을 줄줄히 들고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물결을 간신히 파고든 윤희의 눈빛이 흔들거렸다. 두 어사람을 떠밀다시피하고 다가간 윤희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 아져 내렸다. 목부위가 끔찍하게 파여진 중년남자와 고개가 이미 꺽여진 중 년여인이 그 속에 있었다. 시체에 다가간 윤희가 떨리는 손을 뻗 어 여인의 목걸이와 아버지를 확인했다. "흑흑! 흑! 엄마, 아빠..." 무릎을 끓고 오열하는 어린 아내의 비통한 모습이 기석의 눈시 울을 붉게 만들어 놓았다. 영옥도 윤희 곁에 쪼그리고 앉아서 같 이 울고 있었다. "흑흑. 흑흑." 기석은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린 어린 아내를 달랠 자신이 없어 서 망연히 우는 모습만 지켜 보아야 했다. 기석은 윤희의 흐느낌이 잦아들자 그녀의 들먹이는 어깨를 가 만히 짚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흑."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녀의 하얀 목이 기석을 자극했다. 그것 은 분노였다. 기석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10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윤희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손안의 10달라를 나에게 주면서 나를 따라해." 기석은 조그맣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 최윤희는 부모님의 복수를 프린세스 낙랑에게 일임한다." 의아해 하는 눈빛으로 기석을 쳐다본 윤희는 기석의 진지한 눈 빛에 최면술에라도 걸렸는지, 무의식적으로 따라했다. "나, 최윤희는 부모님의 복수를 프린세스 낙랑에게 일임한다." 기석은 윤희가 건네준 10달라를 받아 잘 접어서 챙겨넣었다. 어린아내로부터의 청부는 접수되었다. 기석은 윤희대신 주일대사관 오사카 공사관에 지진재해 사망신 고서를 제출해 주었고, 외무부의 재외국민 영사국 소속 비상 대 책반에 사고상황과 그에 따른 사후처리 문제를 수습했다. 처리할 것들을 대충 처리해놓고 교민단체가 마련해준 숙소에서 영옥과 윤희를 하룻밤 재웠다.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았던 터라 다음날 기 석은 윤희와 영옥을 서울로 떠나 보내야 했다. "윤희야, 너무 상심하지 마라. 두 분이 함께 떠나셨으니, 외롭 지는 않으실꺼야. 두 분은 혼자남은 너를 걱정하시고 계실꺼다. 그러니, 힘 내." 윤희가 습기로 젖은 눈썹을 깜박이며 기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차분한 음성이었다. "오빠, 저에게 한가지 약속해 주세요." "무슨 약속?" "제가 죽기전까지 제 곁을 떠나시면 안돼요. 오빠 품 안에서 제가 죽을 때까지 살아계셔야 해요. 이런 일을 당하고 나니 세상 에 혼자 남는 것보다 두려운 것은 없다고 여겨져요. 그러니 저보 다 오래사셔야 해요. 아셨죠?" 기석은 쓴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후후. 그래. 오래오래 살다가 너 죽으면 무덤 예쁘게 만들어 주고 죽을께." 옆에서 듣고 있던 영옥이 끼어들었다. "그럼 내가 제일 먼저 죽겠네." "크크. 글쎄다. 보통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제일 오래 살더 라." "치. 나도 혼자 남기는 싫어요." 윤희가 입가에 조그만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언니랑 저랑은 같이 죽으면 되잖아요. 오빠는 우리 무덤 예쁘 게 만들어준 다음 곧바로 따라오시구." 영옥이 웃었다. "호호호. 오빠가 행여나 곧바로 따라오겠다. 우리 죽으면 화장 실가서 몰래 웃고는 로맨스 그레이 어쩌구 하면서 할머니들 쫓아 다니며 혼자서 잘 놀꺼야." 기석도 웃었다. "허허허. 영옥이가 맞추긴 맞추었는데, 로맨스 그레이까지만 맞았다. 내가 미쳤니? 할망구들 따라다니게. 쌩쌩한 스무살 짜리 아가씨들 놔두고......" 영옥이 흘겨보며 말했다. "그러기만 해봐요. 매일 밤 꿈에 나타나서 백 번씩 안아달라고 할테니깐. 아마 하루도 못가서 복상사 할껄요." 기석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꺼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두 번은 스무살 새색시들하고 놀아줘야 하니까, 아흔 여덟 번 정도로 봐주면 안돼? 그래야 복상사해도 후회가 없지로?" 기석은 영옥에게 옆구리를 강력하게 꼬집혀야 했다. "에잇!" "아윽!" 기석과 영옥의 농담때문인지 윤희가 희미한 미소를 유지하고 물었다. "오빠는 언제 쯤 서울에 오시게 되나요?" 기석이 대답했다. "이 삼일 뒤에, 시신 송환 절차를 마치고 떠날꺼니까, 한 사 나흘 걸릴꺼야. 여기서 떠나기 전에 전화해줄테니까, 그만 떠나 라." 윤희와 영옥을 떠나보낸 기석은 고베지진에 대한 자료를 수집 했다. 인구 백 사십만 명으로 일본 제 6의 도시인 고베는 일본 전체 수출 물량 12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무역항이었고, 기계, 조선, 철강, 화학, 반도체 부문의 주요 공장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기 도 했다. 일본 기상청은 고베 앞바다를 진앙지로 해서 깊이 15키로미터 지점에 진원이 발생했으며 마그니튜드 7.2의 지진이었다고 발표 했다. 진원지와 대단히 근접한 고베를 강타한 유례없는 직진이었 다. 첫 지진 이래 오백회 이상의 여진이 있었고 유감지진도 33회 나 되었다. 지진 피해가 심한 효고 현 일대의 일본전기(NEC), KTI, 미쓰비 시(삼능), IBM 등 4개의 반도체 공장의 통신이 두절되었다. 반도 체 생산시설은 전기 신호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통신이 두절될 정도면 생산시설은 가동중지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반도체 공장은 고도의 청정도를 요구하는 까닭에 청정도를 회복 하는 기간이 적어도 수개월 이상이 필요하다. 따라서 일본 반도 체 업계는 수급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벤젠, 톨루엔, 크실렌 등 방향족 유화제품을 연간 28만톤 정도 생산하는 제너럴 세키유사의 사카이 BTX 공장과 산요 석유화학의 연간 29만톤 규모의 미쓰지마 공장도 지진발생후 가동이 전면 중 단되었다. 고베 지진은 한국의 반도체는 물론, 유화업체들까지도 호재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일본에서 주문이 취소된 반도체 수급양의 조달처는 한국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나프타를 기초원료로 쓰 는 유화업체들은, 일본의 대형공장들의 가동중단으로 나프타 공 급 과잉현상까지 빚어진 까닭에 나프타 가격은 오히려 떨어져,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기석의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 또 있었다. 한국의 대일 수출 물량 중에서 오사카와 고베로 나가는 물량이 차지하는 비중 은 철강류 40퍼센트, 농수산물 1백 퍼센트, 전자 10퍼센트, 섬유 류 40퍼센트나 되었지만, 한국 수출 선박들은 지진이 발생한 시 각에 고베항 대신 지진피해가 거의 없는 오사카항에 정박해 있어 서 지진에 의한 피해가 없었다. 대부분의 수출선박들은 오사카항 을 거쳐 고베항으로 입항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선박들은 오사 카항에서 지진을 모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번 고베 대지진은 지진에 관한한 안전지대라고 여 겨지던 관서지역에서 발생했다. 유라시아 판, 필리핀 판, 태평양 판이 일본열도의 동쪽에 맞물려 있기 때문에 일본 서부지역은 동 쪽에 비해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태 평양 판이 일본 동쪽에서 유라시아판과 필리핀 판 밑으로 파고들 어가 있다. 지진들은 대부분 이와같이 비스듬히 파고든 폭이 좁 은 지역에서 발생한다. 일명 베니오프 지진대라고 칭하는 이러한 지진대는 해구쪽에서 내륙쪽으로 점차 깊이가 증가하게 되고, 이 러한 지진대에서는 진원이 최소한 깊이 70키로미터 이상의 심발 지진이 발생하게 된다. 고베 지진에 대한 의혹이 기석을 더욱 자 극하는 점도 이런 점이었다. 일본 관서 지역은 지질학상 해구에 서 관동지역보다 멀리 떨어진 관계로 내륙형의 더욱 깊숙한 심발 지진이 발생해야 옳다. 그런데 이번 고베 대지진은 불과 깊이 15 키로 미터의 천발지진이었다. 해저에서 천발지진이 흔치않게 일 어나지만, 이런 천발지진은 해저산맥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이 고 고오베 앞바다의 베니오프대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일본 기상청과 지진 전문가들의 고베지진에 대한 분석도 흐지 부지한 것들이었다. 일본 아래 태평양 판이 미끌어지면서 필리핀 판을 융기시키는 내륙형 지진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발표가 있었지만, 불과 15키로미터의 깊이의 진원에 대한 설명을 아무도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 더욱이 고베 대지진이 일어났던 17일 새 벽 5시 47분 쯤, 고베시 주변의 하늘에서 발광현상을 목격한 많 은 사람들이 있었다. `지면이 발을 딛을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흔 들려 밖으로 뛰어 나가보니, 하늘에 붉고 푸른 빛이 순식간에 지 나갔다,` `지진이 발생한 순간 창 밖으로 섬광이 하얗게 빛났 다.` 등등의 고베시민들의 잇단 증언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 다. 이런 `이상한 빛`은 지진 발발시 가끔씩 나타나는 것이긴 했 다. 암석이 강한 힘을 받을 때 전자화된 미립자가 하늘로 튀어오 르고 이 충격으로 전자기파나 오로라와 같은 플라즈마 발광현상 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태평양판이 필리핀 판속 으로 미끌어져 들어가는 과정중에 최소 지하 100키로 미터 이상 되는 깊이에서 발생하는 융기형 지진에서는 지각의 마찰로 인한 섬광이 100키로미터의 지각을 뚫고 하늘로 퍼져 올라간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지진이라는 것 자체가 원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찾기가 어려 운 것이니만치 어느정도의 수수께끼는 남기마련이었다. 만일 평 소의 기석이었다면 이번 고베지진에 신경을 곤두세울 하등의 이 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기석은 이 번 지진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점점 더 또렷해져만 가는 육감 의 끈 때문이었다. 핵, 굴착기, 바닷속 암석 분쇄기, 잠수함, 그리고 신경을 자극 하는 대지진의 이모저모들...... 고베에서 서울로 돌아온 기석은 윤희의 부모님 장례식이 치러 지는 동안 윤희의 두 언니들에게 인사를 했고, 윤희의 미래를 책 임져 줄 기사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혼자가 된 윤희는 한달 동안 언니네 집을 전전했지만 언니들의 방 두개짜리 전세집에 오랫동안 머물 수는 없었다. 결국 윤희는 월세방을 얻어 나와 살아야 했다. 윤희가 얻은 월세방은 하필이 면 세검정 기석의 집이었다. 가까운 두 사람을 잃은 윤희의 외로움을 가까워진 두 사람이 달래주었다. 졸지에 부모님을 잃은 윤희였지만 영옥과 기석의 보 살핌으로 맑은 웃음을 거의 되찾아갈 수 있었다. 기석이 잠을 자는 자세는 대단히 얌전한 것이었다. 반듯하게 누운채로 거의 뒤척이지 않는 그의 똑바른 잠버릇은 스무살 그의 청춘에서 비롯되었다. 영숙과 현주 사이에서 절대의 공평을 지키 다가 붙은 습관이었다. 양쪽의 여인중 어느 한쪽의 여인 쪽으로 돌려 누우면 다른 여인이 등을 꼬집었다. 한동안 불편한 잠자리 에 애를 먹기도 했지만, 수십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치는 동안 기 석은 바닥에 등을 붙히고 고요히 자는 잠버릇을 기어코 터득하고 말았다. 어려운 환경일수록 한번 적응하면 오래가듯이, 기석의 그런 잠버릇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남아있었다. 반듯하게 누워 현주와 영숙에게 팔벼개를 해주면 두 여인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도란거리곤 했다. 그녀들이 주고받는 대화의 내용은 대부분 가운데 누워있는 기석을 공격하는 것이었고, 그녀들은 그런 대화 를 키득거리며 즐기곤 했었다. 윤희와 영옥도 과거의 두 여인들 처럼 그런 대화들을 즐기게 되었다. 오늘밤은 영옥이 먼저 시작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가 누구게?" "양쪽에 여자를 끼고 누운 남자." "세상에서 제일 무능한 남자는?" "양쪽에 누운 여자를 심심하게 하는 남자." "세상에서 제일 게으른 남자는?" "양쪽에 여자를 끼고 잠만자는 남자." "그럼 이것도 맞춰봐. 세상에서 제일 겁많은 남자는?" "양쪽에 여자를 끼고 잠자는 척하는 남자." 잠자는 척하고 있던 기석이 슬며시 눈을 뜨고 그녀들의 대화에 끼어 들었다. "흐으. 문제를 내려면 좀 그럴듯한 것을 내야지." 윤희가 궁금해했다. "오빠가 그럴듯한 문제를 내보세요." 기석이 문제를 내었다. "세상에서 제일 혹사당하는 남자는?" 영옥이 먼저 벧을 눌렀다. 영옥의 벧은 기석의 우측 젖꼭지였 다. "찡. 나 알아요. 하룻밤에 더블 헤더 뛰는 남자죠?" "틀렸어." 이번에는 윤희가 기석의 좌측 젖꼭지를 눌렀다. "찡! 알았어요. 양팔에 알통 키우는 보디빌딩하면서 자는 남자 죠?" 기석이 혀를 끌끌차며 말했다. "쯔쯔. 양쪽에 팔벼개를 해주며 자야하는 남자도 혹사당하는 남자임에는 분명하지. 에구, 머리들은 왜 그렇게들 무거워 가지 구서!" 윤희가 재차 물었다. "맞았죠?" "너희들 모두 틀렸으니까, 오늘밤은 나 쉴꺼야." 두 여인이 거의 동시에 다그쳤다. "정답이 뭔가요?" "얼렁뚱땅 넘어가면 따따블인 것 알죠?" 기석이 편안히 눈을 감으며 대답해 주었다. "정답은 일주일 내내 공휴일 한번 없는 남자야." 두 여인중 한 여인의 쫑알거리는 음성이 기석의 자존심을 충동 이질 하고 있었다. "그럼 오빠는 아니네. 그 멋진 사내는 누굴까?" 사내는 조그맣게 웅얼거리며 잠들기 시작했다. "오늘밤은 나 생리중니까, 너희들 없는 것 가지고 칙칙폭폭 놀 이 하지 말도록...... 쿨..." 방콕에서 고려항공편으로 평양공항에 내린 이건은 공항에 내리 자마자 곧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평양 거리를 둘러보고 싶어서 기사에게 한바퀴 돌자고 했다. 높이 솟은 고층 아파트들이 늘어선 평양시내였지만, 도로를 오 가는 60년대 구형트럭들이 빌딩들과 묘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 다. 광복역 앞 팔골 사거리에서 김일성의 생가라는 만경대까지 5.4 키로미터에 이르는 직선도로가 광복거리다. 원래는 7-8미터 구간 이던 도로폭을 1986년에 백미터로 넓혔다. 도로변에 만경대학생 소년궁전, 국제문화회관, 영화관, 교예극장 등이 보였고, 고층아 파트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대동강변을 따라 대동교, 옥류교, 능라다리까지 이어지는 승리 거리에서는 행정기관의 중추인 정무원 청사와 김일성광장, 녹색 바탕에 노란 투피스를 날렵하게 차려입은 평양아가씨가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고 있는 제일백화점, 냉면집 옥류관등이 보였다. 노동신문사가 있는 대동교 로터리와 만수대거리가 교차하는 지점 에 있는 종로가 이 거리의 중심지라고 택시 운전사가 설명해 주 었다. 미국에서 온 교포라고 설명한 이건에게 택시운전사는 천리마 거리에 대해서도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보통문에서 평천구역 충성의 다리까지가 천리마거리입네다. 1982년 이후 공사를 새로해서 옛 건물들을 철거하고 고층건물을 새로 지었읍네다. 저쪽에 보이는 것이 평양체육관, 고 옆이 창광 원, 창광산여관, 그리고 저기가 남원백화점입네다." 안골체육촌에서부터 안골입체다리까지가 청춘거리라고 했다.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계기로 안골체육촌은 1개의 주경기장 과 9개의 크고작은 경기장이 있었다. 5만명이상을 수용할 수 이 는 체육시설이었다. 안골입체다리는 3중교차식 입체다리로 길이 가 1천2백70미터나 되었다. 원래는 낙랑거리였으나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이름을 바꾼 통 일거리는 초고층아파트가 세워져 있었다. 5키로미터에 달하는 폭 1백 20미터의 도로주변에는 학교, 병원, 상점등의 문화 후생시설 이 늘어서 있었다. 목적지인 창광거리로 한바퀴 돌았다. 평양역에서 보통문까지 이어지는 이 거리는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된 건설사업으로 고층 아파트 30여동과 공공시설들이 세워져 있었다.거리의 좌우에는 조선노동당 당사와 김정일의 26호 관저, 당 창건사적관, 고려호 텔, 평양역전백화점, 그리고 식당가가 있었다. 이건은 시장기를 느끼고 죽 늘어선 음식점 거리에서 택시를 세 웠다. `미류나무`란 간판이 붙은 집에서 이건은 룡성맥주 한 병 과, 단고기(개고기)를 시켜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 던 이건은, 쌍꺼플이 예쁘게 진 음식점 전표대 아가씨에게 고또 래의 대학생인 듯한 사내 한 명이 집쩍거리고 있는 장면을 목격 했다. "이따 끝나고 좀 볼 수 있겠어?" "와 그러네?" "이 에미나이야, 사람 가슴 좀 그만태우구래." 사내의 수근거림에 쌀쌀맞은 아가씨의 음성이 되받아치고 있었 다. "내래 부화(연애)에는 관심없어, 야. 기러니, 일찌감치 속차리 라니까니." 음식점을 나온 이건은 거리구경을 하며 천천히 걸어 다니다가 평양역전백화점에 들러 몇 가지 물건을 샀다. 15달러를 주고 뱀 술 한 병을 샀고, 2달러 45센트를 내고 북한 담배 `대극장` 한 보루를 샀다. 직접 현찰을 지불하고 물건을 산 것은 아니었고 전 표를 끊어 따로 떨어져 있는 출납부에서 돈을 지불하고 도장이 찍힌 전표로 구입할 수 있었다. 창광거리에 위치한 고려호텔에 도착했다. 쌍둥이 빌딩인 고려 호텔은 33-35층 사이에 두 건물을 터널처럼 이어놓은 모습이 특 색있어 보였다. 고려호텔 2106호에 들어가자마자, 이건은 샤워를 했다. 호텔에 비치된 `만병초`세수비누로 비누칠을 했고, `압록 강` 치약으로 이빨을 닦았다. `봄`이란 이름이 붙은 머리기름을 찍어 바르고 위생실(목욕탕)을 나와 `천리마` 라디오의 스위치를 누르니 진공관식 라디오여서 그런지 10여초 후에 노래가 흘러 나 오기 시작했다. 찬바람 부는 길을 처녀는 가네 청춘의 희망은 소중하고 소중하여도 희망안고 이 길을 가리라. 언뜻 들으면 서정적인 여인의 감성이 배어있는 듯한 노래였으 나, 여자 아나운서의 설명을 들어보니 아닌 것 같았다. 나이가 마흔 살이나 먹은 노처녀 생물학자 백설희를 소재로 한 영화 주 제가 였다. 오로지 수령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 시집도 가지 않 은채 연구에 몰두하던 백설희란 마흔 살 아가씨가 열네 번째 겨 울만에 실험을 성공해 수령님께 몽땅 바친다는 영화 <열네 번째 의 겨울>의 주제가라고 했다. 진달래 상표가 붙은 `떼레비`를 켜니 주체사상 찬양 일색의 중 앙방송이 흘러나왔다. 돌려보니 마침 일요일 어서인지 만수대 채 널이 방송을 하고 있었지만, 가야금 연주였다. 이건은 `떼레비` 를 끄고 히다찌 냉장고를 열었다. 삼지연 술과 양덕 소주가 있었 고 몇 가지 인삼제 드링크류가 있었다. 두 시간정도를 따분하게 흘리고 있을 즈음, 벽시계가 오후 네 시를 가르켰다. 곧장 문 두 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 비서국 산하 군사위원회 소속의 김정수 정책부장과, 인민 무력부의 사진태 소장이었다. 두 사람 모두 북한의 핵관련 정책 지원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십 대의 김정수와 오십 대 초로의 사진태 앞에서 이건은 애 송이었지만, 이건은 구김살 없는 웃음으로 두 능구렁이들을 상대 했다. "하하. 시간 약속을 아주 잘 지키시는군요." 사진태가 이건의 칭찬을 머쓱하게 받았다. "여기까지 어려운 걸음해주었는데, 우리래 시간이래두 제대루 지켜 주어야 하지 않갔시오?" "기럼, 이거 쉬지도 못하고 우리래 너무 바쁘게 찾아온 것 아 니오?" 두 사람과 이미 구면인 듯 이건은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천만예요. 방콕에서 여기까지 얼마나 된다구요. 앉으시죠?"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이건이 권했다. "맥주라도 한잔 하시겠읍니까?" 김정수가 말했다. "아니야. 우리가 대접해야디." 사진태도 거들었다. "여기 입놀림하기에 기럴 듯 한 것이 있었디요. 그게 뭐이더 라? 아 기래! 깨비아라구 짭짤한 것이 감칠맛더라구. 기걸로 하 자우. 술은 맥주가 좋갔디요?" 김정수가 전화로 주문했다. 잠시 후, 벧보이가 주문한 것을 가 져왔다. 삶은 계란을 반쪽으로 잘라 노른자위에 주홍색 캐비어를 얹어놓은 것이었다. 연어알만큼이나 굵은 캐비어알이었다. 남한 의 캐비어에 비해 확실히 굵은 것으로 러시아에서 가져온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건이 맥주잔들을 채우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거, 남쪽알보다 확실히 굵은데요. 잘 먹겠읍니다." 사진태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뭘 이 정도야 보통이디. 많이 들라우요." 많이 들라고는 했지만, 불과 여섯쪽 밖에 되지 않는 양에 이건 은 내심 고소해야 했다. 맥주 한잔으로 입술을 적신 세 사내들은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 작했다. 이건이 먼저 시작했다. "고베 대지진이 예상했던 것보다 엄청난 규모였던 탓에, 저와 김국장님은 사실 몹시 당황했읍니다. 아직도 얼떨떨한 후유증에 서 완전히 헤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사진태 소장이 받았다. "우리도 기렇습네다. 원래는 고베항 정도만 흔들어 놓을 것으 로 과학자 동무가 계산했드랬는데, 너무 큰 지진이 되구 말았디 요. 아직도 확실한 원인 규명을 못한 상태입네다." 일본이 대량의 플루토늄을 사들여 가고, TMD(전역방위시스템) 체제를 구축할 준비를 서두르자 북한의 원자력 군사위원회 소속 김정수는 안기부의 김영철 2국장에게 지난해 모종의 제의를 해왔 었다. 그것은 북한의 핵실험에 관계된 지극히 비밀스러운 제의였 다. 당시, 지질학에 관한한 자타가 공인하던 북한은 일본의 진앙대 에 대한 깊은 연구를 끝낸 상태였다. 고베 앞바다 아와지시마 섬 부근의 바닷속 15키로미터의 진원이 고베항을 흔들 수 있다는 연 구결과였다. 그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북한은 그곳에서 핵실험을 하고자 했다. 핵이 진원을 건드릴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운 북한은 그 사실을 실제로 확인하고자하는 의지를 강력하게 피력 했다. 일본이 핵개발을 시작하게 되면 남북한 모두는 양적인 측 면에서 일본을 상대할 수가 없게 되고, 또한 일본 전 열도에 걸 치게 될 전역방위체제를 뚫고 들어갈 미사일 개발 역시 녹녹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남북한은 이 기회에 일본에 대한 비장의 카 드를 준비해 두어야 한다는 북한의 설득이 김영철 2국장과 이건 을 솔깃하게 만들었다. TMD 방위 체제가 아무리 완벽한 것이라해도 열본 본토로 날아 오는 미사일 정도나 막아줄 수 있을 뿐이지, 태평양 판에 넓게 걸친 베니오프 지진대 전부를 방어할 수는 없을 것이란 북한의 주장은, 김영철 2국장과 이건을 상당히 고심하게 만들었다. 북한의 주장을 실제로 확증할 수만 있다면, 이제 일본은 군사 적으로 끝장난 것이나 진배없었다. 어떤 경우라도, 일본은 군사 적으로 남북한의 적수가 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아무리 완벽 한 방위체제라도 난세이제도에서 쿠릴열도에 이르는 넓디넓은 바 다속을 죄다 막아낼 수는 없을테니까. 안기부의 김영철 국장과 이건은 결국 북한의 제의를 받아들이 기로 했다. 다만, 북한의 의도가 순수하게 일본만을 견제하기 위 한 지진유도 핵실험인지가 의심스러웠던 김국장이 그런 점을 피 력하자, 북한의 김정수는 그부분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북한 은 굴착기를 개발하고 굴착기에 핵을 장착하는데까지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으나, 방향유도장치에 대한 개발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해 있다고 했다. 따라서 대남 공격용으로의 굴착기를 이용한 핵공격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해 주었다. 방향유도 장치 없이 바닷속 지각을 뚫고 어떻게 진원지까지 핵을 운반할 수 있느냐고 김국장이 궁금증을 표시하자, 북한의 김정수는 땅속 을 수평방향으로 뚫고 들어가며 방향을 잡을 수 있는 유도장치 개발은 불가능하지만 지구중심을 향한 유도장치는 지구자전과 공 전궤도를 컴퓨터에 입력해 어렵지않게 굴착기에 부착시킬 수 있 노라고 설명해 주었다. 당시, 김국장과 이건은 김정수의 설명대 로 굴착기에 지구중심을 향하는 유도장치 개발이 가능한지를 카 이스트와 국방과학 연구소에 타진해 보았고, 그리 어렵지 않는 유도장치임을 확인했다. 굳이 북한이 우리측에게 합작 제의를 하는 이유를 묻자, 김정 수는 고베 앞바다까지 북한의 잠수정들이 접근하기 어려워, 일본 의 의심을 피하고 핵을 장착한 굴착기를 제대로 정해진 지점에 투사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북한의 의도는 그 외에도 또 있었다. 북한은 스스로를 지킬 정도의 핵이 이미 개발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은밀하지만 분명하게, 경고해주고 싶어했다. 또한, 북 한은 북핵문제로 미국과의 협상 테이블에 있었고, 경수로 지원문 제에 있어 사면초가의 위치에 놓여져 있었다. 남한의 맹방이라고 자처하는 미국은, 이유야 어쨋든, 남한에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북한에 대한 지원을 위해 협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 에서 남한의 신경질은 사실 미국으로서도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더욱이 경수로 지원에 필요한 대부분의 자금을 남한이 떠맡아야 하는 입장이고 보면, 협상테이블에 직접 나와있지 않은 남한일지 라도, 미국은 남한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었다. 남한이 한국형을 고집한다면 북한은 결국 한국형 경수로를 받아들이거나 전쟁을 해야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 것이었다. 북한은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었다. 북한은 극심한 경제난에 대한 돌파구로서 어떻게 해서든 경수 로를 지원 받아야 할 상황에 처해있었지만, 한국형 경수로만큼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한국형과 함께 밀려 들어 올 남한의 많은 기술자와 근로자들은 북한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 는 골치거리였다. 북한주민과 대화가 통하는 남한 인력의 유입은 트로이의 목마속에 들어있는 그리이스 군사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전쟁이란 공멸의 길을 택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핵이 있다고 하지만, 남한에도 북한만큼의 핵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는 것이고, 전쟁이 북한의 의도대로 속 전속결 되지않을 경우 북한은 그대로 무너지고 말 확률이 대부분 이었다. 이러던 차에 북한의 김정수는 남북한 정보부간에 실날같이 이 어지는 접촉루트를 통해 남한의 안기부 2국장 김정수에게 제의를 해왔다. 한국형 경수로에 대한 부분적 양보를 조건으로 남한측이 북한의 핵실험을 대신해 줄 것과 아울러 일본의 아킬레스 건을 확인할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의사였다. 핵실험을 통한 일본내 지진 유발이라는 미끼는 김영철과 이건 을 달콤하게 유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처리하기에 는 엄청난 공작이었지만, 김영철과 이건은 사상최대의 공작을 두 사람이 극비에 부친채 떠맡기로 의견을 모았다. 상부와 과학기술처및 해군에는 바닷속 암석 분쇄기에 대한 실 험이라고 속여서 보고했다. 모든 십자가는 김영철 국장과 이건이 지기로 했다. 김영철 국장은 유도장치 개발에 대한 부분을 맡았 고, 이건은 유도장치가 완료된 후 해군 잠수정에 탑승해서 실행 과정을 맡았다. 결국 이건이 탑승한 남한의 잠수함은 고베 앞바다에 새로 개발 된 바닷속 암석 분쇄기를 투사시켰다. 물론 이건을 뺀 잠수함 내 의 모든 사람들은 단순한 바닷속 암석 분쇄기로만 알고 있었다. 신형 암석 분쇄기로 포장된 굴착기에는 지구 중심을 향하는 자기 유도 장치가 첨가되어 있었고 북한의 30키로급 핵폭탄도 장착되 어져 있다는 것은 이건 혼자만이 알고 있었다. 바닷속 지각을 48시간 동안 15키로미터 정도 파들어간 핵은 기 어코 고베 앞바다의 진원을 건드리고 말았다. 그리고 일본 관서 지역에 오천 명이 넘는 사망자와 수만 명의 이재민을 초래한 대 지진이 일어났다. 예측했던 지진이었으나 예상보다 엄청난 피해를 초래한 고베지 진은 김영철국장과 이건을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하지 만, 김국장과 이건은 동요하지 않았다. 많은 사망자가 마음속에 서 인간으로서의 감정들을 멸시하고 있었지만, 김국장과 이건은 `인간`자체보다는 `민족과 국가의 이익`에 매달리고 있는 사람들 이었다. 이를테면 두 사람 모두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애국애족 의 광신도가 되고만 인간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고베지진이후, 남한은 이건의 예측대로 많은 것을 얻어내고 있 었다. 대지진으로 일본내의 많은 공장들이 문을 닫았고, 일본에서 취 소된 구매 계약들이 한국으로 넘어왔다. 엔고까지 겹친 일본은 이제 더이상 한국이 경제적으로 따라잡기에 요원한 국가가 아니 었다. 대일 수출입 물량이 삼, 사십 퍼센트 증가했고, 첨단 전자 부품, 조선, 철강, 유화, 중공업등의 제조부문에서 수출 물량이 폭발적인 증가를 보이게 되었다. 이런 무역량의 증가 추세가 6, 7년만 이어지게 된다면 국제 산업계 질서는 한국을 중심축으로 재편되고 말 것이 분명했다. 군사적으로도 일본은 더이상 두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수없이 널린 베니오프지진대는, 일본이 수천개의 핵을 갖고 전 지역을 카바하는 방위 시스템을 구축했다하더라도, 방어할 수 없는 것이 었다. 일본 역시 고베지진의 원인 규명와중에서 폭발물에 의한 지진유도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음이 감지되었다. 무라야마 내각은 하타 전 총리로 하여금 일본의 전쟁포기안을 연립여당안 으로 의회에 상정토록 종용했다. 사정에 밝지못한 일본의 우익세 력들이 태평양 전쟁 사죄를 빙자한 전쟁포기 각서에 뜻도 모르고 버티고 있었지만, 이미 무라야마 내각은 군사적으로 `일본은 결 딴났다.`라는 점을 파악한 듯 싶었다. 이건이 평양에 온 것은 고베지진이후 북한에 대한 반대급부 때 문이었다. 두 사람과 이건은 고베지진 이야기를 나누다가 본론으 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진태는 이건에게 경수로에 관한 이야기 를 꺼냈다. "경수로 문제는 조선과 미국의 문제니만큼, 남조선은 빠져주기 만 하면 되는 것 아니요? 미국이 핵 확산방지를 위해 우리더러 흑연감속로를 사용하지말라고 해서 우리가 흑연감속로를 쓰지 않 는대신에 신형 원자로를 미국더러 만들어 내라고 하는 것이 아니 게씀메. 남조선이 비용분담 문제로 미국에 코 꿴 것은 알지마는 우리가 한국형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입장이잖소." 김정수도 거들었다. "우리는 남조선 정부더러 돈을 내라는 것이 아니요. 한국형이 안된다는 것이디. 그점 분명히 알아두라우요. 우리가 바라는 것 은 한국형이 아닌 타국형 원자로입네다. 미국이 우리더러 우리가 만든 원자로 쓰지 말라고 했으니 우리 원자로를 대체할 원자로를 만들어 주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갔소? 그런데 하필이면 한국형 만을 고집하는 것은 우리 조선에 억지로 개방압력을 넣는 것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지 않소. 마치 구한말 일본이 불평등조약을 강요하는 것과 우리입장에선 다를 바가 없소." 우리는 미국형, 러시아형, 독일형 어느 것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지만, 한국형만큼은 어려운 상황이니까니, 그 점에 대해 신경 좀 써 주기요." 이건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아시다시피 저나 김국장님이 경수로 문제를 한국형으로 하라 마라 결정지을 수 있는 위치는 못 됩니다. 저희가 두 분에게 성 의를 보일 수 있는 부분은 약속했던 바대로, 저희 정부가 경수로 문제에 있어서 양보할 수 있는 최저 하한선이 어디쯤 되는 것을 알려드리는 것과, 한국의 기술자와 근로자들이 북한으로 대량 유 입되는 것을 어느정도 막아드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북한과 미국의 핵협상은 사실 우리측 시각으로도, 대단히 불쾌 한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미국은 우리와 총부리를 맞대고 있는 북한에 돈을 퍼다주겠다고 회담을 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여기까지야 참을만 한 것입니다. 서로 총을 겨누고 있어도 북한은 같은 민족이니까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도와주겠다면 반대할 의사는 없읍니다. 그런데, 우리가 억울한 것은, 회담에 나서며 생색을 내는 미국 이 회담장에는 끼어들지도 못하는 우리더러 돈을 내라고 하는 것 입니다. 한발 더 크게 양보를 해서, 수천년 이어 내려온 민족정 신을 한번 더 발휘해서, 우리측은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할 용의 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읍니다. 북한은 한국형 경수로를 받아들일 수 없으니, 다른나라 원자로 를 사달라고 미국에게 강력히 주문했고, 남한은 한국형 경수로가 아니면 돈을 댈 수 없다고 했읍니다. 여기에서 북한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노동자들의 지옥이라고 선전해온 남한의 노동자들과, 북한이야말로 지상 최고의 사회주 의 낙원이라고 알고 있는 북한 주민들과의 만남은 끔직한 것이겠 지요. 미국의 입장도 이해합니다. 작년 중간 평가에 급급했던 클린턴 정부는, 북한과의 핵협상 결과를 대충 얼버무려 놓고는, 핵확산 방지의 교과서적인 사례 운운하며 자화자찬하고 말았읍니다. 당 시 사정에 밝지 못한 미국민들은, 돈은 남한에서 내고 핵확산 방 지에 대한 생색은 미국이 내고 게다가 잘하면 미국기업들의 북한 원자로사업 진출까지 바라볼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었읍니 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이 한국형이 아니면 돈을 낼 수 없다고 나서자, 클린턴 정부는 사면초가에 빠지게 된 것이죠. 하지만 제일 딱하고 억울한 것은 남한입니다. 한국형이 아니면 돈을 낼 수 없다는 저희 남한의 입장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죠. 핵보유국가들의 핵확산 방지를 단 한발의 핵도 만들지 않은 남 한이 왜 떠맡아야 합니까? 우리가 핵을 못 만들어서 안 만들었읍 니까?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측면에서 만들지 말라니까 안 만든 것이지요. 기실, 핵을 만들지 않아 준 것만해도 핵보유국가들은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남한이 핵이 없다는 이유로 북한 의 핵 억제를 위한 대부분의 비용을 부담하라는 핵보유국의 태도 는 정말 괘씸한 것이 아닐 수 없읍니다. 북한에 대한 원조 자체 야, 같은 민족을 돕는다는 차원에서 본다면 어느정도 수긍은 할 수 있고 약간의 성의는 보일 수도 있읍니다. 하지만 북한의 핵위 협에 굴복해서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통째로 원조를 하라고 한다 면, 이것은 원조가 아니고 강탈 당하라는 것입니다. 참을성 많은 저희 남한은 그래도 북한에 원자로를 만들어 주겠다고 했읍니다. 여기까지가 저희들의 한계였습니다. 저희 남한은 북한에 한국형 원자로를 만들어 줄 수 있읍니다. 그러나 외국 기업에서 원자로 를 사다가 만들어 줄 형편은 못되지요. 중요한 것은 돈인데, 사 다주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우리 한국형으로 만들어 준다해도 당장 차관을 들여와서 만들어 줘야 하거든요. 이런 저희들 입장 이 송구스럽지만 어쨋든 한국형이 아니면 돈을 낼 수 없다는 것 이 저희들 입장일 뿐만 아니라 형편입니다. 다행히 북한이 저희들 형편을 헤아려줘서인지, 한국형만은 절 대로 안된다고 버티어 주고 있으니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겠읍 니다. 이 시점에서 제 개인적인 감정을 솔직히 고백해 본다면, `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민족의 동질성까지 느끼고 있읍니 다." 김정우가 이건의 장황한 설명을 자르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자 존심을 피력했다. "우리도 뭐 꼭 남조선의 기술자들이 들어오는 거이 꺼려져서 한국형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야요. 남조선의 어려운 형편을 잘 알고 있으니까니, 남조선 아이들은 빠져주기를 바라는 의도로 미 국형이나 러시아 형 혹은 독일형을 원하는 거이지. 그 점 분명히 알고 있으라우요." 이건이 입가에 기묘한 미소를 머금고 재빠르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우리측으로 하여금 내기 싫은 돈을 내지 않을 수 있도록 구실을 만들고 주고 있는 데 대해서, 저 개인적으로는, 북한에 감사하다고 여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시 민족은 하나 구나` 하는 생각까지도 하게 되거든요. 허허허." 사실 경수로에 관한한 한국 정부의 입장은 그다지 나쁜 것은 아니었다. 한국형으로 선택되어질 경우 북측의 개방유도는 물론 한국형 노형의 아시아지역 수출에 큰 디딤돌이 될 수 있는 것이 고 북한이 경제개발에 성공한다면 현물상환도 받을 수 있는 것이 었다. 차선책으로 한국정부가 북한의 경수로 건설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 남한의 우방인 미국과 일본은 핵확산 방지를 빌미로 우리 의 적대국인 북한을 도와주게 되는 것이된다. 결국 미국과 일본 은 우리에게 일종의 빚을 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 남한 도 적당한 성의 표시 정도는 해야함은 물론이다. 땡전 한 잎 내 지 않다가 우리의 입장만 챙긴다는 구실로 미국이나 일본으로 부 터 음양으로 압력을 받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이건은 가방에서 경수로 관련 남한 정부측 자료 일체를 꺼내서 김정수에게 넘겨주며 말을 이었다. "남한이 대북한 경수로 사업에서 80퍼센트 이상의 중심적인 역 할이 보장된다면 70퍼센트 이상의 원조를 떠맡고, 한국형이 아닌 타국형 원자로일 경우 20퍼센트 이하의 원조를 하겠다는 것을 골 자로 하는 우리측 자료들입니다. 미국의 ABB-CE(미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사의 시스템 80 을 한 국 실정에 맞게 변형한 것이 한국형인데, 70퍼센트 이상의 원조 를 우리가 부담하게 될 경우 노형의 핵심설계인 계통설계를 한국 이 맡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저희측 입장입니다. 따라서 원자로 설계후 핵심부분에 대한 사후 관리 역시 저희 기술진이 맡게 될 것입니다. 북한측의 버티기에 저희측이 물러설 수 있는 부분은 외관설계 뿐입니다. 외관공정에 대한 발주를 외국기업에 맡기고 그 부분에 대한 기술인력의 유입을 억제하는 수준이지요. 이 자료들을 근거 로 북한은 협상테이블에서 얻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산출해내야 할 것입니다. 저나 김국장님은 우리정부측의 주장을 최저치의 수준으로 끌어 내리기위해 아낌없이 외곽지원을 해드릴 것을 분명히 약속드립니 다. 다만, 국민 여론을 고려해야 하는 문제이니만큼, 장담할 수 있는 선을 긋기는 어렵습니다. 이점 이해바랍니다." 김정수와 사진태가 번갈아 가며 자료를 대충 흠어보았다. 사진 태가 자료들을 챙겨 넣으며 말했다. "어쨋건 애써줘서 고맙슴둥. 한가지 제안을 해본다면, 마지막 까지 협상에 실패가 돌아갈 경우, 한국은 미국을 설득해서 원자 로 비용의 70퍼센트 정도를 미국이 떠맡게 하고 주계약자를 미국 기업으로 밀어주기요. 그리고 나머지 30퍼센트의 비용은 남조선 과 일본이 반반씩 부담하면 되지 않갔소? 남조선이 진정으로 우 리 북조선인민을 같은 동포로 생각한다면 전쟁보다는 그 편이 낫 지 않갔소. 안그렇소? 이건동무?" 이건이 잠시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대답했다. "전쟁보다는 좋은 방법이군요." 김정수가 이건의 말을 이었다. "강제적이고 야비한 개방 압력보다도 분명히 나은 방법일끼요. 우리인민들은 풍족하지는 않지만 살아가는데 커다란 불만을 품고 있지는 않소. 기런데, 남조선 동무들이 떼꺼지로 들어와 인민들 에게 바람을 넣는다면 우리로서는 차라리 경수로 안 받는 것만도 못하지 않갔소?"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린 북한이 핵카드를 이용해 경제사정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발버둥치는 의도나, 북한의 경제적 약점을 이 용해 개방압력을 넣는 미국과 남한의 의도나 치사한 것은 마찬가 지였다. 누가 이기냐의 싸움인데, 이건의 생각으로는 이것은 남 북한 모두에게 잘못된 싸움이었다. 남한은 전쟁을 막기 위해서 지난 10월 제네바 북미회담 당시 북한의 경수로 비용의 대부분을 떠맡게 되었다. 하지만 남한도 북한이 한국형 경수로는 받지 않을 것이란 계산은 하고 있었다. 미국 역시 그런 점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당시에는 중간 평가가 코 앞에 닥친 터라, 회담을 얼버무리고 차후에 북한을 밀어 부치 거나, 한국의 양보를 끌어내겠다는 저의를 깔아 두었을 것이다. 북한 또한 시간과 중유를 벌면서 미국과의 협상재개를 통해 한국 형이 아닌 새로운 노형을 얻어내고자 했을 것이다. 동상삼몽(同 床三夢)의 남북한과 미국의 회담미루기였다. 이건이 입을 열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절대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서 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비겁해서도 아니고 저희 남한의 군대를 못 믿어서도 아닙니다. 싸울만한 이유가 전쟁으로 치를 희생에 비해 너무나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잠깐동안 솟구치는 혈기나, 어설픈 분노 정도를 참지 못해서, 아들, 남편, 연인, 오빠, 형제를 전쟁터로 내보낼 수는 없읍니다. 원자로 하나 때문에 수십년 동안 공들인 경제기반을 작살내는 것도 미련한 짓이지요. 그것은 북한도 마찬 가지 일 것입니다. 북한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은 북 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북한도 전쟁을 원할 리는 없겠지요. 문제는 겁없고 철없는 미국이지요. 북한은 한국형을 받아들일 수 없고, 남한은 한국형 아닌 다른 외국의 노 형을 북한에 건설해 줄만한 돈이 없어요. 유일한 양보는 미국으 로부터 얻어낼 수 밖에 없는 것인데, 미국이 70퍼센트 정도 부담 해 주고 나머지를 한국과 일본에서 부담하는 형식이 제 생각으로 도 바람직하다고 여겨집니다만, 아쉽게도 저에게는 미국을 설득 할만한 힘이 없군요. 하지만, 그렇게 되도록 애는 써 보겠읍니 다." 이건의 말투에서 진심을 느꼈는지 사진태가 보기좋은 미소를 띄우며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통일이 되어야 우리네도 이딴 뒷거래 집어치우구 맘 편하게 만날텐데, 남조선 정부는 와그리 반통일적으로 노는겐 지......" 사진태가 통일문제를 언뜻 내비치자 김정수가 남한의 한민족 공동체 방안을 씹기 시작했다. "3단계 3기조 하면서 떠드는 남한의 한민족 공동체 방안 그거 이 결국 통일하기 싫다는 것 아니요?" 민주적 국민합의, 공존공영, 민족복리를 세가지 통일정책 추진 기조로 삼고, 화해 협력 단계 - 1민족 2국가 형태의 남북연합 단 계 - 1민족 1국가 통일국가 단계의 세 단계로 이어지는 남한의 민족 공동체 방안을 김정수가 공격하고 있었다. "남조선은 흡수통일을 반대한다고 떠들면서리, 세 단계로 넘어 가는 남조선측 통일방안을 살펴보면, 흡수통일 해나가는 과정이 더구만. 남북연합후에 남북정상회담-남북각료회의-남북 평의회- 통일헌법기초-민주적 방법절차,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그렇다 치 구, 그 다음 남북한 총선거실시를 해서 통일정부와 통일국회수립 을 하자고 하는데, 남한의 인구가 북한 인구의 두배인 현시점에 서 우리가 응할 수 있는 제안이라고 생각합네까?" 이건이 대답했다. "현재로서는 남북한 총선거란 북한측에서 응하기 어려운 단계 임이 분명하겠지요. 하지만, 화해 협력 단계를 거치고 남북 연합 단계를 거치다 보면 언제가는 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김정수가 허탈하게 웃었다. "허허. 나 이런! 어느 세월에...... 사진태도 이건의 말을 반박하며 고려연방제를 들먹이며 나섰 다. "남측의 방안보다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이야말로 우 리 공화국이 제안한 최고의 통일방안 아니갔시오? 1민족 1국가 2 체제 2정부 구조야 말로 현재 우리민족이 처한 상황에 딱 들어맞 는 것이디요. 1민족 1국가 상태를 이루고 봐야합네다. 우선, 남 북한 교역 문제를 들어 보자우요. 현재의 1민족 2국가 상태에서 남조선이 우리와 무관세 교역을 통한 자유무역을 하게 되면, 당장 WTO<(GATT:관세 및 무역에 관 한 일반협정)의 후신>에서 남조선측에 제소가 들어갈 거요? 내래 알기로는 WTO의 당사국인 남조선이 우리에게 무관세 대우를 해주 게 되면 WTO협정 제 1조의 최혜국특우(最惠國特 遇:MOST-FAVOURED-NATION TREATMENT:MFN)의무에 따라 자동적으로 여타 WTO 회원국들에게도 우리 공화국에 취한 대우와 동일한 무 관세 대우를 해야하는 것이디요. 기러나, 우리가 1민족 1국가 상 태를 이루게 된다면 WTO에 민족내부교류로서 국제적으로 인정받 기 쉽지 않갔시오? 그렇게 생각하디 않소?" 이건이 김정수의 친절한 배려에 실소를 금치 못하며 말했다. "하하. 그런 점까지 걱정해 주실 줄은 몰랐읍니다. 하지만, WTO협정의 체약 당사자는 국가가 아니라 정부입니다. 따라서 남 북한이 1민족 2국가가 아닌, 고려연방제 방안대로, 1민족 1국가 2체제 2정부를 이룬다해도 그런 관점에서 WTO의 제소를 피할 수 는 없을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우리는 2정부 상태가 될테니까요. 남북한 무관세 자유무역에 관한 WTO의 제소를 피할 수 있는 유일 한 길은 전적으로 북한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 다. WTO로 부터 남북교역의 민족내부교류성 인정확보를 위한 대 책으로서는, 남북간의 특별한 입장을 WTO내에서 인정받는 수 밖 에는 없을 것입니다. WTO협정 제 24조에 의하면 `전면적인 WTO원칙 적용면제 조항` 이 있읍니다. WTO의 전신인 GATT는 당사국간 자유무역 지대를 설 치하는 것에 대하여 제 3국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당사국의 자율에 맡겨왔읍니다. 즉 특수한 입장에 놓여있는 두 당사국간 무역거래의 실질적인 자유화를 통하여 협정당사국 경제 의 긴밀한 통합을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는 자유 무역지대(自由貿易地帶) 또는 공동시장(共同市場)등을 인정해 왔 읍니다. `동 지역내와 기타 국가간 무역장벽을 높이는 것이어서 는 안된다.`라는 제한만 제외하면 이론상 구(舊) GATT 회원국은 경제통합을 이룩함으로써 GATT협정의 최혜국대우 부여의무로부터 면제될 수 있었지요. 이것은 새로 출범한 WTO의 경우에서도 기본 적으로 동일할 것입니다. 따라서 남북한이 무관세 민족내부교류를 하자면, 남북한간 자 유무역지대(FREE TRADE AREA), 관세동맹(CUSTOMS UNION), 공동시 장(COMMON MARKET) 또는 경제동맹(ECONOMIC UNION)등의 방식으로 경제통합을 해서 자유무역지대 선포선언을 해버리거나 합의서를 작성해 WTO에 제출하면 양놈들도 더 이상 따지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북한의 소극적 입장을 고려해 볼때 과연 남 북경제통합을 위한 사전합의를 순순히 응해줄 것인가가 염려지 요. 그런데, 사실 북한도 남한과의 무관세 교역을 하는 것에 대 해 반대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않그렇습니까?" 김정수와 사진태는 이건의 얄미운 질문이 상대하기 걸끄러웠는 지 대화를 다시 원점으로 돌렸다. "기건 기렇게 넘어가고, 어쨋든, 남조선측이 주장하는 공동체 방안은 문제가 있소. 두 번째 단계의 1민족 2국가 2체제 상태의 남북연합이란 것은 너무 독립적이고 이완되어 있어서 두 개의 조 선을 반영구적으로 두리뭉실하게 추구하는 분열방안인 까타네, 그 제안은 우리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디요. 그에 비하면 1 민족 1국가로 곧장 가버리는 우리 고려연방제야말로 민족의 숙원 인 통일문제를 진지하고 확실하게 해결하는 방안이디요. 그렇지 않소?" 이건이 간지로워지려는 눈가를 손가락으로 비비며 두 사람에게 이야기했다. "한민족 두국가 상태의 남북연합이 반영구적인 성격을 갖는 것 이 아니냐고 했는데, 반영구적이라기 보다는 과도단계라고 표현 해야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내세운 한민족 공동체 방안은 북 한에서 60년대에 나왔던 통일연방제하고 비슷합니다. 가령 연합 에 대해서 들어보자면, 우리는 남북연합이라고 명명하고 이 단계 에서 남북 정상회담, 남북 각료회의, 남북 평의회등을 만들자고 했는데, 과거 북한에서 연방제를 만들때도 각료기구로서 정치위 원회를 만들자고 했읍니다. 또한 현재 우리의 남북연합 단계나 당시 북한의 통일연방 단계 모두 과도적인 조치라고 표방하고 있 는 점도 다를 바가 없읍니다. 당시에는 북한도 과도기적인 단계 는 물론 총선거 실시까지 거론했다는 점을 비추어 볼때, 현재 우 리측이 내세운 남북연합단계를 반영구적 분열방안이라고 몰아부 치는 것은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하는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습 니까? 현재 북한이 고집하는 고려연방제는 이 과도기적 단계와 총선거가 빠져있읍니다. 그냥 국가통일부터 무작정 시켜놓고 보 자는 것인데, 중간단계 없이 지금 이 상태에서 곧장 통일로 가버 리면 남북간 민족화합 차원에 무리수가 없겠읍니까? 간단히 예를 들어보죠. 우선 낱말 뜻이 남한과 달라요. 북한의 자주는 미제국주의를 내쫓는 것이 자주입니다. 또 북한의 평화는 남조선 혁명을 해서 인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이어야 평화를 논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있읍니다. 민주주의도 그렇습니다. 김일성이 연설에서 수없 이 반복했듯이 자본주의의 민주주의는 계급의 적이고 제국주의자 들의 선전일 뿐이며, 오로지 프롤레레타리아 독재, 다시말하면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만이 진짜 민주주의라고 강조하고 있읍니 다. 또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계급의 자유란 오로지 굶어죽을 수 있는 자유라고 못박고 있어요. 이런 시점에서 정치적 통일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비정치적인 교류부터 선행되어야 할 것입 니다. 한글 맞춤법에서 부터 통일을 시켜나가야, 당장 무슨 협정 서 쪼가리라도 제대로 만들것 아닙니까? 그래서 과도기적인 남북 연합 단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화해, 협력을 바탕으로 서로를 존 중하는 심적 교류가 오가야 하고, 환경문제나 인도주의적인 만남 에서부터 문화 경제적인 단계로까지 인적교류를 충분히 성숙시킨 후, 정치적인 통일이 다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남북한은 통일에 앞서 선결해야할 과제를 안고 있읍니 다. 북한주민들만 흡수통일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한 사람들도 두려워 합니다. 남한이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다고 하지 만 아직은 도약을 더해야 하는 단계입니다. 남북한 총선거로 가기에 앞서 북한은 경제적으로 일정수준까지 끌어올려야 합니다. 남북한이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현시점 에서 통일이 된다면 반통일적인 요소들이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 입니다. 주차위반 딱지로 예를 들어보겠읍니다. 남한에서 벌금 딱지 한장에 부과되는 액수가 북한 사회과학원 의 박사학위 소지자의 월급하고 맞먹습니다. 남북한이 서로를 들 여다 볼 수 있는 상황에서 북한주민들이 이런 경제적 격차를 보 고 무엇을 느끼겠읍니까? 또 남한도 그렇습니다. 경제규모가 커 졌다고 하지만 남한 주민들도 주차 위반 과태료만 올라가도 피부 적으로 경제적 압박을 느끼고 짜증을 내는 사람들이 대다수입니 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규모가 10배 차이가 나는 남북의 백성들 이 어우러진다면 그 결과가 어떻겠읍니까? 낙후된 북한경제의 빚더미를 당장 끌어안아야 하는 남쪽사람들 은 짜증스러운 푸념으로, 자본주의의 찌부등한 호사스러움에 주 눅들은 북한사람들은 신경질적인 열등감으로, 통일에 대한 반발 과 후회만 고조될 것이 분명합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남한은 21세기 선진주도형으로 발전할 수 있는 호기를 통일 뒷치닥거리에 흘려버리게 되겠고, 북한은 경수 로 지원과 조직화된 주민 통제력을 밑바탕으로 고도의 경제성장 을 이룰 수 있는 적절한 여건들을 우왕좌왕하는 민심으로 잃고 말 것입니다. 미, 일이 엔고로 맞부딪치고 있고 유럽은 게을러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남한은 슬그머니 틈새를 비집어가며 떠오르려 애쓰고 있읍니다. 이런 시기에 북한의 빈곤이 무작정 통일이란 연결고리 를 통해 남한의 뒷꿈치를 잡아당긴다면 우리민족은 또 다시 한 시대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자본주의에 때묻지 않은 북한 주민들도 그들의 현상태를 극복 해나가는데, 자의반 타의반으로나마, 세계에서 가장 잘 훈련된 상태라고 할 수 있읍니다. 따라서, 북한은 현재의 가난을 극복하 고 고도성장을 이루는데 오랜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북 한 인민들 역시 잠재력은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일 테니까요. 이 런 시점에서 가난에 숙달된 북한주민들 속에 이질적인 남한 백성 들이 끼어들어 봐야 훼방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남북한이 멀찌감치 떨어져서 서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구경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음양으로 서로를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 길게 이어지는 이건의 주절거림에 사진태가 끼어들었다. "어드렇게 도울 수 있읍네까?" 이건이 허리를 쭉 피며 자신의 기획안을 떠올렸다. 한반도의 21세기를 대비한 국제 전략 기획안이었다. "향후 세계는 미국과 캐나다를 주축으로한 미주권, 영국과 독 일 프랑스가 주축이 된 유럽권, 아랍세력의 중동권, 제 3세력의 아프리카권, 그리고 중국, 일본, 남북한의 아시아권으로 나뉘어 질 수 밖에 없읍니다. 또 이런 세력판도는 각 세력권내의 기구와 외부권을 이어주는 통합기구들에 의해 움직여지게 될 것입니다. 안그렇습니까?" 김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 보라우." 이건이 자신의 구상을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시야를 넓게 가져야 합니다. 비록 조그만 땅덩이 안의 남북한이지만 우린 세계의 리더가 충분히 될 수 있읍니다. 남북 한이 눈치껏 서로 협조만 잘하면 10년안에 아시아의 리더, 20년 안에 세계의 리더로 떠오를 수 있읍니다. 아시아에서 먼저 살펴보자면, 일본은 지진으로 흔들리고 엔고로 휘청대고 있읍니다. 최첨단 기술로 얼마만큼은 버티겠지만, 한국은 일본의 기술을 거의 다 따라잡았읍니다. 3-4년 동안은 아무래도 일본이겠지만 일본은 미 국과의 경제 전면전에 허덕이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향후 3-4년 동안 결국 일본은 3-4퍼센트 정도씩 하락 곡선을 그리게 되겠고, 한국은 엔고, 10억의 중국시장, 첨단분야의 성장등을 바탕으로 7-8퍼센트 정도의 꾸준한 경제 성장을 지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3-4년 후, 미국은 일본 다음 한국을 겨냥하겠다고 벼르게 되겠지 만, 일본과의 경제전(戰)으로 숨을 돌려야 하고, 일본을 공격한 미국에 대해 아시아 국가들의 지탄을 받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미국이 한국을 타겟으로 삼기에는 6-7년 후에나 가능할 것입니 다. 그동안 한국은 이빠진 호랑이인 미국과의 경제전을 치를 준 비를 해야 합니다. 단독으론 어렵고 중국과 일본 북한의 협조를 얻어내야 합니다. 일본의 몰락을 교훈으로 아시아는 유럽 공동체 와 같은 새로운 경제 공동체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그 아시아 경제 공동체의 주도세력은 남북한 일수 밖에 없읍니다. 북한은 적당한 개방과 근면으로 60년대처럼 착실한 경제 성장 을 이룰 것이고 제 3세력권이나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 적당한 영 향력을 고수하고 있을 것이며, 남한의 경제력은 세계 10위권으로 접어든 상태일 것입니다. 떠오르는 한국은 해가 지는 일본 곁에서 일본을 적이 아닌 친 구로서 다독거려 주며 아시아의 보스기질을 일본으로부터 반드시 인정 받아야 합니다. 여의치 않을 경우, 아시아 경제 기구 안에 서 북한의 한 표가 남한에게 적지않은 도움이 되겠지요. 중국 역 시 다른 대륙과의 경제전(戰)에 패전한 일본 보다는 한국을 밀어 주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북한은 남한을 절대적으로 밀어 주어 야 합니다. 남한은 북한에 기술이전이란 형식으로 상응하는 보답 을 음양으로 해주면 되니까요. 그리고 그런 오가는 것들보다 우 리는 같은 민족이잖습니까? 또 머지않아 통일이 되기전에 서로간 의 상부상조가 이루어진다면 민족화합 차원에서도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시아는 중동과 제 3세력의 아프리카와 손을 잡아야 할 것입 니다. 그들의 낙후된 부분을 도와주며 선의의 미소를 지어주면서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유럽이나 미주권 보다는 우리 를 믿어줄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의 역사가 그렇고 현 세계사의 흐름도 그렇습니다. 중동과 아프리카가 아시아를 도와준다면 유 럽과 미주권과의 경제전(戰)에서 한국은 절대로 패하지 않습니 다. 빠르면 10년 늦으면 20년 안에 한국은 세계 정상의 국가가 되 어 있거나 아니면 몰락해 있을 것입니다. 한국의 몰락과 세계정 상의 분수령은, 첫째, 첨단 기술력, 둘째, 남북한과의 관계에 있어 상호협조. 세째, 십억 중국 시장 개척 네째,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 경쟁과 후덕한 아량의 조화, 다섯째, 중동과 제 삼세력권과의 관계에 있어 신의와 예절, 이 다섯가지 고개일 것입니다." 김정수가 안경을 고쳐 잡으며 너털하게 웃었다. "헛헛헛 꿈이 야무지구만 기래. 기러다가 통일은 언제쯤 하려 구?" 이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북한의 성장은 일단 북한에게 맡기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갑작스럽고 강제적인 개방유도 보다는 북한을 도와줄 수 있는 개방을 통해 북한의 체제완화 단 계를 거쳐야 하겠죠. 그래서 1민족 2국가인 현상태대로 남북연합 의 과도체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곧장 1민족 1국가로 가는 고려 연방제는 남한으로서도 북한으로서도 부담만 가중될 것입니다. 중간단계인 남북연합단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진태가 이건의 말을 꼬집었다. "고려 연방제의 1국가 2체제 2정부 하에서도 서서히 대화를 해 나갈 수 있지 않갔소? 우리가 주장하는 연석회의를 통해서 말이 요." 이건이 고개를 약간 흔들며 말했다. "북한이 강조하는 연석회의를 통한 통일논의는 정당, 사회단 체, 개별적 인사를 따로따로 논의 하자는 것인데 이것은 실현불 가능하기도 한 것이고 남북화합에 별 도움이 되기 어려운 것입니 다. 북쪽이야 99퍼센트 투표 99퍼센트 찬성이 말해주듯, 로버트 처럼 학습된 인민들이 앵무새같은 말들을 반복할 테니 별문제가 없지만, 남한은 이럴 경우 사회단체가 한 천개쯤 우후죽순으로 나서겠다고 할 것이고 주장은 제각각일 것입니다. 대표성있는 통 일논의가 불가능하다고 봐야죠. 결국 우왕좌왕 하면서 감정들만 상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남한은 남북연합 단계를 거 치는 동안 북한을 좀 들여다보고나서 국민대표성을 갖춘 최대공 약수의 의견수렴을 한 연후에 1민족 1국가의 수순을 밟아가야 죠." 다시 사진태가 따졌다. "고려 연방제가 중간단계가 없다고 몰아부치는데, 남한의 민족 공동체 방안도 남북연합단계 후에 통일헌법으로 가는 과정을 또 렷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점은 어케 설명할 수 있갔소?" 이건이 여전히 잔잔한 음성으로 대답해 주었다. "완벽한 통일 방안을 책상위에 앉아서 구상한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어느 정도의 애매성 모호성은 그때가서 융통성 대응성 적응성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시점의 통일방안일수 밖 에 없지 않겠읍니까? 문제는 우리가 접촉할 수 있고, 쌍방이 통 일 실현을 위해 꺼리김 없이 나설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의 제시 입니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 방안이 완벽하다고는 못해도 약간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수정도 되고 하면, 남북을 가깝게 만들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북의 접근방식 역시 2체제에서 비롯되는 연방주의적인 접근방식이기 때문에 북한의 고려연방제 와 무관하지만은 않고, 정치 군사문제 논의들 역시 북한이 받아 들이기에 어렵지 않은 것인데, 굳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할 필여 야 없겠지요." 김정수가 다시 공동체 방안에 대해 의구심을 표시했다. "공동체 방안은 우리 고려연방제와 달리 통일 뒤에 2 체제가 아닌 단일 체제로 엮어가겠다는 의지가 분명한데, 통일 후의 체 제 구도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소? 공동체 방안을 들고 나온 것이 남한이니 까네, 무작정 자본주의 체제로 가자는 기 요?" 이건이 잠시 염두를 굴리다가 말을 이었다. "통일후의 체제 모델로 많은 사람들이 구상을 내놓았는데, 제 가 읽어본 비공개 자료들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은 K대 교수의 논 문이었읍니다. 대충 내용을 간단히 언급해 본다면, 오늘날 소련 및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이 지향하는 체제 모형 은 북구형 선진복지국가 특히 스웨덴이라고 합니다. 스웨덴은 실 제로 자유, 복지는 물론 평등의 실현에 있어서 어느 사회주의 국 가보다 앞서 있으며 그 생산체계는 자본주의적이나 분배체계는 사회주의적이고, 기본적인 정치과정은 자유민주주의적이나 사회 경제정책은 사회민주주의적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스웨덴은 자유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결합 접근하는 복지주의적 민주주의국가 로서 그럴듯한 모델이라고 하더군요. 자유, 민주, 행복의 보장이 라는 인류보편의 가치추구를 위한 통일국가의 미래상이 될 수도 있겠고, 통일헌법의 이념으로서 민족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평등주의, 인간주의 등 좋은 것을 모조리 가져다 붙이는 데에도 지장없는 그런 모델이었다고 생각했읍니다. 북한이 하루빨리 개방의 공포에서 벗어나 남북한이 멋진 사회 를 이룩하는데 반쪽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 랍니다." 이건이 말을 마치고 피곤한 듯 눈을 껌벅이자, 북한의 두 장성 은 논의를 중단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한 가 본데 그만 쉬기요. 내일 언제 쯤 떠날끼요?" 이건이 배웅하기위해 일어서며 말했다. "오전에 떠날 겁니다. 다시 또 뵐 수 있겠지요?" 사진태가 문을 나서며 말했다. "물론, 그렇게 될끼우이다. 이건동무 편안히 자고 일어나 좋은 기분으로 평양을 떠나기 바라갔소." "안녕히......" <소설, 안전기획부(9)> (9) 음지의 공작 어버이를 잃은 윤희의 상처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정도가 되 자, 기석은 고베 지진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고베지진을 파고들수록 혐의가 짙어지는 안기부... 민족이기주 의를 위해 가리지 않는 테러 행위... 응징은 정당한 것임에도 기 석은 마음의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당한 쪽은 일본이고 얻은 쪽은 기석 자신의 민족이었고, 안기 부가 관계되어 있다면 가장 깊숙히 개입했을 것이 틀림없는 친구 이건. 이런 것들이 기석을 벌써 몇달째 고민하게 만들고 있었다. 슬쩍 빠져버리고 싶은 마음과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에 대한 테 러를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전사(戰士)로서의 외고집이 계속 상충 하고 있었다. 엊그제는 대구에서 폭발사고로 100명이 죽었다. 현장보도에 대 한 통제 여부로 시끄러운 잡음까지 자아내고 있는 대구 지하철 폭발 사건이었다. 죽은 중학생들의 어머니들에게는 참혹한 슬픔이었고, 일반국민 들에게는 타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혹시 우리동네도`하는 염 려 그리고 그치지 않는 사고에 대한 신경질등등이 겹친 욕으로 묘사되고 있는 인재(人災)였다. 여권이나 야권이나 애도를 표하는 모습은 비슷했지만, 여권의 애도는 풀이 죽어 있었고, 야권의 애도는 활기차 보였다. 6월 선 거를 코 앞에 두고 터진 대구 폭발 사고는 충분히 그럴만 해보였 다. 대구폭발사건은 기석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았다. 고 베지진에 대한 하늘의 응징이란 미신이 언뜻언뜻 머리를 스치며 산란한 마음을 더욱 스산하게 했다. 국가 이기주의의 가장 보수적인 집행자인 안기부... 그리고 고 베참사... 자신이 나고 자란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안기부가 민족의 숙적 이랄 수 있는 일본국민들을 죽였다면, 일본국민을 위해 안기부를 응징해야할까? 더구나 친구인 이건도 개입해 있다면. 감상적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인도주의겠지만, 민족자체만을 놓고 볼 때 배반의 감정까지 지니면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해야 하는지, 결정하기 힘든 기석이었다. 안기부의 음성적인 그늘이 국가를 위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사람도 아닌 자국민에게 응징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기석 자신의 이기주의이기도 했다. 자신이 나고 자란 국가의 이익을 못본 채 해주고 싶은 이기주의임은 분명했다. 기석은 안기부에 대한 응징여부를 여러 사람들의 정서를 통해 서 참고해 보기로 했다. 기석은 구상을 하는데 두 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컴퓨터를 켜고 통신망 하이텔로 들어가 해킹 프로그램 `시바의 야한침대`로 아이디 하나를 도둑질했다. `MBCFM1(고소영)`아이디 였다. 여자 탤런트 아이디를 고른 이유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에 적합해 보여서 였다. 비밀번호는 3XXX였다. 일단 아이디를 준비한 기석은 이문열의 단편집 `아우와의 만남`에서 적당한 글을 하나 선택했다. `홍길동을 찾아서`란 애매한 단편을 써먹기로 했다. 기석은 자신이 `건방`이란 가명으로 통신망에 올린 <소설 안전 기획부>의 전편이라고 할 수 있는 `Z대의 찌꺼기`와 이문열의 ` 홍길동을 찾아서`를 짜맞추는 작업을 시작했다. 국내 정상의 작 가인 이문열의 작품을 빌린 것은 이문열 본인에게는 미안한 짓이 었지만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건방`(기석의 필명)이란 풋내기 작가의 작품과 `고소영` 아이디만 가지고는 사고에 깊이 와 무게있는 독자들을 끌어들이기 어려웠던 것도 `홍길동을 찾아 서`를 끌어들인 한 이유였다. 기석은 사람들에게서 관심을 유도할 만한 글을 만들어 나갔다. (홍길동을 찾아서)의 이문열과 (소설 안전기획부)의 건방. 저는 80년대 후반 Z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현재는 변호사업을 하고 있읍니다. 굳이 학벌과 직업을 소개하는 이유는 지금부터 이야기할 내용과 약간의 관련이 있기 때문이고, 글을 읽는 독자로서 어느정도의 소양을 갖추었다는 점을 설명 해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어쩌면 자기과시처럼 보일수도 있는 소개문에 모쪼 록 넓은 마음으로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며칠전 책방에 들려 몇권의 책을 산 적이 있읍니다. (소설, 안전기획부)를 사기위해 시내의 모서점에 들렸던 저는 평소에 좋아하던 이문열씨의 (아우와의 만남)이란 책을 더불어 샀읍니다. (소설 안전기획부)가 제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두가지가 있었읍니다. 첫째는, (소설 안전기획부)가 컴퓨터 통신망 천리안 (DEBUT)난을 통해 92년 부터 (Z대 찌꺼기) 그리고 (전사의 고백) 마지막으로 (안전기획부)란 타이틀의 연작으로 만 3년간 연재되고 있읍니다. 연재 초기 당시 부터 제목에 이끌린 저 는 독자가 되었읍니다. 지나간 학창시절의 향수가 물씬 피어오르는 초반의 (Z 대 찌꺼기)는 제목도 제목이거니와 내용 또한 글에서 눈을 떼기 어렵게 자극적 이더군요. 한 공학도가 펼쳐내는 사랑이야기가 Z대를 배경으로 독특하고 밀도 있게 전개되었고, 작가가 공학도 이어서인지,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원리와 현 대 물리학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양자역학의 절충을 어렵지 않게 풀어주어 작가의 해박한 묘사에 빨려들고 말았읍니다. 주인공의 여자 꼬시는 절묘한 기 법들이 무척 현실감있어서 경탄과 재미를 주었고, 후반에서 찡하는 감동까지 얻을 수 있었던 소설이었읍니다. 둘째는, (소설 안전기획부)의 초반부인 (Z대 찌꺼기)가 94년 초쯤에 출판이 되었던 적이 있었읍니다. 웨딩잡지인 행복만들기를 만들어내는 문화성이란 출 판사에서 출판이 되었는데, 아쉽게도 출판 열흘 어림해서 이 출판사가 부도가 났읍니다. 제가 이런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행복만들기 잡지사에서 일하던 사람이 저와 친인이었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알 수 있었읍니다. 1년이 지난 뒤에 저는 전반부였던 (Z대 찌꺼기)와 (전사의 고백) 그리고 (안전기획 부)가 이전에 부도났던 출판사의 후신인 황소걸음에서 새로 엮어져 나온 것을 알게 되었읍니다. 그래서 책방을 들린 김에 (소설 안전기획부)를 구입하게 되 었고 이문열씨의 (아우와의 만남)도 구입하게 되었읍니다. 제가 이런 글을 올리게 된 이유는 이문열씨의 중단편집인 (아우와의 만남)을 읽고 나서 비롯되었읍니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아우와의 만남)안의 (홍길동을 찾아서)라는 단편을 읽고나서 였읍니다. `옛날 경상도 안동 땅에 한 유서 깊은 집안이 있었다.`로 시작되어, `가족사적 회고에 따르는 특이한 흥취도 이 수상쩍고 정체 모를 글쓰기의 한 동기가 되었을 거라고` 로 오리무중하게 끝나는, 단편 (홍길동을 찾아서)를 읽고 난 후, 전 한동한 기이한 감동과 우연 그리 고 인연등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했읍니다. 열장도 안되는 이 단편이 (소 설 안전기획부)와 함께 제 손에서 읽혀진 묘한 느낌은 제가 이 단편으로 저 혼 자만의 해법을 만들어 볼 수 있다는 기이한 자만이기도 했읍니다. 당대 국문학 의 거목이라 할 수 있는 이문열씨가 소설속에 감추어 놓은 수수께끼에 대한 해 답을 비약적인 상상력으로 만들어 보았고. 그런 것들이 오늘 이런 글을 올리게 만든 것 같습니다. (홍길동을 찾아서)에 담겨진 수상쩍은 수수께끼에 대한 해석을 이해하는 데 는 몇 가지 단어 맞추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종가집은 정통파 국문학을 구사하는 집합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 속에는 Z대 라는 음영 역시 깔려 있는 듯 합니다.. 그리고 종가집의 종손은 아마 당대 국문학을 대표할 수 있는 작가 이문열씨 의 역할이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종손의 딸인 종녀를 읽노라니 (소설 안전기획부)의 초반부였던 (Z대 찌꺼기)의 작가 건방 씨의 영상이 떠올랐읍니다. 시집간 종녀의 시댁은 통신문학을 구사하는 이공계쪽의 비주류 문학도를 의 미하는 것 같습니다. 시집간 종녀가 종가집에 와서 종가집의 정기를 훔쳐가듯이 낳은 신동아들이 나옵니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에서 종가집이 Z대의 음영을 나타내 주는 듯 합 니다. 신동 아들은 건방 씨의 (Z대 찌꺼기)라고 여겨집니다. 보통 이문열씨의 글에서 여러번 나타났듯이 작가의 작품을 자식으로 표현하는 이문열씨 특유의 기법이 생각나서 종녀의 아들을 건방 씨의 첫 작품인 (Z대 찌꺼기)로 연관지어 보았읍니다. 그리고 종가집의 정기를 빼갔다는 표현은, 건방 씨의 소설제목에 `Z대`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제목 덕을 보았다는 점에다가 `그 정기를 빼갔 다`라는 표현을 쓴 것 같습니다. 딸이 종가집 정기를 훔쳐 신동아들을 낳자마자, 역술에 밝은 종손이 말하길, `네 욕심이 지나쳤다. 여의주를 둘씩 문 용은 등천을 못하나니`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은 건방 씨가 그의 (Z대 찌꺼기)에서 보여준 비할 바 없이 화려 독특한 주인공의 성격과, 주인공이 일반적인 Z대생 이미지를 완전히 깨버리는 카사노바로서의 활약상, 그리고 대부분의 Z대생들이 조심스러워 해야 하는 유 아독존적인 면들을 글속에 감추지 않고 뻔뻔하게 묘사한 점등을 `여의주 두 알 `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등천을 못한다는 것은 세상에 나와 널리 읽혀지는 글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예측하고 있는 장면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종녀의 9살짜리 신동아들이 종손의 예언대로 요절하는 대목에서 죽기 직전 싯귀를 남기는데, `비록 그 죄가 삼천가지라도 불효보다 더 큰 죄가 있으리. 불효가 삼만 가지라도 부모 앞에 죽음보다 더 큰 불효가 있으리.` 라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효를 이야기 하는 것은 신동아들로 표현되는 (Z대 찌꺼기)의 주인공 이 삼대과부집 외아들로서 북에 인연을 둔 그 아버지, 할아버지에 대한 끈끈한 정을 보여주고 있고, 이문열 씨 역시 효를 강조하는 문인이니만큼 공통적인 심 적 교류에 의해서 이런시가 나오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또한 가족사를 배경으 로 엮어지는 종가집과 시가집 이야기니만큼 이런 시의 도입은 저의 시각으로는 매우 적절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신동 아들외에도 종녀는 시댁 집안에 아들 하나를 더 낳아 주었는데 그 신동아들의 동생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면, `죽은 형의 화려하고도 비장한 전설에 가리어 얼마 동안은 그 재주를 인정받 지 못했으나 그래도 범상함을 넘어서는 아이`로 묘사해 놓고 있읍니다. 여기서 신동아들의 동생 역할은 (Z대 찌꺼기)의 연재이후 건방 씨가 새로 올 린 단편 (작가의 눈물)을 가르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구절절한 찌꺼기 헌터로서 긴 다리의 여인들로부터 동정심을 유발하는 건 방 씨 특유의 재치가 괘씸한 (작가의 눈물)은 이곳 하이텔 Z대 동호회 자료실 에도 올라있는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제가 확인한 바로는 Z대 자료들 중 가장 많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Z대 찌꺼기)였고, (작가의 눈물)역시 베스 트 자료로 올라 있었읍니다. 문학적 깊이가 있는 글로 생각됩니다. 건방 씨는 (작가의 눈물)속에서 (Z대 찌꺼기)의 뒷 이야기를 예고하고 있는 데, (홍길동을 찾아서)에서도 역시 그 부분으로 짐작되는 글귀가 나오고 있었 읍니다. 살펴보면, '아들을 서울로 유학보내 새로운 시대와 맞서게 했고 그 아들도 노력과 열정 으로 무너져 내리는 집안을 되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어설픈 한국판 도약이론 으로 그 아들이 선택한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그 집안의 몰락을 훨씬 급속하고 처참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유리걸식과 다름없는 삶의 밑바닥으로 내몰 리게 되는데 그것은 현대적인 서사공간 속에 전개되는 또다른 긴 이야기가 된 다.` 여기서 `아들을 서울로 유학보내 새로운 시대와 맞서게 했고 그 아들도 노력 과 열정으로 무너져 내리는 집안을 되일으키려 했다.` 라는 대목에서는, (작가의 눈물)에서 예고한 (Z대 찌꺼기)이후 뒷 이야기의 주인공이 중동의 킬러로서 이야기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면서 집안을 되일으키는 대목과 맞물리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또 `어설픈 한국판 도약이론으로 그 아들이 선택한 이데올로기`란 대목은, (Z대 찌꺼기) 이후의 (전사의 고백)에서 묘사되는 중동의 민족문제와 남북한 의 민족문제가 어우러지는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 것 같습니다. `유리걸식과 다름없는 삶의 밑바닥으로 내몰리게 되는데` 란 대목은, (Z대 찌꺼기)이후 (전사의 고백), 로 이어지는 뒷 이야기에 대한 이문열씨의 평가 같습니다. 작가 건방 씨는 (전사의 고백)에서 주인공을 청부업자로 만드 는데 이문열 씨는 그것을 세속적인 인기에 영합하려는 의도로 보고 유리걸식이 란 표현을 쓴 것 같습니다. `그것은 현대적인 서사공간 속에 전개되는 또 다른 긴 이야기`란 대목은, (전사의 고백)에서 (소설, 안전기획부)로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건방 씨의 글에 대한 미확실성을 덧붙여 놓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홍길동을 찾아서)의 그 다음 대목인 말미에서 더욱 뚜렷해지는데, `아홉 살에 죽을 외손주를 돌날에 이미 알아본 그 종손이 정말로 이인이었는 지, 아니면 자신의 가문만 아는 심술 사나운 외할아버지에 지나지 않았는지는 아직도 판가름나지 않았다. 백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간 지금도 한쪽 집안(종 가)은 그 예견을 한 빼어난 이인의 직관으로 보고, 다른 한쪽(시댁)에서는 다 만 약간의 주술력 있는 심술로만 우기기 때문이다. 그 뒤 반세기가 넘도록 두 집안이 나란히 걸어야 했던 참담한 몰락의 세월로 미루어 어쩌면 그같이 상반 된 이해는 다가오는 예감을 받아들이는 두 집안의 태도 차이일 뿐이었던 것은 아닐른지. 그런데,- 이쯤되면 왜 이런 얘기를, 그것도 소설이 차지하기로 된 공간을 빌려 쓰고 있는가를 묻는 이들도 생길 때도 되었다. 거기 대해 홍길동을 찾아서, 라고 대답한다면 너무 엉뚱할까? <홍길동전>의, <심청전>의, <장화홍련전>의 전통이 우리 현대 소설에도 이어질 수 있는가를 살펴보고 싶었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 더 보태기로 하자. 가족사적 회고에 따르는 특이한 흥취도 이 수상쩍고 정체모를 글쓰기의 한 동기가 되었을 거라 고.` (홍길동을 찾아서)는 결국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읍니다. 부분별로 살펴 본다면, `아홉 살에 죽을 외손주`란 천리안의 컴퓨터 문단 개설이후 인기를 모았던 (Z대 찌꺼기)가 서점가에서 별로 알려지지도 않은채 9개월만에 주저 앉은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추측컨데 (Z대 찌꺼기)가 연재가 끝난 시점이 2-3월 이 었으니, 이문열씨가 (홍길동을 찾아서)를 쓴 것이 94년 11-12월 쯤으로 추정됩 니다. `이인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가문만 아는 심술 사나운 외할아버지`란 대목 은 비주류 문학인 (Z대 찌꺼기)에 대한 미평가를 묘사한 것 같습니다. `반 세기가 넘도록 두 집안이 나란히 걸어야 했던 참담한 몰락`이란 (Z대 찌 꺼기)가 컴퓨터 통신망 천리안에 연재될 당시 이문열씨는 (오데세이아 서울)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고 있었읍니다. 아마도 두 글 모두 출판되어 반년만에 실패 작으로 몰락하고 있다는 평가인 것 같습니다. `다가오는 예감을 받아들이는 두 집안의 태도 차이`란 (Z대 찌꺼기)의 몰락 을 예언하는 관점에서 정통파 문학을 대표하는 이문열 씨 자신과 이공계 문학 도와의 입장차이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쯤되면...소설이 차지하는 공간... <홍길동>, <심청전>, <장화홍련전>의 전통이 우리 현대소설에도 이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대목에 다다르면 비주 류 문학이 홍수를 이루는 현대소설에 뚜렷한 국문학의 정통 계승자를 기다리는 이문열씨의 마음이 엿보입니다. 마지막의 `가족사적 회고에 따르는 특이한 흥취`란 대목에서는 (홍길동을 찾 아서)가 (Z대 찌꺼기)에 기울이는 관심의 한 이유를 훔쳐볼 수 있게 해줍니다. (Z대 찌꺼기)에 등장하는 첩보원 한민철은 주인공의 아버지임과 동시에 남한에 서 이북으로 건너간 국문학도로 등장하고 있음니다. (홍길동을 찾아서)에서 나 오는 종가집의 배경과 이문열씨의 배경 그리고 (Z대 찌꺼기)의 배경 이런 것들 이 아주 잘 맞물리고 있읍니다. 또한 (홍길동을 찾아서)의 주인공 종녀의 묘사에 있어,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문열 씨는 치마로 둘러 쌓인 군자로 묘사해 놓고 있는데 이 역시 (Z대 찌꺼 기)의 내용으로 짐작되는 작가 건방의 경력(?)을 묘사한 것 같습니다. (홍길동 을 찾아서)가 (아우와의 만남)이란 단편 집 속에 담긴 것도 저에게는 의미심장 합니다. 한국문단의 거목인 이문열씨가 이제 막 책을 내기 시작한 신예작가의 작품을 소재로 글을 썼다는 점에서 연결고리를 저는 `아우`란 단어로 잡고 있읍니다. 아마도 통신문학이 발현이 되고있는 시점에서 이문열 씨 자신의 원고송고를 위 해 천리안을 들여다보다가 우연히 건방 씨의 작품과 조우하게 된 것이라고 추 측해 봅니다. 그 와중에 이문열 씨는 건방 씨의 (Z대 찌꺼기)를 소재로 해서 현대문학의 미래를 다루어 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런 엉뚱한 글을 올리는 이유는 건방 씨의 (소설 안전기획부)에 인상 을 받자마자, 이문열 씨의 (홍길동을 찾아서)를 읽게 된 우연한 인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 대가의 작품에 담겨진 작가의 비밀을 혼자서 추리해 보는 기 묘한 흥분과 이런 글이라도 올리지 않으면 수수께끼 같은 글에 대한 저만의 해 석이 영원히 사장되어질 것 같아서 대중 앞에 올려 보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이문열 씨나 건방 씨가 아닌 까닭에, 제가 올리는 글이 추측에 불 과한 엉뚱한 억측이 될 가능성이 대부분입니다만, 저 자신이 해석한 느낌은 두 분의 글 모두 재미있고 강렬했읍니다. 두 분의 조우가 우연(?)인지 혹은 어떤 인연의 끈(?)이 숨어 있는지에 대해 직업적인 관점에서도 궁금증이 느껴집니다. 그것이 이런 글을 올리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이 아이디는 한 친인에게 빌린 아이디입니다. 혹시라도 아이디 주인께서 이 글을 보시게 된다면 용서를 구합니다. 이 글을 보시게 되는 분이 있다면 그리고 제 글에 공감이 가시면 아이디 주 인에게 미안하니 갈무리한 뒤 편집해서 새로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차후에 제 아이디가 아닌 관계로 이 글은 지우겠읍니다. 포항 출신의 여변호사 김외X 였어요. 어쩐지 자신이 읽기에도 낯 간지러운 글이었지만 기석 자신에 게는 여러모로 손해볼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통신망 하이텔의 사람들이 꼬일 만한 장소, 이곳저곳에 `여변호사 김외X`로 사칭 해서 올렸다. 물론 아이디는 탤런트 고소영의 아이디였다. 마침 한겨레 신문에 <소설 안전기획부>에 대한 광고가 나가고 있던 터 였다. 이문열, 고소영 아이디, 안전기획부, 그리고 여변호사, 등등의 자극적인 요소들을 뒤섞어 놓은 기석의 정교한 음지의 공작(?)은 예측한 효과를 곧바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곳 저곳의 게시판에 <안전기획부>에 관계된 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기석은 그 중 쓸만한 공간과 이용할만한 글귀를 골라내 었다. 장소는 하이텔 통신망 상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큰마 을(PLAZA) 게시판이었고, 그물에 걸린 고기는 한 아주머니의 글 귀였다. 큰마을 (PLAZA) 제목 : 안기부서 '나온' 아줌마 70번째 이야기!! #5164/6683 보낸이:고장숙 (kokangSU ) 조회:574 안녕하세요? 안기부 자유게시판에서 '나온' 아줌마에요. 대구폭발사건 확실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70번째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어요. *지난 줄거리 40대의 컴퓨터 초보아줌마가 어쩌다 안기부 게시판을 들여다 보곤 엄청 놀란다. 군사독재시절을 미화하는 글들이 있었기 때 문... 안기부 게시판에 몇번의 글을 쓰다가 안기부게시판이 활성화되 는 것이 배가 아파서 음지에서 양지(plaza)로 나온다. 하이텔의 반짝이는 젊은이들이 (혹은 청장년) '위컴의 쥐'가 될까봐 그 시 절의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쓴다. 며칠전 4학년짜리 큰아이가 "엄만 여태까지 대통령중에서 누가 제일 좋아?" 하길래 단호히 "없다!"라고 말했다. "아유~ 그래두 누가 쪼오끔이래두 더 낫다구 생각하냐닝깐?" "없다닝깐!" 간혹 여론조사에서 박정희가 1위니 어쩌니 하는 것을 보고 청 산되지 않은 위험한 역사가 '위컴의 쥐'를 양산하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대구사건을 보고 현재의 언론인들도 길들여진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또 다시 확인하게 된다. 청산되지 않은 더러운 역사!!! 뒤늦게 도착한 [말] 5월호를 보니... <월북 '안기부 비밀요원' 손수철의 고백>이라는 기사가 있군 요. [지난 3월 23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는 91년 부터 안기부 비 밀요원으로 활동했다고 주장하는 한국 삼원통상주식회사 사장 손 수철씨의 입북 기자회견이 있었다....재미언론인 문명자씨가 전 말을 취재... "사업욕심에서 허가 없이 북한 사람들을 만났다가 안기부에 약 점이 잡혀 각서를 쓰고 안기부 첩자 노릇을 해야 했는데 제거 위 협을 느끼고 입북했다."] *간추린 그의 활동 내용은.. 1. 대북 정보수집 2.재중 동포사회에서의 친남(南)계 기반 조성 3.북한 주민의 남한 귀순공작 *안기부 에이전트가 된 경위.. 품질이 좋은 북한 상품 거래선을 남보다 먼저 확보하려는 욕심 에 통일원의 북한 주민 접촉 승인을 받기 전에 저돌적으로 일을 추진.. 남산 아스토리아호텔 2층에서 안기부 국장 신창균이 공포분위 기 속에서 '간첩질'을 했다고 추궁해서 각서를 쓰고 비밀요원이 됨. *안기부로 부터 하달된 지령내용... 첩보망을 확대.조선족,중국인까지 포함해서 친한단체,비밀단체 만들것. 이북에 대한 파괴.암해.인물납치 계획을 수립.보고할 것..등 *중국에서 활동하는 안기부 요원의 수는? "북경,상해,천진,시천,광주등과 심양,연길,춘춘,통화,길림, 위 해,단동등 동북3성 일대에는 안기부 첩자나 비밀요원이 많이 있 는데... 동북3성 일대에는 합작기업이라든가, 1천5백군데가 넘는 데... 그런 곳에 안기부 첩자가 없는 곳은 하나도 없다" *안기부 요원들의 활동내용... -중국 동북지방 재중교포들에 대한 분리. 이간 전술- [친북계 교포를 친남계로 돌려 세우는 것. 그래서 이 지역의 2천명 이상 되는 비밀 첩자들이 돈, 물건을 뿌리고 색정적인 (으음..역시!-아줌마 혼잣 소리) 노래 테이프나 비디오 테이프를 돌리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을 조성하고 고향방문, 관광,장사 를 시켜준다며 교포들을 포섭, 회유해 ...친북계 교포들의 통일 운동을 방해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 결과 재중 교포사회에는 친 남계와 친북계 사이에 반목이 심화돼, 친북계와 친남계 어린이들 까지 패싸움...안기부 요원 주강희(손씨의 친구)는 '큰 건'을 수 행... 안기부로 부터 '큼직한 상'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포섭한 사람들을 시켜, "통일은 대단히 힘들다" "통일은 커녕 전쟁이 일어난다" 등등의 유언비어를 교포사이에 퍼뜨린 뒤, 친북계가 운영하는 통일학습장을 습격해 한밤중에 불을 내고 "남쪽에서 불을 냈다"고 소문을 내고... 또 친남계 사람들의 창고를 습격한 후 그건 북쪽에서 했다고 소문을... 그 결과 그 지역에서 대판 싸움을 붙인 후 또 이간질... 양측이 몽둥이.쟁기,식칼까지 들고 나와 치고 패고 받고 찌르 는 난투극을... 이래야 친남계 세력을 확장하기에 유리하기 때 문. (으음..기가 질리는군!-아줌마 신음소리) ................................... 남과 북이 대치상태를 해소하고 화해를 모색해야 할 마당에 손 수철씨의 증언에 따르면 안기부는 단순한 첩보전의 차원을 넘어 궁극적으로 북한 정권의 붕괴를 획책하는 공작을 벌여오고 있었 던 셈...게다가..누구보다도 일치단결해야 할 재중(在中)교포사 회를 친남,친북이라는 대립과 반목의 구도로 몰고 간 것은 민족 적 양심에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행위...] 증말이에요? ["94년 7월 안기부는 국제 2국 담당과에 새로 '중국공작부'를 증설하고 그 아래 6개 공작반을 설치했으며...] 아저씨들이 생각하는 통일은 제일 좋은게 전쟁을 통한 건가요? 또 그런 공작으로 북한내부를 붕괴시켜서 통일하는 거에요? 국민의 혈세를 그런 치졸한 공작하느라 펑펑 쓰는군요. 지하철 공사하면서 보험에두 안들구. 사고후엔 국민한테 강제성금 걷으면서, 돈이 없어 시설안전관 리도 못한다면서.. 오늘 한겨레신문, [소설 안전 기획부] 광고를 봤더니 독후감을 모집한다는군요.--상품--우아~! 핸드폰,무선호출기. 으음.. 젊은이들을 잡겠다는 거군요. 안기부를 엄청 미화한 소 설루다가, 우리 젊은이들을 '위컴의 쥐'로 만들 속셈? 소설 안전기획부 3권 169쪽, ["우리가(안기부) 추구하는 심리적 통일 작업이란, 우리 남한 사람들이 북한 동포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자 하는 데 그 목표를 두고 있다. 우리 체제대로 북한을 흡수하 기 위한 간교한 수법으로서의 심리적 작업이 아니고,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호흡을 같이 할 수 없어 애가 타는, 그래서 더욱 보 고 싶고 자유로이 만나 더불어 살고 싶어하는 민족애를 북한 동 포들에게 심어주고자 하는 것이 안기부의 심리적 통일 작업이 추 구하고 있는 본질이다."] 당신들이 상을 주고자하는 독후감은 이런 거겠죠? -아유! 우린 안기부가 나쁜덴줄 알았더니 애국자만 모인데구먼 유? 아유! 엘리뜨덜만 모여서 국가를 위기에서 건지구. 아유우 ~!- 광고에선 '5천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어쩌구` 해놓곤, 물어보니 완전 가상소설이라네요. -단거 좋아하세요? 드실래요? '단거'가 뭐냐구요? 엿이지요.모. 안기부를 그런대로 묘사하며 글 끄트머리에서 <소설 안전기획 부> 광고를 비웃는 고장숙 아줌마의 글이 기석은 적절하다고 판 단했다. 또한 `하이텔 큰마당(PLAZA)` 게시판이니 만큼 여론에 민감한 장소인지라 이곳에서 기석은 안기부에 대한 국민의 마음 을 읽어 보기로 했다. 기석은 곧바로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위해 고장숙 아주머니 에게 시비를 거는 글을 작성해서 올렸다. 이번에는 탤런트 고소 영 아이디 대신 기석이 공부를 가르쳤던 제자의 아이디로 글을 올렸다. 큰마을 (PLAZA) 제목 : [5164]안기부서`나오신`아줌마에게<안기부? #5337/6683 보낸이:김유재 (bigman) 안기부에서 나온 고강숙 아주머니께, <소설 안전기획부>의 저 자 건방이 몇 자 적습니다. 우선 제 글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겉치레 인 사가 아니라 그 점은 글을 써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하는 고 마움일 것 입니다. 저도 아주머니에게 그런 마음을 분명히 지니 고서 이 글을 찍고 있읍니다. 제 글의 짤막한 부분을 인용하셔서 제가 안기부의 사주를 받고 글을 쓰는 것처럼 말씀하셨더군요. 우선 저에 대한 소개를 하겠읍니다만 제 본명은 쓰지 않겠읍니 다. 오해는 마세요. 제 본명은 알고자 하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읍니다. 그럼에도, 밝히지 않는 이유는, 이 글이 저라는 인간 의 넋두리이기 보다는, <소설 안전기획부>가 어떤 집단의 압력이 나 사주에 의해서 쓰여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더욱 강조하고 싶 어서 입니다. 저는 충남 예산군 광시가 본적이고, 서울에서 태어났읍니다. 6.25때 작은 할아버지는 인민군에 지원하셔서 지금은 아마 이북 에 계실 것입니다. 둘째 할아버지는 6.25때 빨갱이라고 국군에게 총살되셨고, 저희 할아버님도 광시장터에서 둘째 할아버지 옆에 묶이셔서 국군에게 역시 공산당이라고 총살당하셨읍니다. 당시 증조할머니 께서는 과부셨읍니다. 저희 할머님도 역시 청 상과부가 되셨죠. 그리고 저희 아버님 역시 변변치 않은 이유로 제 나이 여덟살 때 어머니 곁을 떠나셔서 저희 어머니 역시 청상 과부가 되셨읍니다. 삼대과부집의 독자가 된 저는 유년시절을 청량리 588 번지 바 로 옆동네(일명 청량리 587번지)에서 자랐읍니다. 어렸을 때, 동네 환경이 별로 그럴 듯 해서 그런지 모르겠지 만, 저는 유년 시절을 창녀 아씨(당시 창녀들에게 손님 물어다 주는 삐끼는 몸 파는 누나들에게 누나라는 명칭 대신 아씨라고 불러야 했읍니다.)들의 삐끼로, 돈을 웬만치 쏠쏠하게 벌었읍니 다. 제 국민학교 학비는 물론, 저와 제 여동생 용돈, 할머니들 사탕값, 정도는 충분히 벌어들였읍니다. 그 와중에 동네 형들과 어울려서 나이 십사세가 되기 이전에 몇 번의 도둑질을 했고, 도 둑질 때문에 경찰서에도 두번을 잡혀갔었읍니다. 하지만, 당시 절도범들 중에 유일하게 저만 14세 미만이었던 터라, 저 혼자서 만 소년원 신세를 면했읍니다. 그리고 휘경 중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성적이 좋지 않았읍 니다. 일학년 때 등수가 반에서 28등이었을 것입니다. 2학년 때 는 11등 정도 했고, 3학년 때는 전교 14등으로 졸업했읍니다.그 리고 대광고등학교를 들어갔는데, 들어가자 마자 전교 6등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2학년 때 저보다 한살많은 여고생을 좋아 하다가 실연을 당하는 바람에 폭삭 주저 앉았읍니다. 고 2때까지 하던 삐끼 노릇을 그만두고 고 3시절에 발버둥을 쳤지만 저는 내 신 3등급으로 졸업해야 했읍니다. 하지만, 운좋게도 학력고사는 잘친 편이라서 저는 서울대 자원 공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읍니다. 그 당시 입시 때문에 용돈도 못벌어서 인지, 가세가 폭삭 기울 어져서, 저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뽀지게 몰래바이트(아이들 과외:전두환시절의 금지과외 공포는 아시는 사람들은 아실 것입 니다.)를 해야했읍니다. 그냥 용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생계과외였고, 저는 열심히 가르쳤읍니다. 일주일에 닷새 정도를 가르쳤는데, 평일날은 네 타임(오후 5시부터 새벽 한시 반까지: 여기서 30분이 추가된 이유는 이동의 필요성입니다. 다행히도 전 현대아파트 단지 쪽에 인연을 맺어 이동에 거의 시간을 소요하지 않았읍니다.)을 가르치고 집에 돌아오면 새벽 두 시가 넘었읍니 다. 일요일은 끔찍하게도 적으면 열 두시간, 많을 때는 열 여섯 시간을 가르쳤읍니다. 그렇게 1년을 뛰어서 빚을 갚았고, 그대신 전 일년 후에 대학에서 퇴학 당해야 했읍니다. 공부를 못해서 스 트레이트 경고(당시에는 2.0(C제로)미만 두번을 연달아 두학기 받으면 퇴학이었읍니다.)로 짤린 거지요. 돈은 좀 벌어 놓았고, 종로학원에 들어가 입시준비를 다시 해 야 했읍니다. 그리고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새로 입학했읍니다. 재입학과 동시에 약간 남은 돈으로 중고 황색스텔라를 샀읍니 다. 또 부지런한 과외선생이 되기 위해서였죠. 그리고서, 새로 들어간 첫 학기에는 또 경고를 먹고서 다시 짤릴 위기에 몰렸읍 니다만, 다행하게도, 바쁜와중에나마, 찾아 헤메던 구원의 여인 을 만났읍니다. 그여인이 제가 쓴 <소설 안전기획부>에 나오는 영숙입니다. 그 여인이 제 대신 아이들 영어를 도와주었고, 리포트를 베낄 때 역시 좀 도와주었읍니다. 그래서 그 덕에 전 어느정도 시험준 비를 할 수 있었고, 경고받은 다음 학기에 장학생 수준의 학점을 받았읍니다. 또 그 다음학기에는 전자공학과 학생들이 가장 치열 하게 경쟁했던 전자기장 시험에서 일등도 한 적이 있어요.(참고 로 당시의 저희 과에는 학력고사 수석도 있었읍니다.) 모두 <소설 안전기획부>에 나오는 내용들 입니다. 에또, 이삼일 전, 정확히 5월 2일자 일간스포츠를 보시면 아시 겠지만, 10년전 그러니까 1985년 5월 25일 정오 `서울대 도서관 자동차 질주사건`의 진범이 <안전기획부>의 작가 건방으로 10년 만에 밝혀졌다고 게제 되어 있을 것입니다. 기사내용을 약간 추 려보면, `85년의 서울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사회주의 혁명등의 낱 말이 낯설지 않았던 시절로 가진자의 상징이었던 자동차는 학생 들에게 금기사항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운전 자가 미모의 여자를 옆 좌석에 앉힌채 도서관을 지그재그로 보란 듯이 질주하는 광경은 충격 그 자체였다. 당시(1985) 대자보, 학 보는 물론 일간지에까지 실렸을 정도. 해프닝의 주인공은 소설가 건방 씨로 10년만에 밝혀졌다.` 이 내용 역시 <소설 안전기획부>에 나오는 바람에 밝혀진 내용 이고, 물론 10년전에 제가 한 짓입니다. 왜 이런 미친 짓을 했냐고요? 헐벗고 굶주리고 있다는 당시의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계층을 위해 돌을 던지지는 못할 망정, 민족 투사들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도서관 중심부를 어째서 관통했냐고요? 제가 안기부원이라서, 재벌아들이라서, 행동하는 양심들을 깔아 뭉개기 위해서 그랬겠습니까? 그것은 제 나이 스무살 때, 사랑하고 고마워 했던 한 여인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녀에게 기억할 만한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 어서, 거지반 목숨을 걸고 한 짓이었읍니다. (크윽! 흑! 훌찌럭!) 저는 고광순 아줌마에게 지금도 똑같은 오해를 받고 있읍니다. <소설 안전기획부>가 한겨레 신문광고에서 핸드폰 2대 삐삐 5백 대를 상품으로 걸고, 광고를 낸 것을 가지고, 아주머니께선, `당 신들이 상을 주고자 하는 독후감 운운...`하셨는데, 아주머니께 서는 글귀에서, 여기서의 당신들을 명백하게 안기부원들이라고 지칭하셨읍니다. 제가 그 `당신들`에 대해 말씀드리겠읍니다. 저는 안전기획부의 전반부인 를 천리안에 연재했 고 그것은 당시 그곳에서는 베스트셀러 였어요.(지금은 아닙니 다.) 의 후기인 <작가의 눈물>은 지금도 이 하이텔 Z대 동호회 자료난에 베스트 자료로 남아 있읍니다.(요건 아직도 입니다.) 의심스러우시면 (GO SCCR)해서 버들골 자료실을 찾아보 세요. 그것을 문화성(행복만들기)이라는 여성잡지사에서 출판을 하겠 다고 했읍니다. 그런데, 출판 한지 보름만에 그 잡지사는 그동안 쌓였던 부채 때문에 변변히 광고 한번 못 쳐보고 부도가 나고 말 았읍니다. 그래서 제 는 만부로 절판된 상태에서 2 개월 동안 발간이 정지되었읍니다. 부도 때문에, 아마, 제 책이 잡지사와 몇몇 관련 도매점들에 담보로 잡혀져 있었던 듯 합니 다. 다시 몇개월 뒤에 부도를 어느정도 수습해서 문화성은 도서출 판 문화성 이란 상호를 새로 걸고 제 책을 재발간했읍니다. 그런데, `문화성`이란 명칭이 이전의 행복만들기 문화성이란 명칭과 동일해서인지, 부도난 회사라고 어떤 신문사도 광고를 실 어주지 않았읍니다. 출판에 관계된 사람은 누구나 아시겠지만 책 나간 보름후에 2개월 동안 책을 찍어내지 못했고, 또 책을 찍어 도 남에게 알릴 수 없는 상황에서는 책을 팔기가 무척 어렵습니 다. 재판 2만 육천부를 찍었지만 한번의 광고도 못 냈읍니다. 그 래도 다행히 그 책은 꾸준히 팔리면서 절판되었읍니다. 그동안 저는 Z대 찌꺼기의 후반부의 3분의 2정도를 새로 썼고, 그와 함 께 새로 출판하려 했지만 분량이 커진 책을 현 추세에 광고없이 낸다는 것은, 출판가가 다아는 일이지만, 자살행위였읍니다. 그 래서, 출판사 사장이 또 상호를 바꾼것이 지금의 `황소걸음`이란 출판사입니다. 이번에는 사장이름도 사장 아내의 이름으로 바꾸 고, 제 책 <소설 안전기획부>를 내게 되었읍니다. 다섯권 짜린데 지금 4권까지 나갔읍니다. 이때 사장부부는 그동안 저에게 미안했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들부부하고 시절부터, 못 믿을 지는 몰라도, 계약도 구두로 했었읍니다. 제 책이 묶여 있어도 전 다른 출판사에 책을 낼 수 있는 상황이었지요. 제가 그러지 않은 것이 사장부부에게 무척 부담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설 안전기획부>를 새로내자, 두 부부는 여기저기 빚 을 끌어모아서 성의껏 초장 광고를 쳤고, 책이 나가자, 수금해 들어오는 어음으로 빚을 갚는 대신 와리깡해서 인세 빼고 모조리 광고로 집어 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빚과, 단 한푼도 챙기지 않고 때려 넣는 광고비로, 저에게 한 권이라도 더 팔아주겠다고, 삐삐니 핸드폰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젠 제가 미안해 죽 겠읍니다. 오죽했으면 저도 여기서 이런 치사한 글을 적고 있겠 읍니까. 제가 야속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신문사들입니다. 조선일보 는 다른신문사(한겨레)보다 광고비도 다섯배나 달라고 하면서, 큰 출판사 광고는 어음으로 실어주고, 황소걸음 광고는 현금 아 니면 실어주지 않겠다고 하며, 동아일보 역시 엊그제인가 반단 짜리 광고도 조그만 출판사라 현금아니면 어음으로는 못실어 주 겠다고해서 취소되었읍니다. (나쁜 놈들!) 중앙일보에서도 저희 광고 담당자가 가서 숱하게 싸웠읍니다. 하다못해 스포츠 신문들도 작은 출판사 광고는 위험하다고 해서 떼를 쓰다시피 빌면서 광고를 낸 것입니다. 그나마 광고비가 싼 한겨레 신문정도나 용이하게 광고를 내고 있읍니다. 출판에 종사 하는 사람들은 다 아시겠지만 이름있는 작가나 큰 출판가가 아니 면 책이 나가야 신문사에서 광고를 실어주는 것입니다. 종로(요 건 오타), 을지서적(이건 진짜)에 가 보시면 알겠지만 베스트 목록에 <소설 안전기획부>가 이미 올라가 있는 상태고 출판 이십 일만에 약 오만부가 깔렸는데도 그렇게 광고를 안실어 주려고 하 더군요. 신문사들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껏 어렵게 기사들 긁어 모아서 신문 만들고 그 수입원이 광고인데, 부도나 기 쉬운 작은 출판사의 어음은 위험스러운 것이지요. 하지만, 작 은 출판사 입장에서는 섭섭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운 점도 사실입 니다. 어쨋든 그래서 도서대금을 몇개월 뒤의 어음으로 받는 돈없는 출판사 입장에서는 현금광고는 그대로 빚이지요. 고광순 아줌마께서 안기부원들이라고 착각하고 계신 `당신들` 은 바로 이들, 집 잡히고 광고치는 두 `부부`입니다. 그 사람들 이 안기부원들일까요? 아니면 안기부한테 돈이라도 꾼사람들 일 까요? 그리고, 고광순 아줌마가 <소설, 안전기획부>를 읽어 보셨 다면 느끼실 수 있을지 모르겠읍니다만, 저는 이날 이때까지, 삼 대과부집 호로자식으로 자라서인지 몰라도, 아직 남의 눈치 보는 것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 제가 쓰고 싶은 글,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한 적은 별로 없읍니다. <소설 안전기 획부> 역시 오로지 제가 갖고 있는 철학에 근거해서 제 자유의지 대로 쓰고 있읍니다. 제가 글을 잘못 썼다면 그건 제 철학이 틀 려서 일 것이고. 옳다면 제 철학이 옳아서 일 것 입니다. 그리고 안기부에 대해 전혀 근거 없는 사건으로 배경을 삼은 것은 거의 없어요. 저는 저대로 자료들 모아서 열심히 썼는데, (광고에는 오천페이지 분량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건 다릅니다. 지금 만페이지가 넘어요. 내외신 자료만...) 고광순 아주머니께 서 `가상소설`이란 표현을 쓰셨는데, 물론 제 소설이 모두 사실 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가상 소설`이란 표현은 저에 게 몹시 어색하게 들립니다. 세계 도처의 장소들이 나오고 갖가 지 풍경들이 묘사되고 있는 것들 그리고 하다못해 비행기 노선까 지 90퍼센트 이상 사실과 똑같아요. 또 서울대 내에서의 `일천번 의 정사`가 묘사되는 부분까지는... 여기서는 참 말하기 어렵네 요. 하지만 이 글은 통신망에 연재되었고 저에 대해서 잘 아는 제 후배들조차도 그런 점에 대해서 단 한마디의 `가상`이란 단어도 쓰지 않았어요. 현재의 제 입장은 김영삼 아저씨 눈치도 볼 필요가 없고 김대 중 아저씨 눈치도 볼 필요가 없어요. 안기부의 눈치 역시 볼 필 요 없는 사람이구요.(안기부가 제 눈치를 살핀다면 모를까.) 그렇다고 욕을 위해서 욕을 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닙니다. 요새 대구 폭발 사건으로 김영삼 대통령이 욕을 많이 먹고 있 는데, 그래도 이 나라 국민중에 누군가는 `대구폭발 때문에 국민 전체가 투표해서 뽑은 대통령을 정말 욕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 을 할 수도 있지 않겠읍니까? 반면에 `대구 폭발 사건 때문에 김 영삼 목아지 잘라라.` 하는 소리도 아래에 적혀 있잖습니까? 그 사람들 안기부원이 잡아가던가요? 이 대구 폭발사건에 대해서 제 입장을 양심에 꺼리낌없이 이야 기해보겠읍니다. - 폭발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은 대통령 때문은 아니라고 생 각합니다. 간접적인 아랫사람들의 관리 책임을 대통령에게 묻기 도 계통체계에 있어 거리가 먼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고에 대해 직접적이고 뚜렷한 과실이 없더라도 책임있는 사람이 책임을 져야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대통령께서 는 이제껏 많은 사고에 대한 책임을 물어 아랫사람들을 자르셨읍 니다. 만일 대통령께서, 뒷날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 어떤 아주 머니가 자신의 자식들에게 `이제껏 어떤 대통령이 가장 멋있었 니?` 하고 물었을 때, `김영삼 대통령`이요. 하는 소리를 듣고 싶다면, 이번 대구 사건에 대해 이렇게 대처했었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램임니다. `나 김영삼은 이번 사고에 책임을 통감하고 사후관리를 철처히 하겠으며, 만일 추후에 이번 사고와 같은 규모의 사건이 또 다시 재발하게 된다면 그 즉시 하야 하겠음을 국민 여러분에게 약속하 겠읍니다.` 이렇게 담화문을 발표했으면 다시 사고가 터져서 물러나더라도 멋있는 대통령이고, 안 물러나더라도 멋있는 대통령으로서 천수 를 누리실 수 있는 것 아니겠읍니까? 대통령자리가 뭐 그리 대단 한 자리라고 그렇게 연연하십니까? 영삼이 아저씨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 아무나 그 자리에 앉혀 놔도 나라살림에 지장 없어요. 그리고, 취임 초기에는 사람들 훈장 달아줄 때, 시골 아저씨처 럼 공손하고 소박하게 달아주더니, 이제는 거만해져서 목에 빳빳 하게 힘주고 고개 뒤로 턱 제끼고 있는 폼이 너무 재수 없어요. `외국 대통령은 안그렇냐?` 하고 저에게 물으신다면, `뭐하러 그런 것을 흉내내십니까?` 라고 반문해 드리겠고, `대통령 체면 운운..`하신다면, 체면이나 권위를 차리는 대통 령 보다 인간적이고 소박한 대통령이 훨씬 멋있다고 대답해 드리 겠읍니다. 대통령 투표할 때 영삼이 아저씨를 찍었고, 87년 당시 무교동 15층에서 영삼이 아저씨 세들어 살 때, 에리베이터 타고 입구도 없었던 사무실 오가며, 찌라시 돌렸던 xxx가, 이번 일에 실망해 서 초록색 삼각천에 영삼이 아저씨 붓 글씨 써 준 것, 찢어버리 면서 적었읍니다.- 이번에는 대구폭발 사건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보겠읍니다. -대구 사건 현장보도에 있어 보도통제가 정말 있었는지에 대해 저는 잘 모르겠읍니다만, 만일 보도 통제를 했다면 안한 것 보다 는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널부러지고 창자 찢어진 중학생들의 모습을 꼭 보셔야 했읍니 까? 그들의 부모나 친척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읍니까? 또 그런 끔찍한 광경이 해외에 전파를 타고나가 이 미묘한 시점의 대외정 세에, 그렇게들 찬물을 끼얹고 싶으셨읍니까? 보도 통제 한다고 여권 표밭이 작살 안 나겠읍니까? 작살이 덜 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보도통제를 했다면, 그 상황에서 여권이라고 정말 여 권 표밭만 걱정해서, 보도를 막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읍니까? 그렇게들 생각의 폭이 좁습니까? 대구 사건으로 욕을 하셔야 한 다면 왜 폭발이 일어났느냐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집중탐구 하시 면서 욕을 해야지, 어째서 폭발사건 자체보다 매스콤의 보도통제 만을 그리도 욕하는 것입니까? 매스콤의 보도통제가 대구폭발 자 체 보다도 여기서는 큰 사건입니까?- 제가 이렇게 한탄하니, 여권에 아부한다고 몰아부치시렵니까? 그렇게 생각해도 좋습니다만 `아부`는 빼주셨으면 합니다. 전 통신망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통신망 자체에 마음의 빚도 약 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전 이 통신망을 사용하는 분들이, 제 시각에서나마, 멋있어 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탄했읍니다. 혹시 누군가가 제 글에 대해 꼬집고 싶으시다거나, 아니면 그 냥 한마디 해주고 싶으시다면, 고요히 생각하는데서 나온 지혜라 고 판단될 때 글을 올려 주세요. 그 글이 저를 욕하든, 제 편을 들어주든, 지혜로서 판단되면 전 인정하겠읍니다. 너무 두서없이 끄적거려서 죄송합니다. 안녕히들 계세요. 건 방. PS: 그리고 이 아이디는 한때 제가 공부를 가르쳤던 제 제자의 아이디입니다. 김유재라고 하는 이 아이디의 주인은 Z공대 2학년 이고, 제가 <소설 안전기획부>의 저자인지, 아닌지도 확실히 모 르고 있는 상태일 것입니다. 이젠 제대로 들통나겠군요. 유재의 허락도 안받고 이런 글을 올리게 되어서 유재에게 미안 하지만, 스승이 제자에게 빚도 질 수 있는 것이지요. "어쨋든, 미안하다. 유재야." 기석이 감상적으로 날조된 과거와 그럴듯한 출판배경을 섞어 고장숙 아줌마의 글에 대한 시비를 올리자, 기석의 맛없고 비린 내나는 잡문(雜文)에 대한 반박들이 새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기석은 민심(民心)이라고 할 것 까지야 없겠지만 깔깔한 매서 움이 제법 표현된 심사(心思)들을 읽어내려 갔다. 이름에 `님`자는 붙여주었지만 반말로 써 올린 글귀였다. 큰마을 (PLAZA) 제목 : [5337][소설 안전기획부]의 작가 건방님에게 #5344/6720 보낸이:황교원 (h880914 ) 건방님이 장황하게 쓰신 지나온 과거와 인생관, 그리고 시국관 (?)등을 인상깊게 읽었다. 아직은 가야할 삶이 더 길게 남은 나 이겠지만, 어쨋든 현재에 이룩한 입지전적인 성공을 축하드린다. (삐끼에서 출발하여 일류대를 나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것을 이 름) 우선 [소설 안전기획부]를 읽지도 않고 이런 글을 올리게 된것 에 대해 내 자신도 아쉽게 생각하는 바이지만, 상업소설 내지는 통속대중소설들이야 대충 신문에 나와있는 광고문안만 봐도 얼추 그 내용이 짐작이 가기 때문에 쓸데없는 수고를 덜기로 한다. (불행히도 광고비가 싼 한겨레 신문을 구독하는 관계로 [소설 안 전기획부]의 광고를 많이 접했다)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우리 현대 사의 음지에서 흡혈적인 존재로 기생해온 중정, 내지는 안기부 나, 그 더러운 권력을 도용하여 명성과 부를 획득하고자 하는 건 방님, 거기에 빌붙어 돈을 벌어보겠다고 그런 책을 출판한 어느 부부 등... 모두 한통속으로서 '시대의 찌꺼기'라고 말하고 싶 다. 내가 보기에 위의 세부류는 차별성을 갖지 않는다. 독후감에 상품을 내건 주체가 안기부이건 출판사측이건 아님 건방님 자신 이건 하등의 상관이 없다는 얘기다. 그리고 한가지 권고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데 건방님이 쓰신 ' 입지전적인' 삶의 모습자체가 내가 보기에 훌륭한 광고가 될 수 있다. 어차피 '찌꺼기'가 된 마당에 무어 가릴거 있는가? 자본주 의 사회는 무엇이든 상품으로 전화시킨다. 건방님 자신을 상품화 시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광고전략이다. 물론 조금 더 극 적이고 통속적으로 개작하는 작업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하긴 돈 독오른 출판사 부부가 어련히 알아서 해줄까마는... 건방님의 다음 작품부터는 한번 빌려볼 생각도 든다. 아마 제 목이 [소설 기무사] 내지는 [소설 공보처] 쯤이 되겠지. 건필을 빈다. 기석은 황교원이 올린 글귀를 음미하며 자본주의적 세태의 흐 름에 신경질을 부리고 있는 이유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황규원은 순수한 사람으로서, 기석이 올린 글속에 담겨 진, 속 들여다 보이는 광고문에 대한 일말의 충고를 전해주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교원이 올려준 글귀는 기석이 충고로만 접수하기에는 글에 너무 많은 칼날들이 담겨져 있어서 설득력 대신 괘씸함만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해 줄 때에, 상대를 배려해주는 척 하 면서 날카로운 공격을 퍼붓는 것은 좋은 글쓰기도 아니고, 구사 하기에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조금만 삐끗해도 상대에게 심한 모멸감을 유발시키면서 강력한 반발로 나타날 가능성이 많 고, 자칫 잘못하면, 남 잘 되는 것 배아파하는 글로까지 전락할 위험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글로 지적할 때는 진지하고 예의 바르며 솔직하게 쓰는 방법이 더 나을 것 같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상대 에 대한 배려까지 담을 수 있다면 대단히 훌륭한 격문이 될 것이 다. 황교원은 우리 현대사의 음지에서 흡혈적인 존재로서 안기부를 짧막하게 거론했는데, 황교원이 안기부에 대한 언급을 비친 것은 아마도 기석이 고장숙 아줌마에 대한 시비문에 여러번 집어넣은 <소설 안전기획부>라는 제목과, 슬쩍 집어넣은 대구폭발 참사와 관련된 보도통제 부분이 때문인 것 같았다. 기석은 황교원의 글에서 안기부에 대한 견해를 좀 더 적나라하 게 읽을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읽지도 않은 소설에 대한 쓸데없는 견해와 기석이 올려 놓은 `입지전적인 묘사`에 대 한 메스꺼움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안기부에 대한 집중적인 거론 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것 같았다. 따라서 황교원의 글에서 기석이 안기부에 대한 대중의 마음을 읽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기석은 황교원에게 소시민적 작가 `건방`으로서 즉흥적인 답장 을 올려 주었다. 큰마을 (PLAZA) 제목 : [5344]황규원씨에게 <안전기획부>저자 건방이... #5441/5660 보낸이:김유재(bigman) 황교원씨에게... 몇가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구구하지만 적습니다. 저나 출판사 사장 부부가 <안전기획부>의 이름을 팔아서 부와 명예 등등을 얻고자 한다고 하셨고, 광고 역시도 저질스러운 상 업광고로 여기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곳에 올린 글 역시 광고 차원으로만 다루어 주셨읍니다. 말씀하신 것들 대부분 어느정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반적인 면을 고려해 보면, 별로 그런 것 같지 않습니 다. 우선 약 삼십여개의 제목들 중에 <소설 안전기획부>라는 제목 으로 책 제목을 결정해 준 것은 출판사 사장부부도 아니었고, 저 도 아니었읍니다. 그 분은 이 책의 이권과는 무관한 문학비평가 `장성수`선생이셨읍니다. 사장부부도 그리고 저도 단행본 출판은 제 책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안면있는 문학비평가에게 의뢰를 했 던 것이죠. 또, 상업광고 역시 출판사에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황소걸음이 워낙 경험이 없어서 `광고분야` 역시 외주를 주어 서 `CWA`라는 광고 대행사가 만들어 주고 있읍니다. 출판사나 제가 통속적이다, 돈을 벌기 위한 상업소설이다, 이 런 화살을 박아놓는 듯한 언짢음을 회피하려고 변명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책이 안 나가는 것보다는 잘 나가는 것이 좋겠지만, 출판사 사 장부부에게 미안하고 책을 써서 생계를 잇는 전업작가분들에게도 미안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저 역시 책이란 상업성보다는 작품성 이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제 능력이 닿는 한 도내에서 그런 글을 쓰기 위해 정성을 다하고 있어요. 그리고 제 책은 5권 중 4권이 나갔을 뿐이고 결말 부분인 5권 이 아직도 나가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상업성 광고 `문안 하나만을 보시고 다른 사람의 글을 그대로 평가한다는 것 은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여기에 제가 올리는 글을 광고라고 하셨는데 교원님 에게 그런 의미로 파악될 수 있다는 점은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여기서 제 글을 보아주신 분이 모두 제 책을 구입하셔 도 500명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양은 하루 주문량에도 못 미 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난에 정성을 기울이 는 것은 밑에 처음 제 책을 안기부의 사주에 의해서 씌여졌다는 어느 아주머니의 오해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 이 들을 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은 충분히 검토해 보고 사실의 진위여부가 명백해졌을 때 해야 하는 것 아니겠읍니까? 또 설사, 어느정도의 개인적인 욕심과 잘못을 노출시켰다고 하더라도, 여 러 대중 앞에서 누군가를 욕하는 것인데 참을만한 것은 좀 참아 주는 것도 좋지 않겠읍니까? 비단 제 일이 아니더라도 이곳 큰마을(PLAZA)난에 와보니 읽는 사람도 많고 좋은 이야기들도 많았지만, 좀 거칠어 보이는 글도 없지는 않더군요. 다른 글이야 그냥 재미로도 쓰실 수도 있으시겠지만, 남 욕하 실 때는 그 욕먹는 사람이 우리 형, 누나, 부모님도 될 수 있다 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안녕히...... 건 방이 적었읍니다. 예의와 구색을 갖춰서 기석은 즉흥적으로 느낀 자신의 마음을 교원에게 전달했다. 교원이 올렸던 글에 대한 반박과 자신의 입 장만을 챙기는데는 그럴듯한 기석의 글이었지만, 대중 앞에서 교 원을 부끄럽게 만들며 자신의 입장만을 보살피는 글인지라, 기석 의 글도 그리 좋은 글은 못 되었다. 기석이 교원의 글을 읽자마자 온라인 상에서 곧바로 답장을 올 린 이유는, 무방비상태의 심적반응을 대중앞에 공개해 보면서 스 스로를 테스트 해보기 위함이었다. 기석은 큰마당난에 교원에 대 한 답장을 올리고나서 자신이 올린 글을 다시 읽어보았다. 처음 읽을 때는 나쁘지 않다고 여겨졌지만, 두번, 세번 읽어 갈수록 찜찜하고 간교한 여운을 느껴야 했다. 기석이 그렇게 모니터 앞에 붙어있는 동안 다시 한교원의 글이 올라왔다. 기석이 올린 글에 대한 짤막한 회답이었다. 큰마을 (PLAZA) 제목 : [5441](황교원) 건방님에게.. #5465/6683 보낸이:최용근 (LivingJK ) 우선 오늘자로 제 아이디가 해제되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들 어왔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건방님의 글을 계속 볼 수 있을지 장 담을 못하겠군요. 이점 유감으로 생각하면서 간단하게 적겠습니 다. 우선 장성수 씨에게 대단히 실망했다는 것을 말씀드리겠구요. 두번째로 장석수 씨의 제안을 그냥 받아드리신 건방님께 다시 한 번 유감이군요. 아, 물론 저는 건방님의 철학에 대해 저의 '주관 '으로 강제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마는 어째든 이것이 건방님 과 저사이에 존재하는 좁힐수 없는 갭이기에 이런 충돌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님께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않고 삶을 영위해 왔고 앞으로도 그러실 거라고 하지만, 분명 님과 저는 거의 비슷한 동 시대를 살아왔을터인데 '안전기획부'라는 말이 이 시대에 무엇을 의미하는것인지 전혀 눈치를 못채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제가 말 씀드리려고 하는 바는 그것이었습니다. 저에 대한 님의 답변이 대단히 절제된 것이라 우선 기대 밖이 군요. 그렇지만 분명 제 글을 읽고 불쾌하시기는 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를 드리고 싶지가 않 습니다. 사실은 그것을 노렸거든요. 제가 님께 항의할수 있는 방 법이 그것 밖에는 찾을 수가 없더군요. 그래봤자 그걸 본 사람이 이삼백명 이상 되겠습니까? 지금 온라인 상으로 그것도 11시에 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길게 말씀 드릴 수가 없네요. 또 앞으로도 답변을 올릴 수 있을지 장담할 수도 없구요. 뭐 하고 싶은 말은 다했으니까. 마지막 한권이 남았다구요..다시 한번 건필을 빌어야겠군요. 한마디만 더... 결혼은 하셨는지? 또는 자제분이 계신지? 모르 겠으나 지금 하시는 일이 훗날 님의 후손에게 부끄러운 것이 되 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른말로 하면 역사로 바꾸어도 되겠죠. 이만... 교원 드림... 교원의 새로 올라온 답장은 반말이 존대말로 바뀐 터라, 기석 을 이전보다 덜 기분 나쁘게 했다. 또, 공격 방향이 기석의 소설 에서 기석의 안기부에 관계된 시대의식 쪽으로 바뀌었다는 점이 주목해서 읽어볼만 했다. 첫번째 올려준 글에 비해 제법 성숙된 교원의 두번째 글이었지 만, 기석의 교활한 답장에 대한 억울함을 대중앞에서 마음껏 휘 두르지 못하는 뒤틀린 심사가 담겨져 있었다. 기석은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기석은 일어나는 감정대로 다시 즉흥적인 답장을 해주었다. 큰마을 (PLAZA) 제목 : [5465] 황교원님에게 박권이... #5527/6683 보낸이:김유재 (bigman ) 사람마다 생각에 차이가 있다는 말씀에 공감이 가는군요. 교원 씨의 생각과 저의 생각이 똑같을 수야 없겠지요. <안전기획부>의 뒷 이야기를 쓰면서 교원씨와 비슷한 생각을 지니고 계신 분이 적지 않다는 것을 반드시 고려하겠읍니다. 성의껏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방이 적었읍니다. 짧막했지만 기석의 글은 정중하고 겸허해 보였다. 그러나 역시 대중앞에 민망하게 노출되어 있어야 하는 교원에 대한 배려가 모 자란 까닭에, 그저 연약한 상대를 한번 더 밟아주겠다는 잠재적 인 충동이 묻어있는 글이었다. 혼자서나 득의해할 수 있는 좋지 못한 글이었다. 기석은 짧막한 자신의 새로운 글도 역시 두세 번 더 읽어 보았 다. 기석은 역시 께름찍함을 느껴야 했다. 자신이 아직도 이기심 의 굴레에 매달려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했다는 괴로움이 쓰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박현숙이란 여성이 글을 올려주었다. 큰마을 (PLAZA) 제목 : [소설 안전기획부]의 건방님에게! #5513/6683 보낸이:박현숙 (cHg5134 ) 제가 84년경에 읽은 책이 있습니다. 과거 일본 유학의 경험이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재일교포 한국유학생 간첩단의 일원이 되었던 아버님을 둔 후배의 집에서 읽은 [안기부]라는 책입니다. 저자는 한국유학생 재일교포였습니다. 책의 내용은 한국에 와서 공부하던 중 간첩단으로 안기부에서 모진 고문 끝에 안기부직원으로 강제 포섭되어 또 다른 간첩단을 만들었던 자신의 치욕적인 삶을 고발한 것이었습니다. 건방님의 안기부는 제가 읽은 안기부와 다른 기관을 이야기하 는 것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개인의 생각이 다를 수는 있지만, 아마 많은 사람들은, 안기부 를 집권세력이 정권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양심적인 사람 들을 폭력으로 억압하는 기관으로나 여기고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 역사속에서 거론하기 싫어하는 안기부 일진데, 그러한 상식을 부정하는 안기부를 그려내고자 하는 것은 역사를 뒤로 돌 리려는 것 아닙니까? 자신의 생각도 중요하고 그렇게 실천하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또,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지만, 상식 을 벗어나는 사고와 실천은 현실에 엄청난 파괴를 가져올 수 있 다는 것을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저는 아직도 그 책에서 묘사했고 후배의 아버님이 당했던 고통 을 잊을 수 없습니다. 심사숙고 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박현숙이 건방님께 보냅니다. 기석은 박현숙의 글이 올라오자마자 역시 내키는대로 즉흥적인 답장을 작성해서 올렸다. 아녀자와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을 질색하는 기석인지라, 신통 한 글이 나올 리 없었다. 큰마을 (PLAZA) 제목 : [5513] 박은숙 님에게 박권이... #5534/6683 보낸이:김유재 (bigman ) 박은숙님의 글을 잘 읽었읍니다. 박은숙님에게는 5권의 초반부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일더군 요. 아쉽게도 이곳 하이텔에는 없고 천리안에서 `go debut`하셔 서 `32`번 찍고 `11`번 누르시면, 5권의 약 40페이지 분량이 올 라가 있읍니다. 혹시 보실 기회가 있으면 한 번 보아주시면 고맙 겠읍니다. 그리고, 못 보실 것을 가정해서 간단히 말 몇 마디를 덧붙여 보겠읍니다. 만일 84년의 안기부와 95년의 안기부가 같다면 저는 <소설 안 전기획부>를 쓸 생각도 못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안기부가 그 때 보다 별로 크게 나아진 점은 없 겠지만, 그래도 달라진 점이 약간은 있지 않겠읍니까?. 제 소설속의 전반부의 주인공은 한기석이란 사람인데, 후반부 에서 한기석과 대칭을 이루는 사람이 안기부에서 꼽아준다는 공 작담당 요원 XXX입니다. XXX는 6, 29 선언의 시발이 되었던 `탁치니 억하더라.`라는말 을 회자 시키고 세상을 떠난 `방정철`과 같은 대학의 학우임과 동시에 오촌당숙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XXX는 방정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에도 없어지지 않는 안기부를 기특하게 바라 보면서 안기부에 입사할 것을 결심하지요. `왜?` 어차피 없어지지 않는 안기부라면 안기부의 공작을 남에게 맡 기느니 자신이 떠맡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하에 안기부에 입사하 게 되는 것이지요. 다시는 안기부가 자국민을 붙잡아다가 때려 죽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XXX는 안기부에 입사하게 됩니 다. 그리고, 안기부를 욕하고 싶거든 밖에서 입만 살아서 나불거리 지 말고, 들어와서 고칠 것을 고치라고 독백을 하지요. 그렇게 후배들을 설득해서 XXX의 설득으로 안기부에 입사한 후 배들이 열명이 넘게 됩니다. 그러나... 대체로 이렇게 이야기가 전개 됩니다. 대부분의 글이 그렇듯이 소설도 뒷부분의 이야기에 작가의 의 도가 담기는 것입니다. 박양께서는 너무 미리 실망하시지 않으셔 도 될 것입니다. 그럼 안녕히... 건방이 적었읍니다. 게시판에 난무하는 거친 글들에 비해 기석이 올린 글들이 비교 적 절제되어 있는 탓인지, 한동안 안기부에 관계된 공격적인 글 들이 올라오지 않았다. 하이텔 큰마당(PLAZA)에서의 잠잠한 여유 를 천리안에 돌려보기 위해 기석은 고장숙 아주머니의 글과 자신 이 답해주었던 글을 천리안 컴퓨터문단에 올려 보았다. 하이텔과 달리 천리안 컴퓨터문단은 기석이 오랫동안 글을 올 려온 공간이어서인지 고정독자들이 꽤 있었다. 욕설이 난무하는 하이텔 플라자 게시판에 비해 천리안 컴퓨터문단은 비교적 젊잖 은 곳이었지만, 그래도 앙칼진 아가씨들이 싸움박질을 할 때가 왕왕 있는 컴퓨터문단이었다. 예상대로 이곳에서는 안기부에 대한 글이 비평란에 올라오지 않았다. 그대신 기석은 천리안 독자들에게서 메일(편지)을 받을 수 있었다. 임현복이란 독자였다. 번호:214/218 송신자:LJUNGHABCK 제목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님의 소설을 빠짐없이 읽고있는 독자 임현복입니다. 님의 소설을 접하며, 언제 가치관이 바뀔지 모르는 제 나이대 의 일시적 감정일른지는 몰라도, 현재로서는 - 제가 아는 한도 내 님의 소설과 게시판에 올려진 몇몇 글에 서의 님의 생활상에 - 어느 정도 매료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문단의 32번 게시판의 님의 게시판 글 수가 오랜만에 3개나 증 가하여 게시판을 살펴 보았더니 하이텔의 플라자 게시판에 관한 글이 있더군요. 덕분에 빌려 놓은 하이텔 아이디로 오랜만에 하 이텔 구경을 잠깐이나마 하고 왔습니다. 하루에 백여개 이상의 글이 올라오는 플라자 게시판이라 님의 글들이 올라와 있는 부분을 찾는데 애 좀 썼네요. 덕분에 황교현 님인가 하시는 분의 글도 접했구요. 제 관점에서 볼 떠 이해가 안 가는 말씀을 쓰신 황교현님의 글을 접해 보고, - 어떻게 책도 안 읽어 보고 그 책의 내용상의 문제에 대해서 논할 수 있는지 - 상당히 이해가 안 가는군요. 또한 독서 감상문 부분에서도 그 런 식의 일이야 몇몇 출판사에서 이미 자주 사용한 상업적 수단 으로 알고 있는데 출판사의 주인이신 분들의 사정이 적힌 글을 읽은 후에도 그런식으로 판단을 한다는 것은 정말 이해가 안 가 더군요. 님께서 어떻게 그렇게나 절제된 반응을 보이셨는지 놀랍 더군요. 저였더라면 이미 한바탕의 풍파(?)를 일으켰을지도 모르겠네 요. ^^; 이런 것에 흔들리지 마시고, 계속해서 건필하시구요, 가내에 평안함이 있으시길 빕니다.(결혼하셨다고 하셨죠?^^) 대구에서 독자 임현복 p.s:본명이 한건방님이신가요? 제가 님에 대해 느끼는 궁금한 부분들중의 하나인 부분이군요.^^; 독자 임현복의 편들어 주는 글에서 기석은 기분이 좋아지는 자 신을 감지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미소를 띄운채 편들어 준 독자 에게 고마움을 보내며, 유쾌한 기분을 그대로 즐겼겠지만, 지금 의 기석은 찜찜한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통신망에 달라붙어 불특정 다수의 반응을 살피며 대응하는 동안, 기석은 자신에게 달라 붙어있는,- 스스로 눈치채기 까다로왔던 -, 이기주의적 성 향을 남들을 통해 감지해내고 있었다. 자신이 이기주의자라면, 남들의 이기주의도 정당한 것이고, 국 가 이기주의도 당연한 것이며, 안기부의 고베지진에 대한 공작도 음지에서마 떳떳한 것으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이었다. 기석은 머리통을 한번 세차게 흔들었다. 통신상에서 본능적인 해답을 찾으려했던 처음의 의도와는 달 리, 말싸음에서 지지않으려는 복잡하고 간교한 심리대응 능력만 구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 중단할까도 고려해 본 기석이었 지만 기석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기석은 마음의 긴장상태를 모두 풀어 헤치고 좀 더 원초적인 대응으로 방향을 전환해 나가기로 했다. 꺼칠한 통신상의 문답들 이, 기석이 예기치 못하는 정체모를 해답의 정수(精髓)를 보여줄 지도 모른다는 기대때문이었다. 기석은 일단 천리안에서 독자 임현복에게 간단한 답장을 보내 주었다. 번호:113/115 수신자:LJUNGHABCK 제 목 : 답장: 안녕하세요. 보내주신 메일을 고맙게 받아 읽었읍니다. 보내주신 글을 격려로 알고 사람들한테 칭찬은 못 들을 지언정 욕을 먹을 글은 쓰지 않게위해 더욱 노력하겠읍니다. 제 본명은 한건방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결혼은 그것이 대답 하기 좀 까다롭군요. 언젠가 사이판으로 신혼여행 다녀온 글을 문단에 올린 적이 있 긴 있었어요. 한동안 제가 글을 올리지 못해서 문단 담당자 이광 희씨가 닥달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광희씨에게 약간 미 안하게 느껴져서 대충 변명으로 써 올린 것이고요.(그 후로 아가 씨들 한테 간간히 오던 메일이 뚝 끊겨 버리는 바람에 아차 실수 를 느꼈지만) 그냥 머~ 대충 상상하세요. 메일을 보내주신데 대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럼 안녕히...... 박희권...... 기석은 천리안 독자에 대한 답장을 송신한 후, 다시 하이텔 큰 마당(PLAZA)란으로 들어갔다. 잡다한 입씨름이 난무하는 곳에서 다시 한번 자신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그동안 기석이 하이텔에 올린 글들은 조심스럽게 절제되어 있 고, 일말의 간교함까지 숨어있는 문구들이어서인지, <안전기획 부>란 시비 걸기 좋은 타이틀임에도 불구하고 야권 성향이 강한 이곳에서도, 한동안 아무도 시비를 걸어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눈에 익은 아이디 하나가 올라왔다. <소설, 안전기획부(10)> (10) 글싸움 그리고... 기석이 처음에 시비를 걸었던 고장숙 아주머니가 억눌린 분을 삭이지 못했는지,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은근하게 기석을 건드려 주었다. 기석에 대한 반격의 의도라기 보다는 이전에 아줌마 자 신이 올렸던 미확인 게시물이 기석에 의해 난타(?)당하자, 꾸준 히 글을 올리고 있던 자신에 대한 자존심을 약간이나마 건져 보 려는 의도의 글인 것 같았다. 큰마을 (PLAZA) 제목 : 안기부서 '나온' 아줌마 71번째 이야기!! #6182/6683 보낸이:고장숙 (kokwangSU ) 안녕하세요? 안기부 자유게시판에서 '나온' 아줌마에요. 토요일 밤, 아니 일요일 새벽까지 손님 치루느라고, 하이텔에 못 들어 왔어요. 죄소옹! 71번째지요? 아줌마가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그러니까 지금으로 부터 30 년전 쯤인가... 아주 인기있는 TV 외화가 있었습니다. '용감한 린틴틴'이라는 제목이었던가.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 늘 백인 기병대와 인디언의 싸움이 있었습니다. 기병대의 마스코트인 고아소년이 데리고 있는 영리 한 개 '린틴틴' 때문에 싸움은 언제나...언제나... 승리로 끝났 고. 그걸 보면 얼마나 신이 났는지... 아유우~! 그 납~쁜 인디언이... 그 무시무시하게 생긴 납~쁜 인디언이... 말을 타고 가다가 불붙은 화살을 쏘려 할 때.. 용감한 기병대 아저씨의 총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 죽는 장면의 그 통쾌함이란.... 아유~! 시원해!! 아유~! 통쾌해!! 어... 어.... 그런데... 철들고 보니까.. 아메리카의 원주민,원주인은 인디언이라는 거 아닙니까? 백인이 침입자라는 거 아닙니까? 인디언은 억울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겪어야 했던, 피해자라는 거 아닙니까? 읔! 침입자가 이기니까, 침입자의 안목으로, 침입자가 영화를 만드니까.. 아! 철없는 먼 나라의 어린이는 '인디언은 씨가 말라야 세상에 평화가 온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던 거죠. (인디언 여러분 죄송해요.) 그 비슷한 시절에.. 라디오나 TV에서 귀가 따갑도록 틀어댄 노래가 있었죠.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워~얼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이 내 마음 님의 뒤를 따아르리라~ 한결 같은 이 내 마 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백마 부대 용사들아~!...... 뉴스에선 씩씩한 '정의'와 '평화'의 사자들이 예쁜 한복입은 여성들이 걸어 준 꽃목걸이를 걸고 배에 올라 손을 흔드는 장면 들이 연일 계속되었고... 어린 아줌마도 늘 목청껏 그런 노래들을 부르고 다녔답니다. 월남에선 왜 그런진 모르지만 전쟁이 있었고 미국은 '좋은 나라'이며 우 리 국군이 가서 싸우니까 무조건 이겨야 했고... '우리 편'은 항상 정의롭고 평화를 사랑하닝깐... 못생기고 납 ~쁜 베트콩은 빨리 죽어야 했죠. ...한결같은 이 내 마음 님의 뒤를 따아르리라~ 어! 그런데 기술자로 월남 갔다 오신 삼촌 말씀을 들으니... 월남 사람들은 한국 군인을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거 아닙니까? 어. 그렇게 배은망덕할 수가... 지들을 위해서...위해서... 싸 우고 있는데.. '60년대 부터 참전했던 전쟁인데 전쟁에 대한 다른 견해들을 주어들을 수 있었던 건, 미국이 전쟁에 두 손을 든 '75년 이후였 습니다. 어! 그런데... 그 전쟁은 미국과 한국이 '정의'와 '평화'를 이루기 위해 개입 했던 전쟁이 아니라는 겁니다.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전체 아시아 국가가 도미노 패가 쓰러지 듯이 차례차례로 쓰러지고 공산화된다." 이것이 미국의 논리였는 데...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였습니다. 당연히 해방투쟁이 있어 왔는데, 호치민(호지명)이 그 리더 였 습니다. 1954년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이긴 베트남은 2년 후엔 남.북 베 트남을 통털어 통일선거 실시후에 통일 국가를 건설한다는 조항 에 합의했죠.(제네바 협정) 2년이 되어가면서 남베트남의 정권은 철저히 부패했고 협정대 로 선거를 실시하면 베트남 국민의 80%가 호치민에게 투표할 것 이 미국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프랑스군 대신 미국의 군대가 들어갔습니다. 미국 정부가 프랑스 대신 남베트남을 지배하기 원했던 것입니 다. 베트남 전쟁은 '반공성전'도 아니고 '정의의 전쟁'도 아니었 으므로 미국의 끈질긴 파병요구를 영국은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월남 전쟁에서 100만의 북베트남 군인이 죽고 200만의 민간인 이 죽었답니다. 고엽제들의 피해로 불구가 된 사람들이 200만... 우리가 도왔던 남베트남 정권의 대통령은 프랑스 식민육군중위 였고 수상은 프랑스 식민공군의 소위였답니다. 그들 군대에서 반 불.반일 항쟁 경력자는 단 1명뿐이었고.. 우리가 총칼을 들이대었던 '베트콩'의 지도자들은 예외없이 반 프랑스, 반일투쟁을 했던 베트남의 애국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우 리는... 베트남의 반민족자들을 돕기 위해 월남에서 피를 흘렸던 것입니다. 베트남 전쟁을 주도했던 '천재 국방장관' 맥나마라가 이제야 비로서 "베트남 사태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전쟁정책의 잘못"을 고백했다고 하는군요.(한겨레21 5월 4일자 참고) 정부가...정권이...똑똑치 못하면 그렇게 엉터리같이 휩쓸릴 수가 있습니다. 자기 국민의 목숨을 그렇게 허투루 소모시킬 수 가 있습니다. 철없는 어린이는 외국의 반민족자들을 돕기 위해 그나라의 애국자, 민족주의자들을 죽이러가는 군인들을 위해 목 청껏 노래를 부르고 다닐 수가 있습니다. 그런 정권들에 대한 평가가 확실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더러 운 역사를 청산하지 않으면... 역사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할 능 력이 없는 국민들에 의해 더러운 정권의 하수인이었던 정보기관 을 미화하는 소설이 만들어 질 수도 있고 상품에 눈이 어두운 독 자들이 열심히 독후감을 써 낼수도 있는 일입니다. '위컴의 쥐'가 되어가는 줄 모르고... 독재자들이 자식들을 통해 부활하려고 하는 이 마당에... 아! 아줌마는 확실한 '5월 광주의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누가 그 가사를 올려주시겠습니까? - 맹호부대 노래는 이제 잊어야지! - 기석은 조금 난감했다. 고장숙 아줌마의 글에서 [역사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할 능력 이 없는 국민들에 의해 더러운 정권의 하수인이었던 정보기관을 미화하는 소설이 만들어 질 수 있고 상품에 눈이 어두운 독자들 이 열심히 독후감을 써 낼수도 있는 일입니다.]라고 우회적으로 <소설 안전기획부>를 걸치고 있는데, 사실, 직접적인 공격이 난 무하는 하이텔 큰마을 난에서 이런 간접적이고 빈약한 비난은, 오히려 사과에 가까운 것이라서, 이런 글을 가지고 작가가 독자 에게 따진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았다. 그래서, 기석은 다른 글 들이 올라오기를 좀 더 기다려 보았다. 하지만 건드려 주는 사람이 한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자존심으 로 버티고들 있는 통신망 상에서 큰마당 난에 꾸준히 글을 올려 왔던 고장숙 아주머니의 간접적이고 가벼운 반박 정도는 그냥 넘 어가 주는 것이 예의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기석은 어쩔 수 가 없는 듯 했다. 기석은 다시 고장숙아주머니에게 시비를 걸어 야 했다. 큰마을 (PLAZA) 제목 : [6182]더 이상 권력의 시녀노릇은 싫다<안기부? #6199/6683 보낸이:김유재 (bigman ) 안녕하세요. 건방입니다. 고광순 아주머니께서 올려주신 글을 읽었읍니다. 인디언 이야기와 월남전 이야기, 그리고 광주를 통해, 구 시대 의 정권들이 했던 못난 짓들과 그 꼭두각시 노릇을 했던 정보기 관에 대한 원망 비슷한 것을 읽었고, 아울러 저와 제 소설 그리 고 제 소설을 읽고 독후감을 쓰게 될 지도 모를 미특정 독자들에 대한 경계에 대해서도 읽었읍니다. 아주머니 말씀을 정보기관에 국한시켜서 나름대로 제 생각을 말씀드려 보겠읍니다. 아주머니 말씀은 거의가 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지난 날 정보 기관이 저질렀던 미련한 짓들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변명도 할 수 없는 정보기관일 것 입니다. 그렇다고 현시점에 무조건 없애버릴 수도 없는 것이 정보기관 일 것입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뒤에도 안기부는 없어지지 않 았고, 아직도 건재하고 있읍니다. 아마 앞으로도 없어지지는 않 을 것입니다. 어느 집단이건 그 집단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모 두 동일하지는 않을 것이고, 또한 시대에 따라서도 생각들의 흐 름은 변천해 갈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한 젊은이가 민족을 위해서 일하고 싶을 때, 그 젊 은이가 익힌 역량에 따라 적재적소에 들어가 민족을 위해 봉사하 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런 시각에서 안기부란 곳이 젊은 이가 찾아 들어갈만한 장소로서 그럴만한 곳이냐? 하는 의문을 한번 제기해 보겠읍니다. 아주머니 같이 정보기관을 싫어 하시는 분들 대부분은 `아니 다.` 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아주머니보다 안기부를 더 싫어했던 사람도 `갈 만한 곳이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없 지는 않을 것입니다. 곪아터진 곳은 칼을 들이밀고 도려내야 상처가 잘 아무는 것이 고, 옛말에도 범을 잡으려면 범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곪은 환부에 더럽고 무딘 칼이 들어가 쑤석거리는 것보다는 깨 끗하고 예리한 칼이 들어가 썩은 고름을 도려내야 하는 것 아니 겠읍니까? 이 사회에서 가장 더럽고 무서운 독이 될 수도 있고, 반면에 만병통치의 명약이 될 수도 있는 곳이, 제 좁은 견해 일지도 모 르지만, 저는 안기부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에 싱싱하고 눈동자가 빛나는 젊은 후배들이 들어가서 독 을 약으로 바꿔가며 민족에 기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소설 안전기획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선거철을 앞두고 정치적인 책자들이 난무하는데, 조상을 걸고 맹세하지만, <소설 안전기획부>는 그런 의도와는 거리가 먼 소설 입니다. 여권을 위해서도, 야권을 위해서도, 그렇다고 현재의 안 기부 과시용으로 쓰여지고 있는 것도, 절대로 아닙니다. 저는 이 글이 백년 후의 독자들에게도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그런 글이 되 기를 바라며 최선을 다해서 쓰고 있읍니다. 물론 능력이 마음을 따르지 못해서 그렇게 못 될 확률이 높겠지만, 아뭏튼 제가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제 소설 속의 안기부 요원들은 더 이상 권력의 시녀 노릇은 하 지 않습니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권이든, 야권이든, 차후 로, 과거와 같은 지저분한 용도로 안기부를 이용하겠다고 마음먹 는 무리가 포착될 때는, 일반 국민이 미처 알기도 전에, 제 소설 속의 요원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 은 누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안기부 내에서 거드름을 피울 수 있는 사람이나, 현재의 대통령이라도, 소설 속의 깨끗한 요원들 이 과거의 더러운 치욕에 치를 떨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 을 것입니다. 가장 빠르고 가장 정확하며 공정하게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사람들을 꼽으라면 전 단연코 제 소설속의 등장인물들을 꼽을 것 입니다. 고광순 아주머니는 과거의 정보기관의 악몽에서 그만 벗어 나 시고 앞으로의 안기부를 지켜 보아 주셨으면 합니다. <소설 안전기획부>의 저자 건방이 적었읍니다. 안기부에 대한 글이 이틀째 올라오고 있지 않은 상황이라 기석 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시비를 걸 수 있도록 적당히 자극적인 내용을 버무려서 올렸다. 아줌마의 양보하는 글에 대해, 기석이 자존심을 챙겨주기는 커 녕, 치사하다 싶을 정도로 꼬투리를 물고 따지는 게 꼴 사나와 보였던 것 같고, 더욱이 기석의 글은 반격에 용이한 허점이 수두 룩한 글이었다. 그래서 인지, 고장숙 아줌마의 글들을 포함해서 몇 개의 사나운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기석은 고장숙 아줌마의 글부터 읽어 보았다. 아줌마의 새로 올라온 글은 기분이 많이 상해서 였는지, 이전에 올린 글들보다 반격의 강도가 높아진 듯 했다. 큰마을 (PLAZA) 제목 : 안기부서 '나온' 아줌마 72번째 이야기!! #6382/6683 보낸이:고장숙 (kokwangSU ) 안녕하세요? 안기부 자유게시판에서 '나온' 아줌마에요. 72번째죠?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갔지!` '5월의 노래'중에서 아줌마가 아는 가사는 요거 뿐이라, 가끔 똑같은 귀절만 계속 흥얼거리면(...지! ...지!-요렇게 특히 '지' 에 강세를 넣어서 흥얼거리면) 운전에 방해된다고 울 남편이 "시 꺼!"하는 바람에 움츠러들곤 했는데, 6306 아아비님 고마워요. 이젠 아이들한테도 가르쳐줄 수 있겠어요. "꽃잎처럼 금남로에..." 아, 그리고 <소설 안전기획부>의 작가이신 건방님! 소설 판매에 지장있을까봐 그러실 수도 있겠지만, (신문광고에 난 '긴 섹스 후의 담배맛,..'어쩌구 한 것에 대해선 "그렇게 하 지 않을 수 없다. 다른 광고들을 봐라, 우린 약과다" 하는 대답 을 출판사에선 하더군요. 요즘 베스트셀러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어거지로 만들어 지고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서두..) 아줌만 지금까지 우리의 생생한 역사들에 대해 글을 써 왔습니 다. 그리고 청산되지 않은 더러운 역사의 중심에 안기부등의 정 보기관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전철에 붙은 스 티커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의 잘못된 행태는 전혀 변한 것이 없 습니다. 변할 계기가 없었죠. 국민이 아직도 무서워 하니까... 국민이 아직도 침묵하니까... 당신은 [곪아 터진 곳은 칼을 들이밀고 도려내야 상처가 아물 고, 범을 잡으려면 범굴로 들어가야 하므로...환부에 더럽고 무 딘 칼이 들어가 쑤석거리는 것 보다 깨끗하고 예리한 칼이 들어 가 썩은고름을 도려내야....그곳에 싱싱하고 눈동자가 빛나는 젊 은 후배들이 들어가서...민족에 기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소 설 안기부를 쓰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리고 [제 소설 속의 안기부 요원들은 더 이상 권력의 시녀 노릇은 하지 않고...그런 무리가 있다면 제 소설 속의 요원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가장 정확하며 공정하게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사람들은 ..단연코..제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을 꼽겠다]고 하셨는데... 그런말들을 들으니 더욱 걱정이 됩니다. 이미 당신들의 요원들은 타락해 있고, ("아아!학! 두 아가씨와 두 짐승들의 하모니... 사이좋은 친구 였던 은정과 미선사이에서 양다리를 ...이건은 두 여인과...-<소 설 안전기획부> 3권 111쪽. 부어라마셔라...) 그들은 소설 속에서만 권력이 시녀가 아닐 뿐입니다. 모순은 현실 속에 있고 당신은 소설속의 영웅주의자일 뿐입니다. '안기부의 곪아 터진 곳은 깨끗하고 예리한 칼을 들이밀고 도 려내야한다'는 당신의 의견에는 찬성하지만 그것은 우리들의 몫 입니다. 당신, 소설속의 영웅이 해 낼 수는 없는 일이지요.절대 로... 그런데, 당신은 저질 광고문과 독후감을 강요하는 상품으로 깨 끗하고 예리한 칼이 되어야 할 역사의 주인공인 우리의 젊은이들 을 더럽고 무딘 칼이 되도록 유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심리적 통일 작업이란,우리 남한 사람들이 북한동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호흡을 같이할 수 없어 애가 타는..더욱 보고 싶고...이것이 안기부가 추구하 는...] 이것 보세요. 이것처럼 당신은 이미 현실을 엄청나게 왜곡하고 있잖아요? 당신들의 요원들은 어디서 무엇이 곪아터졌는지 냄새도 못맡고 있잖아요? 독후감을 써 보내라구요?--말지 5월호 사서 보세요. 오늘 한겨레신문 보니까... 남산의 안기부 건물을 서울시가 사들였다구요? 안기부는 서초 구 내곡동으로 올 가을에 이사한다구요? 서울시는 이곳을 공원으 로 조성하면서 몇몇 건물은 어차피 공원 부대시설이 필요하니까 헐지 않겠다구요? 안기부는 완전철거를 주장하고 있군요. 안기부 청사가 일부 남겨져 시민들에 공개될 경우, 이것이 과 거 군사독재의 상징물처럼 돼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 떠문에... "남산 청사 이전을 계기로 국가 정보기관에 대한 나쁜 이미지 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는 게 우리의 솔직한 바람"이라구요? 콩점 아저씨! '나쁜 이미지'가 국민한테 있다는 걸 알긴 하시느먼요? x 싼 자리 파묻구 자리만 옮기면 x 쌌다는 사실이 없어집니까? 34년간 그 자리에서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무수한 국민들을 잡아다가 고문하구... 간첩 조작하구...겁주구...기죽이구...'위 컴의 쥐'로 길들인게 누군데... 고것에 대해서 한마디 말도 없이 입 싸~악 닦구 이사가면 국민 들이 잊어버릴 줄 아남유? "안기부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는 게 우리 의 솔직한 바람"이라구요? 그렇담 이렇게 해 보시어요. x 싼 자리만 흔적없이 해 놓구 도망갈 생각만 말구. 우선 이근 안이를 잡으시어요. 그리구 그간 독재정권에서 있었던 당신들의 공작자료들을 모두 공개하시어요. 예를 들어 전두환이가 로마교황 오기전에 종교계에서 간첩사건 을 만들라고 지시했다는 거라든가, 현해탄에서 김대중씨를 잡아 빠뜨리려던 배가 안기부 배였고, 그들이 안기부 요원이었는데 누 구의 지시였다든가, 빠리의 김형욱 사망사건은 누구의 지시였는 가, 해직기자들이 장기투쟁하려구 사무실 얻었을 때 건물주인을 협박해서 사무실을 폐쇄한 건 누구의 지시였는가, 남매 간첩단 사건의 조작은 누가 지시한 거며 선거때 흑색선전물 들고 뿌리고 다녔던 안기부 요원들의 상사는 누구였으며 그리구 그동안 감사 한번 받은 일 없이 펑펑 써 왔던 안기부 재정문제라든가... 이런거 다 공개하구 냉전논리만 부추기는, 반통일 분위기만 부 추기는 전철안의 스티커를 모두 떼어 버리구. 더러운 역사를 다 드러내구. 예리한 칼로 도려내구, 고름을 닦구나서, 그리구 나 서... 이사를 가시어요. 공연시리 쓸만한 건물까정 다 헐라구 하지 말구... 고런 과정 을 밟지 않는다면... 아! 아줌마 연재가 길어지겠군요. 기석은 인사말도 없이 끝난 아줌마의 글이 섭섭했다. 하지만 아줌마가 거론한 정보기관이 저지른 지난날에 대해서는 변명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정보기관의 역기능에 대해 70편이 넘는 시 리즈를 올리고 계신 아줌마이니만큼, 정보기관에 대한 분노와 정 부에 대한 골깊은 불신을 표시하는데 그다지 무리가 없었다. 아줌마는 기석의 소설에 대한 광고문제를 저질적인 선전으로 몰고 가면서 기석을 공격했다. 출판사에 전화까지 걸어가면서 선 전문제를 포기하지 않는 아줌마의 고집에서 기석은 그녀의 후퇴 를 모르는 자존심을 읽어냈고, 그녀의 글 곳곳에 서린 `미진한 개혁에 만족하지 못하는 혁명에 대한 미망(未忘)`도 감지할 수 있었다. 처음에 기석은 선전 문제 외에는 아줌마를 건드릴 구실이 없어 서 끌어다 붙였는데, 이제 아줌마의 비난속에 점차 강도높게 등 장하는 `소설판매 운운...`하는 문제를 대하니, 기석은 속이 뜨 끔했다. 경제적으로 별 불편이 없는 기석이었지만,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을 많은 사람들이 읽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했다. 누 군가가 기석이 하이텔에 와서 이런 전투를 벌이는 이유에다 `광 고효과`를 끌어부쳐 기석을 공격한다면 기석은 부정하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그것은 기석으로 하여금 이곳에서 원하는 바 만큼 버티는 데에도 지장을 줄 수 있는 요소였다. 하지만, 다행하게도, 아줌마 다음에 올라오는 글귀는 그런 점 으로 기석을 괴롭히지는 않았다. 기석이 올린 안기부에 관계된 글의 내용만을 공박하는 글이었다. 이십대 후반이나 삼십대 초반 정도의 강단있는 여성으로 느껴졌다. 큰마을 (PLAZA) 제목 : 와~ 무서운 건방 style의 안기부! #6489/6683 보낸이:오혜숙 (kayaba ) 대구가스폭발 사건 이후로 평소에는 얼씬도 안하던 프라자 산 책이 하루일과가 되었습니다. 요즘 제 눈길을 끄는 글은 <안기부에서 나온 아줌마>시리즈 입 니다. 갈무리해서 읽다보니 우연히 건방님 글을 보고 몇자 적습 니다. 이렇게 작가와의 대화까지 가능하게 한 통신에 다시 한번 매력을 느끼게 되는군요. 건방님의 소설 안기부는 읽지 않았지만, 여기 건방님이 직접 쓴 글에 대해 뭔가 앞뒤가 맞지않는 논리들을 보고 글을 씁니 다.(반대의 논리라는 것을 알 수 있겠죠? ) 1.95년의 안기부가 84년의 안기부와 다르다? 건방님은 박종철을 탁! 쳐서 죽였던 안기부와 지금의 안기부는 다르다고 말씀하셨는데, 요즘 일어나는 조작사건들(선거를 앞두 고!)은 제가 보기에는 7, 80년대를 생각나게 하는 수법이군요. 뭐가 다르죠? 그리고 정말로 안기부가 개과천선하고 싶다면 자신 의 과오부터 씻고 환골탈태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할 겁니다. 지 금까지 의문시 되어 왔던 여러가지 사건들의 내막...인혁당, 남 민전, 통혁당, 김대중살해기도사건...(하두많아서 여기다 다 쓸 수가 없군요..)의 진위를 먼저 밝혀야 할 거 아닙니까? 그리고 이근안은 왜 안 잡습니까? 김형욱처럼 죽여 버렸을까요? 갑자기 모든 것을 밝히면 국민들에게 혼란이 더 가중될 수 있 다. 뭐 이런 말씀은 마세요. 그것은 과거의 안기부가 하던 말 아 닙니까? 우리 국민들은 이제 그런 일로 혼란스러워 지지 않습니 다. 2. 그나마 조금 다르게 한 힘은 무엇입니까? 김영삼 정권 이후로 잠시 안기부가 그야말로 잠잠했었는데, 그 것은 무엇의 힘입니까? 영웅주의적 발상을 지닌 개인이 안기부에 들어갔기 때문입니까? 안기부가 본성을 조금 진정시킨 것은 그나 마! 국민들의 각성이 옛날보다 높아졌기 때문이지, 건방님의 소 설에 나오는 주인공과 같은 사람들 때문은 아닙니다. 이 대목에 서...저는 건방님이 아마도 직장 생활이나 조직생활을 해 보지 않은 분 일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라면 굳어진 어떤 조 직내에서 개인이 그것도 신참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아실겁니다. 조직은 조직의 힘으로 변하죠. 한 두사람의 굳은 의지와 행동으로 안 된다는 것을 아실겁니다. 실제로 과거의 그 악랄한 안기부 고문기술자(?)들도 전부 하기 좋아서 한 사람들은 아닐 겁니다. 실제로 어떤 안기부요원은 운 동권 간부를 취조하면서 "내 사위도 운동권이다. 나는 뭐 좋아서 이 짓 하는 줄 아느냐?" 면서 두둘겨 팼다더군요. 그러니 과거의 썩은 안기부는 썩은 사람들만 모였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 그 반대인 깨끗한(?)사람이 들어간다고 변할 리가 없죠. 안기부는 변하지 않고 그 사람만 변하겠죠? 호랑이 굴에 들어갔 다가 호랑이 밥이 되던가(이러면 그나마 다행...왜냐면 혼자 망 하니까) 아니면 더한 호랑이가 될 수도 있겠죠. 만약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를 변화시키려고 결심했다면 혼자가 아니라 뜻을 함께 하는 여러사람을 모아야 할 겁니다.하지만 건 방님의 안기부를 개혁하려는 의지에서는 그런 현실적인 방법은 찾을 수가 없네요 3.와~ 옛날 안기부보다 더 무서운 `건방`식의 안기부 저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제가 한번 인용해 볼께요. [제 소설 속의 안기부 요원들은 더 이상 권력의 시녀 노릇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권이든, 야권이든, 차 후로, 과거와 같은 지저분한 용도로 안기부를 이용하겠다고 마음 먹는 무리가 포착될 때는, 일반 국민이 미처 알기도 전에, 제 소 설속의 요원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 것은 누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설사 안기부 내에서 거드름을 피 울 수 있는 사람이나, 현재의 대통령이라도, 소설 속의 깨끗한 요원들이 과거의 더러운 치욕에 치를 떨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가장 빠르고 가장 정확하며 공정하게 방아 쇠를 당길 수 있는 사람들을 꼽으라면 전 단연코 제 소설속의 등 장인물들을 꼽을 것 입니다. 고광순 아주머니는 과거의 정보기관 의 악몽에서 그만 벗어 나시고 앞으로의 안기부를 지켜 보아 주 셨으면 합니다. <소설 안전기획부>의 저자 건방이 적었읍니 다.] 우~ 정말 대단한 안기부네요. 지금까지는 대통령의 권력유지를 위해 시녀노릇을 했지만 이제는 대통령조차도 그 안전기획 대상 으로 삼는?? 이거야 말로 역대 중정부장, 안기부장들이 꿈꾸던 무소불위의 안기부 아닙니까? 악몽에서 벗어나라고 하셨는데, 악몽속에서도 악몽을 꾸겠네 요. 정권의 잘잘못은 안기부가 판단, 척결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협소한 자기네들의 논리에 맞지 않 으면 사소한 정치비판이라도 이적발언이라고 몰아붙여 감당도 못 할 ~~주의자라고 붙여서 처단했던 안기부와 뭐가 다르죠? 4. 정말 죄송. 시국관에 대해서도 한마디 대구폭발사건에 대한 건방님의 소견도 읽었습니다. 아까 앞의 글들과 마찬가지로 저는 건방님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정말 안 기부식 사고방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창자가 나온 시체, 공개 해서 좋을 게 뭐냐고요? 이렇게 미묘한 시점에 굳이 공개해서 뭐 가 좋냐고요? 공보처에서 언론통제를 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 다고요? 정말 소설 안기부 를 쓰신 작가답지 못한 말씀입니다. 그런 시체 사진도 공개해서 다들 대오각성해야, 다시는 창자가 나오고 머리는 이 병원, 몸통은 저 병원에 있는 이런 사고가 다 시 생기지 않겠죠. 그리고 우리나라가 언제 미묘하지 않은 시기 가 있었나요? 공보처 운운 하신 말씀과 대통령 일인의 책임 운운 하신 대목은 정말 균형잡히지 않은 사고 이십니다. 국민들이 분노하는 것은 현대통령 한사람을 욕하는 것이 아닙 니다. 뭐 대통령이 모든 다리, 모든 지하철 공사장을 지키는 사 람은 아니지만 지키는 사람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공사장을 지키는 사람을 지키는 사람을 지키는... 사람을 지키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건방님의 글을 읽고 느낀 소감은 건방님이 얘기하신 방 식으로 만들어진 안기부에 별로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 과 건방님은 누구의 사주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글을 쓰셨다고 하셨는데 충격(?)이실지 모르지만 누군가 사주할 필요도 없을 것 같네요. 글 여기저기에 드러난 건방님의 안기부식 사고방식때문 이죠. 일치했는데 사주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있겠습니까? `있겠읍니까? 있겠읍니까?`로 연달아 물어 보는 것이 상당히 얄밉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기석은 체험했다. ` 1,2,3,4로 번호까지 조목조목 붙여주며 따지고 있는 오혜숙이 란 아가씨의 글은 기석이 생각할 때, 1번 `95년의 안기부가 84년 의 안기부와...`에서는 내용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의 부족으로 미비하고 잘못된 부분이 없지 않았고, 2번의 `그나마 조금 다르 게 한 힘...`에 대한 주장은 대체로 틀린 말이 없었고, 3번의 ` 건방 스타일의 무서운 안기부`에 관한 언급 또한 기석을 납득시 킬만한 설득력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4번의 대구폭발사건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기석의 생각과 차이가 있었다. 기석은 연달아 올라오는 비난의 글귀들을 대하면서 자신의 감 정의 흐름을 파악해 보았다. 기석은 아줌마와 아가씨의 글들을 처음 읽어내려갔을 때 간간 히 솟구치는 화끈한 반응을 체험했다. 그것은 주로 자신의 목적 (예를 들면 `책광고 효과`와 같은 감추었으면 하는 이기주의 적 인 목적)에 허를 찔렸을 때, 그 솟구치는 열기가 더욱 강했다.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도 잘잘못을 되새기는 대신 일단 `들키면 안된다.`하는 재빠른 수치심이 신경을 자극하면서 기분을 언짢게 하는 것이었다. 기석은 감정조절에 관한한 교활하다 싶을 정도로 숙달된 인간이었음에도, 그런 톡톡거리는 정도로 솟구쳐 오르는 신경의 자극조차도 `반성` 보다는 비난해 준 상대에 대한 `괘씸` 으로 더 크게 느끼고 있는 듯 했다. 기석은 `반성` 보다는 `괘씸`이 앞서 있는 상태를 지우지 않은 채 두 여인에게 답장을 올려 주었다. 큰마을 (PLAZA) 제목 : 안기부를 욕하는 분들께. 건방이... #6506/6683 보낸이:김유재 (bigman ) 혜숙씨는 소설은 읽지도 않으시고 제가 언급한 소설속의 단편 적인 분위기만을 들어 저를 공격하셨읍니다. 일단 제가 글을 잘 못 올려서 혜숙님을 기분 나쁘게 해드려서 죄송하고, 혜숙님의 생각과 제 생각이 차이가 있는 점에 대해서도 미안하게 생각합니 다. 그리고 고장숙 아줌마는 광고문제로 자주 저를 공격하시는데, 솔직히 말씀드려서 `긴 섹스 후의 담배 맛` 하는 광고를 전 아직 한 번도 본적이 없어요. 정말입니다. 물론 광고가 나가지 않았다 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 것이 과거에 있었고 대중의 이맛살 을 찌푸리게 했다.`라는 소리는 들었어요. 그렇다고 그 광고를 제가 만들지 않았으니 그런 광고에 책임없 다라는 식의 말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현시점에 대해서 제가 그 과거의 광고에 대한 언급을 하기 어렵다.`는 점 에 대해 이해를 구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미 흘러 지나간 과거의 좋지못한 광고에 대해 제가 무슨 손을 쓸 수 있겠읍니까? 혜숙씨와 아줌마의 의견대로 안기부는 정말 없어져야 하는 것 입니까? 그런 대표성이 두 분에게 있읍니까? 없겠지요. 하지만 두 분은 안기부를 없애라 하고 자신의 주장을 표현할 수 있읍니다. 두 분은 분명히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이 나라 국 민이니까요. 하지만 저도 국민의 한사람입니다. 안기부는 현재의 축소 분위기에서 벗어나 더욱 확장 되어야 한 다. 라는 것이 제 주장이고 그 이유는 <소설, 안전기획부> 5권에 쓰고 있읍니다. 사서 보시든 보시지 않고 저를 그냥 공격 하시든 그건 두 분 마음먹기죠. 그리고 벌써 독후감을 실으셨다고 하는데, 도대체 끝나지도 않 은 소설에 어떤 독후감을 실었는지 궁금합니다. 하지만, 말이란 잡지를 사서 보지는 않겠읍니다. 끝나지도 않은 글에 대한 독후 감을 싣는 잡지가 얼마만한 신빙성이 있는 글들을 게제하고 있을 까에 대한 `못미더움` 때문입니다. 그리고, 혜숙님이 조직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해주셨는데, 조직 의 구조 개편에 한 두사람의 역할이 무어 그리 대수겠냐고 하셨 읍니다. 하지만, 그 한두사람이 때로는 기대할 수 조차 없었던 일들을 해내기도 합니다. 링컨이 흑인들을 해방시켰고, 고르바쵸프가 냉 전을 종식 시켰읍니다. 아마도 링컨이나 고르비 주위에 조력자가 있었으니 그리 할 수 있었지 않았느냐고 따질지 모르겠읍니다. 맞습니다. 단 한사람의 힘은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조직에 대한 제 견해를 말씀드리자면, 세 사람만 의지 를 뭉치고 자신들이 약속한 신념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몰두 한 다면 어떤 조직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어요. 안기부가 아니라 백악관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란 것이 제 생 각입니다. 물론 제가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일말의 가능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지요. 비록 일말의 가능성이지만 거기다 목을 걸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 장담하실 수 있겠읍니까? 그리고, 아줌마께선 처음에는 제 글에 대한 선전을 자주 물고 늘어지셨는데, 처음에는 제 글이 안기부에서 나온 것으로 곡해하 시고 그러신 모양입니다만, 선전광고와 안기부는 무관하다는 것 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읍니다. 두분께서 안기부를 싫어하시는 이유중에 하나가, 과거 정보기 관이 무고한 사람을 잡아다가 죄를 날조해서 두들겼다고 해서 그 런 것 아닙니까? 그런데, 두 분께선 제 소설<안전기획부>에 대해 무고하게 물고 늘어지시면서 대중 앞에서 싸잡아 비난하고 계시는 점은 한가지 도 없읍니까? 혜숙씨는 소설을 읽지도 않은채 제목 하나만 보고 비난하시고, 아줌마께서는 끝나지도 않은 글에 독후감을 쓰셨다고 보라고 하 십니다. 만일 두 분 같은 분이 안기부원이 되셔서 일하신다면 안기부를 욕 안먹게 만드실 수 있으십니까? 아니 안기부가 아니라, 그 어 떤 정보기관이라도 두 분이 들어가셔서 일하시거나, 아니면 두 분이 원하시는 바대로 안기부 같은 것을 싸그리 없애버린다면, 그때는 만족하시겠읍니까? 안기부가 잘못한 점이 있다면 욕을 먹어야지요. 욕하세요. 해 명을 할 수 있는 부분이라면 안기부는 해명을 하겠지요. 해명을 못 한다면 정말 잘못을 저질러서 웅크리고 있거나 아니면 해명을 할 수 없는 입장이겠지요. 간단히 요사이 조선일보에 언급된 여간첩 `은하수`건도 발표하 려다 미루게 된 것으로 아는데, 이유가 무엇일까요? 김락중사건 이 조작이라서 그렇다고 하시겠읍니까? 아닐 것입니다. 선거 분위기에 편승해서 여권 돕는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겁나 서 일 것입니다. 5권을 쓰던 중 잠깐 들어와서 두 분의 글을 읽고 두서없이 적 은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깊이 생각하지도 못하고 글을 올려 서 또 죄송하지만, 할 것이 밀려 있어서 신중한 글을 올릴만한 시간을 할애해서 적지 못했읍니다. 글을 올리거나 쓰다가 보면 올려 놓고, 또는 써 놓고, 잘못 썼 구나, 잘못 표현했구나, 하는 후회를 남길 때가 많습니다. 이번 에도 후회가 남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오늘 들어왔던 것은 그동안 올렸던 제 글이 변변치 못하 다는 생각에 지우기 위해 들어왔었읍니다. 하지만, 오늘 올라온 두 분의 글을 대하니 며칠 후에나 지워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안녕히들 계세요. 건방이 적었읍니다. 느껴지는 감정을 삐딱하게 담은 기석의 글이었다. 물론 좋은 내용은 아니었지만, 두 여인을 공박해서 그녀들의 감정을 한층 더 격렬한 흥분상태로 몰아가고자 한 의도가 글 속에 배여 있었 고, 이 정도의 글이라면 야권 성향이 농후한 하이텔 큰마당 (PlAZA)난의 지나는 객(客)들을 더욱 끌어들일 수 있다는 의도도 없지 않았다. 기석은 안기부에 대한 깊이 있고 무게 담긴 신랄한 비난을 들어보고자 했다. 자신의 오만한 감정상태를 더욱 오만하 게 만들어 보고 싶었고, 그런 상태에서의 심적 조절능력을 시험 해 보고자 했다. 글들이 또 올라오고 있었다. 큰마을 (PLAZA) 제목 : 쉿~검찰아찌나,안기부아찌만 보세요~!! #6511/6683 보낸이:남혜영 (artexy ) 안녕하세요~ 검찰 아찌들~ 이번에 민청학련(전국 민주 청년학생 총연맹)의 추모 모임을 했던 사람들을 민청학련에 대한 찬양고무 등을 이유 로 국가 보안법에 저촉되어서 수사 한다면서요? 그래선데요. 제가 그런 사람을 한명 알거든요. 그 사람도 국보법에 저촉되 는지 알고 싶어서요. 확실히 그럴것 같은데. 그 사람요 글쎄~ ` 민청학련은 이적단체`란 대법원 판결을 조작된거라구 말하구 또, 자기 이름으로 민청학련 관련자 에게 `영치금`까지 준 적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확실히 문제 되죠??... 근데요 문제가 쬠 있는 데...~~ 그사람 지금 대통령이거든요~ 이걸 어카죠?!!!! ^^; 이상은 아이디 빌려쓰는 하윤이었습니다. 큰마을 (PLAZA) 제목 : [6506에 대한 반론/안기부는 어떤 집단인가 #6689/6708 보낸이:임석찬 (YIM122233 ) 나는 원방 님의 책을 본적도 없고 그리고 더불어 지금 읽고 있 는 그 홍보(?)사건의 전모도 잘알지 못합니다. (죄송하군요. 건 방님을 원방님이라고 불렀군요. 에디터<주:조잡한 수준의 문서 편집기능만을 갖추고 있어 간혹 수정에 불편함이 있다>라 양해를 구합니다.) 그러나 건방님이 이야기하시는 그 신념이라는 것이 과연 어디 에 바탕을 둔 것인지 심히 묻지않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국가 안전기획부는 어떻게 생겨난 것입니까? 그것은 박정희 군 사정권시절 자신의 군사 쿠테타를 합리화하고, 정치적으로 자신 들의 정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방첩대라는 군 정보기관에서 비롯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방첩대(여기서 방첩대는 두가지로 찢 어지게 되는데 그것은 지금의 보안사를 거쳐 기무사가 된 군 정 보 보안기관과 그리고 지금의 안기부로 오는 중앙 정보부일 것이 다.)의 후신이랄 수 있는 중앙 정보부는 유신을 통과시키고, 반 공 이테올로기를 바탕으로 수많은 악법들을 옹호했으며, 독재정 권을 반대하는 많은 지식인들과 언론인 그리고 생존권을 위해 분 분히 일어선 국민들을 불법세력이니 불온세력이니 하여 탄압했읍 니다. 그 악명높은 국보법(국가 보안법)으로 잡아넣고 고문하며 최소 한의 인권조차도 보장하지 않았던 탈법적인 파쇼정권의 철옹성이 아니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건방님이 찬양하는 그 안전기획부가 과연 국민들을 위해 무엇을 하였는지 묻고싶습니다. 이땅의 노동자들이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혹사 당하고 있을 때 그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명서 한장 발표한 적이 있 었습니까? 죄없는 학생들이 분연히 일어났을때, 쇠파이프에 맞아 죽고 고문당해 죽던 그 학생들을 위해 국가 안전기획부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을까요? 매년 선거철이면 어김없이 터져 나오던 그 수많은 간첩단 사건 과연 그것은 어떻게 만들어 진것일까요? 국민의 눈과 귀를 속이는 언론은 어디서 만들어 진것이며 그리고 이 나라를 이모양 요꼴로 만든 군사정권의 앞잡이가 바로 누구였 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런데 안기부가 확대 개편되어야 한다고요? 대구참변등 잇따라 터지는 문민정부의 무능력한 정권을 보호하 기 위하여? 아니면 민심을 잃어 버린 여당의 장기집권을 보장하 기 위하여? 아니면 아직도 때려잡아야 할 이땅의 불온세력과 빨 갱이들이 너무도 많기에 지금의 안기부로서는 그 힘이 부족해서? 저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과거의 안전기획부가 어떻든 그리 고 더불어 지금의 안기부가 어떻든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국가 안전기획부는 쇠파이프에 팔다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깨져 개처럼 쫓겨나는 철거민들을 보호하는 국민의 기관이 아니며 입 주한지 1년도 못돼 무너질까 두려워하는 영세민 아파트의 국민들 을 옹호하는 집단도 아닐 것이며 탈법적인 노동악법을 개편하는 올바른 양심을 가진 정보기관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앞으로 며칠후면 광주 민주화항쟁이 돌아옵니다. 아직도 구천을 맴도는 수많은 민주영령들의 원혼이 잠들지 못하고 있는 이 나라에서 국가 안전기획부는 없어져야할 몇가지 안되는 것들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요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국가 안전기획부는 우리 나라 대학 생들이 직장으로 원하는 몇가지 안돼는 우량직업중의 하나라고 하더군요, 가슴아픈 현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지금의 안전기획부는 분명 그 이름이 어떠하든 어떤 모습으로든 지금의 국가 안전기획부 밖에 될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분명히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이 나라에서 국민들이 더이상 국민들위에 군림하는 정 부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며 또 그런 정부를 옹호하기 위해 국민 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그야말로 말그대로 불온한 기관 역시 존재 를 허락하지는 않을 것이란 사실을요. 당신들이 음지에서 양지를 지양하건 양지에서 음지를 지양하건 관심이 없습니다. (지향인가요?) 건방님은 신념의 옳고 그름을 다시 한번 따져 보시기 바랍니 다. 그 신념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방향으로 흘러야 하는지 깨달 으실 수 있다면 적어도 이 나라는 조금 더 변화된 모습으로 올바 른 역사를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많은 책이 팔리시기를 기원하며(반어법) 더이상 국민들에게 욕을 먹지 않는 안전기획부 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5.18 진상규명과 범죄자들에 대한 조속한 처벌을 바라며 더불 어 마음놓고 살아갈 수 있는 사고없는 우리나라를 기원하면서... 정리되지 않은 글로 다소 무례가 되었더라도 양해를 바랍니다. 하이텔의 많은 분들중 저보다 좋은 글들을 올려주실 분들이 많으 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시기를 바라며... 임석찬. 비교적 차분하게 안기부와 기석의 견해를 비판하는 임석찬의 글에서도 내용 자체 보다 자신이 공박당하고 있는 부분에 신경이 몰리는 것을 체험했다. 기석은 다른 사람의 글도 읽어보았다. 이번에는 김원상이란 사 람의 글이었다. 김원상은 `건방`을 아이디 주인인 `김유재`로 착 각하고 글을 올렸다. 이런류의 착오는 단순한 것이지만 어떤 대 상이나 혹은 기관 또는 글 등등에 대해 주장의 신빙성을 떨어뜨 릴 수도 있어서 독자의 외면을 사기 쉽다. 남을 비평할 때는 간 단한 것에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할 것이다. 큰마을 (PLAZA) 제목 : 그런 관점으로 사고한다면 비판받아 마땅.. #6517/6683 보낸이:김원상 (K3cosmosos) 김유재씨의 글을 읽어보니 사고의 관점에 질곡된 부분이 있다 고 생각 되어 몇마디 하고 싶군요. 일단 김유재씨의 사고방식은 철저히 지배 이데올로기에 젖어 있음을 느꼈습니다.지배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힘없는 백성, 국 민, 민중을 학살해 왔는지는 언급할 필요 조차 없겠지요. 김유재씨는 링컨이나 고르비를 무척이나 존경하고 계신 것 같 군요. 제가 생각하기에 링컨이나 고르비 같은 사람은 그 시대가 요구한 바가 무엇인가를 나름대로 올바로 읽은 결과 탁월한 정치 적 선택을 한 인물이었을 뿐이지요. 그런 이유에서 존경한다면 뭐 어쩔 수 없지만요. 그리고 세사람의 의지만 뭉치면 조직을 바꿀 수 있다고요. 떽기~~~여보시오. 그런 사고방식이 민중을 학살하는 지배 이데 올로기의 원천이 됨을 왜 모르시오. 몇사람의 의지만 있으면 사 회도 나라도 바꿀 수는 있겠지요. 실제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가 그 허위같은 사실을 입증해 주었으니까요. - 아! 역사는 왜 가끔 반동으로 가는가? 역사의 반동에서 우리 는 무었을 배웠지? 아! 그렇다 한가지 배운게 있지. 다시는 그런 일부 반동 세력이 준동하지 못하도록 민중이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 일부 극소 과격분자들이 민중의 의사와는 아랑곳 없이 독선적 인 지배를 꿈꿀때 전제적 권위적 독재가 판치고 급기야는 10월유 신 같은, 12.12사태 같은, 광주학살(광주민중항쟁)같은, 고문살 인 같은, 거품경제같은, 장영자 같은 있어서는 않될 무서운 결과 를 잉태함을 왜 모르시나요. 진정 역사는 일부 몰지각한 반동 세력에 의하여 움직이지 않습 니다. 물론 그들도 꼭 필요한 세력이긴 하지요. 왜냐하면 그들은 진짜 인간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크나큰 교훈을 주기 때문이지요. 그런 인간이 나타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는 교훈을... 진정한 역사의 발전은 인간 대다수가 꿈꾸는 방향으로 가게 마 련입니다.그래서 민주주의 이념은 세상에 존제해 왔던 어떠한 정 체(政體)보다도 국민의 의사를 많이 수렴할 수 있기에 우리가 발 전시키려 하는 것이지요. 김원상... 기석은, 아이디 빌려 쓴다는 하윤, 그리고 임석찬, 김원상등이 올린 글들은 구 시대의 정보기관의 폐해를 현재까지 연장시키지 못해 억울한 듯, 그 비판의 강도가 지나치게 거세다고 생각하며 자위하기로 했다. 순간순간 즉석에서 올리는 글들임에도 이 정도 의 내용을 담고 있다면, `과거의 정보기관에 무심하지 않았던 사 람들이었을 것이거나, 어쩌면 선거에도 무관하지 않은 사람도 있 을 지도 모른다`는, 어거지에 가까운 추측도, 기석 자신을 달래 는 데 한 몫을 하는 것 같았다. 기석이 이런 쪽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애쓰는 것은 자신의 글 곳곳에 감춰 둔 민망한 구석들이 예 상보다도 너무 적나라하게 들어나는 바람에, 대중의 수준을 너무 얕잡아 본 실책에 대한 쪽팔림때문인 것도 같았다. 글들의 내용은 기석이 올린 글에서 시비의 소지가 있었던 `소 수에 의한 조직 변화 가능성`을 따지고 있었지만, 대체로 이 나 라 정보기관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었고, 현 정부에 대한 불만족 스러운 점들도 드러내고 있었다. 기석의 감정 상태는 좋지 않은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그것은 올라오는 글들의 `옳고 그름`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는 것 같았 다. 책을 출판하고 있는 작가 `건방`이 올린 글인데 다수에 의해 한결같이 공박을 당하고 있는 점이 언짢았고, 더욱 괘씸한 것은 `책을 읽지도 않고 제목만 보고 따져오는 무지스러움과 무성의` 였다. `과거의 책`이 아닌 `현재 나가고 있는 책`에 대한 분석은 커녕, 과거의 광고와 단순히 <안전기획부>란 제목에만 얽매인채, 읽어 보지도 않고 분위기에만 편승해서 작가에게 대드는 불나방 식의 공격은, 우왁스럽고 조잡하게만 여겨졌다. 그리고 그런 저 런 괘씸함에는 기석 자신의 책이 `널리 읽혀져서 좋은 글이란 인 정`을 받아야 한다는 이기심이 제대로 실현되고 있지 않다는 섭 섭함도 어느정도는 개입되어져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석은 이곳이 야권 성향의 글들이 판을 치는 곳이고 대체로 보수 여권은 이런 글싸움에 별로 개입하는 경우가 드문지 라, 침묵을 지키고 있는 대다수의 독자는 기석 자신의 편일 것이 라고 여기며, 자신의 글이 비판일색으로 난도질 당하고 있음에도 또 한번 자위할 수는 있었다. 자신이 쓴 글에 대해 여러사람에게 비난받아야할 이유가 없다 고 생각하고 있던 기석으로서는, 이런 형태의 공격이 글쓴이의 마음을 상당히 상하게 하는 것이란 것을 체험했다. 더구나, 비난 속에 오해나 독자의 시각에서 잘못 판단되어진 부분이라도 있을 적에는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심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는 것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기석에게는 일반인들과 구별되는 유별난 무심(無心)이 있었다. 죽음을 거래하며 어렵게 터득한 그의 무심이 참는데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지금의 기석은 감정의 물결을 무심보다는 방심(放 心)의 상태로 흐르도록 조절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석은 자신의 민망함들이 절제를 통해 모양새를 갖추기보다는 감정에 휩쓸리는 데로 분방한 형태를 띄도록 방임하고 있는 것 같았고, 어떤 형태 를 띄는지 관찰하고 싶어하는 것도 같았다. 기석은 글로써 터득해야 할 무심(無心)에 총으로 터득한 무심 (無心)의 도움을 빌리고 싶지 않은 듯 싶었다. 기석의 키보드를 두드리는 속도가 빨라진 것으로 미루어 불안 정한 감정을 약간 엿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크게 동 요하고 있지는 않은 듯, 기석은 무난한 글을 작성했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고 예의바르게 인정했으며, 작가의 명예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겸손하게 사죄하는 글이었다. 기석이 필명으로 내세운 `건방`을 아이디의 주인인 `김유재`로 착각하고 글을 올려 주었던 김원상 앞으로 쓴 글이었다. 김원상 앞으로 올려진 글이었지만 그동안 올라왔던 비난의 글들 모두에 대한 답장 형식이었다. 큰마당: (PLAZA) 제목 : 김원상님께.<김유재가 아니고 건방입니다.> #6536/6683 보낸이:김유재 (bigman ) 여러분들이 지적해주신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보니 제가 좀 실 언을 한 것 같습니다. 서, 너 사람이 조직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다는 뜻으로 쓴 것이 강도가 너무 심하게 표현이 되었고, 표현 에 무리가 많았다고 여겨집니다. 어지러운 글로 심기를 상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 글을 쓸 당시 제가 감정이 몹시 상한 탓에 혜숙씨와 아줌마에게 `무작정반박`이란 글쓰기 최악의 상태에서 거친 감정들이 약간 지저분하게 표현되었읍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건방이 적었읍니다. 기석이 인내의 글을 작성하고나서 다시 게시판을 살피니 여전 히 자신을 자극하는 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이번에 올라온 글은 아이디 주인이 전경숙이란 여자이름으로 되어 있었으나 글귀에서 는 남자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새로 올라온 글 역시 기석의 부아를 긁는 글이었다. 큰마을 (PLAZA) 제목 : 박건영씨와 건방님. #6528/6683 보낸이:전경숙 (Rainwomon) < 박건영 과 건방 > 박건영이라는 친구를 텔레비젼에서 처음 보고서는 상당한 호감 을 가졌었다. 아마 이 친구가 생긴 탓이리라. 어쩌면 '야, 이렇게 안생긴 인간도 살아가는데, 나는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무의식적 우월감의 발로인지도 모른다. 하여간 나는 이 친구가 좋았는데, 번드르르하게 생기고, 얼굴 반반한 연예계 인간들에 대한 '반항'으로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내 주위에 흔한 그 안생긴 인간들, 너저분한 인생들이 TV에 까지 진출하여 한판 잔치를 벌이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이다. 그러니, 이 친구가 핫팬츠 차림에 투명한 비닐옷을 입고나와 엉덩이를 쓸어만질 때에도 '하하. 이 친구 참.'하고 웃을 수 있 었다. 게다가 말을 더듬는 그 어눌함이 순진하다 못해 순수하게까지 비추어지기도 했었다. 근데 지금은 이 친구가 나오면 어떤 생각이 드냐면, "지랄하고 자빠졌네." 라는 느낌이다. TV프로 '김한길과 사람들'에 나와서 이 친구가 하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 이런 느낌이 들었다. 무슨 말을 했냐면 자신의 파격적인 옷차림과 요상한 포즈는 " 한국여성의 성적 보수성"을 혁파하는 위대한 거사라고 강변했던 것이다. 이 친구는 "여성도 남성의 육체를 즐길 줄 알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한몸을 바치겠다"고 굳게 다짐한 것이다. (아, 이 순간 우리의 악동 김x섭님이 떠오르지 않을 수 가 없구나.) 나는 그 친구가 매우 진지한 태도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믿는 다. 그냥 '해프닝을 일으켜 주목 좀 받아 보자'라는 식의 얄팍한 쇼맨쉽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김한길과 사람들'에서 얼마나 진 지한 표정으로 이야기 했던지, 본 사람은 느꼈을 것이다. 이 얼마나 웃기는 짜장인가! '광대'가 '광대' 노릇을 관두고 '여성해방운동가'가 되겠다? 흐음.. 그것도 비닐옷 입고나와 엉덩이를 매만지는 매우 혁명 적인(?) 투쟁방식으로? 나는 '박건영'이라는 친구는 천한 광대에 불과하므로 '여성해 방운동'이라는 고급스러운 분야에 진출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고 자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분야에든 진출할 권리가 그에게는 있 다. 문제는 TV에 나와서 비닐옷 입고, 엉덩이 매만지는 행위가 '여 성해방을 위한 혁명적 투쟁'이라고 주장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건 그냥 해프닝에 불과한 것이다. 차라리 "여자들에게 내 훌륭한 몸매를 보여주고 싶어요."라고 말했으면 귀엽기나 하지. 제발 말도 안되는 엉뚱한 곳에 거창한 이름 좀 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보는 사람이 역겨운 것이다 얼마전 집 앞 서점에서 "Z대 찌꺼기"라는 책이 있길래 서점에 서서 대충 훑어보았다. 대충 보아도, 아까운 돈을 주고 살만한 책은 아니었다. 세상에는 얼마든지 읽을 책이 많이 있는 것이다. '쓰레기'에다가 돈을 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물론 나는 저자의 이름도 주의깊게 보지 않았다. 세상에는 기 억해야 할 이름이 많은 것이다. '찌꺼기'까지 기억하면서 살 수 는 없는 노릇 아닌가. 대충 내용을 보니 뻔한 3류 소설이 대충 그런 것처럼 '섹스 행 각'이 주된 내용이었다. 서점에 서서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도록 읽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원래 그런 인간이어서, 그런 부분만 찾아서 읽었나 ? 근데 그런 부분이 많긴 많더군. 서서 읽기엔 다 리가 아플 지경이니.) 물론 중간에 '모사드'인가 'KGB'인가 뭐 첩보기관 얘기가 있더 라만, 이거야 뭐 '분량채우기'고, '괜히 있어 보이기'고 '장식효 과'라는 것을 다 아는 얘기 아닌가! 하여간 시간때우기로 서점에서 서서 보기에는 괜찮은 책이었 다. 근데 어느날 플라자에 와서 보니 '안기부 어쩌구'하는 얘기가 있어 보니 의 작가(건방님) 아닌가! `흐음..이제는 안기부 어쩌구 하는 책을 쓰신 모양이네. 민족 의 앞날을 위해 안기부를 반대하는 무리들과 전투를 벌이고 계시 네.` 심심풀이용 소설을 쓰시면서 스스로를 라고 했을 때는 '맞아. 그렇군'이라고 선뜻 동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떡하면 여자를 꼬실 수 있는가? 여자사냥꾼의 자질 은 무엇인가?'를 얘기하던 사람이 갑자기 거창한 이름 - 국가와 민족의 안위와 안기부의 적극적 역할 - 이라는 문제를 들고 나오 니 나는 또 자꾸 '박건영'이 생각난다. `거창한 이름 덮어쓰기`는 아닐까? 그렇다면 그 목적은 무엇일까? 잘 모르겠다. 하긴 별로 관심도 없다. 여하간 건방님 하시는 사업이 날로 번창하시길... 누가 썼다고 언급되어 있지 않은 글을 접한 기석은 글의 내용 따위는 별 관심이 없었다. 다만 글을 올린 사람이 자신에 대해 욕하고 싶어하는 분위기만을 받아들였고, 울화가 치미는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답장을 찍어서 올렸다. 이번에는 감정표현이 제대로 된 글 같았다. 큰마을 (PLAZA) 제목 : 전경숙님께. #6533/6683 보낸이:김유재 (bigman ) 지랄은 하는데 왜 이리 자빠지지 않는지 모르겠읍니다. 말씀하 시는 것을 곰곰히 들어보니, 저에게 상당히 기분 나쁜 감정을 갖 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언급하시면서 절 욕하시는 것 같던데, 그동안 여 자분들에게만 공격을 받아서인지 오랜만에 남자분에게 공격을 받 으니 신선한 느낌이 드는군요. 여자를 논하던 제가 안기부를 논하니 더욱 쓸하신 것 같으신가 본데, 그러면 안되는 것입니까? 삼류소설가는 영원히 일류소설을 쓸 수 없는 것입니까? `서울대 찌꺼기`를 쓴 글쟁이는 `안전기획부`를 쓰기에 모자름 이 많다는 것인데, 그럼 안전기획부는 누가 쓸 수 있는 것입니 까? 댁같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지랄하고 자빠졌네." 하는 사람이 써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 폭언이 아니면 저를 훈계 할 자신이 없읍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려서 전 댁같이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욕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사회의 쓰레기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 통신망의 최대 약점이 무엇이라고 생 각합니까? 제 생각에는 바로 당신같은 사람이라고 여겨집니다. 위에 제가 글을 잘못 썼군요. 온라인상(전화선으로 연결되어진 상태)의 에디터라서...`보이지 않는 곳에서 욕하지 않는 사람`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욕하는 사람`으로 정정하겠읍니다. 댁께서 제 이야기 중 어느부분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드셨는지는 몰라도, 제가 느끼기에는 그냥 한번 욕이나 해보자는 것처럼 들 릴 뿐입니다. 저도 여러모로 부족한 사람이니까, 제 부족한 점을 지적해 주 실때, 수긍이 가면 고맙게 받아드리겠읍니다. 하지만 쓸데없이 입에서 쓰레기가 튀어나오듯이 내뱉는 욕찌거 리는 이후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고 상대하지 않겠읍니 다. 제게 감정이 상하셨으면 상하신 이유를 똑바로 한 번 짚어보시 고, 또 그것이 대중 앞에서 한번 따져보시고 싶다고 판단되면, 글을 올려주세요. 인정이 되면 앞으로 제가 살아가는데 많은 참 고로서 새기게 될 것이고, 아니라고 판단되면 무시하겠읍니다. 기석은 이번에는 제대로 챙기던 인사말도 빼 버렸다. 그동안 올린 글에 비해, 거칠게 상대를 몰아부치는 글이어서인지, 상대 의 답장이 금방 올라왔다. 글로 욕하는 것은, 남이 보기에는 크게 기분을 건드리는 글이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당하는 당사자는 커다란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하물며 남이 보아도 욕하는 글이 분명한 것이 었음에야! 기석에게 반격을 당한 상대 역시 뒤질새라 매서운 글을 올려 놓았다. 큰마을 (PLAZA) 제목 : 아고 무서워라... #6562/6683 보낸이:전경숙 (Rainwomon) < 아고, 무서워라... > 에고, 오늘은 저의 하이텔 생활 중에 최대의 비난을 받은 날이 군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전 댁같이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욕하는 사람이야말로 사회의 쓰레기가 아닌가 생각 해 봅니다. 이 통신망의 최대약점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 제 생 각에는 바로 당신같은 사람이라고 여겨집니다."(6533, 건방님의 글 중에서 ) 물론 여기서 '댁'이란 저를 지칭하는 말이지요.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하고 이해할 수 없는 바도 아 니지만.. 제가 원래 비꼬기를 잘하거든요. 근데 아무한테나 비꼬지는 않 지요. '건방'님은 그래도 명색히 '소설가'이니 이 정도의 '비틀 어 글쓰기'는 널리 양해하실 줄 알았지요. 근데... 흐흠.. 제가 판단을 잘못했네요. 뭐 길게 쓸려면 얼마든지 길게 쓸 수 있겠지만, 짧게 핵심만 쓰도록 하지요. 삼류소설가는 일류소설을 쓸 수 없는가? 아, 당연히 쓸 수도 있지요! 흐흠... 근데 "Z대 찌꺼기"가 3류 소설이 맞나요? 그리고 "안 기부 어쩌구"는 1류 소설인가요? "안기부 어쩌구"는 제가 읽어보지 않아서(앞으로 읽을 생각도 없습니다만) 모르겠고, "Z대 찌꺼기"는 3류 소설인 것은 거의 확 실한 것 같더군요. 제가 제기한 문제는 "넌 3류 소설을 썼으니, 이번에도 안봐도 뻔하다."가 아니라, 다음 문제였습니다. "귀하의 3류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돈주고 볼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만, 어쨋든 서점에 서서 따분한 시간을 흥미롭게 보냈습니다. 문학적으로는 비록 '쓰레기'지만 '시간 때우기'로서 는 그런대로 괜찮았으니 '3류'로서의 사명에 충실한 소설이었지 요. 그런데 이번에는 뭐 '안기부'를 건드리셨다는데, 그리고 안 기부 문제로 플라자에서 적들과 대치하고 계신다는데 혹시 가수 '박건영'씨가 그러는 것처럼 별것 아닌 것 가지고 거창한 이름을 붙이면서 스스로 자기과대포장 최면에 빠지신 것은 아닌지요? 저 는 이전의 '3류'를 보고 미루어 짐작컨데, 그런 혐의를 두지않을 수 없군요."( 아고 이렇게 친절하게 해설을 해야 하다니.... 크 으...) 그런데 귀하께서는 저를 "뒤에서 욕하는 사회의 쓰레기야" 라 고 비난을 하십니다.. 흐음.. 앞에서 욕할려면(사실 저는 욕한 적도 없지만) 그럼 컴퓨터 모니터 속으로 뛰어들어가 전화선을 타고 귀하의 방까지 2400bps로 달려가야 하나요? 그래도 저는 귀하의 소설의 독자로서 귀하의 새 소설에 대해 그리고 최근 플라자에서의 행적에 대해 있을 수 있는 '의심'을 제기했습니다만, 돌아온 것은 제 문제의식을 완전히 왜곡하시어 서 "3류는 1류를 쓸수 없는가? 이 뒤에서 욕하는 사회의 쓰레기 야 "입니다. 좀 더 노골적으로 제 견해를 말해 보지요. 저는 최근의 문단과 출판계의 흐름을 볼 때, 소위 '치열한 작 가정신'이라는 것이 희박해지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뭐 '진실을 추구한다'거나 '예술혼을 불태운다'거나 '삶의 의미를 밝힌다.' 거나 하는 얘기들이 순진한 문학소년, 소녀들에게 적합해질 지경 이지요. 제가 보기엔 많은 요즘 광고에서 방방 뜨는 수두룩한 작가들의 작가정신은 "돈을 벌자 !" 이겁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이 전혀 나쁜 생각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 돈 왕창 준다면야 저 라도 당장 뛰어들겠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만, 돈벌기 위해 책을 쓰는 작가는 '아, 실은 내 소설에 뭔가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돈벌자고 하 는 짓이야'라고 솔직히 말해야 한다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귀하에게 그런 혐의를 두고 있습니다. '국가와 민 족의 안위와 안기부의 적극적 역할'의 이면에 있는 것이 바로 돈 이 아닐까 하는 혐의지요. "함부로 사람을 의심하지 말라.!"라고 하실 겁니까 ? 저의 혐의에 대해 답하고 싶으면 답하십시오. 글을 눈으로 대충 흘터내려가는 동안 아픈데를 찔려서인지, 기 분이 상한 기석은 앞으로 `전경숙`이란 이름으로 올라오는 글은 무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다시 올라온 새로운 글 을 찾아 읽었다. 또 올라온 글은 약간 뒤처져서 올라온 고장숙 아줌마의 글이었 다. 큰마을 (PLAZA) 제목 : 안기부서 '나온' 아줌마 73번째 이야기!! #6549/6683 보낸이:고장숙 (kokwangSU ) 안녕하세요? 안기부 자유게시판에서 '나온' 아줌마에요. 73번째죠? 먼저, <소설 안기부>저자 건방(bigman 이란 아이디를 빌려 쓰 시는)님께! 제 말뜻을 오해하셨더군요. 님은 - [아줌마가 '말'지에 벌써 독후감을 실으셨다고 '말' 5월호를 사서 읽으라고 했지만 안사보 겠다. 도대체 끝나지도 않은 소설에 독후감을 싣는 잡지가 얼마 만한 신빙성이 있는 글들을 게재하고 있을까에 대한 못미더움 이.....] 하셨는데. 천천히 말씀 드릴 터이니 자~알 들으시어요. 아줌마는 독후감 을 쓰지 않았어요. 당신의 책을 광고하는 출판사가 광고문에 당 신의 소설 안기부를 읽고 독후감을 써 보내면 삐삐랑 무선전화기 를 준다고 광고를 냈잖아요. 끝나지도 않은 소설에... 아줌마가 글을 모호하게 썼나,반성해 보려고 아줌마 글을 다시 뒤져 보았는데 오해받을 만한 문장이 아니던데... 아줌마 글을 너무 급하게 읽으셨나 보지요? 그리구 '말' 5월호엔 안기부 요원이었던 사람이 북한에 귀순하 면서 인터뷰한 기사가 있어요. 그걸 보라는 거였지요. 소설 안기부를 쓰신 분이 '말'이란 잡지의 성격을 그렇게 쉽게 오해하실 수 있다는게 좀 놀랍군요.('말'님! 잠시라도 오해를 받 게해서 죄소옹!) 아, 그 소설의 전편이 이미 라는 이름으로 나왔었 다구요? <소설 안기부>는 다른 분이 이름을 지어주셨다구요? 광 고는 다른데서 따로 한다구요? 에..그러니까 요즘은, 현실 따로, 모순 따로, 소설 따로, 작가 따로, 작명가 따로, 출판사 따로, 광고 따로...그렇다 하더라 도... 역사소설도 아니고, 넌픽션도 아니고, 가상소설에 (출판사 직 원은 분명히 가상소설이라고 하더군요. 당신은 일만 페이지가 넘 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했으니 가상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다 고 하시지만 그것이 비행기 안에서의 풍경이라든가 외국 건물이 나 거리에 대한 묘사에 관한 자료라면 별 의미가 없는 넌픽션이 지요.) 그것도 군사독재정권의 충실한 하수인이었던 그리고 아직 도 변치않고 -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오직 깨끗하고 예리한 칼날 을 가진 -현실속의- 다수의 국민들에 의해서만 변화될 수 있는 그러한 안기부를 결과적으로 미화한, 미화할 수 밖에 없는 소설 에, 아직 완결편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상품을 내걸고 독후감을 모집한다는 건 잘못된거 아닙니까? -소설 속-의 당신이 '만들어 낸 영웅'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 해 주리라고 믿습니까? -얼핏 당신이 안기부 입사를 희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 각도 드는데... '개혁'을 위하여...'깨끗하고 날카로운 칼로 더러운 곳을 도려 내기 위하여','범을 잡기 위하여 범굴로 들어가려'하는 당신의 목적을 그들이 안다면 불행하게도 그들은 당신을 채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소설 안기부로 인하야 상품을 얻으려 -아유~ 안기부가 이 렇게 좋은덴줄 몰랐어요-하는 독후감을 열심히 쓰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는 공로로라면 몰라도... 그런데 안타깝게도 건방님! 그런 젊은이들은 이미 당신 소설속 의 영웅처럼 될 수 없답니다. 우리 역사가 필요로 하는 젊은이들은 당신의 책 광고에 나오는 -냉철하게 표적을 겨냥하고 단숨에 방아쇠를 당기는 남자- -이 세상에서 저 세상 끝까지 쏘아 맞춘다는 바벧탑의 저격 수!- -양심을 생각하는 대신 지옥에 갈 것을 당연히 받아 들이며 지 옥에서도 역시 저격수가 될 것임을 다짐하는 영원한 저격수를 꿈 꾸는 남자- 가 아니라, 안기부등에 의해서 쥐처럼 길들여지지 않은 역사를 잘 알고, 더러운 역사를 청산하기 위하여, 쥐처럼 살기를 거부하는 당찬 젊은이랍니다. '더운 가슴과 찬 이성'을 가진 젊은이들이지요. 아! 그런데 아줌마는 희망을 발견했어요. Cg51345, artexyz, Kayaba, Rainwomon... 등등 당차고 똘똘한 여성들이 많이 보이잖아요! 물론 당차고 똘똘한 남성들도 많이 보이지만요. 그리고 아들 아이디 빌려 쓰시는 [아아비]님! 5월 광주노래를 많이 익혔습니다. 아직 미숙하지만... 3절; 산자들아 동지들아 모여서 함께 나가자 욕된 역사 투쟁없이 어떻게 헤쳐 나가랴 4절; 대머리야 쪽바리야 양키놈 솟은 콧대야 물러가라 우리역사 우리가 보듬고 나간다 후렴; 5월 그날이 다시오면... 아! 다시 건방님! 아줌마가 지난 글에도 썼지만, 5공때 안기부장을 지냈고 지금 은 민자당 국회의원인 안무혁씨와의 인터뷰 기사가 '말' 4월호에 있답니다. "(5월 광주 학살사건에 대해)..과연 우리 국군이 정말 그랬을 까요? 나는 믿어지지 않아요. 정말로 우리 군이 무법적으로 시민 을 쏘고 도망 가는 사람을 쫓아가 죽이고 했다면 그건 군이 아니 라 폭도죠. 정말 그랬다면 국군은 해체돼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 나 난 우리군이 그랬으리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광주 비디오는 광주에 가면 터미널 노점에서도 팔더만요. -5공때 안기부장했다는 사람이 5공때 일을 모르더먼요. 기석은 독한 글들에서 매섭게 비난 당한 상황이어서인지, 아줌 마의 글에서는 감정이 동요되는 부분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다 만, 지난날의 아픔을 개혁보다는 혁명을 통해 해소하고 싶어하는 의도가 간혹 감지될 때, 생각의 차이 정도를 느꼈다. 흙탕물에 튀긴 감정의 여운이 여전히 감돌고 있었기 때문에, 기석은, 올라온 글들에 대한 시시비비에 대한 생각은 감정을 수 습하고 고요한 상태에서 따져 보기로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감정의 흥분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듯 했다. 기석은 사적인 변명과 간단한 대답으로 빠져나갈 준비를 하기 로 했다. 그동안 올라온 글들에 대한 답장을 두서없이 온라인 상 에서 찍어 올렸다. 큰마을 (PLAZA) 제목 : 건방을 욕하시고 계신분들께. 건방이... #6556/6683 보낸이:김유재 (bigman ) 정말 요새처럼 바쁘기는 처음입니다. 특히 통신망에 이렇게 분주하게 매달리게 될 줄은 몰랐읍니다. 저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계신 고광순 아주머니에게는 어 떤 면에서 저를 무척 도와주고 계시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광고 를 자주 언급하시는데, 제 책이 나가는 출판사 `황소걸음`은 아 주 작은 출판사입니다. 광고비가 많을 리 없어요. 주로 한겨레 신문과 스포츠등에 광고가 나가는데, 조선이나 동아일보에 비하 면 다섯배는 싸다고 들었읍니다. 제 책은 다섯권짜리 소설이고, 다른 책과 비교해서 광고비로 책정된 액수가 적으면 적었지. 많 지는 않습니다. 아주머니께서 제 책을 욕하시며 하이텔에서나마 욕먹는 광고라 도 도와주시고 계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로나마 절 도와주 시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어서인데, 혹시 안기부원 아니십니까? 물론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10퍼센트도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실 이런 광고효과는 달갑지 않습니다. 이 아이 디도 제 아이디가 아니고 적당히 발을 빼고 싶은데 자꾸 여러분 들에게 발목이 잡히는군요. 그리고, 몇몇 분들이 몇가지 사건들을 들이대며 사실을 밝히라 고 안기부에 호소하시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던데, 그런 문제는 안기부에 직접 문의 하셔야 할 것입니다. 저에게 답변을 요구하신다면 요구하신 분은 제 책을 보시라고 밖에 할 수 없읍니다. 저는 안기부에 관계된 몇가지 의심스러운 사건들에 대해 근거 자료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소설속에 써 놓았읍니다. 하지 만 제 소설 첫 장에 써 놓았듯이 제 글은 소설임을 밝혀 두겠읍 니다. 혜숙씨께서는 도서대여점에서라도 빌려보고 나서 따져 주시면 고맙겠구요. 읽지도 않은 분들께서 제 소설에 대한 왈가왈부에 노골적인 공격자세를 취하며 참여해 주신데 대해 글쓴이인 제 입 장에서는 섭섭한 점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혜숙씨가 언급한 문안에 `무서운 박권 스타일의 안기 부`라고 하셨는데, 그 문안을 이렇게 고쳐 주셨으면 합니다. `무 서운 박권 스타일의 <소설 안전기획부>`라고..... 그리고 고광순 아주머니 께서는 출판사에 전화까지 걸어 보신 모양이시던데, 그 열의와 관심에 깊은 고마움까지 느껴집니다. 소설 쓰는 것보다 아주머니와 이렇게 나마 대화하는 것이 더 재미있다고 느껴지기도 하는군요. 물론 재미로만 쓰는 소설이 아 니라서 소설 쓸때만큼 신중하게 답변을 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한 점이 있읍니다. 어쨋든 요사이 통신망을 오가는 것은 저에게 주 관심거리가 충분히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출판사에 물어보니 고광순 아주머니와 통화했던 분은 경리 아 가씨이더군요. 하긴 출판사에서, 경리 아가씨만큼 저에 대해 아 는 사람도 없지요. 어차피 죄다 절 잘 모르니까요. 그렇다고 절 안기부원으로 생각하지는 마세요. 지구상에 첩보 기관이 안기부 밖에 없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제 가 남의나라 `정보관`일리는 없겠지요. 제가 이렇게 비비꼬는 말 투를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점은 제 입장을 밝히기 싫어서입니다. 그리고 혜숙 씨가 지적하신 사건들 대부분은, 제 개인적인 견 해로 답변을 해드리자면, 현재의 안기부보다는 과거의 안기부에 그 책임을 물어야 할 것들이 대부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김형욱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에 대해서 안기부원들도 모르고 있 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혜숙씨는 어떻게 안기부에서 쏴죽였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십니까? 김형욱 사건 당시에는 안기부도 없었어요. 김대중 사건 때도 역시 입니다. 관계했던 사람들은 은 퇴했거나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나머지 사건들도 의구심을 남기는 것과 미진한 구석이 저로 서도 느껴지지 않는 바는 아닙니다만, 제 능력이 과거의 사건을 헤집을 만한 선까지 미치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후의 안기부에 대해서는 이렇게 하자라는 말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제 소설을 통해서 이겠고 제 자 유 의지에 의한 고유의 생각을 표현해 보는 것일 뿐입니다만, 아 마 안기부원들도 제 소설을 읽고 있는 것 같으니, `이렇게 생각 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참고 정도는 하겠지요. 그리고 제 또렷한 주장 하나가 5권에서 씌여지고 있는데, 안기 부에 대한 새로운 영역의 신설을 주장하고 있읍니다. 그것이 먹 혀들지는 모르겠지만, 어쨋든 이야기나 해볼려고 합니다. 그리고 화들 너무 내지 마세요. 안녕히들 계세요. 박권이 끄적거렸읍니다... <소설 안전기획부(11)> (10) 안전호심술(安全護心術) 기석이 새로 올린 글이 `책선전`에 꼬투리를 잡힐만한 글이 되 기에 충분했는지, 기석이 올린 글들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들이 연달아 올라왔다. 그다지 감정을 자극할 만한 글들은 아니었지 만, 기석은 어쩐지 발가벗겨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창피하다고 느꼈지만 `반성`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기 석이 방심(放心)의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비평들은 `충고`라기 보 다는, <소설 안전기획부>를 한번도 읽어 보지 않았고 기석의 배 경에도 무식한 독자들이 분위기에나 편승하려는, `입방아`내지는 서당개의 `풍월`정도로나 받아들여 지고 있는 것 같았다. 큰마을 (PLAZA) 제목 : 작가가 책선전? 건방<안전기획부> #6571/6683 보낸이:정성수 (CHUNSSS ) 작가라고 나와서 웬지 책선전을 하는것같은 느낌을 주고있다 뭐 거기 현혹(?)되어 책을 사보실 분이 있으려나! 쩝!! 날씨도 안좋은데, 진짜 읽고싶은 책도 많은데... `안전기획부` 보다는 `대구참사의 내막` 뭐 이런 제목에 내용 도 알찬 그런 책이라면 얼른 사볼텐데. 누가 이런책 좀... 반박글이 올라오려나? 어떻게 하지. 무서워~~~~ 고장숙 아줌마의 글을 꼬~옥 읽는 CHUNSSS 큰마을 (PLAZA) 제목 : :::소설 안기부::: #6579/6683 보낸이:남교진 (BILLY1234 ) 건방님에게 먼저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렇듯 많은 관심들 을 보여주니 말입니다. 요즘 비판의 글들이 많이 올라오는데... 글쓴이의 의식을 말할때 특정인물을 말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 다. 요즘 세태가 그러니까요... 하지만 소설은 소설일 뿐이고, 작가의 생각도 자유로와야 한다 고 생각합니다. 요즘 의식없이 시간 죽이기(killing time)용의 소설들이 많이 팔리고 있다고 하는데 독자의 의식 또한 드러나는 게 아닌가 합 니다. 이를 독자가 이끌어 갈수도 있고 작가가 끌어 나갈수도 있지만 배고픈 작가를 할려는 사람들은 별로 없더군요. 그리고 우스운 사실은 게시판에 많은 조회수를 유도 할려는 제 목들(소설의 경우도 마찬가지죠.)이 내용과 다르다는 것이 께름 칙할 때가 있읍니다. 자극만을 찾고 자극만을 주는 세태를 반영 한다고 봅니다. `독자가 바꿔야 하나? 작가가 바꿔야하나?`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얘기와 일맥상통 하는 것 같구요. 어쨋든 많은 자료와 객관적인 시각을 키워서 대작을 쓸 수 있 는 건방님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글을 쓴 작가를 비평하더라 도, 글을 쓰지 않고는 간지러워 못견딜 것 같아서 쓴 비평가들처 럼 보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책을 비판하고자 할 땐 한번이라도 읽어주고 비판해 주셨으면 합니다. 상당히 재미있게 지켜봐 왔습니다만 중요한 요소들이 쌍방에 빠져있어서 논쟁이라기 보다는 줄다리기를 보는 기분이 들어서 몇 글자 적었습니다. 큰마을 (PLAZA) 제목 : 간첩나올 때가됐다. #6580/6683 보낸이:김영기 (HY1020123 ) 선거가 코앞에 다가왔으니 간첩이 나타날 때가 되었다. 선거 때가 되면 간첩이 나오는지, 간첩이 많을 때 선거를 하는 지 모르겠지만 꼭 선거전에는 간첩이 많이 잡힌다. 벌써 교수 간첩이 잡혔는데 그 학교 학생들은 간첩이 아니라고 아우성이다. 간첩은 원래 국가기밀을 넘겨야 간첩인데 그러지도 않은 모양이다. 요번 대구폭발을 비디오로 찍은 사람이 있는데 우리나라 방송 에서는 안틀어주니 그거 NHK나 CNN특파원에게 주면 간첩행위가 되는지 정말 궁금하다. 외국에선 그런거 갖다주면 돈많이 준다던데 내 꿈은 프리랜서 기잔데 우리나라에서는 다 틀렸다, 이민이나 가야겠다. 작은 지역 신문사에 있으면 사이비기자로나 몰리고.. 선거전날이면 무시무시한 핵전쟁 영화나 틀어대고.. 사회과학 공부하는 교수들 조사한다는 보도를 살인범 검거소식 과 묶어서 방송하질않나... 대학가에서 서점이 사라진다는 신문기사에선 애꿎은 유흥업소 주인들만 죽어난다. 모일보사설을 보니 서점주인들의 각성을 기 대한대나? `에라 술이나먹자`라는 풍토를 조성한게 누군데... 아무튼 선거는 가능한 묶어서 했으면 좋겠다. 하루 노는건 좋지만 애꿎은 간첩만 불쌍하니... 근데 <소설안기부> 책광고는 참 요상하다. `긴 섹스후의 담배맛'이란 머릿광고가 `긴 사랑후의 담배맛`이 라고 이틀만에 바뀌었다. 저자도 모르는 광고가 막 나가고 많은 경품...출판사도 가난하 다는데 협찬사가 없다고 보는게 오히려 무리다. 안기부... 과거에 사람을 많이 죽였는지 어쩐지 안봐서 모르겠지만 공식 적으로도 지난 총선에서 야당후보를 떨어뜨리기위해 흑색 유인물 을 돌렸었지. 뭐 개인적인 친분으로 그랬대나. 흐흐흐..너무 웃 겨서 눈물이 다 난다. 요거 한개만 갖고도 국민의 이름으로 없애버리기에 족하다. 국가정보기관이 필요하다면 이름부터 바꿔야한다. 세계화 시대 에 그 구질구질한 이름은 뭐하러 붙들고 있나. 발상의 전환은 요 런 데에 필요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거부감을 느끼고 또 지은 죄도 많다면 바꾸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오히려 광고라 니... 머리가 아프다. 정말 온 국토의 `정신병동화`를 이루려 작정했 나보다. 아무튼 선거를 앞두고 `주위에 간첩이 있나?` 둘러 보기 전에 `잡힌간첩 진짜간첩인가?`도 살펴 봐야겠다. `끝.` 기석은 올라오는 글들을 시덮지 않고 싸가지 없는 비난으로 치 부하는 듯 했지만, 아픈데를 찔리는 듯한 신경의 반응을 인정하 며, 약이 오르고 있는 자신에 고소를 머금었다. 기석은 이 선에서 빠지기로 했다. 큰마을 (PLAZA) 제목 : 책선전이란 오해가 싫어 이만 떠나지요. 건방이. #6589/6683 보낸이:김유재 (bigman ) 건방입니다. 책선전처럼 보이는 말싸움에 저도 약간 짜증이 나는군요. 그래 서 이만 물러가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안기부를 욕하지만, 여러분들이 대놓고 욕할 수 있는 정보기관을 가졌다는 점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할 만한 것입니다. 북한에 가서 김정일 욕한번 해보세요. 당장 온 가족이 십년은 교화소에서 썩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인세에 연연해야 할 만큼 어렵게 살지는 않아요. 인세가 아니더라도 남들 버는 만큼은 벌지요. 안녕히... 추신: 사실, 이제 밀린 일거리들 때문에 더 오고 싶어도 못올 처지이네요. 그동안 몇몇 분들에게나마 미운정이라도 든 것은 저 에게 결코 나쁜 기억이 아닙니다.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읍니다. (이걸 또 책 팔아먹기 위해 아부한다고 보는 사람은 없을라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고장숙 아주머니, 그리고, 혜숙씨, 기타 저에게 관심을 보여준 모든 분들께 적어도 무관심했던 분들보다는 감사드립니다. 그리 고 누구더라 이름이 잘 기억 안나네요. 제가 `통신망의 단점`이 라고 지칭했던 분도 안녕히 계세요. 혹시 인간적인 만남의 기회가 온다면 서로 구김살없는 웃음으 로 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박권이 적었읍니다. 기석이 하이텔 큰마을(PLAZA)에다가 고별사(?)를 올렸음에도 <소설 안전기획부>와 안기부에 관한 글들은 여전히 올라오고 있 었다. 기석은 뒤에 올라오는 글들에 대해 더 이상 대응하지는 않 았지만, 역시 관심을 기울이며 찾아 읽었다. 큰마을 (PLAZA) 제목 : 안녕, 건방님 !! #6599/6683 보낸이:전경숙 (Rainwomon) 떠나시겠다는 건방님의 결정은 정말 잘하신 겁니다. 사실, 이곳 플라자는 '책을 막 써낸 작가'가 , 그것도 신출내 기 작가가 오기에는 상당히 위험한 곳입니다. 게다가 자신이 쓴, 혹은 쓰고 있는 '책'을 언급한다는 것은 거 의 자살행위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항상 고운 시선만을 보이는 곳이 아니기 때 문일 것입니다. 저는 귀하가 안기부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건 그건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든 견해를 밝히고, 정정당당히 토론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기부와 관련한 '책'을 쓰고 있는 작가라면 문제가 복 잡해지지요. 귀하는 귀하의 견해에 대해 언급하는 분들께 일일히 답해 주셨 습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견해에 대해 책임지는 친 절한 자세로 생각될 수 없는 바도 아니지만, 적어도 귀하의 입장 을 고려하신다면 빚어지는 오해를 감당하실 각오를 하셔야 했습 니다. 제가 귀하에게 제기한 것은 단지 '혐의'에 불과합니다. 근거없 는 추측과 심증이라는 잣대로 귀하를 재단해 본 거지요. 물론 저 는 그 '혐의'를 그대로 지닌 채 앞으로 귀하의 책을 시간이 나면 서점에서 찾아볼 생각입니다.(생각이 난다면... 돈주고 살 생각 은 아직도 없어요.) 저는 요즘 작가들이 책을 쓰는 주요한 요인이 "돈"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하물며 세칭 일류작가들도 인세 문제로 출판사랑 소 송도 벌이고, 이리 저리 계약 출판사를 옮기는 마당에 가난한 생 활 끝에 이제 막 "돈"이 되는 책을 쓰게 된 젊은 작가들이야 두 말할 나위도 없지요. 책을 쓸려면 "돈"이 되는 책을 써야 하는 것이 20세기 말의 " 상식"입니다. 아니면 미쳤다고 그 고생합니까? 작가는 굶으면서 '진실'을 찾고, 예술혼을 불태워야 한다는 인 간이 있다면 그야말로 "너나 굶어라."라고 해주어야 마땅합니다. 요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잘 알아야 한다는 거지요. 적어도 작가라면 알아야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나는 무식하다"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철학자 인 것처럼, 작가는 "나는 돈벌기 위해 책 쓴다."라는 걸 솔직히 인정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작가라는 겁니다. '책'은 상품이고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독자들은 평가해야 하는 것이 요즘 시대입 니다. 에고, 여하간 행운을 빕니다. 비꼬는 소리가 아니라, 진정으로 사업 잘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현실적 테두리에서 자유 로울 때, 다시 만나뵙기를... 안녕히... 기석의 작별인사에 대한 답장 형식으로 올라온 전경숙의 글이 었다. 옳은 말도 아니었으나 틀린 말도 없는 무던한 전경숙의 ` 전송인사`에서, 기석은 `인사`보다는 여전히 `괘씸`을 느껴야 했 다. 그것은 그러지 않아도 쫓겨나는 듯한 기분을 떨쳐 버리기 어 려운 기석 자신에 대한 배려는 커녕, `너는 쫓겨나고 있다.`라는 점을 대중 앞에 분명히 고자질하고자 하는 혐의가 느껴졌기 때문 이었다. 기석은 자질이 있어 보이는 이 아마츄어 글쟁이에게 속으로 한 마디 해주었다. `네가 원하는 바대로 욕도 안먹고 돈도 많이 버는 작가가 되고 싶다면, 너에게 등을 보이는 사람에게 화살을 쏘아서는 안되며, 너만 못한 사람의 별것 아닌 성공에 삐뚤어진 질책으로 너 자신 의 마음을 해쳐서도 안되며, 마지막으로, 비꼬는 재주는 남에게 써 먹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반성할 때 쓰기 위해서 익히는 것임 을 명심하거라.` 전경숙에게 마음속으로나마 거칠게 답장을 보낸 기석은, 오혜 숙의 전송인사도 읽어 보았다. 큰마을 (PLAZA) 제목 : [건방님께] 아쉽네요 #6624/6683 보낸이:오혜숙 (kayaba ) 음... 오늘도 바쁜 하루를 보내고 하이텔에 접속해 보니... 의외로 많은 글들이 올라와 있군요. 건방님은 요 며칠새의 일들로 불쾌해 하시는 것 같은데, 그래 도 다른 논쟁들보다 비교적 차분하게 진행되어 보기에 좋군요. 그리고 건방님은 자꾸 `안기부와 건방을 욕하는...` 이라고 하 셨는데, 이말은 욕-->비판 이라고 바꾸었으면 더 좋을 뻔 했어 요. 제가 건방님을 미워한다고 하셨는데, 제게 어떤 개인적 해꼬지 를 한 적이 없는데 왜 미워하겠습니까?(하긴 개인적 해꼬지를 하지않은 박소장과 전소장,노태우씨를 저는 무지무지 미워하니 까, 뭐 `개인적 해꼬지` = `미움`은 아니군요. 하여튼 그 인간들 은 미워하지만 건방님에게는 미움의 감정이 없습니다. 참 저는 경상도가 고향인 사람입니다.) 다만 <안기부>라는 우리 현대사의 피해갈 수 없는 그곳과 견해 의 차이가 문제 되었던 거지요 그리고 김형욱사건과 김대중사건때 안기부는 없었다고 하셨는 데, 맞는 말씀이에요. 안기부가 아니고 중정이었죠. 중앙정보부. 세칭 남산! 제가 명칭에 혼동을 일으켰네요. 왜 그랬을까? 멍청해서인가? 아마 그 사람들은 이름을 바꾸었지만 내 기억속에는 하나이기 때문인것 같네요. 더구나, 안기부는 중앙정보부 자리인 남산에 있잖아요? 사람도 그대로 일테고, 뭐 물갈이(인사이동내지는 해직) 된 사 람도 있어서 바뀐 사람도 있겠죠. 기술(?)도 그대로 전수받았을 테고... 기구와 함께... 요즘도 안기부를 그냥 `남산` 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던데, 중정이고 안기부고 혼란스러우니까 그냥 `남산` 이라고 하면 좋 겠어요. 만약 내가 봄이 가고 여름이 와서 여름옷으로 바꿔 입었더라도 나는 "오혜숙" 인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리고 책을 읽지 않고 욕을 한다고 하셨는데, (아마 온라인상 이라 서로의 감정전달이 잘 안 된 것 같군요) 저는 글 서두에 분 명히 책은 안 읽었지만 건방님의 게시판 글에 나타난 주장을 보 고 반박을 하는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책내용에 대해서 뭐 라고 했나요? 그밖의 지적하신 다른 문제도 결국 관점의 차이에서 나오기 때 문에 같은 말만 반복이 될 것 같네요. 어차피 훌륭한 작가를 지향하고 계신다면 그저 "흥미"를 끄는 작가가 아니라 모두에게 "인정"을 받는 큰글을 쓰는 분이 되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 사회에도 이득이 되겠죠? 벌써 이별사를 하셨으니, 이글을 못 읽을 수도 있겠군요. 오혜숙... 작별 인사를 해주고 있는 글들에서도 기석은 여전히 개운치 않 음을 느꼈다. 욕 혹은 비판 이라는 것들을 계속 먹다보니, 기석은 올라온 글 들의 전체적인 내용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싶은 마음 보다는 괘 씸한 글들에서 삐딱한 부분에만 감정이 집중되고 있음을 느꼈다. 아픈데를 달래주는 척하면서 문지르거나,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 분을 쓸데없이 까발리거나 하는 짓꺼리들이 야속하게만 생각 되 었다. 어쩔 수 없는 지나간 과거의 책선전에 대한 잘못을 인정했고 또 그런 광고가 나간 배경 설명을 해줄 수 있을 만큼 해주었음에 도 불구하고, 현재 나가고 있는 책에 대한 평가를 읽어 보지도 않은 채, 지나간 지저분한 광고 `긴 섹스후의 담배 맛`에다가 도 매금으로 갖다 부치는 것이 기석은 억울했다. 감정대로라면 앞으 로 좋은 책을 쓰기 보다는 `기왕 이런 소리나 들을 바에야 돈이 나 왕창 벌 수 있는 글에나 달라 붙어야 겠다.`라는 반발심만 솟 구치는 기석이었다. 기분이 전혀 나아지지 않은 상태의 기석은 하이텔에서 빠져나 와 천리안으로 들어갔다. 천리안에도 기석이 하이텔에서 벌인 논 쟁에 관계된 글이 있었다. 게시판에 공고되어 있는 글은 아니었 고, <소설 안전기획부>의 5권 초반부까지 읽은 독자가 기석에게 편지(MAIL)를 보내준 것이었다. 번호:217/218 송신자:EEEKKkLLL 송신일시:95/05/11 13:25 형태:TEXT 제목 : 독자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번이 세번째 편지로군요. 한번은 그냥 썼던 독후감이었고, 두번은 보내주시려는 책을 안 받겠다는 편지였고, 이번이 세번째네요 얼마전 하이텔에 갔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한건방님께서도 통신을 오래 하셨겠지만 제가 느끼는 것은 통 신이라는 환경 탓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얼굴이 보이지 않고 흔히 하는 막말로 `주먹이 멀어서...` 라 는 말이 옳을 때도 있구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부담없이 내뱉고 전화만 끊어버리 면 언제 그랬냐싶게 상관없이 지낼 수 있으니까요. 통신은 사각지대가 아니고, 엄연한 사회에 포함된 것이라는 것 을 잘 인식하지 못하나 봅니다. 제 책에 쓸 꺼리가 하나 더 늘었 네요. p.s.)정보기관에 대한 시각은 저마다 다르지만, 부류가 있겠지 요. 왜 그곳은 매번 음지가 되어야 하는지? 전 좀 그렇네요. 이런 말이 있더라구요. `대통령을 비난하지 마라. 그에게 초청을 받으면 가장 기뻐할 사람이 바로 너이기 때문이다.` (안 기뻐할지도 모르지만..) 독자가........ 어느정도 기석에 대한 위로 비슷한 것도 담겨진 독자의 편지를 대하니, 역시 하이텔 보다는 천리안이 젊잖은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슬그머니 다시 생각해보니 `가재는 게편` 이라는 속담이 떠올라서 별로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기석은 백줄 분량의 감상문 모집(주:신문 광고에 나간 독후감 이 아니고, 기석의 책이 출판되기 전에 천리안 컴퓨터 문단에 게 시한 감상문 모집이었고, 비평 보다는 감상을 보내달라고 공고한 적이 있었다.)에 대한 공고문을 천리안에 올린 적이 있었다. 그 당시는 기석이 올리고 있는 소설 제목이 에서 <전사의 고백>으로 이어지던 중이었고, <안전기획부>라는 타이틀 은 올라가지 않은 상태였다. 그후, <안전기획부>가 이어지면서 분량이 커진 원고에 대한 제 목을 출판사측과 논의했다. 출판사 측은 문학 비평가 장성수에게 제목에 대한 자문을 구했고, 장성수는 출판사 사장과, 편집장, 작가인 기석, 그리고 장성수 자신까지 제각각 열가지의 제목을 생각해 보라는 숙제를 냈다. 기석은 <안전기획부>를 포함해서 <탈고하고 있는 전설> <문경 지정> <비늘없는 물고기들>등등의 열가지의 제목과, 글 후반부에 서 전개될 내용에 대한 구상을 요약해서 보내 주었었다. 그리고 며칠 뒤 기석이 장성수에게 `제목이 어떤 것으로 결정되었읍니 까?`하고 물었을 때, 장성수는 <소설 안전기획부>라고 대답해 주 었다. 그리고 제목을 전해들은 기석은, 지금도, 많은 제목들 중에 <소설 안전기획부>를 짚어준 장성수가 상당한 안목의 소유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3권까지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의 반응은 <소설 안전기획부>를 좋지 않은 제목으로 여기고들 있는 것 같았 다. 지금 편지를 보내준 이 독자도, <안전기획부>라는 글이 <전사 의 고백>의 뒤를 잇자, 일말의 섭섭함을 표시하면서, 3권까지(당 시에는 4, 5권이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나온 책을 기석이 보내 주겠다고 하자, <안전기획부>로 이어지는 책은 받기 싫다는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이 독자는 분명 적지 않은 글을 읽은 사람일 것이고 글도 쓰는 사람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글은 다 읽고 나서야 평가를 내려야 한다는 상식을 갖춘 사람임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기석은 단순히 <안전기획부>라는 제목 하나 때문에 애독하던 독자가 끝나지도 않은 소설에 섭섭함을 표시해 오는 반응들을 체 험하며, 안기부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심정을 생각해 보았 다. 안기부원이 사람을 만날 때 어떤 심정일까? 진짜 명함은 이름밖에 찍혀져 있지 않으니 남에게 내밀기도 거 북하다. 여의치 않아서 유령회사를 사칭한 명함을 내밀을 수 밖 에 없는데, 어쨋든 이것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니 찜찜하기는 마 찬가지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기를 좋아하고 가까와 질수록 더 많은 것을 묻는다. 안기부원의 대답은 궁색해질 수 밖 에 없고 사람과 가까와 지는 것을 점차 멀리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세상을 살다보면 사람을 안 만날 수는 없는 일이니 만 나게 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우스개 소리가 나오면 웃어 야 하고 친밀감이 들면 친밀감을 표시하며 가까워 지는 것이 보 통이고, 정이들 때도 있다. 가까워져서 정이든 사람에게 자신이 안기부 요원임을 밝혀 본 다. 마주한 정든 상대는 안기부원이라는 것에 개의치 않고 약간 의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즐겁게 술잔을 기울여 준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안기부원도 그렇고 마주 앉았던 정든 상대도 그렇고 서로 연락을 꺼리게 되고 만다. 그러다 관계는 소원해지고 잊혀 진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자신이 안기부원임을 밝히고 사람을 만날 때를 떠올려 보겠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자신의 업무와 관계된 경우고 직책은 물론 본명까지 사실대로 밝히지는 않는다. 그렇게 만나는 만남에서도 좋은 관계를 구축하기란 매우 어렵다. 안기부 업무는 꽤 범위가 넓다. 붙잡아다가 족쳐야 되는 업무 때문에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경우는 사실 드물다고 표현할 수 있는 정도다. 내가 예를 들고자 하는 것은 이런 희귀한(?) 경우 를 제외해 놓고서이다. 직업상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인간관계`라는 것이 있 듯이 안기부원에게도 그런 것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안기부원이 `인간관계`를 어떻게 쌓아가는지 한번 예를 들어보겠다. 호텔 라운지에서 신문기자와 마주 앉았다. 신문기자가 묻는다. "점심 들었나요?" 안기부원이 대답한다. "네." "어디서 드셨나요?" "구내 식당에서." "뭐 드셨나요?" 여기서 안기부원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려 보고 대답해 주어야 한다. `비빔밥을 먹었는데 기밀일까? 구내식당 메뉴를 공개해도 되는 것일까? 에이! 이 정도로 국가기밀누설죄를 뒤집어 쓰진 않 겠지. 대답해 주자.` "비빔밥 먹었읍니다." "아! 비빔밥을 드셨군요. 비빔밥 말고 뭐가 맛있읍니까?" 약간 켕기는 질문인지라, 안기부원은 어투를 우회적으로 바꾸 면서 대답하게 된다. "잘 기억이 안나는데, 청어구이 같은 것이 나오면 맛있지 않을 까요." 기자가 여전히 묻는다. "식사비용은 얼마나 하나요? 지불방식은 현금인가요?" 안기부원이 생각해보니 가격은 기밀이 아닌지라 기분좋게 대답 해주고,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한 기자가 고마워서 해맑은 웃음까지 선사한다. "1500원 정도고, 현금대신 뭐 쿠폰같은 것으로 하겠죠. 헛헛 헛" 안기부원의 웃는 낯을 살핀 기자가 약간 까다로운 질문을 슬쩍 던져본다. "한 가지만 더 묻겠읍니다. 식당은 청사 몇층에 있읍니까?" 얼굴가득 웃음을 띄우던 안기부원은 갑자기 낯빛을 굳히며 까 다로운 질문에 대해 긴장한다. `1층에 있는데, 기밀인지 아닌지 헷갈리네. 더 이상 대답해 주다간 잘못하면 실수하겠다. 머리 굴 리는 것도 복잡하니 이쯤에서 아주 말을 끊자.` 염두를 어렵게 굴린 안기부원은, 허리를 똑바로 피고 팔짱을 딱 낀채, 기자를 쏘아보며 말한다. "그딴거 자꾸 묻지 말아요." "왜요?" "기밀이니깐." 그리고 안기부원은 굳게 입을 다물고 상대를 쳐다보기만 한다. 기자는 더이상 묻지 못한다. 인간관계가 좋아질래야 좋아질 수 없는 대부분의 만남은 이렇 게 끝난다. 그리고 안기부원을 만났던 일반인들은 끄트머리의 고 압적인 자세를 이렇게 표현한다. `겁주구... 기죽이구...` 그렇게 일반인들은 안기부원을 싫어하게 되고, 안기부원은 사 람들이 많이 오가는 양지 대신 눅눅하지만 편안한 음지를 좋아하 게 된다. 기석은 천리안의 독자가 짧막한 편지 속에서 궁금증을 표시한 `그곳은 왜 매번 음지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머리 속 에서 떠올려 보았다. `<안전기획부>란 제목 하나로 읽지도 않은 소설은 물론 지은이 까지 외면해 버리는 양지의 햇살이 너무 따가와서 일 것이라고.` 기석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기분 그대로 천리안에서 빠져나와 다시 하이텔로 들어가 보았다. 안기부에 관계된 글이 하나 더 올 라와 있었다. 고장숙 아줌마에게 `5월의 노래 가사`를 보내 주었 던 `아이비`라는 사람의 글이었다. `안기부 언론팀`에 대한 글이 었다. 큰마을 (PLAZA) 제목 : [아아비] 폭로! 안기부 언론팀 여전히 활동 #6621/6687 보낸이:박한식 (HL2OYSSS ) ##아들 ID 빌려쓰는 박정호 입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에서 주간으로 발행하는 <미디어 오늘> 창간호 1면 기사를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 안기부 언론팀 여전히 활동중>>> ## 문민정부 "폐지하겠다" 불구 음성적 공작 계속 ## *주요언론사 전담기관원* <동아일보/이정태> <서울신문/송홍> <조선일보/최경학 이영희> <중앙일보/김교섭> <한겨레신문/배경한> <한국일 보,연합통신/송자혁 정민국 (중복전담)> <프레스센터/김진택> 김영삼 정부가 출범직후 폐지를 약속했던 안기부내 대 언론 담 당부서가 여전히 존속돼 온 사실이 확인됐다. 최근 <미디어 오늘> 취재팀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안기부는 서 울 지부 정보과 산하에 40여명 규모의 언론팀을 별도기구로 운영 하면서 언론인과 언론사에 대한 정보수집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김영삼 정부 출범이후에도 안기부에 대언론 전 담부서가 별도기구로 구성돼 있다는 것과 그 규모가 파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덕 전안기부장은 지난 93년 3월 안기부 기구개편을 단행하면 서 정치사찰 관련부서를 폐지, 안기부는 대공 및 해외업무에 주 력하겠다고 밝혔다. 이에따라 안기부내 제4국(정치언론담당부서)이 폐지된 것으로 밝혀졌으며 그 이후 지금까지 언론담당부서의 실체가 확인된 바 는 없었다. 이번에 확인된 안기부 언론팀은 40대 후반의 중간 간부급 4-5 명을 비롯, 30대 중후반의 요원들을 주축으로 구성돼 활동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 가운데 KBS를 담당하는 허수현씨(일명 서웅)는 중앙정보 부 시절부터 20년 가까이 대언론 관련부서에서 활동을 해온 인물 로 알려졌으며 조선일보 전담요원 최경학씨는 지난 90년 <언론노 보>에서 `언론사찰' 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폭로됐음에도 계속해서 활동을 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중앙일보를 맡고있는 김 교섭씨도 90년 당시 국민일보를 `출입' 했던 인물로 밝혀져, 안 기부가 말썽이 나면 자리를 바꿔가며 대 언론 활동을 계속해오고 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이밖에도 프레스센터, 한겨레, 한국일보, 연합통신, MBC, CBS 등 주요 언론사에 안기부원들이 전담배치돼 활동을 하고 있는 것 으로 드러났다. 이들 요원들은 해당 언론사 언론인의 신상파악과 노조활동 등 과 관련된 정보수집 활동을 하면서 언론사 간부들과의 잦은 접촉 을 통해 주요사안 보도에 대한 `조정업무' 까지 해오고 있다는 의혹을 사고있다. 실제로 대구 가스폭발 참사 때 이들 요원들이 방송사에 대해 현장의 참상을 축소하고 수습에 중점을 두도록 `보도조정' 을 한 사실이 방송기자들을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이에 앞서 지난해 11월 대전KBS를 담당하는 요원이 공무원비리 관련보도 삭제를 요 청한 사실이 드러나 관련자가 보직해임 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들 요원들은 과거처럼 노골적으로 언론사를 출입하지는 않으 나 주로 언론사내의 학연이나 지연 등을 할용, 주로 언론사 밖에 서 언론인들을 만나 정보수집 및 `보도조정' 활동 등을 하는 것 으로 파악됐다. 이에 대해 안기부 이재홍 공보관은 "제4국은 이미 폐지됐고 언 론대책반도 존재하지 않는다"며 "단지 대공활동의 일환으로 요원 들이 개인적으로 정보수집 활동을 하고 있을 뿐 언론통제를 위한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 끝 - 이외에도 관련기사가 3면에 더 있는데... 휴~~ 타자가 느려서... `안기부 언론팀..`에 대한 글을 읽은 기석은 머릿속에 대강의 상황이 그려졌다. 몇몇 기자들과 인맥이 닿아 있는 안기부원들이 자신과 인연있 는 기자들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어 `식사`또는 `술한잔`을 하자 고 했겠고, 기자들은 자의반 타의반 안기부 내의 인맥을 만났을 것이다. 오고 가는 대화 역시 뻔하다. 안기부원은 관심있는 사건에 대해 궁금해 했을 것이고, 기자는 사건에 대한 이런저런 의견을 들려 주었을 것이다. 가끔씩 안기부 입장과 기자의 생각이 상반될 때는, 안기부원은 `이래라 저래라`간섭하는 대신 걱정스러운 표정 정도로 의사를 표시했을 것이다. 그러면 기자는 자신과 친분있는 인맥의 입장을 어느 정도는 헤아려 주었을 것이다. 이런 만남이 한 두번에서 끝났으면 별 탈이 없었을 터인데, 사 고를 친 것을 보면, 아마도 안기부원 몇몇이 자신이 담당한 기자 에게 지나치게 노골적인 간섭을 드러내었던가, 아니면 빈번하게 청해오는 `술한잔`에 귀찮아진 기자가 짜증이 났던가, 기석은 둘 중 하나일 것으로 판단했다. `천하의 안기부`이어야 하는 안기부가 기자들에게 물먹는 꼴상 에 기석은 욕이 나왔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안기부 망신은..." 기석은 가끔씩 이건에게 안기부의 국내담당부서에 대해 물어 본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던 `이건의 심정 `이 이해가 갔다. 기석은 안기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안기부 내의 고질화 된 정치판 눈치보기는 역겨운 것이었다. 여당 눈치는 물론, 노태우 대통령 시절 김영삼 대표의 노란 봉투 사건에서 부터, 야권의 눈치까지 보아야 했던 안기부는 이제 기 자들의 눈치도 살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과거의 미련한 짓들을 저지르던 안기부도 저질이었지만, 여기저기 굽신 거려야 하는 현재의 안기 부도 보기에 좋은 것은 아니었다. 기석은 문제는 안기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요원들 스스로가 자신의 능력과 가치에 대한 자부심을 팔아먹 고 있는 것 같았다. 지난날 저질렀던 무식한 짓들에 연루된 약점 과, 정권에 아부하려는 지저분한 눈치쟁이들, 그리고 이런 것들 에 밥줄을 잡힌 요원들... 어려운 입장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기저 기 눈치나 보다가, 만만한 상대 하나 걸려들면 쌓였던 스트레스 를 포악한 분풀이로나 해소해 보려고 벼르는 치사한 권력의 개가 되고 싶을까? 아닐 것이다. 안기부 요원이 되었다면 그대는 인생 뿐만이 아니라, 영화속이 나 소설속에서도 주연이 되기에 충분한 사람들이다. 시끄럽게 `빵빵`거리는 홍콩영화 속의 유치한 영웅이 아니라, 만인(萬人)의 안보를 책임져 주고도 한마디의 감사도 기대하지 않는 `고요한 영웅`으로 등장하는 주인공 말이다. 사내로서 그 보다 큰 명예는 없다. 훗날, 그대들의 손자에게만 살짝 전해줄 수 있는 명예겠지만, 한 번 생각해 보라. 아이들 셋이 모여 이야기를 한다. 한 아이가 말하길, "우리 할아버지는 국무총리였어." 또 한 아이가 말하길, "에이, 그정도 가지고, 우리 할아버지는 대통령이었어." 마지막 아이가 신비스러운 미소를 띠며 말하길, "너희들 입닥쳐. 우리 할아버지는 안기부원이었어." 했을 때, 국무총리나 대통령을 내세우던 아이들이 정말로 입을 오무려주는 그러한 안기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요원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가의 안보를 책임지는 보디가 드로서의 가치가 얼마만한 것인지? 자신이 해나가야 할 일에 대 한 긍지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하고 있는 지? 에 대해 항상 생각해보길 바란다. 위에서 시킨다고 넙죽넙죽 고개만 조아리지 말고, 가슴을 딱 펴고 해야할 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고, 해야겠다고 판단하면 하 는 것이 진짜 보디가드요, 존경받을 수 있는 안기부원일 것이다. 더러운 치욕을 먹고 사느니, 공사판을 전전하더라도 깨끗한 밥을 먹고 사는 것이 진짜 사내다. 현장요원들은 정권에 아부하는 대신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당 당하게 수행하겠다는 고집과 자신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국민이 욕해도, 나으리들께서 `알아서 기라.`는 의중을 비추더라도, `할 것은 하되, 못 할 것은 죽어도 못하겠다.`라는 `떳떳한 음지`로 서의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권력의 더러운 칼이 아닌, 음지에서 양지를 지켜주는 국민의 보디가드로서 그 사명을 다해줄 때, 안기부는 `천하의 안기부`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요원들 스스로 `나는 지금 권력의 시녀가 되어 사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명예를 팔아먹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항상 되새겨 준다면, 그대들은 `음지의 전사(戰士)`라는 명예 하나만으로도 손자들에게 영원히 자랑스러운 할아버지가 될 것이다. 기석은 컴퓨터 통신망을 통해 갈무리(컴퓨터용어로 외부 시스 템의 글이나 화면등을 자신의 컴퓨터로 입력시키는 것을 말함)한 자료들을 정리했다. 여러사람이 안기부와 자신의 소설에 관해 그 동안 올려준 글들을 자신의 글들과 함께 시간대별로 이어 내려가 며 차례로 재편집 해갔다. 그 간(間)의 글싸움들을 다시 한번 검 토해 보기 위해서였다. 고장숙 아주머니가 맨처음 올려준 글부터 새로 읽어 내려가려 던 기석은, 자신의 찌부드한 심리상태가 다른 사람의 글들을 받 아들이는 데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였다. 현관문이 열려지는 차임밸 음향이 들렸다. 낮시간인지라, 영옥이 퇴근해온 것 같지는 않고, 그러고 보니, 런던으로 비행나갔던 윤희가 돌아오는 날이었다. 방문이 슬며시 열려지며 윤희가 들어왔다. "뭐 하세요?" "그냥. 장난하고 있었어. 잘 다녀왔니?" 윤희는 의자에 앉아있는 기석의 한쪽 어깨를 짚으며 모니터 화 면을 향해 고개를 약간 숙이며 말했다. "네. 컴퓨터 장난하고 계셨어요?" "뭐. 대충 그렇지. 마중나가지 못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비행에서 막 돌아와 약간 피로해 보이는 윤희였지만, 일주일만 에 만나는 반가운 빛때문인지, 피로보다는 생기가 피어나고 있는 듯 했다. 기석은 우둘두둘해져 있는 자신의 심리상태를 때마침 도착한 윤희를 통해 해결해 보기로 했다. 기석은 윤희쪽으로 돌아앉았다. 앉은채로 윤희의 감색 스커트 아래로 양손을 집어 넣고 그녀의 양 허벅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하얀 브라우스에 고개를 파묻은 채 기석이 중얼거렸다. "무척 보고 싶더라." 윤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응. 정말이야." "에이. 영옥이 언니가 나없는 동안 잘 해주었을텐데..." "아니야. 영옥이 하고 있을 때도 너만 보고 싶더라." "치. 그 말, 영옥이 언니한테 일러도 돼요?" 난처한 질문을 회피하려는 듯, 기석은 그녀를 감싸 안은채 그 대로 바닥에 뉘였다. 그녀의 스커트를 허리어림까지 올리고 스타킹과 팬티를 끌어내 렸다. 세모꼴 검은 숲에서 갈라지기 시작하는 싱싱한 아가씨의 두 다 리를 하얗게 벌려놓고, 사내는 엎어졌다. 그녀의 귓속에 거친 호흡을 불어 넣어주며 브라우스 단추를 풀 렀다. 노브라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사내의 뇌리를 잠깐동안 스쳤으 나, 사내는 개의치않고 그녀의 등 아래에서 브래지어의 호크를 열었다. 탱탱한 그녀의 양쪽 가슴이 파묻어오는 그의 안면을 감미로운 정서로 감싸주었다. 어느새 곧추선 그의 가운데가 그녀의 숲을 익숙하게 헤치고 들 어갔다. 여인의 입술사이에서 입성(入城)을 알리는 성음(性音)이 새어 나왔다. "아학! 학!" 여인의 몸속으로 밀려들어가면서 사내만이 느낄 수 있는 미묘 한 부드러움과 야릇한 안정감이, 그에게 고요하고 만족스러운 정 서를 베풀어 주고 있는 듯 했다. 아름답게 열려진 여인의 몸속을 조용히 오가며 열중하던 사내 는, 이윽고 아랫도리에서 번지는 짜릿한 본능을 맛보았다. "흐으!" 사내의 머리가 여인의 유방을 짜부러뜨리며 파묻히고 있었다. 여인의 가슴은 다감(多感)하고 아늑한 사내의 고향이었다. 비행의 피로 때문인지, 윤희는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 덕분에 어렵지 않게 심리적 안정감을 되찾은 기석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기석은 통신망에서 갈무리했던 편집자료들을 처음부터 다시 읽 어 내려갔다. 처음에 읽을 때 느꼈던 괘씸함이 거의 느껴지지 않 았다. 끝까지 다 읽자, 기석은 한 번 더 읽어보기로 했다. 세번 째였다. 반복되며 읽혀지는 비판의 글귀들은 기석에게 더 이상 비판으 로 와닿지 않았다. 글들의 내용이 비로서 읽혀지고 있는 것이었 다. 기석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으며, 그런 것들이 그들의 글을 통 해서 지적될 수 밖에 없는 `이해(理解)`가 기석의 가슴에 새겨지 기 시작했다. 그들의 글속에는 분명 오해도 있었고 엉뚱한 지적도 있었으며 기석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잘못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 은, 기석 자신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거나 모호하게만 느꼈을 뿐 짚어내지 못했던 어리석음들을, 그들은 짚어내주고 있었다. 그들 은 기석 자신이 이미 알고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고칠 수 있다고 여기던 자만(自慢)까지도 깨우쳐 주고 있었다. 더욱이 글을 쓴 사람들의 마음이 읽혀질 때는, 민망함이 몸 전 체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는 듯 했다. 기석은 자신이 기연(奇緣)을 얻고 있다고 생각했다. 김강이란 무협작가 쓴 `비류직하 삼천척(飛流直下 三千尺)`이 란 무협소설이 얼핏 떠오른다. 명문정파의 제자로서 그럴듯한 무공을 익힌 주인공이 자신이 익힌 무공을 시험해보고자 강호에 출도한다. 몇몇 악인들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리며 한동안 승승장구하던 주인공은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게 되고, 찌를듯한 호승심까지 겹 쳐,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가 된다. 거대한 마(魔)의 집단에 도전장을 내고, 비로서 자신의 가소로 움을 깨닫게 된다. 악전고투를 겪으며 악당들에게 쫓기다가 삼천 척이 넘는 절벽아래로 추락하게 된다. 다행이 절벽 중간에 삐져나온 나뭇가지에 걸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주인공은 절벽 중간의 암동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 에서 또 한번 고초를 겪는다. 동굴입구에서 거칠고 사나운 짐승들에게 이리 뜯기고 저리 뜯 기다가 가까스로 암동(暗洞)에 들어가는데 성공한 주인공은 청강 검 한자루와 무공비서(武功必書)를 무릎에 얹은채 좌화(座化)한 해골만 남은 선인(先人)의 유골을 대한다. 유골 앞에서 큰절을 세 번 올린 주인공은 선인의 기연(奇緣)을 취한다. 이름하여, `안전호심술(安全護心術)`이란 천하제일의 심 법(心法)이 수록된 무공비급이었다. `안전호심술`의 첫장을 펼치니 선인이 후인에게 남기는 기록이 쓰여져 있었다. "본인은 하이텔 큰마을이란 곳에서 자라났다. 젊어서는 호기방장하야, 큰 파람 긴 한소리에 거칠것이 없음을 자랑하던 중... 그만... 중략... 중략... 그렇다가... 스스로 부 족함을 크게 깨우치고... 만인(萬人)을 위한 호생지덕(好生之德) 을 깨우치기에 이르러... (중략)... 후인에게 경계함이니... 본 인이 남긴 `안전기획술`로 부단히 차분한 심성을 연마하여, 중인 (衆人)들에게 베풀지어다. 마지막으로, 후인(後人)은 존경받는 무인(武人)이 되기위해서 무공을 연마하지 말고, 추앙받기 위해 검(劍)을 사용하지 말지어 다. 만인의 곤란(困難)을 수습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을 돕는데 만족하라. 젊은이들이 사랑하고 노인들이 존경하는 무인 이 되기보다는, 그들을 사랑하고 보살피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무인(武人)이 되어줄 것을 간곡히 당부하노라." 김강의 무협소설 `비류직하 삼천척`에 염두를 굴리기를 중단한 기석은 컴퓨터 모니터를 쳐다 보았다. 모니터에는 기석 자신이 얻고 있는 기연이 화면상에 떠 있었 다. 고장숙 아주머니의 글에서 부터 비롯되는 자신에게 쏟아진 비평들이었다. 기석은 차분한 마음으로 화면에 떠올라 있는 글들을 새로 편집 해 갔다. 맞춤법을 고치고, 더러는 부연설명도 붙히며,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그 자신의 마음 역시 정화해 나가 기 시작했다. 안기부를 비판하는 70여회의 글을 올리고 있는 아주머니의 마 음... 그것이 누구에 의해 씌여진 것이든 글 속에 담긴 것은, 당 사자들에게는 애가 타는 한(恨)이었을 것이고 바라는 원(願)이었 을 것이다. 그 마음은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떠나 이 사회 전체 가 달래주어야 할 한 페이지임은 분명했다. 글재주가 비상해 보였던, 아마추어 글쟁이들의 마음도 읽혀졌 다. 글솜씨로 미루어 등단을 했거나, 아니면 몇번의 등단시도에 운 나쁘게 고배를 마셨던 사람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과 나 을 것도 없어 보이는 많은 작가들의 신문광고, 그리고 변변한 내 용도 없이 버젓이 베스트셀러라고 자랑하는 찢어버리고 싶은 책 들... 이런 것들이 그들의 젊은 마음을 시도 때도 없이 할퀴었을 것이다. 기석은 자신의 삶속에서도 많은 잘못들을 찾아냈다. 헌팅에서 출발한 애틋한 사랑, 진하고 격렬한 체험에서 터득한 강도높은 섹스신,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모순조차 어렵지 않 게 풀어헤칠 수 있는 물리학적 사고. 삼대과부집 한이서린 분단 의 비극, 다국적 기업과 다수의 스튜어디스 아가씨들 사이에서 전전하며 그려낸 세계 곳곳의 산지식들, 그 속에 자리하게 되는 중동의 저격수, 그리고 가장 가까운 벗이요, 정보관으로 국제적 인 지명도까지 있는, 철저한 안기부맨인 이건 그리고 이건을 통 해 들여다 볼 수 있었던 안전기획부, 21세기에 전개될 지구촌 판 도를 위해 수집한 만페이지가 넘는 근거자료들... 이런 것들을 비교적 유연하게 짜맞추어왔다고 생각했다. 기석 은 미련한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의 삶속에서 숱하게 드러내고 있는 `체`와 일반인들과의 `괴리(乖離)` 그리고 인연(因緣)의 틀 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편협(偏狹)`,등등의 헛점들을 알고는 있 었다. 하지만 무시해왔다. 간간히 뿌려지는 조미료처럼 `배려`를 섞기도 했지만, `이해` 는 부족했다. 부족한 정도라기 보다는 `몰이해`에 가까왔고, 보 는 사람들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않았다. 자신의 삶에 수치스 러움을 남겨두지 않고자 했고, 자신의 인연에 얽힌 편애(偏愛)를 지극히 당연시 했다. 자신은 보편적인 대중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서, 자신이 그래야 했던 시덮지 않은 이유를 대 중이 이해해 주기만을 바랬다. 이제껏 기석은 찌꺼기를 예쁘고 값비싼 포장지로 싸서 남에게 겉만 보여주며 속까지 자랑하고 다닌 꼴이었다. 기석은 점점 더 참담한 심정이 되어갔다. 어떤 소설에서인가 `젊은 독자에게는 사랑받고 나이 든 독자들 에게는 존경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작가의 의도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당시에는 좋은 내용으로 기억되었고 본받을 만한 작가의 자세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와 되새겨 보니, 그보다는 `젊은 독자들을 사랑하 고 나이든 독자들을 모실 줄 아는 작가`가 독자들에게 인세를 챙 길 자격이 있는 진정한 작가라는 마음이 앞선다. 기석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경이로운 체험을 글로 남기기 위 한 작업을 시도해갔다. 어쩌면 통신문학의 한 본보기가 될지도 모르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비평이 담긴 글들을 아이디까지 그대로 나열하며 순간순간 겪 었던 감정의 흐름을 쓰고자 했다. 누군가에 의해서 이름이 붙혀졌을 통신문학이기에, 기석 자신 도 그 명칭을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얼마뒤면 통신이란 단어는 떨어져 나가게 될 것이다. 혹자는 이방의 문학으로 한 갈래처럼 생각하기도 하고, 또 다 른 이는 하나의 새로운 장르처럼 이야기 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기석 자신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통신은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마치 붓대신 펜을 사용하므로써 얻어지는 편리일 것이다. 어차피 문학은 문학인들 것이다. 아마 도, 현 과도단계의 통신문학은 끝끝내 붓만을 고집하려는 게으름 뱅이에게 회초리 정도의 역할을 수행하는 정도일 것이다. 현재 보편적인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통신수준은 사실 통신이 갖고 있는 잠재력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방안에 앉아 서 십팔만리 밖의 강아지가 새끼를 몇마리 낳았고 개집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받아볼 수 있는 것이 통신이다. 우리문학이 좀 더 세계속으로 뻗어나고자 한다면, 도구의 전환 이 필요하다는 것이 기석의 생각이었고, 여러번 강조한 바가 있 었다. 하지만, 당시의 기석에게는 문인들에게 통신의 필요성을 호소한다기 보다는 자신이 길을 밟았던 통신의 가치만을 부각시 킴으로써, 자만에 가까운 먹히기 어려운 호소를 했다고 인정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지금의 기석은 진지하고 성의있는 마음으 로 통신 대중화의 시급성을 호소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어쨋든 기석은 현재까지는 통신문학이라고 불릴 수 있을 만한 작업에 매달리고 있었다. 기석이 여러 비평문에서 굵직하게 느껴야 했던 또다른 점은 안 기부를 경멸하는 일반인들의 견해들이었다. 그들의 견해를 보편 적인 대중으로 보기에는 미진한 점이 많지만, 일단 그렇게 안기 부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안기부가 헤아려야 할 것이다. 대체로 일반인들이 안기부를 싫어하는 이유는 과거의 잘못이 상당한 원인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강렬한 것은, `권력 의 시녀`로서의 안기부를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인상이었다. 이를 위해 안기부는 정치세력으로 부터 사법부 이상의 독립을 하루빨리 서둘러야 할 것이고, 국민들이 신뢰하고 자랑할 만한 대외적인 첩보능력을 향상시켜야 할 것이다. 국내문제에 연연하 는 정보기관은 치졸하게 보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 하고, 끝끝내 정권의 하수인 역할에만 연연하다가는 안기부는 결 국 더러운 치욕만을 남긴 채 문을 닫게 될 것이란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안기부가 국가의 안전을 수호하는 정당한 자리매김을 하기 위 해서는 어느 아주머니의 말처럼 대다수 국민들의 지켜보는 예리 한 눈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잘못한 점들만을 들추어 내려고 혈안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들의 역할을 너무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살피려 하지말고, 그들 고유 업무의 가치를 높이 평 가해 주면서 그들의 애처러운 분발에 ,인정된다면, 스스럼없이 경의를 표할 줄 아는 자세가 반드시 필요하다. 욕을 하기위해 욕 을 한다거나, 지난날의 약점을 지나치게 물고 늘어지려는 태도만 으로는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을 것이다. 기석은 이번에 매달린 자신의 `음지의 공작`을 통해 얻어낸 결 과를, 이건과 고베지진 참사에 적용시키기로 서서히 마음을 굳혀 갔다. 지나친 이기주의는, 그것이 누구를 위하는 것이든, 질책을 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건은 물론 기석 자신도... <소설, 안전기획부(12)> (4) 마파람 3층의 이국장 사무실로 호출을 받은 이건이 307호실의 문을 두 드렸다. "들어와요." 언제나 공손하게 들리는 이국장의 음성이었다. 하지만, 이국장을 아는 사람들은 안기부 내에서 가장 냉정하고 날카로운 사람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이국장을 꼽는다. 마음 좋은 아저씨처럼 보이는 퉁퉁한 몸매의 금테안경이 이건을 반겼 다. "어서 와." 자리에 앉은 이건이 간단한 인사말을 끝내고, 이국장의 낯색을 살폈다. 심각한 일에 직면했을 때 눈을 껌벅이는 버릇이 있는 이 국장이었다. 일자로 굳어진 입술에 연속적으로 껌벅이는 눈을 보 아하니, 대단히 까다로운 결정에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다. 이건은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도 한달전 이 건 자신이 기획해 올린 프로젝트 `마파람`건 때문인 것 같았다. 미흡한 겉치레 정도로 방향이 잡히고 있는 일본의 부전사죄 결 의안에 언짢해 있던 상황에서, 이건은 북한의 조심스런 제안을 비밀리에 전달받았었다. 그것은, 고베 지진, 엔고, 옴진리교 등등으로 휘청거리고 있는 일본에 `끝내기 한방`을 선사하자는 것이었다. 이건 역시 일본의 괘씸죄도 그렇거니와, 현실적인 상황을 놓고 볼 때에도 `마무리 한방`은 꽤나 시기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료들을 수집해 기획안을 만들어 가면서 이건의 그런 생각은 더욱 굳어져 갔다. 실현에 있어 난제(難題)라고 할 만한 것도 없 었고, `한방`이후의 파급효과란 어쩌면 단군이래 가장 큰 국익으 로 기록될 만한 것이었다. 이건은 고베지진이 아닌 앞으로 터질 동경대지진에 대해서 생 각해 보았다. 동경은 지진에 관한한 고베 보다 훨씬 더 약한 지대였다. 태평 양판이 바로 밑으로 파고드는 일본 동단에 위치한 까닭에, 관서 지역이었던 고베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동쪽 바다의 적당한 진 원지에 고베지진에 사용했던 규모의 핵을 터뜨려 준다면, 지진에 약한 동경은 고베지진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될 것이 분명했다. 동경이 무너져 내린다면, 일본에서 침몰한 무역은 부산항으로 몰리게 되겠고, 서울은 곧바로 아시아의 수도(首都)가 되는 것이 었다. 세계에 깔려있는 일본산 제품들은 한국산으로 바뀌게 될 것이고, 동경 복구로 떼돈을 벌어 들일 곳도 한국밖에 없었다. 이건이 품어왔던 세계 최강으로 이어지는 교두보, 아시아의 최 강, 한국의 실현이 눈 앞에 다가온 것이었다. 북한이 제의를 통해 요구해오는 것은 기껏해야 경수로 부대 비 용 추가와 쌀 몇 섬이 고작이었다. 동경시민들의 참혹한 주검들 외에는 이건으로서 망설일 것이 없는 제의였다. 한동안 갈등이 없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하게 될 짓이 설사 반인류적인 몰염치한 짓일지라도 이건은 독해지기로 했다. 결국 이건은 `동경 대지진 유도를 위한 지하핵폭발`이란 내용 이 담긴 심혈의 기획안 `마파람`을 탄생시키고 말았다. 이국장은 이건과 대체로 생각과 행동이 일치했던 사람이었으 나, 지난 번 이건이 기획한 `마파람`에 대해서는 도무지 나설 배 짱이 생기지 않았다. 고베 지진으로 적지않은 재미를 보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동 경 대지진 유도를 위한 지하핵폭발`이 담긴 `마파람`프로젝트는 이국장으로서도 다루기 겁나는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고베지진에, 엔고에, 옴진리교에, 그로기가 되고 있는 일본에 확실한 끝내기 한방을 선사해야 한다는 이건의 겁없는 주 장은 두려운만큼, 유혹도 큰 것이었다. 휘청거리고 있는 일본에 게 마무리 펀치로서는 `마파람`보다 확실한 것은 없을 듯 했다. 주저하던 이국장이 결국 주사위를 던지기로 다부진 결정을 하 게 된 것은 아이러니컬 하게도 한 일본인 때문인 것 같았다. 이국장이 굳어있던 입술을 떼었다. "심심치않게 태평양전쟁을 들먹이기는 했어도, 한일합방까지 당연한 조약처럼 떠들은 적은 거의 없었는데... 망언 미치의 치 매성 발언이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니 어쩔 수 없지." 한일합방에 관련된 일본 와다나베 전 외상의 망언이 한반도 뿐 만 아니라 중국까지 자극해 버렸다. 일반적으로 이런 망언에 대 한 정부의 대응양식은 이이제이(以夷制夷)식인 것으로 북한과 중 국에게 대일 비난을 맡기다가 편승하는 수법을 자주 사용해왔다. 그러나 이번 미치(와다나베의 별칭)의 망언에는, 북한은 한 짓 이 있어서인지 조용했고 다만 중국이 강도높은 성명으로 와다나 베의 망언을 먼저 공격하자 한국신문들이 뒤따랐다. `북한이 와 다나베를 통해 일본에게 쌀을 구걸하는 입장이어서 미치의 망언 에 침묵할 수 밖에 없다`는 논조도 일부 한국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일본 보수인사들이 이것 저것에 시달리다 보니, 분위기 쇄신 이나 한번 해보고 싶었나 봅니다. 어쨋든, 사과 몇마디로 더이상 그냥 넘어가 줄 수는 없겠지요." 이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들을 모시도록 하지. 언제가 좋을까?" 금테안경 속에서 빙그레 미소짓는 이국장에게 이건도 비슷한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내주 초 정도로 잡을까합니만..." 잠시 말을 끊었던 이건이 또렷하게 물었다. "마파람을 띄우는 것입니까?" 이국장이 눈빛을 진하게 바꾸며 가늘지만 연약하지 않은 음성 으로 대답했다. "마파람을 실행해. 걸리적 거리는 가지들이 있다면 모조리 쳐 버리고서라도, 끝까지 가 보자구." 이건이 눈을 맞추며 짧막하게 받았다. "그렇게 하죠." 가끔 부인을 따라 절에 들락거리기도 하는 이국장이 씁쓸하게 말했다. "우리는 지옥에서도 또 만나게 될 것 같네. 똑같은 죄를 짓게 될 테니까." 이건도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응수했다. "하하하. 아마도 그곳에는 전쟁놀이 하다 잡혀 온 히틀러도 있 을 겁니다. 틈이나면 셋이서 함께 고스톱이나 때리게 되겠지요. 점당 시체 하나로..." 한동안 컴퓨터에 달라붙어 있던 기석은 기지개를 켜고앉아, 멀 거니 생각에 잠겼다. 한동안 깊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기석은 주원을 부르기로 했다. 삐삐를 치니, 얼마 되지 않아 주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왜?" "할일 없으면 우리집에나 들려라." "왜?" "그냥 네 얼굴도 보고싶고, 상의할 것도 있어서 그러니까, 자 꾸 왜왜거리지 말고 빨리 와라." "알았다." 주원이 도착하자 영옥이 과일을 깎아서 가져다 주었다. "참외 좀 드셔 보세요." 주원이 체면을 차리며 포크를 집었다.. "잘 먹겠읍니다." 기석이 영옥에게 눈짓을 하자, 영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시구, 부족한 것 있으시면 부르세요. 전 윗층에 있을께요." 영옥이 나가자, 기석이 물었다. "뭐 타고 왔니?" "경복궁 역까지는 전철 타고왔고, 거기서 여기까지는 택시 잡 아타고 왔어." "10부제가 쎄긴 쎄구나. 안기부원까지 제 차고 못 올 정도니." 주원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기부? 크크... 일반국민들 한테는 개하고나 비교되는 안기 부인걸." 기석이 웃으며 반문했다. "개?" 주원이 푸념 비슷한 것을 늘어 놓기 시작했다. "개하고 비교 해주는 정도면 다행이지. 박정희 정권의 시녀노 릇하다가 주인이던 박정희까지 쏴 죽인 중정은 주인까지 물어뜯 었으니, 개만도 못하겠고, 5공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안기부는 그래도 주인을 물어 뜯지는 않았으니까, 그나마 온전히 개라고 불려도 그리 손색은 없을꺼야. 왜 개도 안되니?" 기석이 대답해 주었다. "아냐. 안기부는 개였고, 앞으로도 개이길 바란다." 주원이 약간 볼멘 음성으로 툴툴거렸다. "지금까지 개였으면 되었지, 앞으로도 개노릇을 하라고 내 앞 에서 그런 소리를 할 건 뭐야?" "개노릇도 잘만하면 나쁠 것 없어. 앞으로는 국민의 개노릇을 하면 되잖아. 그러면 귀여움도 받고, 사랑도 받을 꺼다. 하지만 현재의 안기부 조직으로는 사랑받는 정보기관이 되기는 부족한 구석이 있을 것 같다." 주원이 관심을 기울이며 물었다. "어떻게 해야 그 사랑이란 걸 좀 받아볼 수 있나?" 기석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체로 국민들이 안기부를 싫어하는 것은, 안기부의 역할에 염증을 느껴서일꺼야. 안기부를 대놓고 욕하는 목소리 큰 사람들 은 주로 인권문제를 들어 안기부를 욕하지만, 솔직히 그것이 국 민 정서는 아니라고 생각해. 방정철 고문치사 사건이후, 안기부 만큼 인권에 신경쓰는 정보기관도 그리 많지 않아. 국가 보안법 이 살아 있지만, 북한 소설까지 출판될 수 있는 현실이고 보면 안기부법 자체가 인권을 크게 좀 먹기에는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 어. 일반인들이 안기부에게 따스한 눈길을 보낼 수 없는 이유는 인권 보다도 이제는 안기부 역할에 대한 염증으로 봐야 해. 대공수사도 대공수사지만, 그보다는 좀 더 국제적으로 노는 안 기부의 면모가 필요할꺼야. 21세기에 닥칠 경제대전을 목전에 두 고서, 경직된 남북문제에 투닥거리는 안기부는 사실 국민들에게 꼴볼견 안기부로 밖에는 비칠 수가 없다. 여론이 때때로 안기부 축소를 들고 나오지만, 내 생각에는 축 소가 아니라 더욱 확대시켜야 해." "확대를? 그런 소리 했다가 뒷감당을 어떻게 할려구?" "감당을 못해도 할 소리는 해야지. 지금의 안기부로는 한국이 21세기를 주도하는 국가로 성장하기에는 어림도 없다. 21세기 패권의 향방은 잡소리 할 것 없이 첨단 기술력과 정보 력이야. 다른 것들은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어렵지 않게 따라잡 을 있지만, 이 두가지를 10년안에 세계 정상으로 끌어 올리는 것 이 어려워." 주원이 과일을 씹으며 맞장구쳤다. "어려운 일이겠지." "하지만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야. 할 수 있어." "어떻게?" "과학기술 분야에 집중적인 투자도 중요하고 인재양성도 중요 해. 그렇지만 그것만 가지고 10년안에 정상은 무리야. 한가지가 더 추가되어야 해." "그게 뭔데?" "새롭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조직을 하나 만들어야 해. 세계에 서 유래도 없었고 어쩌면 앞으로도 없을 비선(必線) 라인을..." 주원은 이제껏 이처럼 거창하게 주장하는 기석을 본 기억이 없 었다. 그래서인지 참지 못하고 궁금증을 표시했다. "글쎄 그게 뭐냐니까?"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국에 대한 군사비밀 보다는 우리가 뒤 떨어진 갖가지 분야에 대한 외국의 노하우들이야. 전 문적이고 철저한 핵심부분을 파고들어 필요한 고도의 노하우들을 빼내와야 하는 것이 앞서가는 첩보전이겠지. 이런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안기부 인력 가지고 는 어림도 없어. 몇몇 학자나 관계 업무에 종사하는 직원들을 회 유하고 협박하는 식의 낡은 방법으로 이 분야에서 획기적인 성과 를 거둘 수는 없거든. 이 분야에서 철저하고 전문적인 스파이 양성이 필요해." 주원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난 또 무슨 대단한 거라구. 그게 어디 말처럼 쉽나?" 기석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아니야. 내가 언급하려는 것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상식적 인 것은 아닐꺼야." "상식적인 것이 아니라면?" "안기부에서 필요한 새로운 조직은, 학생들이야. 21세기는 그 들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현재 대학 3, 4학년이나 대학원에 재학중인 학생들로 이루어진 조직이 필요해. 이들을 개별적으로 선별해서 간단한 첩보기술을 가르쳐 주고, 해외에 유학보낸 뒤, 그곳의 첨단분야의 일터를 찾 아들어가게 해야 해. 그 다음 그곳의 핵심기술이나 노하우를 도 둑질 시키는 것이지. 전문분야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도 잘 아는 사실이겠지만, 전문 분야의 노하우들은 대부분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면 뽑아낼 수 없는 것들이거든. 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만이 자기분야의 노 하우를 훔쳐내올 수 있는 거야. 일반 요원들이 뽑아내기 어려운 정보들을 그들이 맡아주었으면 하는 것이지. 그래서 안기부는 이 분야에 대한 조직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 다는 것이지. 주원이 이마를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것이... 박사학위 따겠다고 외국으로 나가는 학생들이 미쳤 다고 위험한 스파이 놀음에 끼어들겠니? 실현성이 전혀 없어 보 이는데." 기석이 조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시도는 실현성을 배가시킬거야. 황당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 도 하다가 보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아. 그리고, 네가 앉아서 생각하는 것처럼 실현성이 없는 것은 아 니야. 실현에 있어 어려운 점은 한 가지 뿐이야. `어떻게 이런 고도의 산업스파이 요원들을 대량으로 채용할 수 있겠는가`하는 점이겠지.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어. 체째는,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게 우리의 의도를 대학생들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이냐? 하는 것이겠고. 둘째는, 현재의 대학생들이 그들이 가장 재수없게 생각하는 안 기부요원이 되기 위해 과연 지원해 주겠는가? 일꺼야. 새로운 조직의 인원은 약 이, 삼백명 정도가 필요할 것이고, 외국의 어느 대학을 가더라도 최상위권의 실력을 쌓을 수 있는 영재들이어야 할꺼야. 이 공부벌레들에게 첩보기술을 습득시키기 는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야. 문제는 요원확보인데 처음 오십명 정도만 확보되면 그 오십명을 통해서 나머지 인원을 확보해 나가 는 방법이 적절할 꺼야. 같은 과 내에서 이런 일을 해 줄만한 동 기나 후배들을 선별할 수 있는 능력은 이 오십명보다 더 나은 전 문가는 없거든. 다시 한 번 쉽게 말하자면, 이 오십명에 대한 확보가 한국의 미래를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이야기지. 여기에는 지독하리만큼의 비밀엄수가 필요해. 자칫잘못 했다가 는 `한국의 안기부는 산업스파이 양성소고, 한국 유학생은 모두 스파이다.` 라는 말이 국외로 새어 나가면 도로아미타불일 뿐만 이 아니라, 유학가는 학생들 입장만 아주 난처하게 되거든." 주원이 비실거리며 내뱉었다. "꿈같은 소리같다." 기석도 주원의 부정어린 태도에 어느정도 수긍을 해주었다. "어렵긴 어려운 일이지. 하지만, 한 명의 고도화된 산업 스파 이는 자신의 분야에 관계된 수십명의 노하우들을 빼내줄 수 있 어. 만일 이, 삼백의 고도로 전문화 된 산업스파이가 무사히 결 실을 맺을 수 있다면, 세계 곳곳의 핵심 기술 분야에서 우리는 수천명이 넘는 전문가들의 노하우들을 고스란히 받아올 수 있는 것이지. 21세기의 전쟁은 바로 이런 형태를 띨 수 밖에 없다. 이 것이 진짜 `먹느냐? 먹히느냐?`하는 싸움일테고. 따라서, 안기부는 현재의 대북국가안보에만 연연하는 틀에서 빨리 벗어나야 할꺼다. 그러자면 이러한 조직의 신설을 하루빨리 서둘러야 할 것이고, 이런 업무를 안기부가 무사히 수행해낸다 면, 국민들로 부터 적어도 `정권의 시녀노릇을 하는 개`라는 욕 은 먹지 않을 꺼다. 10부제에 걸려도 안기부 신분증을 내밀면 경 찰이 웃으면서 봐 줄지도 모르고..." 주원이 쓴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이건이에게 한 번 이야기해 보지 그러니?" 기석이 말했다. "그 여우같은 놈이 모를 리 없겠지. 준비작업 정도는 끝내 놓 고 있을꺼다. 아마 요원확보 정도에 고심하고 있겠지." "하긴 잔머리가 발달한 이건이 놈이니..." 이건에게로 이야기가 흘러가자, 기석은 가슴에서 우울한 답답 함이 느껴졌다. 기석의 그늘진 얼굴을 흘깃거리며 주원이 물었 다. "다른 부인께선 왜 안보이니?" 기석이 대답해 주었다. "비행중이야." "아항! 스튜어디스양었지. 그건 그렇고, 아까 언급한 구름잡는 이야기 때문에 부르진 않았을 것이고 왜 부른거야?" "그냥, 너하고 드라이브나 좀 해보고 싶어서 불렀다." "드라이브? 나하고?" "응." 기석이 고개를 끄덕여주자, 주원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아가씨들 틈에서 둘러 쌓여 지내다 보니 갑자기 게이라도 되 었나? 사내놈들끼리 드라이브는......" 기석이 약간 낯빛을 굳히며 말했다. "살다보면 이런저런 일들도 생기기 나름이지. 나가자." "잠깐, 참외는 마저 먹고 나가야지. 갖다준 사람 성의가 있는 데." 꼬불거리는 북악산 1차선 도로를 천천히 오르며 기석은 생각을 정리했다. 주원은 우악스러운 면이 있지만 이건처럼 음모형은 아니었다. 비록 정보사 출신이지만 기석 자신이나 이건에 비해 천진한 면이 남아 있는 주원이었다. 몇번 고베 지진 이야기를 주원에게 슬그 머니 흘렸지만, 주원의 표정에서 기석은 아무것도 읽지 못했다. 기석은 핸들을 슬며시 움직이며 구비구비 비탈진 길을 오르며 백밀러를 통해 주원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흥얼거리며 가느스름 하게 눈을 뜨고 느긋하게 경치를 감상하는 대가리속에는 계집이 나 홀랑 벗겨 넣고 있을 것 같았다. 고베지진 같은 끔직한 사건 의 잔상 따위는 읽어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기석은 한번 더 시도해 보기로 했다. 기석이 차를 길 옆에 바짝 세운 뒤 주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 며 허를 찌르듯이 갑작스럽게 물었다. 짤막했지만 힘이 들어간 음성이었다. "고베 지진 누구짓이니?" 주원이 개입했다면 눈동자가 흔들리며 약간이나마 당황한 목소 리가 흘러나와야 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뚱하게 눈을 뜨고 쳐다보며 의아하게 되물었다. "누구짓이라니? 지진같은 천재지변도 그렇게 물을 수 있는 건 가? 조물주 짓이겠지. 갑자기 그건 왜?" 자연스럽게 주절거리는 주원을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던 기석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래. 조물주 짓이겠지. 사람이면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을 꺼 다. 사람이 할 리는 없을꺼야." 주원은 기석의 무게 있게 흘리는 말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기 시작했는지, 약간 굳어진 표정이 되어 기석에게 물었다. "아까부터 지진 이야기를 자주 꺼내는 것 같은데 고베 지진 때 문에 부른거니?" 어렸을 적부터 같이 자라온 주원이었다. 기석은 주원은 아니라 고 확신했다. 기석은 다시 차를 팔각정 쪽으로 몰아가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해." "무슨 낌새가?" "올라가서 목이나 간단히 축이고 이야기 하자." 맥주 한깡을 사들고 팔각정 2층에 올라갔으나 주위의 사람들 때문에 편하게 이야기 할 만한 장소가 못 되었다. 문을 밀치고 실외로 나오니, 계단 앞에 망원경이 설치 되어 있었다. 오백원 짜리 동전을 밀어넣고 서울시내 곳곳을 살펴 보았다. 기석은 서울시내 뿐만이 아니라 현 위치에서 저격할 수 있는 장소와 저격당할 수 있는 위치를 망원경으로 잡아보았다. 저격을 경험하고 곧바로 따라붙은 버릇이었다. 정지해 있는 장소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주위부터 두리번 거리는, 바밸탑의 저격수다운 습 성이기도 했다. 망원 렌즈를 통해 기석의 눈에 들어온 장소들은 모두 깨끗했 다. 팔각정에서 내려온 기석과 주원은 망원경으로 보아둔 숲 속 의 벤치에 가서 앉았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기석이었다. "시노하라 사건으로 일본에 갔을 때, 방위청의 나까야마에게 일본 근해에서 북한이 바닷속을 파헤친다는 소리와 한국 잠수함 의 어정쩡한 동태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고, 북으로 원앙을 구 출하러 갔을 때 원앙으로부터 굴착기에 핵을 장착한다는 정보를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진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했어. 그런 데 고베지진이 터지고 말았지." 주원이가 어이없다는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그래서 고베 지진이 북한에서 인위적으로 터트린 지진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기석이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진 모습으로 대답했다. "그것도 그렇고, 또 있어." 주원이 다시 물었다. "또 있다니?" "고베 지진이 터지기 며칠 전 사이판에서 이건이를 봤다." 주원이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채 말했다. "그 이야기는 나도 이건이에게 들었어. 기석이 네 놈도 마누라 둘 데리고 그곳에 신혼여행 갔었다면서?" "마누라 둘 데리고 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건이를 사 이판에서 만난 이야기를 하는거야. 바닷속 암석 분쇄기를 실험하 러 왔다고 했는데, 영 찜찜해. 이건이 같은 놈이 한참 바쁠 때 암석 분쇄기 하나 실험 하자고 잠수함을 타겠니?" 주원이 고개를 조금 갸웃거리자, 기석은 안주머니에서 열장 정 도의 메모지 묶음을 꺼내어 주원에게 보여 주었다. "이게 뭐야?" 고베지진이후, 지진에 관계된 미심쩍은 부분들을 수집하면서 기석이 그동안 정리한 자료들이었다. "천천히 읽어 봐라." 고개를 약 이십여분 동안 고개를 기울이고 메모 쪽지들에 골몰 하던 주원이 고개를 들었다. "그럼, 너는 고베지진에 안기부가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거니?" 기석이 아무말 없자, 주원이 다시 물었다. "이 자료 대로라면 안기부가 북한과 담합해서 일본 앞바다속에 핵을 터뜨렸고, 그 때문에 고베지진이 일어났다는 것인데... 이 자료들의 신빙성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니?" 기석이 풀었던 다리를 꼬고 앉으며 자세를 고쳐잡고 말했다. "안기부가 개입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건이 개입되어 있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자료는 80퍼 센트정도 믿을만 하다고 판단되고, 실행이전의 원인과 실행이후 드러난 결과와 목표분석은 그 이상이야. 또 지진발생 시점의 주 변 정황 역시 그래. 각 부분에 대한 신빙성을 모두 곱해보아도, 자연지진 보다는 폭발물에 의한 인위적인 지진일 가능성이 더 높 다." "흐음." 주원은 한숨을 깊숙히 내쉬었다. 주원의 낯빛도 기석못지 않게 굳어지고 있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기석과 주원은 담배 한 개비를 주고 받았다. 연기를 내뿜던 주원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찜찜한 점이 있긴 있네." 기석이 고개를 돌리며 주원을 쳐다보자, 주원이 말을 이었다. "얼마 전, 이건이가 어디론가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었어. 출 장 후에 그 자식을 만나러 방(이건의 오피스 텔)에 들려보니, 담 배를 한갑 주더라고. 그런데, 북한제 `대극장` 담배였어. 또, 같 이 퍼마신 술 역시 북한산 뱀술이었구. 최근에 북한에 들어갔다 온 것은 틀림없는 것 같아. 당시 경수로 문제로 좋지 않을 때라 서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따지고 묻지는 않았지." 기석의 얼굴이 더욱 딱딱해지고, 눈빛 역시 침중하게 가라앉았 다. 기석을 흘깃 돌아본 주원이 씁쓸한 목소리로 물었다. "만일 이건이가 고베 지진에 깊숙히 관계 되어 있다면 어떻게 하지?" 기석이 망설이지 않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다시는 그런 짓 못하게 해야지." "어떻게?" "사표쓰게 하고, 관계자들은 모두 세상에서 지워버려야 겠지." 주원이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건이가 순순히 사표낼 놈이니? 우리한테야 어리숙하게 대하 지만, 그 자식 안기부에 입부한 옹고집은 보통 유별난 것이 아니 잖아. 이런 짓을 했다면 어지간한 각오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놈 특유의 광기가 발동해서 투자도 엄청 많이하고 한 짓일텐 데, 어정쩡하게 물러 나려고 하겠어? 어림없는 소리지. 제기 랄......" 군시렁 거리는 주원의 음성을 끊으며 다부지게 말했다. "그래서 너하고 의논하는 거다. 나 혼자서는 그놈을 달랠 자신 이 없어. 네가 도와줘야 한다. 민족도 좋고 국가도 좋지만, 이런 짓까지 저지르면서 칼을 휘 두르는 것은 누구라도 용납할 수 없다. 아직 이건이가 한 짓이라 고 장담하기에는 이르지만, 만일 저질렀다면, 이건이에게 더이상 위험한 칼자루를 쥐고있게 할 수는 없다." 주원이 끼어들었다. "그래도 이건이에게는 안기부가 남다른 곳인데...... 사표를 내라고 하는 것은 손목을 자르는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걸. 내 생각으로는 그놈이 응할 것 같지가 않다." 기석이 고개를 떨구었다. 얼마 후,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가 기 석의 입술사이로 흘러나왔다. "어쨋든, 이건이가 수천명을 죽였다면 앞으로도 수천 명을 더 죽일 수도 있다. 그녀석 고집대로 살아가게 마냥 내버려 둘 수는 없어. 대량 살상을 해본 놈은 한번으로 그치는 경우가 거의 없잖 아. 필요에 의해서라면 반드시 또 저지르는 것이 그런 놈들의 생 리고, 철학이며, 나중에는 버릇까지 된다. 손목을 자르지 못한다면 목이라도 비틀어야 겠지. 분명한 것은 나도 그놈을 죽이고 싶지 않다. 너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물론이지." "너는 지금 이건이를 도울 것인지, 나를 도울 것인지, 택일해 야 해. 한가지 알아둘 것은 네가 이건이를 돕는다면 내가 죽거 나, 이건이가 죽는다. 너까지 이건이 쪽으로 붙어버리면 난 이건이를 설득할 자신이 도저히 없다. 따라서 이건이에 대한 설득을 포기한 내가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건이를 죽이는 것 뿐이다. 그렇게 되면 이건이 또한 날 죽이려고 하게 되겠고, 둘 중에 하나는 죽는다." 기석이 말을 끝내자 주원은 당혹한 표정이 되었다. "이건 완전히 협박이구만. 네가 이건이까지 죽이겠다고 다짐하 면서 이 일에서 빠지지 못하는 이유가 뭐야?" 기석이 대답했다. "수천 명이 죽었고, 수만명이 다쳤다. 게다가 이런 일이 인위 적으로 일어났다면 앞으로 또 일어날 수도 있다. 몰랐으면 모르 되 알았다면 그냥 지나칠 수 없고, 능력이 닿지 않는다면 모르되 닿을 수 있다면 반드시 거치고 지나가야 한다. 내 업무의 대부분은 남들 일에 끼어드는 일이다. 떳떳할 리 없 는 직업이지만 스스로에게 조금이라도 떳떳해지기 위해서라도, 말려야 한다고 판단했으면 말리고, 죽일 수 밖에 없다면 죽여야 하는 것이 바로 내 밑천이요, 천직이다." 주원이 맥없이 중얼거렸다. "이건이나 너나 똑같은 놈들이야. 안 쳐도 될 사고치는 놈이 나, 눈 감고 못 본척 하면 그만인 일에 억지로 끼어들려는 놈이 나, 내 눈에는 그놈이 그놈이다. 한탄스러운 점은 두놈 다 독한 놈들이라 말리지 못한다는 점이야. 결국 말리지 못하는 죄는 내 가 뒤집어써야 할 죄목인 것 같다." 주원이 잠시 말을 끊었다가 계속 이었다. "어쨋든, 할 수 없는 일이겠지. 일단은 기석이 너를 돕는 것이 우선일 것 같다. 너희들 중 누구도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 까. 이건이를 설득해보고 안되면 너를 설득하겠다." 기석이 입가에 엷은 미소가 감돌았다. "아직 이건이가 개입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아. 이제부터 네가 이건이 쪽을 더듬어 봐. 이건이에게 직접 물어보면 꼬투리가 될 만한 것들은 모조리 감출테니까, 성급하게 대들지 말구. 조심스 럽게 쑤셔 보아야 할꺼야. 함부로 의중을 떠보지는 마라. 아무래 도 너보다는 이건이가 눈치가 빠르잖아. 이건이가 개입했는지의 여부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이건이 외에 누가 또 개입 해있는지 그걸 알아내야 해." "알았다. 너는?" 기석이 대답했다. "나는 나대로 할 일이 있을꺼다." 주원과 헤어지자마자 집으로 돌아온 기석에게 윤희가 문을 열 어주며 반겼다. "일찍 오셨네요. 친구분하고 나가셔서 늦을 줄 알았어요." "윤희 얼굴이 어른거려서 커피 한 잔하고 `요이땅`해서 왔어." 윤희 뒤쪽에 있던 영옥이 입을 삐죽거렸다. "윤희만 보고 싶고 난 안 보고 싶었어요?" "응. 뭐 별로 보고싶지 않았어." 기석의 당돌한 반항에 영옥이 눈썹을 세우고 따졌다. "뭐예욧." 기석이 따지는 영옥의 옆을 스치며 엄지와 검지로 영옥의 앞가 슴을 콕 집으며 느물거렸다. "보고싶지 않은 대신에 만지고 싶더라구..." 영옥의 자존심을 세워준 기석이 소우퍼에 앉아 TV를 켜자 영옥 과 윤희가 따라와 앉았다. 6번에서 꺼벙하게 생긴 유부남 왕학포 가 대화명 `조디 카렌다`와 채팅(컴퓨터 대화)하고 있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유부남이 처녀 희롱하기 딱 좋은 컴퓨터 채팅이 었다. 윤희가 재잘거렸다. "저거 하면 재미있겠다. 오빠도 할 수 있어요?" "못해." "에이 내숭. 정말 못해요?" "응." "오빠 컴퓨터 칠줄 알잖아요?" "그래도 못해." "왜요?" "저거하면 전화세 엄청 깨져. 그래서 못해." "에잇. 해보긴 해봤지요?" "그냥. 아주 조금만 해봤어." "오늘 나 저거 가르쳐 줘요." 얼굴을 바싹 들이밀며 팔을 잡고 칭얼거리는 윤희였다. 영옥이 덩달아 부추겼다. "난 저거 할 줄 안다. 얼마나 재미있다구." 윤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영옥에게 물었다. "언니 해 봤어요?" "응." "오빠가 가르쳐 줬나요?" "아니. 대학 다닐 때 동생한테 배워서 조금 해봤어." 기석에게 눈길을 돌린 윤희가 다시 조르기 시작했다. "나도 빨리 가르쳐 줘요. 언니만 할 줄 알고 나만 모르면 불공 평 하잖아요." 성가시게 졸라대는 윤희가 약간 귀찮아진 기석이 한마디 했다. "저거 얼마나 나쁜거라구. 남편만 외출하면 유부녀들 바람피기 에 딱 좋은 것이 저건데, 미쳤다고 내가 저걸 가르쳐 주니? 안 돼. 테레비는 몰상식하게 저런 걸 방송하고 있어. 좀 고차원적으 로 컴퓨터로 소설을 본다거나, 아니면 소설을 써서 올린다거나 하는 걸 방송해야지. 에잉. 쯔쯔......" 가르쳐 줄 수도 있는 컴퓨터 채팅이었지만, 기석 자신이 컴퓨 터 대화방에서 무수한 아가씨들한테 사기치고 다닌 전과가 들통 날 수도 있는 문제이니만큼 기석은 버텨야 했다. "그리고 가르쳐 준다해도 처음 배우는 사람은 손가락이 느려서 한두 달 배워가지고는 어림도 없는거야. 일년은 붙어서 배워야 할걸."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초보자라도 일단 대화방 안에만 들 어가면 수 시간내로 저절로 배워지고 수 일내로 타자도 자연스럽 게 빨라지는 것이 컴퓨터 채팅이었다. 문제는 기석이 윤희에게 컴퓨터 통신을 가르쳐 줄 이유가 없다 는 점이었다. 사기친 여자들에게서 날라오는 전자메일(컴퓨터 상 에서 오가는 편지들.)들 중에는 지극히 야한 내용도 없지 않은 터라, 영옥과 윤희에게 들키면 눈가에 오선지가 그려줄 수도 있 는 문제였다. 또한 컴퓨터 통신이란 컴맹(컴퓨터를 배우지 않은 사람)에게 별것도 아닌 재주로 은근히 뻐기며 비밀스럽게 즐길 수 있는 놀이인 까닭에, 가까운 주위 사람에게 가르쳐 줄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일단 옆 사람이 배우면 별것 아닌 재주라는 것이 금방 노출되서 그동안 누려왔던 거만한 지위가 위태로와 질 수 있다. 따라서 더 이상 주위사람에게 우월감을 느끼며 키보드를 두드리기 어렵게 된다는 것도 컴퓨터 통신의 전파력을 떨어뜨리 는 한 요인이었다. 그런저런 요인들이 두루두루 널려 있는 탓에 기석은 그녀들이 컴퓨터통신을 하겠다는 것이 기꺼울 리 없었다. 산통을 깨는 것은 영옥이었다. "윤희, 네가 일주일 동안 설겆이 도맡아 해주면 내가 열흘안에 고수로 만들어 줄 수 있어." 기석이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영옥을 말렸다. "영옥아, 너는 하이텔에서만 해서 천리안은 잘 모를꺼야. 명령 어도 하이텔하고 다 틀려서 새로 배울려면 일년은 걸릴거야. 그 러니 포기해." 영옥이 기석을 무시하며 윤희에게 말했다. "천리안에도 `H`명령어(통신망 내부의 사용하는 공간 곳곳마다 `H`명령어가 있어 H 만 누르면 설명이 나와서 초보자라도 그자리 에서 이용가능하게 해준다.)는 있겠죠. 머. 윤희야 오빠말에 속지마. 빠르면 한 시간이면 마스터 할 수 있 는 것이 컴퓨터 채팅이란다. 오빠 조를 필요없고 나한테만 잘 보 여." "컴퓨터가 얼마나 어려운건데......" 기석이 여전히 끈덕지게 말려 보았지만 영옥에게 말을 잘리고 말았다. "어렵긴 뭐가 어려워요. 안 가르쳐 주려고 생떼 쓰는 것이 아 주 수상해요. 대화방 안에서 여기저기 총각행세 하고 있다는 거 모를줄 알아욧." 기석은 억울했지만 내뱉지는 못하고 속으로 읊조려야만 했다. `그럼, 내가 총각아닌가?` 기석은 자정이 넘을 때까지 윤희에게 기어이 채팅을 가르쳐 주 고 말았다. 기석의 아이디로 들락거리던 윤희는 대화방의 새 친구들에게 유부녀라고 소개하는 대신 아이디 주인과는 사촌지간일 뿐이라고 소개했다. 기석은 바람나는 유부녀들의 시발점은 앞으로 컴퓨터 채팅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었다. 기석은 불안한 두 아가씨들을 남겨둔 채 시골집에 내려가야 했 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 였다. 고즈녁한 밤하늘에 별들이 낮게 떠보이고, 축사에서는 간간히 소울음 소리도 들리는 그런 곳이었다. 할아버지 제사를 끝내고 새로 지은 양옥집을 빠져나온 아버지와 아들은 이슬이 서려 있는 풀밭을 가로질러, 19대째 내려오는 조선기와집의 툇마루에 걸터 앉았다. 밤바람이 시원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북한이 고베지진에 관여했다면, 그러려니 하면 될 것이지. 굳 이 북한에 들어가 확인할 특별한 이유가 있겠니?" 아들이 대답했다. "현 시점에서 민족주의는 어느 선까지는 확실히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민족을 위한다는 구실로 무 수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갈 권리는 어느 민족에게도 없읍니다. 타민족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빠진 발전은 그것이 발전처럼 보 일지라도, 주변으로부터 인정받기 어려운 성장일 것입니다. 더욱 이 상대방을 짓밟으며 뛰어오르는 식의 과분수적인 도약은 솟았 다가 곧장 추락해 버리는 몰락의 지름길이 되기 쉬워요. 결국 쌍 방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만 남기기 되고, 누적된 적대감으로 후대에게 편가르기식 원한만 물려주는 꼴이 될 것입니다. 설사, 우리 민족이 한(恨)을 품고 있는 일본일지라도 적보다는 친구로 만들어 나가며 따라잡아야 한다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민족주의를 위대한 것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위대 함에는 보편 타당한 절대성이 결여되어 있읍니다. 지나친 민족이기주의는 주변을 멍들게 하고, 종국에는 자신에 게도 화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이번 고베지진 에 대한 의구심을 그냥 지닌 채 흘려버릴 수는 없읍니다. 분명히 규명하겠읍니다." 아버지가 다시 물었다. "분명히 규명해서 어쩌려고? 고베 지진은 남, 북한이 공모한 짓이라고 일본 정부에 고해바치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아들이 대답했다. "그건 아닙니다. 고베지진으로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읍니다. 그 중에는 제 어린 아내의 부모님도 계셨읍니다. 저는 아내에게 백달러 짜리 청부를 받았고, 직업에 충실하려고 합니다. 물론 그 청부도 청부지만, 제가 이 일에 뛰어들 수 밖에 없는 것은 재발 가능성 때문입니다. 한번 맛본 희한한 고기 맛에 한번으로 멈추 기는 어려운 법이니까요. 수천명을 몰살시킨 관계자들에 대한 응 징은 응징인 동시에 재발에 대한 경고도 담겨있는 것이죠. 제 힘 이 닿는 한까지 저는 이 일에 매달리겠읍니다." 아버지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 내가 중동으로 갔던 것은 이쪽 일에는 개입하기 싫어서 였다. 세상 일들이 마음같지 않구나. 네 생각을 이야기 해보거 라." "일단 북한에 들어가 고베지진에 관련되었을만한 인물들을 추 적해 볼 생각입니다." 아버지가 다시 길게 숨을 내뿜었다. "후! 북한은 그리 녹녹한 곳이 아니다. 마음대로 쑤시고 다니 기에는 불편한 곳이지. 게다가, 넌 아직 북한 훈련을 받지 않았 다. 북한 쪽은 이 아비에게 맡기거라." 기석이 약간 난색을 표시했다. "이번 일로 아버님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들어 가겠읍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야. 이번 일에 관계된 북한내의 인물들을 조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때는 그곳의 공작부 요원이기도 했 었으니, 아직도 이 아비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을게다. 너보다 는 그곳에서 숨쉬기 편한 사람을 들여 보낼테니, 북한 쪽은 나에 게 맡기고 빠지거라." 아들은 굽히지 않고 당돌한 의지를 표명했다. "제 마누라 일도 개입되어 있으니, 반드시 제가 들어가서 일을 처리하겠읍니다." 아들의 고집을 아는 아버지인지라, 절충안을 제시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네가 그냥 들어가면, 낭비하는 시간이 많 을테니, 관계자들에 대한 조사자료를 준비해 주겠다. 자료들이 준비되면 보내줄테니, 그 다음에 네가 들어가서 일을 끝내거라." 아들이 대답했다. "그럼 그렇게 하겠읍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 너 혼자 그곳에 보내기에는 찜찜한 구 석이 약간 있으니, 북한 훈련을 거친 시니어 한명을 붙여 주겠 다. 아버지와 반평생을 같이 보낸 동료니까, 도움이 될꺼야." 아들은 아버지의 부정(父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고맙습니다." 튕마루 앞마당의 거무튀튀한 녹슨 펌프로 물을 뽑아 올렸다. 박을 갈라 만든 바가지에 한가득을 퍼담아 나누어 마신 아버지와 아들은, 불빛이 새어나오는 양옥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5) 컴퓨터... 시골에서 할아버지 제사를 치루고 서울로 돌아온 기석을 두 여 인은 반겨주지 않았다. 컴퓨터 채팅 때문이었다. 컴퓨터 앞에 달 라붙어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리며 희희덕 거리는 여편네들을 지 켜보며 기석은 혀를 끌끌차야 했다.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절간에 이가 남아나지 않는다더니... 이 년들아! 빨리 밥상차려. 배고파 죽겠어." "어머. 오빠 미안해요." 여인들은 사과를 하고 있었지만, 컴퓨터 앞을 벗어나지는 않았 다. 모니터 속에서 `꼬실테크`라는 대화명의 얼간이가 대화 대기 실에 머물고 있는 두 여인에게 대화방으로 초대하는 `메모`를 보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모:꼬실테크> 채팅 카사노바 꼬실테크 올시다. 한번 넘어와 주시면 성심 성의껏 꼬셔드리겠사오니... 메모:꼬실테크>부디 인연을 거부하지 마시고 야릇한 스릴의 세 계로 옥보(玉步)를 들여놓아 주시길..." "호호호! 이 인간 너무 웃긴다." 여편네들은 대화 대기실에 머무른채 계속적으로 전달 되어지는 `꼬실 테크`의 메모를 즐기고 있었다. "메모:꼬실테크> 긴긴 밤 잠 못이루고 연인을 기다리며 뒤척이 는 이 마음을 아시나요? 메모:꼬실테크>뜨겁게 타오르는 정열로 자제할 수 없는 젊은 육체는 이 밤도 가누기 어려운 한숨만 거칠게 토해내고 있읍니 다. 메모:꼬실테크>몽롱하게 감겨져 있는 눈 속에는 뽀드럽게 식혀 줄 여인의 손길도 가물거리지만, 저는 차마 눈을 뜨지 못합니다. 메모:꼬실테크>눈을 떠 버리면 빈 방의 캄캄한 어둠만이 뻔하 게 다가오는 현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당. 메모:꼬실테크>저물어 가는 숨결의 고요함이 왜 이다지도 막막 하기만 한 것인지... 메모: 꼬실테크>흑... 흑흑... 얼굴이 구겨지면서 눈물이 흐르 네요. 메모:꼬실테크>불러도 불러도 대답없는 사모님! 메모:꼬실테크>이 불쌍한 청춘을 위해 가정을 한번만 포기하시 고, 과감히 다가와 주시지 않겠읍니까?" 곧이어 꼬실테크의 초대문구가 모니터 상에 떳다. `#11번 방의 꼬실테크 회원님이 초대하였읍니다. 11번 방의 비 밀번호는 `인연`입니다.# "어머! 언니! 이 사람 정말 안돼 보인다. 꽃같은 마누라를 둘 씩이나 처 박아둔 채, 뻔뻔스럽게 외박하고 들어와 밥 달라고 큰 소리치는 인간도 있는데... 정말 안됐다. 그렇지, 언니?" 기석을 비아냥거리는 윤희에게 영옥도 한 술 더 보태주고 있었 다. "외박하고 들어와서 밥 달라고 보채는 인간은 콱콱 무시해 버 려도 되는거야. 불쌍한 꼬실테크에게나 가 보자. 윤희야, `j 11` 한다음 `인연` 누르고 초대에 응해 봐." "응. 아라써. 한번 넘어가 주지. 머~." 통신 카사노바, 꼬실 테크의 수작에 넘어가고 있는 여인네들을 말리지 못한 기석은, 어쩔 수 없이 혼자서 밥을 차려 먹어야 했 다. 기석이 밥을 다 먹고, 설겆이를 대충 끝내자, 그제서야 컴퓨터 앞에서 떨어져 나오는 여인들이었다. 담배를 꼬나물고 부글거리던 심정을 달랜 기석은, 두 여인과 긴 밤의 전투(?)를 호되게 치루며 또 한번 시달려야 했다. "헥헥!" 일대이의 전투를 치루고 곯아 떨어졌던 기석이 늦잠에서 깨어 났을 때, 두 여인은 이미 출근한 뒤였다. 여인들이 미리 차려놓은 아침을 먹고 설겆이를 끝낸 기석은 한 가한 오전을 컴퓨터 앞에서 보내기로 했다. 기석은 한동안 들리지 않았던 하이텔의 큰마을로 들어가 보았 다. 한통노사 분규에 대한 글들이 도배되어 올라오고 있었다. 14843 이진과 14844 정인화가 노조를 반박하는 글을 띄우자 노 조를 옹호하는 사람들에 의해 집단린치(?)를 당하고 있는 중이었 다. 큰마을 (PLAZA) 14937/17395 (총 6351건) 번호 이름 ID 날짜 조회 Pg 제목 14937 장종인 jang8 06/11 432 1 한통노조kttu개설할것. 14934 이준규 oilst 06/11 817 4 [한통]KTTU살릴수있다 14932 이경호 l1470 06/11 518 6 (한통)자율경영의원칙 14922 장영순 ohngb 06/11 235 3 이진님의억지에대해 14921 박연숙 chime 06/11 260 1 무식한이진님의.. 14920 성은주 EneRa 06/11 244 1 하하`이진`그놈웃기네 14915 장용준 ngbea 06/11 207 2 `정인화님`의궤변 14904 송재철 ng01 06/11 221 1"쌍소리"만`난무`하는군 14903 김상연 unkuy 06/11 255 1 이진님은신문사편집장? 14902 이득만 hulk 06/11 963 3 한통 사용자측의 망언. 14901 정승호 sh03 06/11 248 1 [충고]찐드기언론에게. 14900 손진관 5479S 06/11 263 7 인화의14844에대한비평 14899 강명철 nff 06/11 222 2 이진,정인화,나쁜놈! ................... ................... ................... 14887 이동주 hul 06/11 661 3 노조에대한 언론의기만 14886 유대영 007 06/11 235 1 정인화의 잘못된견해. 14885 변민재 ein 06/11 314 3 합법파업 본적 있는가? 14884 한종칠 a54 06/11 475 1 이진,정인화 너무한다. 14856 허성봉 chia 06/11 511 1 10년다녀도한달75만원? 14855 김경숙 n9559 06/11 288 5 노동탄압 기네스북에? 14854 이영희 down 06/11 353 1 한통:범법자라?이진놈! 14853 강민수 ks 06/11 365 2 이진놈의글에대한 비평 14844 정인화 d1 06/11 728 3 한통, 파업가능성있다. 14843 이진 sdfg 06/11 984 4 한통노조는 욕심쟁이 기석은 게속 키보드의 엔터(Enter)를 쳐내려가 보았지만, 밑에 도 역시 비슷한 양상이었다. 한통 노조 사태에 대한 지지글들로 대부분이 채워지다가, 어쩌다가 노조원들을 반박하는 글이 올라 오면 또 다시 우루루 몰려들어 집단 욕설과 비아냥 거리는 조소 로 노조에 대한 반박글을 올린 사람들을 묵사발 만들고 있었다. 기석은 큰마을 게시판에 올라온 제목들을 흠어내려갔다. 이번 에는 아래에 14579번의 <한국통신노조에게 경고함>이란 제목의 글을 올린 김지원이라는 사람이 몰매(?)를 맞고 있었다. 14635 장용준 gbea 06/11 541 3 김지원에게 엄중 경고. 14634 조철희 n87 06/11 321 3 [14579]김지원님아!봐라. 14633 탁정성 hoho 06/11 268 1 김지원님은뭘잘못했나? 14627 문호웅 TE 06/11 391 2 지원,너에게 경고하노니. 14622 윤영기 iGh 06/11 443 2 "김지원님" 화이팅 14618 정승현 h043 06/11 416 1 [한통]김지원,언제한번봐! 14617 김보진 idea 06/11 454 1 지원님에게엄중경고1 14603 이순옥 ris3 06/10 383 2 [To] 김지원에게보낸다. 14598 홍만중 p12 06/10 311 2 김지원님에게칼을던진다 14597 강영수 myw 06/10 273 2 감히,한통노조를 비판해? 14594 박민숙 hime 06/10 394 1 지원에게 감사를.정말? 14592 정진훈 siks 06/10 120 1 상호비방을 삼가하자.. ...................... ...................... ...................... 14586 김승진 HW 06/10 308 1 지원아 이젠 그만 쓰거라. 14582 박종국 m2 06/10 477 1 똥오줌못가리는 지원에게. ...................... 14579 김지원 colm 06/10 907 4 <한국통신노조에게경고함> 기석은 한동안 더 지켜 보았지만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 다. 기석은 자신의 글을 올리기로 했다. 이전에 후배 김유재의 아이디로 들어가 <안기부> 문제로 한바탕 일전(?)을 치룬 적이 있는 기석인지라, 반정부적인 글을 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과거 의 행적(?)때문에 공격당할 수도 있있다. 그래서 기석은 새 아이 디로 과거를 감춘채 글을 올리기로 했다. 새 아이디는 권영자란 아주머니의 아이디였다. 권영자 아주머 니는 기석의 동네에 살고있는 아주머니였지만, 서로 말을 건넨 적도 없는 중년부인이었다. 기석이 권영자 아주머니의 아이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 들렸던 조흥은행에서 돈을 찾고 있 던 권영자 아줌마의 통장번호와 주민등록 번호를 암기했던 까닭 이다. 동네 아주머니였던 터라, 주소와 집 전화번호도 역시 쉽게 알 수 있었다. 권영자 아주머니의 이름을 빌어 하이텔 신규 아이디 신청란에 아주머니의 성명, 주소, 전화번호 등을 기입하고, 자동이체 납부 란을 선택해 영자 아주머니의 통장번호를 기입했다. 그러자 즉시 사용 가능한 아이디가 또 하나 생겼다. 물론 들통날 때까지 밖에 사용할 수 없겠지만, 기석의 집에 설치된 전화선 바이패스 기능 (전화선 사용시 사용장소를 다른 곳으로 돌려 버리는 장치)은 뒷 탈을 만들 가능성을 제로화 시켜주고 있는 터라, 안심하고 사용 할만 했다. 기석은 글을 작성해서 올렸다. 큰마을 (PLAZA) 제목 : 지원님 글을 읽고 한통노조 분들에게... #15123/17185 보낸이:권영자 (jindal3 ) 조회:881 우선 에디터로 올리는 글이기에 깊은 사고와 심도있는 논리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지 못함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이곳 게시판의 글들을 꾸준히 읽어 온 사람입니다. 김지원 님의 글이 물론 완벽한 사실일 수는 없을 것이고, 한통 노조에 대한 빈틈없는 충고라고 생각되어지지는 않습니다. 김지원 님은 일단(추측이지만) 한통노조분은 아닐 것이라고 생 각되고 따라서 현 한통사태에 노조에 깊숙히 관계된 분들만큼 사 정에 밝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가 김지원 님의 글들 중에서 관여하고 싶은 부분이 있고, 또 그동안 큰마을 게시판을 읽어오며 느낀 공감대 가 있어서 돌팔매질을 당할 것을 무릎쓰고 몇자 적습니다. 우선 김진호 님이 올리신 글들중에서 저와 생각이 아주 비슷한 부분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합니다. 이곳이 한통노조나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게 점거되어 있다는 인상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컴퓨터 통신망 어느 곳에서도 이곳처럼 한통관련이나 대정부 욕설로 일관 되어 지는 곳은 이곳 외에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또한 생각이 다른 사 람의 글이 올라올경우, 치사하다고 여겨질만큼 인신공격적인 야 비한 발언들에는 생각의 차이를 떠나서 심각한 적의까지 느껴지 더군요. 한통노조나 특별한 정치색을 띤(제 추측입니다) 듯한 이 곳의 글들에 심한 반발감이 느껴지는 것은, 현재의 노조사태보다 도 오히려 이러한 유별난 대응방식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마치 아마추어 선동가들이 무지한(여기서의 무지란 한 통이나 정치권에 별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사람들에 게 강제적이고 과시적인 윽박과 자화자찬식(이를테면 전 노동자 들은 다 내 편이고, 내 말이 곧 이나라 전체의 노동자들의 의사 인 듯한)의 해설로 자신의 주장만이 절대의 진리요, 생명이라고 주입시키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읍니다. 기실, 진리란 그렇게 흔하게 떠벌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잠시 진리라고 생각했던것도 지나고 나면 진 리가 아니었구나 하고 느꼈던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한번도 없 었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성인이거나 자기 만족에 빠진 돈 사람 이겠지요.) 그런 미확정 논리로 사람을 인신공격하는 것은 논리의 옳고 그 름을 떠나서 치사하고 야비한 짓입니다. 한통노조가 어떤 입장이든지간에 이 게시판에 올라온 짓꺼리는 노조 스스로의 얼굴에 똥칠을 하고 있는 짓이란 것을 분명히 아 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느끼지 못하는 집단이라면 당신들은 풋나기들이고, 그 런 풋나기들의 주장을 깊이있게 관심을 기울이며 사고해 볼 가치 는 없는 것이겠지요. 컴퓨터 통신망 어느 곳에서도 이렇게 일관된 주제가 무식하게 쏟아져 올라오 는 곳은 없을 것입니다. 좀 더 자중하시고 자신들 의 주장과 다르더라도 집단 린치식의 대응은 스스로들 자제해 주 시길 바랍니다. 솔직히 이곳에 올라와 있는 글들만으로 판단하건 대, 제 생각은 이곳 큰마을이 특정한 정치적 색채를 띤 사람들의 고약한 짓으로 오염되어 있다고 여겨지고 있어요. 다수처럼 보여지기 위한 소수의 발악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min어쩌고 하는 아이디의 주인이 처음 올린 글에서는 (편지 형식 이었어요) 마치 휴전선에서 대남 방송하고 있는 북한 여자 아나 운서의 간드러진 교성을 느꼈다면 제 지나친 착각일까요? 이번에 올린 제 글에도 격앙된 감정이 담겨져 있는 듯해서 미 안합니다. 다음에 올릴 때는 좀 더 신중하게 올려 보도록 하겠읍 니다. 추신: 한통노조나 소외된 분들이 대다수 매스컴에 떠밀려 와 떠들곳이 마땅치 않은 까닭에 이곳 큰마을 게시판을 점거해 보고 자 하는 듯한 애처로움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방법이 틀렸기에 지적해 주려는 의도도 있었읍니다 . 저는 `건`이라고 합니다. . 안녕히... 기석이 올린 글은 반정부적인 색채를 띈 사람들의 집단 반발력 을 고려해서 올린 글이니만큼, 반응들이 곧장 올라오기 시작했 다. 기석은 욕설이 난무하는 제목들중에 엉뚱한 제목이 있어 선 택해 읽었다. 김홍길이란 사람이 <`건`님에게 사과합니다>라는 의외의 제목으로 글을 올려 주었다. 큰마을 (PLAZA) 제목 : [한통] `건`님에게 사과합니다.... #15359/17395 보낸이:김홍길 (DSANY) 조회:922 `건`님 보세요. 한국통신노조가 물론 전체 노동자들을 대표할 수는 없는 것이 겠지만, 그렇다고 6만 한통노조원을 싸잡아 공격하시는 `건`님의 글에 치밀어 오는 분노를 가눌 길 없네요. 한통 노동자들과 그 가족 수십만의 가슴을 할퀴고자 하는 `건` 님의 잘난 글에서 설마 우리가 사과를 느낄 줄 알고 이 글을 보 시고 계시지는 않겠지요. 저는 `건`님에게 사과대신, 시대에 반 역하는 글을 올리신 건님의 오만한 글을 용서나 해줄까 해서 이 글을 올렸읍니다. 약 올리는 글로나마 용서를 해드릴 테니까, 더 이상 까불지 마세요. 생계의 위협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 노조원들의 곤궁 한 심정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일인 줄은 압니다. 그래서, 우 린 스스로 뭉치는 것입니다. 남들 다 굴리는 자가용은 관두더라도, 비좁은 월세방, 허름한 달동네, 어둠침침한 골목집에서 가족들을 벗어나게 하고픈 그 심 정을 모르시나요? 건님, 모르면 잠자코나 계시지. 건님, 슬픈 개구리에게 돌을 던지지 마셔야지. 건님, 무슨 심통으로 우리 연약한 노조원들을 이곳에서조차 몰 아내시려 하는 것인지? 건님, 정부기관의 끄나플이라도 되시는 모양이신데, 더 이상 초싹거리지 마시고 지구를 떠나주시면 고맙겠쓰으. 6만 한국통신 노동자 여러분! 느끼한 프락치들의 수작에 현혹되지 마시고 우리모두 똘똘 뭉 쳐 8만원 인상을 `학실하게` 관철 시킵시다. 여러분의 돌돌뭉친 함성이 내 가족을 지키고, 이 민족을 진정 한 민주사회로 인도하는 초석이 될 것입니다. 가진 자의 배부른 욕심은 매번 채워지는데,, 없는 자의 소박한 소망은 언제까지 부서지기만 해야 하는 것일 까요? 겉 희고 속 검은 불의의 앞잡이이신 `건`님, 정의를 부르짖는 우리 노조원들의 울부짖음이 들리지 않습니 까? 굶주리고 배가 고파 울고 있는 우리의 아이들이 보이지 않습 니까? 남의 생존권 투쟁이니, 그냥 남의 일인가요? 아마도 `건`님은 배부른 자들이 흘려준 떡고물에 배는 주리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지만, 떡고물이 마름하는 날, 우리의 입장이 되어 보세요. 그러면, 그 때는 세상 돌아가는 진실을 알 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가만히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싸움을 걸었나요? 우 리의 행진에 쓸데없이 끼어들어 `감놔라 콩놔라`떠드는 몰상식한 인간들에게 젊잖은 충고 몇 마디를 해주었을 뿐인데... `건`님 께서는 하루빨리 무지한 한계의 그늘에서 벗어 나셔서 이 땅의 노동자들과 호흡을 나누게 되기를 바랍니다. 노조원 여러분 `건`과 같이 진실에 동참하지 못하는 비겁자들 을 그냥 용서해 줍시다. 철들 날이 있겠지요. 한국통신 조합원 여러분! 하루 빨리 이 강산에 노동자들의 정의를 구현시킬 수 있도록 우리모두 인내와 끈기로 성실하고 알차게 투쟁해 나갑시다. 모두 힘 내시고... 소박한 소망을 꿈꾸는 김홍길... 기석은 기만당한 심정으로 즉석에서 김홍길에게 한마디의 답장 을 올려 주었다. 물론 `건`이라는 가명을 사용했고, 아이디 또한 구너영자 아주머니의 아이디였다. 큰마을 (PLAZA) 제목 : 밑에 김홍길씨 보세요. #15366/17395 보낸이:권영자 (jindal3 ) 조회:373 제목은 사과한다고 적어놓고 글 내용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 람들을 용서해 주자고 써 놓고 있읍니다. 그런 글은 누가 보아도 기만 입니다. 왜 그렇게 글을 쓰세요. 글내용에 불의며 정의며 늘어 놓는 것과 김홍길 씨의 기만과는 상반되는 것입니다. 그건 김홍길 씨 자신 뿐만 아니라 한통에 관련된 사람들 모두 에게 기만의 누를 끼칠 수 있는 짓입니다. 그리고 노조원 6만, 등등을 언급하며 한통에서 일하고 있는 사 람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도 현재 이 란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먹혀들지 않을 것입니다. 어쨋든, 한통은 이 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대 우가 나쁜 곳은 아니니까요. 정년 퇴직할 때, 퇴직금 1억 8천 챙 길 수 있는 회사가 어디 그렇게 흔한가요? 좀 더 진지해져 보시고 침착하게 대응하세요. 밑의 김홍길 씨의 글은 한통노조의 삼십만 가족에게 별로 도움 이 되지 못할 그런 글이에요. 곪은 곳에 메스를 대주니까 아프다 고 칭얼대며 생각없이 뒤트는 어린 아이의 몸짓같은 글입니다. 자중하시고 가벼운 글이라면 글이라면 모를까, 에민하고 첨예 하게 다루어질 글이라면 좀 더 깊이 생각해보시고 글을 올려 주 세요. 건. 김홍길과의 말싸움을 끝낸 기석은 또 다른 글을 찾아 읽었다. <정부의 끄나플은 이곳에서 나가라>라는 제목으로 조정훈이라는 사람이 올려준 글이었다. 조정훈외에도 이곳에서는 <정부 프락치 XXX>`, `<건=안기부원?>`, `<물을 흐리는 끄나플들>`등등의 제목 이 적지 않았다. 이곳에 보수적인 글을 올렸던 사람이면, 대부분 정부 기관원으로 몰리곤 했다. 이전에 기석의 <소설, 안전기획 부>에 관련된 글에서 큰마을 게시판의 몇몇 반정부 견해를 가진 사용자들이 농락(?)당했던 고거 때문인지, 아닌지는 장담하기 어 렵지만, 대체로 이들은 안기부원으로 몰리는 경우가 많았다. >> 1539 79 큰마을 (PLAZA) 제목 : 정부의 끄나플은 이곳에서 나가라 #15379/17395 보낸이:조정훈 (lcom) 조회:569 1/2 언제부터인가 큰마을 게시판에 정부의 프락치 끄나풀들이 초를 치고 있다. 선거를 앞두고 이곳에서 여론을 흐리고 있는 자들이 단순한 선거 운동원같지는 않다. 나는 이들이 안기부원 내지는 그의 똘마니들이라고 의심하지 않을수 없다. 이들은 슬며시 나타나 쏜살같이 여러 개의 게시물을 올린다. 내용은 대부분 진실을 외면하고 정부측 변명만 실컷 늘어 놓다 가, 진실을 부르짖는 사람들을 공박하는 것이다. 또한 글의 지적 수준을 살펴보면, 일반인들이 따라잡기에 만만치 않은 꽤나 고급 스런(?)표현으로 치장되어 있다. 정상적인 직장인이라면 시간상 이런 여러 개의 글을 동시 다발 적으로 올리기는 힘들다. 게다가 이들은 대체로 정체가 불분명하다. 나는 이 프락치들에게 경고한다. 어서 이곳에서 꺼져달라고. 만약 네놈들이 정부나 여권의 사주를 받은 안기부 프락치가 아 니걸랑 나처럼 떳떳하게 신분을 밝혀달라... 어찌하여 네놈들은 대가리를 움추린 채 세상을 비굴하게 좀먹 고 사는고? 은평구 대천동 진흥정보산업 대표 조정훈 기석이 안기부원으로 오인받는 글을 접할 수 있는 것은 큰마을 게시판 뿐만이 아니었다. 전자메일을 통해서도 안기부원이 되어 가고 있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권영자 아주머니의 아이디로 기석이 올렸던 첫번째 글에서 기 석은 inher 이란 아이디의 주인이 게시판에 첫번째 올린 글을 지 칭해서, `휴전선에서 대남 방송하고 있는 북한 여자 아나운서의 교성처럼 느껴진다.`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그 아이디의 주인에게서 기석은 전자메일을 받았다. 편지 보관함 (MBOX) <답장요망> 발신일시 : 95/06/07 00:14 발 신 인 : 진혜경 (inher) 수신/참조: <답장요망> 제목 : ['건'님께] 북한 여자 아나운서가 아닌 대한민국 여대 생 jinher 입니다. 건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개인적으로 메일을 드리는 것은 건님의 글을 읽어보고, 저에 대해서 오해하시는 부분이 많으시는 것 같아서 기냥 드리는 겁니다. 우선, 저는 여대생이며 지금 개인적 사정으로 휴학상태에 있어 요. 학교 다닐 때는 여러 선배님을 쫓아 다니며 집회에도 나가고 노동상담소에서 잡일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사회과학 세미 나도 받았지요. 하지만 결코 사상이 의심스러운 빨갱이는 아닙니 다. 후후..제 편지에서 북한 대남방송의 간드러진 여자의 교성을 느꼈다고 하셨는데요. (이때 전 웃음을 참지 못하였습니다. 하 하) 음..제 편지에 감상적인 냄새가 풍겼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전,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학생도 아니고 순수 문학을 전공하고 있고, 고등학교때부터 감상적인 글솜씨라는 비평을 많이 받았습 니다. 그러나, 제가 한통 노조원들에게 다소 여린 문체로 격려한 것 을 배제시키고 읽어 주신다면, 제 글에 담긴 새로운 진의(眞意) 를 파악하실 줄 믿습니다.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막상 실천하지 못하는, 친한 후배 나 선배들, 또는 현재 운동하시며 고생하시는 분들 앞에 당당히 나서지 못하는 제 자신의 초라함들이 담겨져 있을 거여요. (아닌 가요..하하) 제가 그 글을 쓰게 된 이유는 (편지 '형식'이라고 하셨지만) 정말 한통인들에게 대다수 시민들의 반응을 알려드리기 위해서 였습니다. 제가 과거 집회에 나갈때, 시위대를 쳐다보는 시민들의 눈이 너무 차갑다라는 생각에 위축이 많이 되었던 것을 생각하고, 이 번 한통 노조 사태에 대하여 노조원들에게 한 시민으로서 격려해 주고 싶었어요. 또한 아직도 운동의 지지기반은 얼마든지 있는데, 단지 지쳐버 린 것은 바로 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부끄러운 마음에 한통인들에게 플라자 란을 빌어서 성심성의껏 편지를 쓴 겁니다. 그러나 정인화님에 대한 제 비판이 너무 원색적이었다는 것은, 역시 인정합니다. 제가 그런 원색적인 비난을 인화님에게 퍼부운 것은, 통신하는 제 주변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본 결과, 정인화님 은 프락치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고, 분을 참지못해 두번에 걸쳐 원색적인 비판을 해댄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정인 화님이 무얼 하는 분일까 궁금해서 고등학 생이니 모니 마구 말을 한 거구요. 작년인가, 제가 작년 여름에 정말 안기부 가공 인물에게 호되게 당한 일이 있었거든요. 흐 흐..^^; 그런데 억울한 건 오늘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 플라 자를 보니, 저에 대한 비판은 올라와 있는데, 정작 정인화 님은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또다른 복창 두드리는 말씀을 올리셨더 군요. 전 오늘 내내 내가 경솔했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본 순간... 정말 다시 의심이 가는 것은 어쩔수가 없네요. 후후. (왠 의심병. 중국집 이층에서 살았냐구요? 으읔.) 에구..수다가 또 길어졌습니다. 아까운 시간 뺏어서 죄송하구 요, 건님, 다른 의견은 동감하는데 저에 대해 오해하시는 것 같 아 찜찜해서. 이렇게 몇자 올리는 겁니다. 그리구, 솔직히 말하자면, `건`님이야말로 `절 북한 여자 아나 운서로 보시는 진짜 안기부원`처럼 느껴졌어요. 하지만, 어쩐지 `건`님의 글에서는 안기부원의 이미지와는 약간 색다른 믿음같은 것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겁나지만 솔직하게 글을 드리고 있어 요. 이만 쓸래요. 안녕. <<혜경 드림>> 기석은 안기부의 국내 담당국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었지 만, 이건을 통해 어느정도 안기부의 형편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 다. 안기부원들은 자신에게 할당된 임무에 주력하는 편이어서, 이런 게시판에 나와 사람들을 겁주는 짓 따위는 좀처럼 하지 않 았다. 현재의 플라자 게시판에 사람들이 적지않게 오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정도 규모의 언론에 안기부가 신경 쓸 겨를은 없 을 것이다. 기석은 사람들이 종종 안기부원으로 오인하는 사람들의 글도 찾아 읽었지만, 안기부원이 언론조종을 위해 개입한 글이라고 보 기에는 어색한 점들이 너무 많았다. 또한 왕왕 정부의 험담을 늘어놓던 사람이, 안기부원이라고 사 칭한 사람으로부터 욕설을 담은 협박성 전자메일을 받았다고 글 을 올려 놓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우도 안기부원이 저질렀을 가능성은 없었다. 이유는, 안기부가 개입한다면 굳이 그런 편지 를 보내지 않아도, 훨씬 더 깔끔한 방법으로 게시판을 조절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석은 안기부식 본보기가 될 만한 글을 올림으로써, 사람들의 안기부에 대한 오해를 풀어줌과 동시에, 이곳의 사용자가 안기부 를 사칭한 사람들의 분별없는 협박성 전자메일이나 전화질로, 기 죽지 않도록, 적당한 글을 작성해 올렸다. 큰마을 (PLAZA) 제목 : 프락치 운운 하시는 분들에게... #15528/17395 보낸이:권정자 (jindal3 ) 조회:350 프락치 운운 하시는 분들께... 아래 글들의 제목을 쭈욱 한번 흠어 보세요. 반정부적인 입장 의 글들과 정부 옹호적인 입장의 글들이 10대 1은 넘어 보이네 요. 이런 비율이 일반 대중의 의식에 대한 비율이라면 이곳에서 반정부적인 입장을 드러내시고 계신 분들은 벌써 정부가 되어 있 었어야 할 것입니다. 왜들 그렇게 답답하십니까? 여러분들이 글을 올리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글 한번 올리면 `와아`하고 몰려 들어서 여러분들을 지지해 주는 사람들 때문입 니까? 그런 분들은 여러분들의 글이 아니더라도 여러분들 편입니 다. 그것도 아니면 여러분의 글에 응수하고 있는 사람들을 공격 해서 그들의 언짢아진 마음에 쾌재를 부르며 자기만족에 빠져들 기 위해서 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렵게 글을 써 올리는 목적은 아마도 이곳에 글을 읽기 위해 오가는 순수한 독자들(예를들면 글싸움에 끼어들 여력 이 남아돌지 않는 제 할일에 바쁜 분들)을 여러분의 의식구조대 로 설득하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통신망상의 독자들의 심리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들은 절대다수처럼 보여지거나, 쓸데없는 억측으로 상대방을 비하하는 그런 집단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현재 올라오고 있는 반정부적인 입장의 글들은 스스 로 제 살을 깍아먹고 있는 글들로 밖에 여겨지지 않아요. 너무 지나치게 경직된 의식구조로 사람들을 몰아 부치고 있고, 또 너 무 미련하게 왕창 올라오고 있어요. 10대 1로, 1을 공격하는 미련함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길 바랍니 다. 그렇게 기형적으로 다수처럼 보여지길 원하시는 이유가 무엇 입니까? 그런 다수라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차분한 논리로 상대 방을 설득해도 충분할텐데, `근거없는 추측으로 일관된 프락치 운운`으로 상대방을 비하실 필요가 있읍니까? 여러분들 중에는 정치집단에 관계되었거나, 특정의 매체에 관 계 되어진 사람이 한사람도 없나요? 10대1이란 비민주적인 비율이 이곳을 오가는 독자들에게 어떤 대답을 해줄 것 같습니까? 그리고 아래 글들을 보면 툭하면 안기부 프락치 어쩌니 하시는 데, 안기부원은 이나라 국민이 아닌가요? 자신의 생각을 이런데 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까? 저도 정인화 씨를 비롯한 몇몇 분들이 정부를 옹호하는 글들을 읽어 보았읍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글에서 안기부 냄새가 풍기지 는 않아요. 안기부적인 글이라고 보여지기에는 너무 드러나 보이 고 직접적이며 솔직한 글들이거든요. 이렇게 글을 써놓고 보니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저 또한 안기부 원이라고 몰릴 가능성이 농후하군요. 저는 미리 말해두지만 안기 부원이 아닙니다. 하지만 믿어달라고 부탁하지는 않겠읍니다. 믿 지 못하시겠다면 믿지 마세요. 믿지 못하시는 분들에게만 제가 안기부원이 되어 드리죠. 저는 안기부원이고 이곳에서 글을 올리 겠읍니다. 어쩌시겠읍니까? 이제는 유치한 글장난에서 하루빨리 벗어 나시고 상대에게 친 절하고 정직한 마음을 담아서 설득하는 글들을 올려 주세요. 그 것이 여러분들은 물론 여러분들의 의도를 돕는 글이 될 것입니 다. 한예로 조선일보를 가끔 욕하시던데 그런 욕이 여러분들의 추 구하는 목적에 도움이 되실 것이라고 여겨지십니까? 그런 욕을 읽는 조선일보 기자가 `아하 내가 정말 좋지않은 기사를 썼구 나.`하고 느끼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정도로 밖에 생각하 지 못하는 여러분이라면, 여러분은 영원한 패배자로서 남은채, 이승을 하직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욕하지 마시고 설득하는 글을 쓰세요. 진지하고 겸손한 표현으 로 어려운 입장의 사람들에 대한 양해를 구하는 그런 글들을 조 선일보 기자들에게 보여주세요. 메마르고 구하기 어려운 몽상보 다는 현실적이고 인간애가 담겨있는 그런 글이라면 조선일보 기 자들의 마음을 여러분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을 것입 니다. 선전 선동처럼 보여지기나 하는 유치한 글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리고 비슷한 글이 올라와 있으면 반복해서 올리 지 마시고, 좋은 글이라고 판단되는 글이라도 중복되어진 내용들 을 무더기로 추천하는 식의 미련함도 그만 노출시키시고요. 그리고 장난스럽고 상대방을 깔보는 듯한 표현도 대중의 눈살 을 찌푸리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한번 더 간곡히 부탁하지만, 확인되기 전까지는 근거없는 추측 으로 상대방을 공격하지 마세요. 그런 수법은 소기의 성취를 달 성했다 하더라도 더러운 성취고, 잘못하면 더러운 패배자로 전락 하기 쉬운 위험한 짓이에요. 여러분들의 목적이 어떻든 간에 잔잔하고 밀도있는 그런 글만 이 여러분들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p.s) 우러 나오는 진심으로 정직하게 한 마디만 덧 붙이겠읍니 다. 저는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보다는 적은 것을 소유한 사람의 편입니다. 하지만 많고 적음 보다는 옳고 그른 것을 더 추구하고 싶고, 옳고 그른 것 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더 편안하고 행복하 게 인도해 줄 수 있는 사회구현을 위해, 한 줌의모래라도 되고자 하는 것이 제 바램입니다.(믿거나 말거나) 건... 글을 써서 큰마을에 올려놓고 보니, 기석이 느끼는 얼마간의 짜증까지 담긴 글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새로 올라오는 글들의 제목은 전혀 달라진 기미가 없었다. 기석은 자신의 효과 없는 글 을 지울까 하다가, 그냥 두기로 했다. <소설, 안전기획부(13)> 새로 올라오는 글들 역시 편싸움에 연연하는 글에 가까왔다. 보수적인 사람이 글을 올리면 진보적인 사람들이 달려들어 공격 하고, 조선일보를 욕하면 한겨레를 욕하는 그런 설전이 이어져 갔다. 다만 한통 사태 이후, 조계종과 명동 성당에 공권력이 투 입된 뒤여서인지, 종교계의 반발을 부추기는 글들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또한 선거를 앞두고 세인의 이목을 자극시키려는 무리들 도 언뜻언뜻 비치고는 했다. 기석은 글들의 제목을 쭈욱 흠어 내려가며 글들을 뽑아 읽다가 다시 제목만 흠어 보다가 하는 짓을 반복했다. 큰마을 (PLAZA) 13187/17402 (총 6358건) 번호 이름 ID 날짜 조회 Pg 제목 13172 최현주 IHJ3 06/07 283 2 이승호님은 일방적인 시각? 13168 정선훈 iks 06/07 361 4 여러분 한겨레를 보세요. 13159 김성환 ncha 06/07 526 8 이승호님께 충고 한마디! 13152 이영철 am32 06/07 439 2 [이승호님께 무관심을!!!] 13139 김덕래 TnHo 06/07 515 1 조선일보 보기싫다. 13138 오정숙 ddtnr 06/07 550 1 이승호님의 글을 읽고 13134 윤영태 lht 06/07 1266 5 언론의 수치! 조선일보. 13129 윤영태 kyl 06/07 742 4 [연대]조계종총무원 경찰난입규탄 13115 이승호 sanb 06/07 1939 4 한통 노조에 충고 한마디(5) 14899 강영철 an 06/11 222 2 [이진, 정인화님] 내 말 좀 들어보소? 14888 조원배 b85 06/11 245 9 조선일보는 각성하라. 14886 유대홍 dh 06/11 235 1 <>정인화(bp) 잘못된 견해의 실상 14884 한상칠 ha114 06/11 475 1 [한통]이진,정인화 너무하는군 14877 유병남 Y30 06/11 371 3 [14846]추기경님 강론비판의 오류 14875 이용진 dfhJ 06/11 469 1 여기는 명동 성당입니다. 강론 추신 14874 김삼종 jksj 06/11 296 3 14861이진님께 14873 이용진 Cwe 06/11 476 6 여기는 명동성당입니다. 강론3 14872 이용진 Cwe 06/11 453 4 여기는 명동성당입니다.-강론2 14870 이용진 Cwe 06/11 573 4 여기는 명동성당입니다-추기경님 미사 15410 장재혁 chew1 06/13 412 2 시국미사 및 시국법회 15408 고진숙 kong 06/13 989 7 안기부서 '나온' 아줌마 94번째 이야기! 15396 김민근 ie 06/13 563 6 민주당 기관지 한겨레. 15385 안정희 hyn 06/13 568 4 [성서유린에 대한 향린교회 성명] 15382 박정철 hal 06/13 579 12 [반박 3]이승호님의 지겨운 '충고'에 대해 15381 장우익 jai 06/13 498 2 그래도 난 조선일보를 본다. 15380 이정한 waxax 06/13 760 2 [지지] 한통노조 지지 운동 우리도 합시다 15374 김성진 eung1 06/13 353 1 [한통]이 땅의 민족지 한겨레를 봅시다. 15368 최영란 48et 06/13 264 1 경찰력 투입은 성당건립 97년만에 처음. 15364 오은경 win 06/13 896 1 kttu 동지들에게.. 15362 정인화 bpd 06/13 205 2 세상에서 가장 빈곤한 사람들(아귀자포만) 15361 김성재 bukj 06/13 385 2 이승호님(sanbon1)에 대한 충고 한마디(1) 15359 김옥렬 ANN 06/13 923 3 [한통] 민자당 기관지 조선일보. 15351 강은성 kesul 06/13 397 1 [명동]향린청년들은 시국미사에 갑니다. 15350 권정자 j3 06/13 880 4 이승호님의글을읽고,한통노조분들에게. 15347 최영란 asd 06/13 267 1 못가진 자는 모두 죄인이다. 15310 이승호 ernb 06/13 1834 8 한통노조에 보내는 충고.. 제목에서 욕설이라도 사라진 점이 눈을 덜 피곤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기석은 조계종과 명동 성당에 대한 공권력 투입이후, 종교계의 대정부 사 과 요구가 지나치게 거칠게 표현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명동 성당 의 요구는 더 이상 글을 올리지 않으려는 기석을 기어코 자극하고 말았다. 아마도 종교에 대해 다소 냉소적인 입장을 갖고 있던 기석인지라, 마음을 바 꾼 것 같았다. 지치지도 않는 편가르식 설전(舌戰)으로 큰마을 게시판이 오 염되어 가는 생각도 한몫을 거들었던 것 같다. 시사를 논하는 장소이긴 했지만, 자신들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기 주의적인 발언들이 도를 지나치고 있었다. 가장 공정해야 할 언론 매체까지, 여당신문, 야당신문으로 편가르기식 보도를 하고 있는 행태에서 기석은 조그 만 분노마저 느껴지기 시작했다. 기석은 읽던 글을 멈추고,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글을 올리기로 마음을 굳 혔다. 기석은 <영리한 사람들만 보세요>란 제목을 붙혀 놓고, 큰마을에 올리 는 마지막 글을 작성해 갔다. <영리한 사람들만 보세요.> - 민주주의 원리 중에 굵직한 것을 들라면 견제와 균형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틀 안에서 솟아나는 조절기능이야말로 민주사회를 이룩하는 데 초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신문은 여당 할렐루야지, 저 신문은 전라도 신문, 이런 매스컴들이 세 상의 시시비비에 관해 제 입장대로만 떠들 때, 상대방은 물론 제 삼자의 눈 에도 탐탁하게 비춰지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특정 종교 집단이 자신의 울타리에 관해 성역운운 하는 것, 역 시, 그 종교와 무관한 사람들에게는 좋지않게 들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공권력 투입으로 자존심이 상한 종교집단이 비난 성명을 내면서, 지난날의 업적(?)을 들먹이며 대정부 비난의 강도를 높였읍니다. 스스로 약한자를 대변한다는 성자의 모습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런 종 교와 무관한 제 입장에서는, 상처받은 자존심의 회복이라든지, 현 사회에서 의 영향력 보강이라든지, 하는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욕심, 역시 성자의 모습 속에 감춰져 있다고 여겨집니다. 언제나 자신은 선(善)이라고 주장하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집단은 무조건 악(惡)이라고 합니다. 선(善)이란 것은 스스로 선(善)이라고 말해서 선(善) 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그렇게 인정해줄 때 비로서 선(善)인 것입니 다. 또, 한번 선(善)했다고 해서 언제나 선(善)도 아닌 것입니다. 종교가 사실 그동안 공산주의와 맞서는데 커다란 역할을 해왔던 것도 사실 이고,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과거의 종교가 세상에 항상 긍정적인 역할을 해왔던 것은 아니잖 습니까? 그리고, 미래사회에서의 종교에도 (개인적인 견해로서는) 위험스런 요소가 없진 않을 것입니다. 종교가 사람들을 많이 살렸다고 하지만, 종교 때문에 죽은 사람이 그 보다 적지는 않을 것입니다. 십자군 전쟁에서 부터 종교의 아귀다툼 때문에 죽어 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 번 헤아려 보세요. 그 뿐인가요? 현재도 지구 상의 화약고라는 중동을 떠올려보면, 회교권과 이스라엘의 분쟁이 어디에서 비롯되어졌겠읍니까? 그저 자신의 종교만이 잘났다는 아집과 상대방을 인정 하지 않는 배타성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읍니까?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지구상에 핵전쟁이 일어나서 인류가 멸망한다면, 그 것은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내세 를 염두에 두고 인류가 몰살 당하는 싸움질은 하지 않을 테니까요. 겁나는 것은 종교입니다. 죽은 다음의 세상을 기대하는 그들에게는 `지금 죽어도 내세가 있으니`, 하는 관점에서 무슨 짓인들 못하겠읍니까? 핵전쟁이 지구상에 발발해서 인류가 멸망한다면, 종교인들 때문에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농후할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에 대항한 기독교에 대해 걸핏하면 자랑하는데, 당시의 민족 운동을 했던 기독교인들이 크리스챤이어서 라기보다는 이 나라 백성이었기 때문에 독립운동을 한 것입니다. 기독교가 없었더라도 민족운동가들은 독립 운동을 했을 것이고, 해방도 되었을 것입니다. 2차 대전 당시 기독교가 일제에 맞선던 것은 우리 백성이 이뻐서 라기 보 다는, 기독교가 당시 일본과 싸움을 하고 있던 서구 사회의 문화였었기 때문 으로 해석이 되어야 옳바른 평가일 것입니다. 일례로 한동안 큰마을 게시판에 오르내렸던 월남을 한번 들어봅시다. 월남의 그 지난한 식민지 싸움이 어디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십 니까? 프랑스의 월남에 대한 최초의 접근은 선교활동이었어요. 알렉산드르 드 로 데스(Alexandre de Rhodes) 라는 신부(神父)가 1624년 월남에 도착해서 약 8 년간 선교활동을 하다가 추방되었지요. 그는 선교활동을 돕기위해 라틴어와 월남어로 된 교리문답과 해석사전을 편찬하면서 월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였 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월남문자로 굳어져 버렸읍니다. 월남 왕조는 프랑스의 선교활동을 막다가 유화하다가 다시 막던 중 1847년 다낭(Da Nang)에서 프랑스함대와 월남함대의 충돌이 있자, 선교활동에 대한 대대적인 압력를 가했읍니다. 그 결과 유럽인 선교사와 스페인 주교가 처형 되기에 이르렸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결국 1858년에 프랑스는 스페인과 연 합하여 다낭(Da Nang)에 상륙하게 되었지요. 이것이 프랑스의 월남 식민지화의 시발입니다. 그후, 월남은 중국 청조(淸朝)에 구원을 요청하였지만, 청도 서구열강에 그리 큰 힘을 발휘하기에는 해가 기운 탓이었는지, 약간의 무력충돌 후, 월 남의 종주권을 프랑스에 넘겨버리고 말았읍니다. 이것이 월남 비극의 시작입니다. 그후, 월남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죽었는 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기도 싫을 정도입니다. 종교, 특히, 기독교가 일제시대와 공산주의와의 싸움에 주춧돌 역할을 해 내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런 역할을 대외적으로 떠벌리며 자랑 할 만한 입장도 아닐 것이고, 업적이라는 것은 자랑하기 위해 쌓는 것이 아 닙니다. 자랑할수록 그 참뜻이 점점 희석되어져 버리죠. 더욱이 지구상의 최초의 분쟁부터, 열강의 식민지화까지 종교가 끼친 해악 에 비하면, 기독교가 인류를 위해 베풀었다고 주장하는 사랑은, (비기독교인 의 눈에는) 조족지혈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을 종교가 도와주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종 교가 도운 것입니까? 아니면 헌금이 도운 것입니까? 누가 도왔다는 것입니 까? 그 헌금이 부자들 손에서만 나간 헌금은 아닐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일해서 번돈 역시 챙겨서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남 아서 많은 사람들 월급주며 성당이며 교회며 절이며 유지 확장시키는 것 아 닙니까? 농부들은 곡식을, 대다수 노동자들은 갖가지 재화를, 생산하고 보수를 받 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무엇을 생산했읍니까? 사랑이라고요? 자랑스럽게 떠 들며 앞뒤 가리지도 못하고 분규나 조장하는 성명이, 비종교인들 모두에게 사랑으로 비춰질 줄 아십니까? 어림없을 것입니다. 정말로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노라고 자랑하고 싶다면, 땅값 비싼 명동성당 팔아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변두리나 아니면 절처럼 산으로 들어 가세요. 이 나라 정부는 종교인 비종교인 할 것 없이 국민 전체가 투표해서 만든 정부입니다. 그 정부가 법집행(조악스런 면이 있었던 법집행이었다고 생각하 더라도, 분명한 것은 위법은 아니었고, 국민으로 부터 위임받은 법집행이었 읍니다.)을 위해서 명동성당에 들어간 것에 대해, 종교집단이 국민이 뽑은 대통령에게 머리숙일 것을 강요하고 있읍니다. 그런 성명에 대해, `그 성명 참 당연한 성명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싸가지 없고 주제넘는 성명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누가 더 많은지는 모릅니다. 투표를 해봐야 알겠지만, 아무 때나 시시때때로 투표를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읍니까? 그래서 우리는 일정 한 기간마다 투표를 하고, 그 투표에서 국민의 지지를 얻은 사람에게 그 기 간동안 할 일을 맡기는 것 입니다. 그런데, 국민전체가 뽑은 지도자에게 특 정종교 집단이 고개를 숙여달라? 그것이 정당한 요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어떤 종교인이 87년 6월 항쟁을 들먹이며 `군사독재타도에 앞장선 우 리를... 은혜도 모르는... 현 정부는... 문민독재 운운...`하며 떠든다면, 그 사람은 세상을 제대로 살펴볼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6월 항쟁 당시에 공권력을 행사하던 집단이 국민이 세운 정부 였읍니까? 총부리로 권력을 강탈한 강도들이었읍니다. 그런 탓에, 전 국민이 아닌 한 개인이라도 서슴없이 강도들에게 개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현 정부는 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정부임이 분명한 까닭에 (국 민이 위임한 기간동안은) 특정집단이 그들만의 부분적인 의사로 전 국민의 대표자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부는 만능이 아니어 서 때로는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도 있읍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평가는 어떤 특정집단이 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선거 때 전 국민이 투표로 심판하 는 것입니다. 종교집단의 이번 성명은 누가 뭐래도 제 눈에는 지나치게 건방진 요구로 비춰지고 있읍니다. 그리고, 왕왕 이번 조계종과 명동성당에 대한 공권력 투입을 지자제 선거 와 관련 시키는데, 어느 미련한 정부가 표 좀 더 얻겠다고 이런 시기에 종교 계와 대립하려고 하겠읍니까? 이 정부에 그렇게 미련한 사람들만 모여 있다 고 여기십니까?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대구폭발사태가 터졌읍니다. 그리고 한 통사태... 이런 것들을 선거에다 갖다 부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정부라 고 생각하십니까?... 오히려 이런 사태들을 지자제 선거와 연관지으려는 사 람들이 (투표에 관한한) 수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플라자 게시판에 대해서도 몇 마디 해보겠읍니다. 컴퓨터 통신망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로 매스콤의 역할까지 수행해 나 갈 가능성이 적지 않습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이 큰마을 게시판 하나로 매스 컴 운운 하기에는 다소 이른 감이 있지만,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이고 보면 그리 무시할 만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게시판의 운용입니다. 이곳은 전국각지에서 많은 분들이 다방면의 정보를 신속하게 올려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 집단이 자신들의 특정이익을 위해 이 게시판을 점거하고 도배하는 후안무치 한 경우가 느껴졌읍니다. 처음에 언급했지만, 이건 여당 할렐루야지, 저건 전라도 신문, 바로 이런 것이 매스콤의 해악이 아니겠읍니까? 매스콤의 원, 투, 쓰리는 공정성, 정확성 그리고 신속한 정보전달력일 것 입니다. 기존 매스콤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공정의 불균형과 사실에 대 한 부정확성일 것입니다. 이런 기존의 악습이 이 플라자란에 까지 오염된다 면, 통신망이란 새로운 매체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지난 번에 올렸던 몇몇 글들에서, 한통과 반정부적인 발언을 겨냥해 서 글을 올렸던 것은 플라자의 불균형과 비정확성 때문이었읍니다. 어떤 분이 안기부원도 이 게시판에 글을 올릴 수 있으니, 한통노조도 글을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맞습니다. 둘 다 모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었던 것은, 한통노조라는 특정집단의 사람들이 집단 목적 을 관철시키기고자, 우루루 몰려나와 게시판 대부분을 장악하고 도배를 했던 점입니다. 만일 안기부원이 이곳 게시판에서 안기부 본연의 임무를 들먹거리 면서 이곳 게시판에 글올리는 사람들을 추근대며 몽땅 뒷조사를 해나간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두 가지 경우, 전자는 견제와 균형에 의한 조절기능을 깨는 것이고, 후자 는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억압하는 것이니, 모두 게시판을 오염시키는 짓이겠지요. 이 두 가지의 경우보다 더욱 더럽게 오염시킬 가능성도 있읍니다. 특정한 정치색깔을 띠고, 그들과 다른 색의 주장을 펼치면 사정없이 몰아 치며 비난과 욕설로 게시판의 균형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짓들입니다. 신문을 보아도 정치면, 경제면, 스포츠면, 등등..이 따로 할애 되어져 있 읍니다. 그런데, 어떤 한가지 정치색으로 게시판을 가득 메우고, 자신과 생 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근거없는 비방과 야비한 조소만으로 일색된다면, 플라자는 기존의 매스콤이 갖춘 악습보다도 훨씬 더 추한 내용을 전파하는 독버섯이 되고 말 것입니다. 어쩌면 차세대 매스콤으로 떠오를지도 모르는 게시판이 헐뜯기에 눈이 어 두어진 무리들로 가득찬다면, 그게 바로 오염입니다. 제가 여권 성향의 글을 올린 분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지 않는 이유는 그 들은 저 아니더라도 이곳을 점령하다시피한 사람들에게 형편없이 공격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코 편들어 주는 차원은 아닙니다. 플라자는 누구나 신속한 글을 올릴 수 있고 올려진 글에 대한 즉석 비판 기능도 있읍니다. 이런 것은 기존 매스콤이 갖추지 못한 장점이 되기에 충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장점이 장점의 구실을 못하고, 특정한 집단의 점거와 난세를 바라는 이들의 부추김의 역할만 되어버린다면, 장점이 단점이 되어 버리는 결과가 아니겠읍니까?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르다는 식의 편가르기 논리는 배제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옳을 때도 있고 그를 때도 있을 것입니다. 헌데, 이곳에 올라오는 글 들을 살펴보면, 이 사람이 올린 글은 보지 않아도 이쪽 편, 저 사람이 올린 글은 보지 않아도 저쪽 편이고, 여러가지 사실에 대해, 견해는 오로지 한가 지입니다. 진보를 추구 하는 사람들은 보수적인 사건은 내용 여하에 관계없이 무조건 틀렸다고 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세상 모든 일이 한방향으로만 옳은 것이 다 쏠려 있을 수 있겠읍니 까? 뉴튼의 원리보다는 아인쉬타인의 원리가 이론 면에서 앞서 있는 것이 사실 입니다. 그래서 지난 세기의 이공학도들은 상대성원리를 절대의 진리처럼 생 각했읍니다. 그래서 우주에서 상대성 원리가 보여준 아름다운 원칙들이 개개 의 입자에게도 적용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읍니다. 우주와 마찬가지로 모든 입자들은 원자핵 주위를 전자들이 궤도를 따라 아름답게 돌고 있을 것 이란 생각을 했읍니다. 그러나 금세기 후반에 여러 과학자들의 각양각색의 이론이 조합된 양자역학은 상대성원리가 별나라에서 보여준 환상적인 꿈을 여지없이 깨뜨려 버렸읍니다. 입자는 상대성원리가 설명한 것보다 훨씬 복잡 다양하고, 어지러운 세상이며, 전자는 시도 때도 없이 이곳 저곳에서 확률적 으로 불쑥거린다는 것이 판명되었지요. 상대성원리가 분명한 이론이라고 인정되었던 시대에도 건물을 짓고 다리를 만드는데, 상대성 원리를 적용시키지는 못했읍니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아 도, 기술적으로 실현할 수 없어서 였읍니다. 그래서, 상대성 원리보다는 떨 어지지만 뉴우튼의 둥그스름한 원리를 적용시켜서 세상을 만들었지요. 실현 할 수 있었으니까요. 제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는, 삼민투에서 갈라져 나온 민민투와 자민투가 학생운동의 주류를 이루었지요. 민민투는 무장봉기에 의한 폭력혁명만이 이 사회에 민주화를 실현할 수 있 다라는 패도적인 제헌도법을 구사했고, 자민투는 직선제 개헌만 이루어 지면 민주화가 가능하다는 보편 논리로 대중성을 확보하는 대중검법을 펼쳤는데, 결국 자민투의 대중성으로 6.29선언이 나왔죠. 당시 운동권을 A,B,C,D로 구분해 본다면, D는 데모할 때 돌 던지는 그룹정도라 할 수 있겠고, C는 선봉에서 화염병 던지는 정도의 그룹이겠고, B는 각 단과대별 또는 학교별 회장선거에 나서는 얼굴마담들 정도가 되겠고, A가 이론 창출을 맡는 학생운동의 모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민민투에 속해있었거나, 자민투에 속해있었거나, 당시 대학가의 이론 창출 의 귀재들은, 이론만을 놓고 볼 때는 누구나 민민투의 오로지 이론이 옳다는 것을 인정했읍니다. 그러나 그놈의 실현 가능성 미약으로 민민투의 제헌도법 은 자민투의 대중검법에 고배를 마셨죠. 그리고 결국 이 땅에 실현된 것은 상대성이론이 아니라 뉴튼의 운동법칙이었읍니다. 그러니만큼 아직도 숙제는 남아 있을 것입니다. 뉴튼의 법칙에서 안주할 수야 없으니까요. 보다 나은 세상을 구현하기 위한 참신한 이론의 창출은 관 심을 가져볼 만한 분야겠지요. 그러나 절대의 진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상 대론조차, 복잡다단한 양자론에 뒤엎어져 버린 것을 참고해 본다면, 이미 검 증이 끝난 구닥다리 이론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것은 미련한 짓에 가까운 짓 일 것입니다. 상대론은 이미 고전이 되었으니, 우리는 복잡다단한 양자역적 인 방향으로 모색을 시도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흑백논리도 아니고, 회색도 아닌, 복합된 복잡속에서 옳고 그른 것을 따질 수 있고, 옳고 그른 것 보다 더욱 소중한 가치도 추구해 나갈 수 있는 그런 이론이 누군가에 의해 창출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선거철만 되면, 간첩사건으로 공안정국으로 몰아간다는 지적을 자주 해주 시는 분이 많으시던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간첩들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일 때가 언제일 것 같습니까? 바로 선거철입 니다. 그래서, 스파이들이 드러나기도 잘하고, 스파이질에 대한 혐의가 있는 용의자도 평상시보다 많을 수 밖에 없읍니다. 적대국을 코 앞에 둔 지구상의 어느 국가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것 입니다. 이 플라자 게시판을 배경으로 예를 들어보겠읍니다. 어떤 맹꽁이 아줌마가 반정부적인 입장의 글을 계속 올립니다. 그 글들을 읽은 북한 공작원이 그 아줌마에게 대화 좀 하자고 색깔을 같이 하는 평범한 사용자로 접근합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 후, 한 번 만나서 가볍게 술 한잔 하자고 합니다. 그리고 만나서 역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줌마의 반정부적인 입장 을 슬쩍슬쩍 찬양형식으로 부추기다가, 어떤 사건 (예를 들면 한통사건)에 대한 파업을 슬쩍 거론 하면서, 한통 파업을 지지하는 내용으로 또 한번 부 추키고, 아줌마에게 그런 글 한번 올려보라고 넌즈시 권합니다. 그래서 맹꽁이 아줌마는 한통 파업을 부추기는 글을 재미있게 올립니다. 간첩이 별 건 줄 아십니까? 만일 그 상황에서, 신분을 위장한 북한 공작원이 맹꽁이 아줌마에게 `아! 지난달에 큰 언니 손녀딸이 돌이었다고요? 이거 준비한 것은 없고, 이거 돌반지 값이나 하시지요?` 하고 봉투하나를 디밀때, 잠시 망설이다가 `에라! 형편도 어려운데`하고 넙죽 받아버리면, 그게 그 대로 간첩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영리하게 글을 올리고 계신 분들이 `얼씨구! 누가 그런 유치한 수작에 넘 어갈까나?`하고 반문하실지 모릅니다. 물론 이런 예는 단순한 가상이라 헛점도 많지만, 실제 북한 공작부의 공작 도 이 예보다는 훨씬 더 치밀할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 북한 공작원에 의해 공작 대상으로 찍혀지면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지에 대해서 는, 저 자신은 솔직히 회의적입니다. 이보다는 한 단계 발전된 예를 들어 보지요. 역시 똑같은 맹꽁이 아줌마에게, 어떤 글쟁이로 위장한 북한의 대남 특수 요원이, 아줌마의 글과 반대의 색을 가진 보수적인 글로써 시비를 거는 것이 지요. 그렇게 몇 번의 투닥거리는 글로 서로를 익히는 동안, 그 북한 공작원은 얄미운 글들로 맹꽁이 아줌마와 같은 색을 지닌 사용자들의 공분을 사게 되 겠지요. 그러면 한동안 플라자는 그런 분들의 글들이 자주 올라와 이 대남 특수 요원은 자신이 취하고자하는 포섭대상을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북한의 대남 특수요원은 그들과 반대하는 글로써, 그들에 대한 사상성의 검토까지 할 수 있게 되겠고, 그런 그들에게 제 삼자로 변신해 접근하는 것 은, 공작이라고 언급할만한 가치도 없이, 너무나 쉬운 짓일 것입니다. 그리고, 한통물결이 게시판을 점거하게 될 때, 이 북한 공작원은 아마추어 인 노조원들에게 행동지침이 될 수 있는 사보타지 수법들을 메일로 보내주겠 지요. 어디에서도 증거를 잡기는 어려워요. 북한 공작부는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그런 공작부의 공작을 지금 게시판 의 대다수 영리한 분들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것이겠지요. 막아낼 수 있는 것 은 CIA도 아니고 FBI도 아닙니다. 남한의 안기부 정도가...(흐음...) 결국 선전, 선동의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다가, 은근한 북한 공작원에게 자 신도 모르게 포섭된 후, 이용당하는 와중에 간첩으로 체포되고나면, 울며불 며 나는 간첩이 아니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간첩은 스스로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재수없는 사고처럼 와닿을 수도 있는 것일 것입니다. 스스로를 너무 영리하다고 과신 하지 마세요.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조심하세요. 추신:이 게시판에 멀리서 오신 손님도 계신 듯 한데, 제가 7월 초까지 해 야할 복잡한 일거리가 누적되어, 한동안은 상대해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7월 초나 중순 쯤이면 복잡한 자료정리가 대충 마무리 되어질 것 같으니, 그 때쯤 대접해 드리지요. 어디 어떤 인간인지, 민주주의 수련장에서 한번 붙어 봅시다. 건...- 기석은 마지막 글을 큰마을 게시판에 올리고, 컴퓨터를 빠져 나왔다. 당분 간은 컴퓨터를 통해, 사람들의 생각을 읽어볼 필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선거 철 분위기에 편승한 선거운동원들의 흑색모략이나 메워지고 있는 게시판은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관찰 하고픈 기석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기석이 컴퓨터를 끄는 이유는 아니었다. 사실, 더 이상 컴 퓨터 앞에 앉아 있고 싶어도, 이제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기석은 이제부터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박 희 권... <안기부와 조선일보에게...> 저는 83년 부터 90년 2월 까지, 80년대의 대부분을 대학에서 머물렀읍니다. 민주화의 열기가 한창 들떠 있던 80년대였지만, 부끄럽게도 저는, 과외와 학업, 계집질로만 대학시절을 보냈읍니 다. 민주화가 무엇인지는 숱하게 붙어있던 벽보와 학보, 그리고 학우들의 고함 등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저하고는 무관한 내용들이었읍니다. 제 관심은 제 가족과 제 여자들 뿐이었읍니 다. 그후, 졸업을 해서 여전히 제 가족만을 돌보는 데 급급한 과외 선생질에만 몰두했읍니다. 어느정도 형편이 피고, 집도 샀읍니 다. 제 취미생활인 통신망에 글쓰기를 즐기며, 그다지 어려움 없 는 낙천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읍니다. 그런데, 어느날 통신망 게시판에, `태백산맥 저자에 대한 기소 방침`이란 글이 떠올랐길래,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저는 <서울대 찌꺼기>를 썼고, <전사의 고백>을 쓰는 와중에 <안전기획부>로 전환해서 썼읍니다. `80년대의 <서울대 찌꺼기> 와 90년대의 <안전기획부>를 접목시킨다면?` 하는 구상이 떠올랐 기 때문입니다. 저는 서울대는 졸업했지만, 안전기획부는 문턱에도 가본적이 없읍니다. 그럼에도 안전기획부를 쓸 수 있었던 것은, 통신망의 자료 중 `안기부`란 글자가 들어간 것은 모조리 수집할 수 있었 던 까닭이고, 또, 안기부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 안기부 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읍니다. 안기부원들 중에 한 명은 선배 였읍니다. 안기부에서 저에게 요구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읍니 다. 저는 안기부에 자료를 요구했읍니다. 안기부는 작은 책 열 권 분량의 자료를 수집해 집으로 보내주었읍니다. 제가 안기부와 맺은 인연의 전부입니다. 제가 <안전기획부>를 쓴 데에는, `안기부가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정보기관이 되어 주 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읍니다. 단순해 보이는 의도였지만, 소 설이니까요. 하지만, 꾸준히 글을 쓰다보니, 저는 제 글에 대해 일말의 책임을 지고 싶었읍니다. 그래서 `태백산맥 저자에 대한 기소방침`을 막고자 하는 글을 올렸읍니다. 그 후, 다시 통신망 게시판에 후배들의 글이 올라 있더군요. 그리 과격하지도 않은 `21세기 아이들에 대한 구속건`이었읍니 다. 저는 그 때 비로서 `운동권의 씨를 말리겠다는 박일룡 경찰 청장`이란 사람을 알게 되었읍니다. 독일의 총리인지 하는 사람이 했던 이야기가 얼핏 떠올랐읍니 다. `현실에 만족하는 젊은이들만 있다면, 독일의 미래는 없다.` 저는 운동을 해본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운동에 무식한 사람이 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 나름대로의 견해 정도는 가지고 있읍니다. 제가 다닌 대학이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21세기 아이들이 주도하는 서울대 학생회는 과격집단이나, 사회의 암적인 존재와 는 거리가 있는 그런대로 봐줄만한 집단이라는 것이 제 견해였읍 니다. 우려되었던 것은, 21세기 아이들이 아니라, 타대학에서 주 도권을 잡고 있던 `한총련`이었고, 가리지 못하고 잡아들이는 ` 박일룡 경찰청장`이었읍니다. 그래서 저는 `돌대가리 경찰청장님`이란 제목의 글을 통신망에 깔아버렸읍니다. 그 글을 쓴 두 가지 목적은, 박일룡 경찰총장의 과격주의를 막고자 했던 것과, 다른 하나는 한총련을 통신망에 불러내 여론으로 쓸어버리고자 하는 의도에서 였읍니다. 제 의도는 다행히 그리 빗나가지 않아서 한총련을 통신망으로 불러들이는 데 성공했읍니다. 미련한 한총련은 김일성을 찬양하 는 글을 띄웠고, 여론에 실컷 두들겨 맞고 통신망에서 쫓겨났읍 니다. 한총련을 여론으로 두드릴 밥상은 차려진 셈이었는데... 그후, 한총련은 범민족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평양에 아이 들 둘을 보냈더군요. 저는 그런 한총련에 정부가 대응해야할 방 법 중 가장 좋은 방법은 `정부는 아이들 하고싶은 대로 놔두게 하고, 시민은 한총련 하는 짓을 욕하고, 그렇게 무관심으로 한총 련을 소외시키는 것`이 가장 훌륭한 대응방법이라고 생각했읍니 다. 그런데, 제 견해로는, 조선일보가 정부의 과격한 대응을 부채 질 했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제 견해로는`, `한총련 사태의 주범`은 조선일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조선일보가 `고 의로, 또는 어떤 이권으로,`그런 짓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 다. `여론의 판단미스`였읍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실수를 하는 것이고, 여론이라도 당연히 실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격한 군상(群像)들의 충돌은 어떻게든 막아야 겠다는 생각에 계속적으로 글을 올렸읍니다. 많은 사람이 죽는 불상사를 최소화 해야겠다는 의도가 제가 열심히 글을 올렸던 이유였읍니다. 의경 한 명이 죽고 사태가 마무리 되었읍니다. 한총련 사태 이후, 저와 조선일보의 말장난은 계속 이어졌읍니 다. 사실, `저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읍니다만`, 지난 5년 동 안 통신망에 글을 올리는 동안, 저와 가장 친한 독자는 조선일보 였읍니다. 제 집에서 조선일보를 보고 있고, 조선일보 데스크는 제 글을 보아주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 만, `저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읍니다.` 어쨋든, 저는 지금 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제 생각을 빌려 이야기를 해나갈 수 밖에 없읍니다. 조선일보와 말장난이 이어지는 동안 조선일보는 저의 예보능력 에 겁(?)을 집어먹은 것 같습니다. 한때는 저를 한총련의 괴수로 짐작하는 듯 했고, 또, 한 때는 저를 고정간첩으로 의심하는 듯 했고, 소설 속의 전사(?)로 띄우 는 듯한 느낌도 받았읍니다. 그래서 저 나름대로 조선일보 데스크의 자존심과 감정을 몇 번 건드려 주었읍니다. 목적은, 친구들에게 제 뒷 조사를 철저히 해 보라는 이유에서 였지요. 어제 또 하나 글을 올렸는데, 이번에는 안기부에서 파생된 떠 돌이로 보는 듯 하더군요. 제가 어제 안기부 관련 글을 올린 것 은 <안전기획부>를 쓴 저자로서의 책임감에서 였읍니다. 제가 싫 어는 것 몇 가지 중에 하나가, 사람들이 안기부를 욕하는 것입니 다. 왜냐하면 <안전기획부>저자니까요. 글을 쓰시는 분이라면 제 마음을 아실 것입니다. 정말로 한총련 사태가 `찬양고무?`,`이적 표현물?` 그리고 `미 련한 아이들...`이런 것들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리고 `그런 류의 사태를 `찍어 누르기`로 막는 것이, 앞날에 보 탬이 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시나 요? 사실, 제 가장 무관심한 분야가 운동이니, 정치니, 하는 것들 입니다. 맨날 쌈질만 하려는 작태가 무척 싫어서지요. 저의 할아 버님이 그 와중에 돌아가셨고, 저희집이 삼대과부집으로 몰락한 원인이었으니까요. 그런 류의 감정들이, 안기부로 수사권이 넘어가는 것을 막고자 하는 의도였고, 앞에서도 그런저런 이유들로, 한총련 사태를 큰 충돌없이 막으려 애썼던 이유였으며, <오소리 찜>한 이유였읍니 다. 조선일보는 한총련이나 이북의 고정간첩들을 너무 높이 평가하 는 것 같아요. 저 때문이라면(순전히 제 생각입니다만) 그리 긴 장 안 하셔도 돼요. 저는 상당히 건전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어머니와 아내와 아이를 돌봐야 하는,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이 요, 여대생들과 친한(?), 일개 과외선생이 분명합니다. 안기부도 그래요. 이웃이 표정으로 두려워하고 속으로 욕하는 안기부원보다는, 국민들과 이웃 그리고 후손들이, 겉으론 무시해 도, 속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안기부원들이 되어 주시기를 바랍 니다. 오판을 남에게 미루려는 짓은 얼룩이 지게 마련입니다. 역사에 오점을 남기지 마세요. 저는 개인적으로 정말 안기부와 조선일보를 좋아하고 있읍니 다. 안기부는 책을 쓰면서 정이 들었고, 조선일보는, 저희 집에 매일 아침 배달되는 신문이어서가 아니라, 제 글을 읽고 묻고 대 답하는 보이지 않는 5년 친구인 까닭이지요.(적어도 저에게 는...).그런 인연이 좋아하는 이유라면, 당연한 것 아니겠읍니 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만,) 조선 일보가 겁 먹는 저의 능력은, 제 능력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제 가 옳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님들보다 옳은 길로 갈 수 있었던 것은, 제 인생의 목표가 `이권`이 아닌 `사랑`이었기 때문입니 다. 저에 대해 궁금 하시면 제 주변 모두를 샅샅이 조사해 보세요. 어떤 조사에도 응해 드리겠읍니다. 이렇게 시시콜콜 글을 드리는 이유는, 저로 인해 큰 일을 하고 있는 현명한 친구들이, 더 이상 혼돈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함입 니다. 추신: 앞으로도 친구들의 길을 주시할 것이고, 큰 일에 잡념으 로 흔들린다고 여겨질 때는 가차없이 메스를 들겠읍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잔재주를 섞지 않았읍니다. 오해 없으시길... 괘씸한 우정, 박희권이...